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주일예배를 마치고 돌아와 KBS1 강연 “100”을 시청하면서 아내와 함께 울었다. 얼굴 한 쪽을 덮은 큰 모반으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김희아 집사님. 그녀의 살아온 삶과 살아가는 진솔한 간증은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을 만큼 큰 감동이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사랑과 희생과 용서와 감사가 무엇인지 알게 해 준 그녀가 고맙다. 이런 여인이 이웃임이 고맙고 한 하늘아래 함께 숨 쉬고 있음이 감사하다. 그녀의 아름다운 간증이 몇 편의 설교보다 나을 것 같아 주일 낮 예배에 영상예배로 드렸다. 성도들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예배 후 온통 눈물자국으로 얼굴들이 발갛게 됐다. 참으로 큰 은혜를 나눴다. 오후예배는 소그룹 목장별 나눔을 통해 또 한 번 눈물을 적셨고 회개의 고백들이 쏟아져 나왔다.대구에서 공예미술 강사로 활동하면서 두 아이의 엄마로 열심히 살고 계신 김희아 집사님. 태어날 때부터 얼굴 한쪽을 다 덮은 커다란 붉은 반점 때문에 부모로부터 버려져 보육원에서 자란 그녀. 그런데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좋은 보육원에 보내졌기에 자신은 잘 자랄 수 있었고 자신을 버린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이 세상에
중독을 치유의 첫 관문은 순복이다. 순복은 자신의 중독적이고 강박적인 행동이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순복은 중독과 강박에 자신이 무력했고 자신의 삶을 관리 할 수 없었음을 시인하면서 시작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내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었지만 이제는 내 자신이 스스로 통제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일이며 또한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즉, 자신을 피조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치유는 자신의 순복을 통해 참 자기로서 하나님을 정확히 만나 주님께 나의 의지와 생명을 맡기기로 결정하는 과정이다. 순복이 아닌 굴복으로(힘 있는 부모 밑에서 굴복 당했던 상처 입은 자녀처럼) 많은 사람은 알코올이나 여러 중독형태를 멈추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종교인이나 봉사자등 또 다른 중독 형태를 띌 수도 있다. 원 가족의 역기능을 통해 생긴 거짓자아가 기능을 하면 평생 겸손한 성직자나 봉사자의 모습을 띌 수도 있고 종교의 힘을 빌려 자신의 의지로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시도를 하게도 된다. 그래서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합법적으로 통제함으로 자신의 수치심은 여전히 가려지게 되고 마치 중독과 강박처럼 점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뺏기고 죽을 정도로 맞은 채 버려졌다. 이 사람은 신체적 폭력, 심리적 충격으로 곧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적하고 외진 길이었지만 마침 지나가던 사람들이 있어서 구조될 수도 있었건만 그들 또한 그를 버려두고 피해 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한 사마리아인이 위기상황에 처한 이 사람을 안타깝게 여겨 신속히 응급조치를 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 살 수 있었다(눅 10:30~35). ‘위기’(crisis)의 사전적 정의는 ‘위험한 고비나 시기’를 일컫는다. ‘분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어떤 판단이나 선택, 결정의 분기점 혹은 전환점에 있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위기 사건이나 상황 자체가 문제이지만 그 위험한 고비나 시간을 어떻게 지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위기는 흔히 개인적 혹은 상황적 요소에 의해 발생하게 된다. 길에서 강도만난 사람은 ‘강도’라는 상황적 요인에 의해 삶과 죽음의 위험한 고비 혹은 분기점에 이르렀던 것이다. 위기상황은 치명적인 심신의 문제나 정서적 외상 혹은 죽음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어
요즘 기업 광고에 CEO가 직접 출현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사실 CEO의 얼굴이 회사의 얼굴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회자의 이미지가 곧 교회의 이미지라고 말하기도 한다. 보편적으로 그 교회의 목회자를 보고 교회를 보게 되면 모두가 묵시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가 있다. 대개 목회자와 교회는 닮아가게 되어있다. 당장이야 알 수 없지만 시간을 두고 보면 반드시 관련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더 확실한 것은 목회자의 집, 목회자의 가정의 모습이 바로 목회자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근원지이다. 지금은 예전과 달라서 가정에 충실한 목회자의 모습을 성도들이 보고 싶어 한다. 비록 우리나리의 이혼율이 30%이상에 육박하고 있지만 그래도 목회자만큼은 가정을 지켜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것은 그만큼 가정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모든 이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가정은 행복의 보금자리요, 안식처라는 사실을 목회자 가정을 통해 확인 받고 싶어 한다. 아마도 이런 성도들의 소망은 시대가 황폐해질수록 더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목회자가 아무리 성도의 행복을 운운한다 해도 그 자신이 행복한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지 않는
외과적 수술 환자들은 수술 후 회복실이란 곳으로 옮겨진다. 회복실은 위급한 일이 발생 했을 때 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곳이다. 회복실에서는 마취가 풀리면서 찾아오는 손님이 있는데 그게 바로 통증이다. 통증이 두려워 마취를 깊게 한다거나 자주 마취를 해 통증을 피하려 한다면 회복하는데 장애가 생긴다. 그래서 회복단계에서는 환자가 통증을 직면해 이기려는 자세와 노력이 필요하다. 통증의 고통은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고, 또 수술을 선택했기에 꼭 만나야만 하는 회복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건강의 회복을 위해서는 얼마간의 통증은 내 스스로 선택하여 감내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암의 특징은 자각증상이 없는 것처럼 부정적 수치심의 특징도 자신과 타인에게 멋지고 건강하게 보이는 행동으로 위장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수치심을 찾아내고 내 스스로 인정한다는 것은 아프고 힘들다. 나는 이것을 직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어느 정도 치유하는 데에도 이르렀으나 완벽하다거나 완전한 치유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내 스스로 완벽하거나 완전한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한, 또 내가 나 스스로 그렇게 여겨져서 자신이나 가족,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타인을 완전히
대형병원을 가보게 되면 시장인지 분간이 안 된다. 어느 과(科)를 가나 만원이고 아우성이다.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치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우주를 개발하는 최첨단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가하면 조그만 상처에도 몸부림치는 것이 사람인 것이다. 사실 몸에 사소한 상처나 아픔이 있어도 몸에 영향을 주어 균형을 잃게 한다. 그러나 누구나 자기 몸에 병이 있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지만 초청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것이 병이다. 그 병은 예고 없이 누구나에게 슬며시 다가와서 자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아주 큰 병이 아니거나 사소한 상처들은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만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상처다. 이 병은 시간이 지나도 좋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나빠지기도 한다. 그리고 몸에 있는 병은 자기 한 사람 아픈 것으로 끝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다른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 영향의 범위는 칼과 창이 되기도 하고 예리한 흉기가 되기도 한다. 언어와 표정으로 다양한 공격의 모양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책임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별것 아닌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 세상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며 공격을 하기도 한다. 그
엄마는 아기에게 항상 옆에 있어 주는 존재다. 아기가 옹알이를 할 때 아기의 소리를 흉내 내어 주며 ‘도리 도리 잼 잼’을 하며 아기에게 자극을 주기도 한다. 이처럼 아기는 생후 15개월 동안 공생애 단계라고 불리는 기간을 자신을 반영해 주고 자신을 받아들여 주는 눈을 필요로 한다. 주로 그 눈은 자기를 돌보아 주는 엄마의 눈이다. 이 눈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아이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이 된다. 공생애 단계는 구강기를 포함하는 시기이기에 모유를 먹으며 자연스럽게 엄마와의 신체접촉을 이루는 시기이기도 하다. 신체적, 정서적으로 건강한 엄마라면 아기가 필요로 하는 사랑을 충분히 주게 될 것이다. 가장 적절한 시간에 수유를 한다든가 배변을 적절하게 도와 줄 수 있다. 즉, 아기가 필요로 하는 사랑을 신체접촉을 통해 충분히 반영해 준다.반면 엄마 자신이 어린 시절 역기능적 상처와 현재의 원가족의 불안한 관계에 놓여 있을 때, 아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아기에게 투사할 가능성이 높다. 아기에게는 나쁜 신체접촉(모유 수유를 잘 못한다든가 일관성 없는 돌봄, 또는 방치와 신체적 학대 등)이 있을 수 있다.건강한 부모로부터 아이의 초기 욕구
세계역사를 보게 되면 전쟁이 없던 시대는 없는 것 같다. 우리나라 역사나 세계 역사나 모두가 전쟁으로 얼룩진 모습을 남겨주고 있다. 지금도 지구상 곳곳에는 보이는 전쟁과 보이지 않는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이러한 전쟁의 이면에는 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굳이 우리나라 역사나 세계 역사를 들출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습이 바로 여기에 많이 해당되기 때문이다. 우리들도 조그마한 이권이나 유익이 된다면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만약 인간이 아닌 동물들에게 욕심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남아돌아가는 동물들이 얼마나 있을까? 맹수들이나 육식동물들은 자기들의 한 끼의 배를 채우면 더 이상 다른 것을 취하지 않는다. 약한 동물들이 아주 가까이에서 있다 할지라도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만약 우리 주변에 평생을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덩굴 채 있다면 어떠할까? 그렇다.유독 인간들만이 상상 할 수 없는 욕심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가하면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그 나라의 재벌들은 자기와 온 가족이 평생을 살 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애쓰는 것을 본다. 그리고 거기에서 부정한 방법이 나오고, 해서는
더구나 신흥이단 집단(예, 신천지)의 추수꾼 전략으로 기성교회에 파송된 종교 프락치들이 자기의 신분을 교묘하게 위장하고 1년 2년씩이나 교회 안에서 잠행(潛行) 전략을 펼침으로 많은 사람들을 끌고 가는 상황은 목회자들로 하여금 교인들의 신상명세를 더욱 분명하게 확보해 놓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혼한 사람의 경우에는 가급적 이혼사실을 감추고 싶은 경향 때문에 너무 구체적으로 신상을 밝히고자 하는 데에 반대한다. 자연 교회 지체들과의 깊이 있는 대화를 꺼리게 되고 교회 공동체의 활동에 적극 관여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 교회의 행사 중 상당부분이 가족중심 또는 가족단위의 행사로 치러지기 때문에 자연 이혼자는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중심에서 변두리로 내몰리게 된다. 목회자가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가족의 소중함을 설교할 때에도 이혼자들을 일일이 배려해서 설교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혼자들이 쉽게 상처를 받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교인수첩 제작 시에 부부일 경우 이름 옆에 괄호를 치고 배우자의 이름을 함께 적어 넣는 경우에도 상처를 입는다.이에 목회자들의 고민은 상당히 깊어진다. 연구자의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이혼과 재혼의 과정을 겪으면서 교회 공동체와 함께 동고동락하지 못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이 회복된다는 것은 교회가 성장위주의 개교회 주의로 나가는 것으로부터 방향을 전환하여 지역사회를 향하여 성실한 자세로 ‘디아코니아’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개혁돼야 한다는 의미이다.3. 기독교가정의 미래와 윤리적 전망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부단히 개혁적인(이미 개혁이 된 교회가 아니라 지금 개혁하고 있는 교회의 사명)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개혁의 외침은 바로 가족공동체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김병권은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제시한 가정준칙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논하면서 그 준칙을 통하여 그것이 어떻게 사회로 투영되어 나갔는가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종들도 윤리적 권면을 받을 수 있는 인격적 주체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가정준칙은 당대 사회에서 종속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아내, 자녀, 종)에게 먼저 윤리적 권면을 한다. 당시 문화에서 어떤 법적, 도덕적 지위도 없던 자들에게 인격적 도덕적 책임감을 부여하고 그들을 도덕적 주체로 간주했다. 둘째, 가정준칙의 모든 내용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엡 5:21절의 명령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에서 당대 사회 풍토에서 보자면 근본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