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절만 되면 들려오는 안타까운 소식들이 있다. 명절에 시댁에 가지않겠다는 아내를 남편이 폭행해서 아내로부터 고소를 당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추석 연휴 뒷날엔 어느 지방법원에서만 55쌍이 이혼했다는 발표를 듣기도 했다. 이제는 유쾌해야 할 명절이 부부싸움의 원인으로, 나아가 이혼을 부채질하는 원인이 되는 세상이 된 것 같아 안타깝기 만하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는 즐거운 명절이 되어야 하는데…. 가족간 우애를 다지는 명절이 되어야 하는데…. 오고가는 귀향길 고통과 가사노동에 대한 갈등, 심적, 육체적으로 참기 어려운 명절이 되어 싸움과 미움으로 유쾌하지 못한 명절을 보내는 가정들이 이제는 없어져야 한다.시대가 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고 있는 전통적 생활들이 이런 병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고 남편이나 아내나 모두 자기만 아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생각들이 명절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먼저 우리 교회들과 성도들이 앞장서서 명절 문화를 바꾸어 가야 한다. 우선은 가사노동의 굴레에서 신음하는 여성들의 고충을 덜어주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가사노동의 성 차별과 불균형 때문에 가족끼리 반목하는 일이
몇 년 전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말아톤’이라는 영화를 기억한다. 5살짜리 지능의 자폐증을 가진 20세 ‘초원이’라는 주인공이 자신이 가진 장애를 극복하고 마라톤을 세 시간 내에 완주하는 성장기를 다룬 내용이었다. 필자가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은 초원이를 마라톤 선수로 만들어낸 그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장애를 가진 아들이 마라톤을 세 시간 내에 완주하는 서브쓰리를 이루어낼 수 있도록 돕는 과정에서 그 어머니는 영 관심이 없는 코치에게 매달리기도 하고, 나머지 식구들의 필요를 무시하기도 한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아들의 훈련에 혼신을 다해 매달리던 어머니는 코치와 한바탕 말다툼을 한다.코치에게 ‘자식사랑과 집착을 혼돈하지 말라’는 따끔한 충고를 듣고 그 어머니는 자신의 전부를 걸어온 초원의 마라톤 서브쓰리를 포기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것은 출발선에 선 아들을 말리기 위해 달려온 어머니가 꼭 잡고 있던 아들의 손을 놓던 장면이다. 어머니가 아들의 손을 놓고 나서야 비로소 그 아들은 자신의 의지와 열정으로 서브쓰리라는 목표를 이루어낸다.우리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나가면서 ‘하나 됨’을 강조한다. 필자가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로부
핵가족이 아닌 대가족 시스템을 가졌던 우리의 어린 시절에는 보통 10여명에서 많으면 20명 내외의 대가족이 함께 살았다. 설날이 되면 술을 담그고 산자를 빚고 다식을 만드는 등 며칠 전부터 명절 준비를 했다. 떡도 한 두 되 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말로 했으며 지금같이 떡집이 있어서 떡집에서 떡을 해오는 것이 아니라 모두 집에서 가족들이 했다. 떡도 한 두 가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했으며 돼지를 통째로 잡고 닭도 여러 마리씩 잡았다. 식혜와 수정과도 말로 하고 전도 커다란 바구니로 하나씩 몇 가지를 부치고는 했다. 그렇게 준비한 음식들이 명절 때만 되면 넓은 광으로 가득 차서 사람이 다닐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음식들을 준비했던 것이 우리네 명절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많이 준비한 음식들은 차례를 지낸 다음에는 가족이 모두 모여 함께 먹었다. 그리고 동네의 이웃들과 인근의 어른들이 계신 집들에도 음식을 돌리고는 했다. 그때에는 동네의 어느 집이든지 아내와 며느리와 어머니와 딸들도 명절 음식을 준비하면서 그 일이 어렵다거나 힘들다고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모두가 즐거웠다. 그저 사람들은 명절을 맞으면 그렇게 일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흩
우리 교회를 비롯한 많은 지역 교회들이나 코스타와 같은 집회를 보면서 갖게 되는 고민 아닌 고민이 하나 있다. 이 수많은 크리스천 자매들의 짝 찾아 주기 미션이다.너무 기도도 열심히 하고, 너무 신앙도 좋고, 너무 공부도 많이 했고, 너무 능력있고 똑똑한 이 자매들을 보면서 뿌듯하기 보다는 시름에 잠기게 되는 이유가 있다. 이 ‘너∼무’ 괜찮은 자매들이 자기가 ‘존경할 만한 배우자’를 찾을 때, 지레 겁먹고 도망가고 싶을 우리의 ‘보통’ 형제들을 보면서다. 실제로 독신의 은사와 거리가 멀고, 결혼은 하고는 싶은데 하염없이 나이만 먹는 자매들을 보면서 자꾸 외치게 되는 한마디가 있다. 제발 너무 괜찮은 ‘엄친딸’은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요즘의 대세는 ‘허당’이기 때문이다.우리는 하나같이 적당히 잘나고 적당히 못난 구석을 갖고 태어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돕는 배필’(창2:18)을 주신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 모두가 서로의 도움이 필요한 빈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도 ‘허당’의 면모가 있게 마련이다. 거의 모든 일을 철저히 잘 해내는 사람들도 아차 흘리는 순간이 있다. 너무 괜찮은 사람들은 잘못하면 도움 받는 법을 잊
미국에서도 노스캐롤라이나(NC)의 ‘촌’에서 사역을 하다 보니 인터넷으로 올라오는 수많은 신조어들이 꽤나 낯설다. 마음먹고 공부(?)하지 않으면 뭐가 뭔지 알아듣지 못하는 사오정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가정이나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강의하면서 요즘 청년들에게 배운 말 중에 ‘밀당’이라는 그럴듯한 개념이 떠오른다. 주로 데이트를 하는 남녀 관계에 적용되는 ‘밀당’, 즉 밀고 당기기는 부부관계에서든, 자녀하고든, 많은 관계에서 중요한 역동을 표현한다. 사실 인간관계에서는 1+1=2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바로 이 ‘밀당’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상호작용 때문이다. 한 사람만 들여다보면 참 좋고 재미있는 사람인데, 어떤 사람하고 붙여놓으면 영 딴판이 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인 영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누군가하고 같이 있으면 반짝반짝 빛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부산물이다.예를 들어 성격이 강하고 리더십이 있는 사람은 옆에 잘 따라주고 도와주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빛이 난다. 재미있고 유머 있는 사람은 옆에서 깔깔거리고 웃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더 재미있어진다. 과묵하고 조용한 형제는 발랄하고 수다스러운 자매를
누가복음 10:41에 예수님의 방문을 받은 마르다는 음식 장만하는 일로 마음이 분주했다고 한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자신을 도와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예수님 발아래서 말씀을 듣고 있는데 그것이 마르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자신의 집에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음식을 마련해야 하는데 동생이 돕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청원한다. 동생 마리아에게 나를 돕도록 말씀해 달라고 그러나 엉뚱하게도 예수님은 마르다를 편들지 않고 오히려 마르다를 책망하신다. 이유는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분주하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한 가지 일로 족하다고 말씀하시는데 네가 하는 일 즉, 음식 만드는 일에만 전념하라는 말씀이다. 아마도 마르다가 자신의 일인 음식 만드는 일에만 집중했다면 예수님께서 마르다가 준비한 음식을 드시면서 칭찬하셨거나 감사하셨을 것이다. 우리들도 마르다처럼 이러한 실수를 할 때가 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기쁨으로 일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을 돕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일이다. 혹 명절 때마다 음식 만드는 일로 인해 다투거나 마음 상한 경험은 없는가? 마르다처럼 당연히 자신의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가족이 자신을 돕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일
얼마 전 상담소를 찾아온 20대 중반 아가씨의 고민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도 할 수가 없고, 사람이 많은 장소에 갈 수도 없단다. 직장에 가면 자신을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동료들 때문에 너무나 스트레스를 받아서 얼마 못 가 그만둬버리는 것이 어느새 패턴이 되고 이제는 취직할 때가 없다.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니 어릴 때부터 조용하고 똑똑했던 이 아가씨는 흑인들 사회에서 ‘이상한 아이’로 놀림 받았다.‘Nerd’, 즉 공부벌레라는 별명은 미국사회, 특히나 흑인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받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이 아가씨는 어릴 때부터 똑똑하면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자신을 혐오하기 시작했다.그러다 이제는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기만 해도 자신이 이상한 사람인 것을 눈치 챌까 봐 가슴이 철렁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 한 청년은 수련회를 가기 위해 목사님께 자세한 정보를 받았다. 밤에 자매 혼자 수련회 장소에 찾아오는 것이 걱정되었던 목사님이 한두 번 더 물었다. “오는 길은 알겠니? 괜찮겠어?” 목사님이 이렇게 물으면, ‘우리 목사님 자상하기도 하셔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그런데 이 자매가 화를 벌컥 낸다. “목사님!
결혼을 하면서 신혼이라고 하는 달콤하지만 ‘살벌한’ 기간에 돌입함과 동시에 많이 듣는 조언이 있다. ‘초반에 기선을 잘 잡아야 한다는’ 선배들의 충고이다. 처음부터 배우자의 길을 잘 들여놔야 평생이 편하다는 것이다. 기선 제압이 목표가 된 결혼의 시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터로 변하기 십상이다. 이미 결혼을 준비하면서 혼수문제, 집안끼리의 묘한 신경전에서 시작된 접전은 아이를 낳고 누가 밤에 일어나 기저귀를 가느냐, 누가 설거지를 하느냐 다투면서 새로운 단계의 전쟁으로 접어든다. 아이들이 커가고 손이 좀 덜 가면서 몸이 편해질 만하면, 우리의 새로운 싸움은 배우자에서 자녀들로 옮겨간다. 아이들이 십대로 접어들면서 부모의 권위, 가정의 규칙에 저항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 온 부모에게, 엄마, 아빠가 틀렸다고, 자기는 그렇게 안 산다고 도전하는 것이다. 무사히 십대를 넘겼다고 자부하는 부모들은 자녀들의 결혼문제를 놓고 골치를 썩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고 보면 가정은 우리를 제일 아프게 하면서 동시에 우리를 가장 강하고 성숙하게 하는 훈련의 장이 된다.상담을 찾는 많은 분들이 상담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공통적이 목표가 있다. 내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의 전 인생에 걸친 심리사회성 8단계에서 마지막 단계는 자아실현으로 인류애로 확장이 되느냐 아니면 인생을 절망하느냐이다. 그것은 앞선 단계들, 특히 어린 시절 대상과의 관계에서 사랑의 공급을 잘 받아 신뢰감, 자율성, 주도적인 인격으로 형성되느냐에 의해 자아실현의 에너지의 큰 부분을 공급받는다. 어린 시절 대상과의 관계는 부모가 되는데 부모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자녀에게 한 몸 됨의 동일 메시지를 자녀에게 전달하는 일이 되며, 이것은 부모와 자녀도 하나로 연결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한 몸 됨의 사랑의 관계가 인류애로 확장하게 되는데 이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다. 나는 많은 시간을 가족의 체계를 역기능을 말하면서 부모사이의 갈등이 엄마와 아들의 밀착으로 나타나고 이는 다시 아들부부의 역기능으로 대물림이 되는 것에 대하여 말했었다. 가족의 3세대의 체계에 있어서 한 쪽이 서로 밀착이 되면 다른 쪽은 갈등의 관계가 된다. 와이셔츠 단추가 하나가 밀려 채워지면 다른 단추들도 채워지기는 하되 밀리기 마련이다. 힘들더라도 다 풀고 새롭게 채워야 되는 것처럼 한 인격의 치료는 전체적
하루는 레스토랑에 갔을 때에 농담처럼 주위에 있는 남녀가 결혼을 한 사이인지, 연애를 하는 사이인지 맞춰보자고 한 적이 있다. 농담이었지만 커플들을 구분했던 기준이 참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서로를 열심히 바라보며 대화에 열중하는 커플은 연애이고, 밥 먹기에 바쁜 커플은 부부라는 결론이다. 한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고 단란한 가정을 꿈꾸며 결혼을 했는데 어느새 서로가 너무 익숙해지면서 꼭 한구석에 밀어둔 낡은 가구처럼 취급하기도 한다. 없으면 허전한데, 평소에는 영 눈이 안가는….사랑을 하면서 그리고 결혼을 하면서, 우리는 가정에 대한 막연한 그림과 기대를 가지고 시작을 하기 마련이다. 일터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왔을 때 쉼과 안식이 있는 곳, 따뜻한 사랑이 느껴지고 나누어지는 곳, 집에 들어오는 순간 맛있는 된장찌개가 준비되어 있는 곳, 아침에 눈을 뜨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행복한 곳 등 나름대로의 그림을 가지고 결혼과 가정이라는 시스템에 뛰어들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착각을 하거나 무시하고 싶어 하는 가정의 또 다른 얼굴이 있다. 가정은 우리의 가장 연약한 부분이 계속 드러나는 곳이고, 우리의 이기적인 사랑이 테스트를 거치는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