K씨는 남편의 침묵이 참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과묵하고 진득해 보였던 남자가 살아가면서 지루하고 무관심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어쩌면 변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속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터에서 들어오면 혼자 방에 들어가 컴퓨터 화면을 보며 지친 심신을 달래는 듯했다. 피곤해서 그러려니 배려하려고 애썼다. 혼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도 반응이 시큰둥한 남편 얼굴을 보면 맥이 빠졌다. 자신이 하루 종일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 육아에 얼마나 지쳤는지, 때론 마음이 얼마나 싱숭생숭한지 도대체 관심이 없는 듯 보이는 남편이 점점 미워지기 시작했다. 과묵한 남편은 이제 사랑이 없는 이기적인 인간으로 비쳤다. 자신이 하는 말을 무심하게, 그저 잔소리로 듣고 넘기는 남편의 주의를 끌려면 더 강한 말이 필요했다. K씨의 언어는 점점 거칠어지고 비난의 톤도 높아졌다. 그럴수록 남편은 더 적극적으로 K씨와의 대화를 피했다. 아내가 매사 부정적으로 투덜대는 말들이 듣기 싫고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K씨는 어떤 점을 걸고 넘어지면 말없는 남편조차 발끈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피곤하다고 늘어져 있는 남편에게 차고 청소를 시키던지, 집안에서 얼마나 형편없는 남편이자 아빠인지를 일깨워
목회자에게, 교회 중직들에게, 혹은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라고 한다면 No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 그 필요를 다 내가 채워줘야 할 것 같은 선한 마음에서이다. 또 부탁하는 것을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난감하다. 내가 힘에 부쳐도 상대방이 원한다면 어떻게 하든 들어줘야만 할 것 같다. 내가 교회에서 지도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보살펴야 하고 베풀어야 한다. 우리는 착하게 살아야 하고, 기독교인이라 더욱이 착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처음에는 기꺼운 마음으로 요구에 응답하다가 점점 더 상대방이 부담스럽고 심지어 미워진다는 데 있다. 내 할 일을 못하고 손해를 보면서까지 애를 썼는데 상대는 끝도 없이 요구하는 것만 같다. 어느새 내가 해주는 일들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만 같다. 힘이 들어 어쩌다 No라고 할라치면 상대방은 섭섭해하는 것 같다. 그게 마음이 영 불편하고 내가 이기적인 것 같아 죄책감까지 든다. 그래서 계속 요구를 들어주다 보면 어느 새인가 상대방에게 분노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본다. 내가 도와줘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그 사람이 화나고 짜증 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도
그리스도인은 예수로부터 세상으로 파송 받은 그리스도의 대사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28:19~20)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의 모든 삶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한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비슷하게 살 때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예수를 볼 수 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5~16) 그리스도인이 착한 행실을 통해 빛을 비출 때 주변의 사람들이 감동받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유창한 말로 성경이야기를 하
어떤 일을 시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결혼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것은 결혼은 유지하는 것이다. 어릴 때는 신데렐라가 한번 춤추고 사랑에 빠진 왕자와 결혼하는 데에서 끝나는 이야기가 그저 재미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그 신데렐라가 결혼해서 왕자와의 배경 차이, 문화 차이, 성격차이, 왕비로서의 새로운 역할에 대한 부담 등등을 어떻게 극복하고 살 것인지, 과연 행복할 것인지 뒷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결혼을 골인하면서 다 끝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아는 것이다. 로맨틱한 사랑의 황홀한 경험에 이어서 화장실을 청소해야 하고, 아기 기저귀를 갈아야 하고, 매달 날아오는 청구서에 돈을 지불해야 하는 삶의 뒷모습에 맞닥뜨린다. 구원의 기쁨과 은혜에 충만해 사역에 헌신하고 시작할 때는 신난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가서 커피를 내리는 일도, 교회 쓰레기통을 치우는 일도 그저 감사하고 은혜롭다. 하지만 그 사역을 계속한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열정으로 시작한 일이 마치 김빠진 콜라 맛처럼 느껴지면서 아무 감정 없이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그 거룩하고 멋진 순간 뒤에는 훨씬 많
오늘도 사람들은 삶의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각자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인정 받기위해서 어떤 사람은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성공하기 위해서 제각각 목적을 가지고 일한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우리의 사람을 다시 한 번 생각 해 보게 하는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고린도전서 10장 31절 말씀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말씀은 첫째는 생존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 돼야 한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일 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 돼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무엇을 하든지” 라는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의미다. 그대가 공부를 하든지 직장에서 일을 하든지 예술을 하든지 운동을 하든지 사업을 하든지 정치를 하든지 복음사역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이다. 내가 하는 일을 성공 하느냐? 못하느냐? 이일로 내가 인정받느냐? 못 받느냐? 돈을 많이 버느냐? 못 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안되느냐? 가 더 중요한 것이다. 미
상담소를 찾아와서 털어놓는 고민 중에 하나로, 너무 많은 일에 압도되어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을 나눌 때가 있다. 집에 손님이 온다거나 학기말 고사가 다가올 때, 직장에서 쫓기는 프로젝트가 있을 때, 마감이 다가올 때, 할 일이 겹겹이 쌓이고 밀릴 때, 이 모든 해야 할 일에 깔려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든다. 걱정해야 할 일이 많고, 할 일이 끊이질 않는 듯한 상황을 보면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도록 압도된다. 예를 들어 손님이 집에 온다면 음식을 할 계획을 세워야 하고, 청소를 해야 하고, 계획대로 장을 봐야 한다. 장도 미국에서는 한 군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국소형마켓, 대형마켓, 한국마켓 등 세 군데를 돌아야 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실제로 몇 가지 요리를 해야 하고 손님이 오기 전 부엌을 말끔히 정리해야 한다. 이렇게 손님 맞을 준비를 하면서도 당장 먹을 끼니를 준비해야 하고 평소에 해오던 일들을 해야 한다. 아이들을 씻기고 숙제를 봐줘야 한다든지, 여기저기 레슨에 데리고 다녀야 한다. 이 모든 일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이미 압도되어 온갖 짜증을 다 부리고 집안 분위기는 살얼음판이 된다. 대학생들이 상담을 하러 올 때, 듣는 과목들이 줄줄이 F를 맞
영어에서 “cutting off your nose to spite your face”라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자신의 얼굴에 앙심을 품어서, 혹은 괴롭히려고, 자신의 코를 벤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화가 나서 앙갚음을 하려고 하는데 결국은 스스로만 괴롭히고 만다는 뜻의 숙어이다. 과연 누가 자신의 얼굴이 맘에 안 들어 코를 베어내려 할까 싶지만 사실 우리가 무심코 수없이 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늘 부부싸움을 하는 부모님이 미워서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세상이 못마땅해서 계속 술로 푼다면 이 또한 자신만 상처 내는 행위이다. 교회에서 누군가에게 화가 난다고 아예 예배를 안 드릴 수도 있다. 결국에는 누군가 때문에 ‘시험 들어서’ 혹은 ‘삐쳐서’ 주님께 마땅히 드릴 찬양을 포기하고 말씀으로 스스로를 새롭게 할 둘도 없이 귀한 기회를 포기한다. 상대 때문에 자신이 손해 보는 짓이다. 우리는 때로 정말 참기 어려운 감정에 휘말린다. 너무 화가 나거나 상처를 받아 잠이 오지 않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살다 보니 열받을 일이 많다. 분명히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온 사
한국에서 상담이 비교적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을 보지만, 아직도 상담소의 문턱은 쉽게 넘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이민을 왔던 그 당시의 문화를 고스란히 가지고 사는 해외 거주자들에게 상담이란 왠지 수치감과 의구심을 유발하는 단어이다. 의사를 보러 간다는 말은 시장 간다는 말처럼 쉽게 이야기되고 정보를 나누지만, 상담을 받으러 간다는 이야기는 숨기고 싶다. 미국에서 자란 우리의 자녀들이 상담이라도 받고 싶다고 하면 바로 가슴이 철렁하다. 정신력과 영성으로 이겨야지, 뭘 상담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말린다. 그래서 어쩌다가 상담을 요청하는 ‘희귀한’ 한국 분들의 사정은 의외로 심각하다. 자녀와의 갈등이 극에 달해 가정폭력에 노출되고, 아동보호기관에게 아이를 빼앗길 위기에 있기도 하다. 이미 한쪽에서 이혼을 결심한 경우 법적인 수속을 밟을 때쯤 상담소를 찾기도 한다. 중독으로 인해 가족들이 모두 등을 돌리고 이미 모든 것을 잃을 때에야 문제를 깨닫기도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과 치유의 역사들을 보지만, 이미 상처 입고 신뢰를 잃은 가족과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는 돌이키기 쉽지 않다. 기다리다가, 괜찮다고 자위하다가, 호미로 막을 일에 가래가 필요하
현대인들은 직장이나 사회가 짜놓은 스케줄에 의해 무척 바쁘게 살고 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기계의 톱니바퀴 돌아가듯 돌아가는데 나 혼자 빠질 수도 없고 남들은 열심히 달려가는데 나만 뒤처질 수 없다는 생각에 눈치를 보며 경쟁하며 살다보니 스트레스가 쌓이고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럴 때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늘 하는 일이 아닌 다른 것을 해봄으로 몸도 마음도 충전할 필요가 있다. 그런 역할을 해주는 것이 취미생활이다. 옛날에는 “취미가 뭐예요”라고 질문 하면 흔히 하는 말이 독서나 음악 감상 이라고 했는데 오늘날은 취미도 다양하다. 취미생활은 스트레스를 해소해준다. 직장인이나 개인 사업자나 학생이나 가정주부나 사람들은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스트레스가 누적되면 병이 된다고 하니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취미생활이 좋다. 생계와 직접 관련이 없고 업무가 아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재밌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자신에게 잘 맞는 취미를 찾으면 신세계를 만난 것처럼 의욕이 생기고 재미에 빠져들게 되며 성취감도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이렇게 좋은 걸 왜 몰랐던가 싶을 정도로 그 것을 하는 동안은
한자 사람인(人)자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양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서로 기대며 더불어 살아야지 혼자 살 수 없다. 돈이 많다고 대궐 같은 집을 짓고 그 집에서 혼자 맛난 음식을 먹고 비싼 옷을 입고 산다고 재미가 있겠는가? 돈은 남을 위해 쓸 때가 즐겁고 지식은 들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보람이 있다. 맛난 음식이 있어도 같이 먹을 사람이 없고 명품 옷을 입어도 봐주는 사람이 없고 해박한 지식이 있어도 들어 주는 사람이 없다면 삶은 하나도 즐겁지 않다. 인생을 즐겁게 살려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한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편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하신 것은 다투고 반목하지 말고 서로 연합하여 더불어 즐겁게 살라는 말씀이다.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들어라 더불어 살기 위해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들어야한다. 들며 날며 인사정도 하는 이웃이아니라 이웃사촌이 있어야한다. 멀리 있는 친척 보다 이웃사촌이 났다는 말이 있듯이 좋은 이웃은 친척보다 형제 보다 더 좋을 수 있다.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