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생인 아들이 며칠 전에 요즈음 핫한 책이라며 한 권의 책을 선물하였다.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이다. 80년대생인 저자가 대기업 인사팀에서 90년대생들을 경험한 이야기이다. 그들의 사고방식과 행동과 일하는 방법 등을 이해하고 잠재력을 끌어내 공존하기를 바라는 내용이다. 저자는 90년대생들을 이해하기 위한 그들의 특징을 “간단하게, 재미있게, 정직하게”라는 3개의 키워드로 정리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그와 유사한 3가지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은 복음을 간단하고 쉽게 전하셨다. 90년대생들은 기성세대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말을 줄여서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줄임말은 핸드폰을 사용하면서 더욱 진보한다. 낱말을 줄이다가 합성어로 그리고 초성으로 더 나아가 기호로 간단하게 줄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시험하는 율법사에게 십계명을 두 계명으로 간단하게 말씀하셨다.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인데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셨다(마 22:37~40). 또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쉽게 말씀하셨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이 가득합니다. 윤동주의 시구가 읊어지는 개천절 날 오후 시골에서 택배로 보내온 푸성귀가 있어서 바리바리 싸들고 근처에 사는 딸네를 갔다. 가는 길에 마트에 들려 과일이랑 아이들에게 필요한 간식거리가 될 만한 식료품을 이것저것 바구니에 담다보니 분량이 꽤나 많다. 양손에 들기에는 조금 많은 분량으로 늘어나 종량제 봉투 두 개와 꽤 묵직한 박스가 하나가 되었다. 딸내미네 아파트 주차장에 가서 전화를 했더니 고 3짜리 외손녀가 전화를 받는다. “엘림아 할아버지가 짐이 좀 많아서 그러는데 주차장으로 잠간 내려와 줄래?” “네” 한 참을 기다리니 둘째 외손자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다. 중3인데 몸무게 세 자리수로 표시되는 거구다. “할아버지 옷을 갈아입고 오느라고 늦었어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것은 없는데, 할아버지는 엘림이가 내려 올 줄 알았는데 아론이가 나왔구나.” “네 할아버지, 누나가 저보고 할아버지 주차장에 오셨다고 가서 짐 받아오라고 해서 제가 왔어요. 이리 주세요.” 외손자와 짐을 나누어 들고 딸네 집에 가서 한 참을 있으려니 아이들 넷이 다 들어왔고 조금 더 있으려니 출근했던 딸 내외도 퇴근해서 왔다
2018년 여름이다. 개척 3년차의 마지막을 향해가던 시점에 여기저기서 후원이 끊어진다는 편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3년이 그 주기이니 그러려니 했는데, 다시 어떻게 채우나 고민만 하다가는 교회와 내가 나이 한 살 더 먹겠다 싶어 여기저기 연락을 취하고 편지도 썼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마음으로”라는 주제로 우리교단 국내선교회(회장 유지영 목사, KMB)에서 주관한 세미나에 참석하게 됐다. 가끔 연락을 취하고 도움도 받고 얼굴도 익히던 사람들 즐비하고 국내선교회에서 제공하는 후원금에 대한 의리도 있어 한 번 참석 해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만난 제프 클락 교수와 J.D 페인 교수와 미남침례회 해외선교회(IMB) 설훈 선교사의 열정적인 강의 속에서 나름 뿌리교회의 자존심이라 여기던 계획들에 맛난 양념들을 접하게 되고, 국내선교회 유지영 회장님의 조율 속에 그 강사들, 또는 국내선교회 이사 목사님들의 꾸준한 멘토링을 경험하게 됐다. 멘토링의 결과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목회하는 현장 속에서, 말뿐이 아닌 그들을 자주보고 또 보고 계속 보고, 앞으로도 꾸준히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결과라면 결과였다. 아주 오래된 고집이 꺾이기는
절대적 지도력을 행사했던 모세가 죽은 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가 가나안 입국과 정착을 하는데 첫 번째 관문이었던 여리고 전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가 큰 전투였고 사건이었다. 그 여리고 전투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으라면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돌고 또 도는 칠일간의 워킹 후에 제사장의 나팔 소리를 신호로 온 백성의 함성으로 그 성이 무너졌다는 기적이다. 그런데 여리고 전투에서 그것과 양극적으로 비교되는 또 다른 사건이 바로 아이성 패배의 사건이며, 이 패배의 원인이 바로 ‘아간’ ([עָכָן] 아칸-Akan 은 ‘괴롭히는 자, 근심이나 두통거리’를 의미한다).이라는 한 사람이 탐욕으로 시날산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과 50세겔 되는 금덩이를 탐내어 자기의 소유로 감춘 것이었다. 이 아간의 사건은 그가 감춘 금, 은 시세의 가치나 아간의 목숨에 관한 문제보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완수해야 할 소명과 존재감이 개인의 사사로운 탐욕으로 인하여 좌절될 수 있다는 자각과 여운을 남긴다. 동시에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호흡처럼 붙어 다니는 소유욕에 대한 집착이
나는 가끔 명품과 명문가를 몹시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때로는 교회 지체들이나 또 아내까지도 우리 목사님은 명품 좋아하고 명문가 좋아해라고 말할 때면 어의가 없어진다. 아무리 살펴봐도 내 소지품들은 그냥 평범하고 명품이라고 굳이 내세울 만한 것은 명함케이스 하나다. 평생에 명품이란걸 가져본 적이 없어서 나는 분명히 명품 애호가는 아니다. 물론 명품을 구입할 경제적 여력이 있지도 않고 명품을 구입하는데 돈을 쓰고 싶지않다. 그리고 나는 명문가 자식도 아니고 명문가가 되보려 한 적도 없다. 그런데 내가 왜 그런 오해를 받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평소에 명품과 명문가 애찬론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명품이란 무엇일까? 한 물건이 명품으로 인정받는 과정은 간단치가 않다. 이것은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구촌에 사는 어떤 민족도 이 물건에 가치를 공유해야 한다. 그리고 그 물건을 소유하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 수 있어야 한다. 오랜 시간을 소장해도 그 가치가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용도가 이와 같던지 비슷해도 언제나 비교 우위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물건을 명품이라고 할 때 공감이라는 필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어릴 때 어른들이
먼저 침례교단 농어촌선교회를 세우셔서 주의 크신 뜻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며, 저희 농어촌선교회를 위해 기도와 물질 등으로 함께 해 주신 교단 내 모든 교회와 목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국교회가 한참 부흥하던 70·80년 대 그 부흥의 밑거름은 농어촌교회였습니다. 농어촌에서 나고 자라며 믿음을 가진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가 교회들을 섬기며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탈농어촌 현상은 성장하는 도시교회들과는 반대로 농어촌교회들의 성장을 멈추게 했으며, 아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차고 넘쳤던 교회들은 원치 않는 빈자리만 넘쳐나게 됐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지금의 농어촌교회는 성장은 고사하고 목회자의 생계마저 고민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대부분의 초·중·고등학교가 폐교 혹은 축소되어 교회에서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더 이상 볼 수 없으며, 그나마 남아서 교회를 지키는 소수의 성도들은 대부분 천국을 앞둔 고령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어촌 목회자들은 소수의 성도들과 교회를 지키며 나름대로 교회를 다시 일으키려 몸부림을 치며 그 달려갈 길을 달려가는 최선의 헌신을 다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오는 미자립의 현실과 어
우리의 미래는 다음 세대를 ‘다른 세대’가 아닌 ‘부흥의 세대’로 준비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다음세대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다음을 이어갈 새로운 주역이 되도록 준비시킬 수 있는가! 우리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고 변할 수 없고 변해서도 안 되는 것, 그것을 진리라고 한다. 이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 그의 말씀뿐이다. 이 말씀위에 우리의 다음세대를 건축해야 한다. 또한 동시에 이 진리가 무미건조한 주지주의나 맹목적적 성경숭배나 율법주의적 맹신이 된다면 아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진리가 살아서 생명이 되고 변화가 되고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에 실제적인 답이 되어야만, 다음세대가 살아날 뿐 아니라 승리하는 세대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생명의 문제인 것이다. 진리와 생명을 종교와 전통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새술은 새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바로 생명과 진리, 전통과 종교의 문제이다. 본질과 비본질의 문제가 다음세대를 살리고 세우는 일에 핵심이다. 이러한 기반 위에 포스트모던이다, 4차산업 혁명이다, AI이다, 융합시대다 하는 미래의 문제들 속에서 길이 되고 답을 주는 승리하는 세대가 설 것이다. 요
다음세대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포스트모던의 세상을 지나 4차 산업혁명시대, 다가오는 AI세상의 시대를 살아갈 세대에게 본질을 준다는 것! 새 술이어서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그들에게 전통과 종교를 깨고 생명과 진리를 전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줄 것인가? 본질과 비본질의 문제! 생명과 진리, 전통과 종교의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답을 찾을 것인가? 본질의 문제란 과연 무엇인가? 필자는 지난 글을 ‘우리는 새 술과 새 부대가 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으로 마무리했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 “생명과 진리, 전통과 종교라는 측면에서 이제 과감히 전통과 종교화 된듯한 모습에서 돌이킬 준비가 되었는가? 우리에게 편하고 익숙하고 일부가 되어버린 어떤 요소들을 과감히 버리고 바꾸어 나갈 준비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임과 동시에 “생명과 진리라는 전제를 배경으로 과감하게 새로워질 준비가 되었는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변화를 준비하고 있는가? 우리는 새 술과 새 부대가 될 준비가 되었는가? 한 번 더 생명과 진리, 전통과 종교를 명확히 짚고 가자!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여보 저거 임신한 것 같지 않아요?” 예배당 마당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고양이를 보고 아내가 놀란 듯 외친 말이다. 그 고양이는 동네 혼자 살고 있는 어느 할머니가 기르는 고양이인데 먹이가 부족한지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찾아다닌다. 시골인 이곳은 음식 찌꺼기를 두엄 칸에 버리거나 한 쪽에 구덩이를 파고 버리는데 교회 정원 한편에 있는 구덩이에도 자주 찾아오는 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 눈에 부른 배가 보인 것이다. 마침 집에 유통기한이 조금 지난 연어 통조림이 몇 개 있었는데 그것을 주자는 말에 캔을 따서 주었더니 허겁지겁 먹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집에는 안 가고 마당 한 구석으로 가 퍼질러 누워버렸고 결국 연어 통조림을 먹는 며칠 동안 집에도 가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딸아이가 고양이 준다며 사료를 사왔고 고양이는 그것을 얻어먹으며 제 집인 양 현관 앞에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했고, 그 소문을 들은 주인 할머니는 목사님 댁에서 잘 얻어먹고 살라 하며 찾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택 뒤꼍에 있는 심야 보일러 저수통 근처에서 아주 작게 ‘낑’하는 소리가 들려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보니 고양이 새끼 네 마리가 거기에 있었다. 그 소식을 전해
다음 세대, 이 시대의 최고의 화두! 10/40 창(10/40 Window)을 주창한 선교 전문가 루이스 부쉬라는 학자는 최근에 4/14 창이란 신개념 선교지를 선포했다. 내용인즉, 4세에서 14세의 다음 세대를 잃으면 모든 미래는 끝이 난다는 것이다. 이는 전 세계의 다음 세대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못한다면 기독교의 미래는 끝이 난다는 것에서 창안된 ‘신개념 선교지대’이다. 이러한 상황은 다음 세대를 잃어버린 서구 기독교, 그리고 멀리서 찾을 것 없이 지금 한국교회의 급격한 쇠퇴와 고령화의 모습이기도 하다. 시골 교회는 시골이라 할머니, 할아버지만 남았는 줄 안다. 그러나 도시의 교회를 가도 젊은이들은 거의 없고 고령화된 늙은 교회들이 대부분이다. 이번에 뱁티스트 트렌스포메이션(Baptist Transformation, 이하 BT)를 준비하면서 전국의 침례교회들의 상황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도시나 농어촌을 막론하고 다음 세대, 특히 청년부가 존재하는 교회들이 지방회 안에서 1/3이 안됐고, 그나마도 제 기능을 발휘하는 청년부는 1/4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한국교회의 절반 이상이 주일학교를 운영하지 않는다는 보고는 우리가 이미 아는 상황이다. 대학
로마서 필사를 마치고, 성실히 완성케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필사를 끝마치며 감사 기도를 하던 중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필사를 마치면서 네가 깨달은 것이 무엇이니? 어떤 마음으로 필사를 했니?”라는 음성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또 물으셨습니다. “필사를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서 했니, 칭찬 받고 싶어서 했니, 완성의 목적을 가지고 했니, 상 받고 싶어서 했니, 누구의 의를 위하여 했니?” 말씀을 대하는 저의 태도와 의도를 물으셨습니다. 나도 이것을 해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던, 일 중심적인 저를 발견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로마서 필사책을 폈습니다. 자세히 세세하게 다시 읽으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주님과의 친밀함을 구하며 묵상을 써내려갔습니다. 로마서를 자세히 읽으면 읽을수록 울컥 올라오는 감동의 말씀들은 살아서 역사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서 필사를 하며 ‘비판과 비난’이라는 주제로 훈습일지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사람을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장단점을 구분하며 비판했던 저는 이 문제가 죽는 날까지 해결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이웃사랑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롬14:15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
내일 일을 몰라 사람은 막말을 하면 안된다고 한다. 그야말로 언제부터인지 나의 입장이 그렇게 됐다. 나의 남편인 한명국 목사는 줄기차게 침례교세계연맹(BWA)에 몸바친 사람이고 그 덕분에 나는 가정과 교회에 대해 강하게 버텨가는 힘이 생겼다. 어떻게 여기까지 달려 왔는지 지나온 걸음을 되돌아 보니 아득하다. 어린 시절 집에 오면 따뜻한 어머니는 없고 서먹하고 썰렁한 선생님만 있었고 결혼을 해서 나이많은 남편에게 사랑받겠다고 선택은 했지만 남편은 없고, 목사님과 BWA만 있었던 것 같다. 언제 이 우리를 벗어나 볼까도 생각하고 이리저리 안간힘을 써봤지만 탈출하려는 나에게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은퇴하고 새로이 받은 교회는 다시금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전에 정말 나의 의지가 아닌 다른 의지로 전국사모회에 헌신하게 됐다. 스스로 나를 반문해보고 또 불가능이라는 두려움이 나의 영혼을 짖누르기도 했다. 안한다라는 말을 수 없이 내뱉었다. 그러나 어느날 개척 초기 성도 한 분의 전화가 걸려왔다. “사모님 무슨 일 하시지요? 기도 중이 하나님이 사모님께 물질을 보내라 합니다” 나는 소름이 돋았다. 이 길을 비켜갈 수 없는 길이라 여기고 순종하기로 한 뒤
산상수훈의 내용 중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께서 당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며 의식과 형식에 치우쳐 오직 사람들이 보아주기를 바라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사거리나 길거리에서 구제를 하거나 기도하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경계를 시키시는 한편, 그들의 그러한 모습을 외식과 위선으로 단정하시고 본받거나 답습하지 않아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려는 그러한 행동에 대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더욱 실감하게 하시려고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2,5,16)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니까 그들이 행하는 그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일이 틀림없는데, 하나님께 받을 상보다, 먼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려고 하는 그 마음으로 하나님보다 사람을 먼저, 그리고 사람을 더 의식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한 보상이 되어버려서 하나님이 따로 갚아 주셔야 할 상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이 직접 하신 이 말씀을 주님의 임재 앞에서 생각해 보면, 오늘 이 시대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전반적인 면에서의 모습을 생각해 보지
제이슨 맥코이 선교사 가족 미국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말콤 펜윅 선교 130주년 기념 및 세계한인침례인대회(영적성장대회)에 잘 사는 미국을 한국으로 모시면서 굳이 비행기표까지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니 이 일을 준비하면서 “비용이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해야 한다”는 박종철 총회장의 결단에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은퇴하고 미국에 돌아간지도 수십 년, 남편이나 아내는 이미 고인이 된 채 홀로 살고 계신 은퇴 노인 선교사에게 1000달러가 넘는 비행기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액수였다. 이번 대회 최고령 참가자인 현복자(Betty Jane Hunt) 선교사는 4월 11일로 만 93세가 된다. 1958년 30대 초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한국에 와서 67세에 은퇴해 고향에 돌아가기까지 자신의 청춘을 한국에 바쳤다. 침례교 교회진흥윈이 생기기 훨씬 이전, 지금 진흥원이 하고 있는 일을 시작해 침례교회의 개척과 발전을 도왔던 그는 자신의 생애에 한국 침례교회가 자신을 재정적으로 후원해 한국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며 나이를 잊은 채 환호했다. 앤 윈더스 켈리 선교사 (미국 정착후 결혼, 사진 왼쪽
최근 들어 매일 순간순간 습관처럼 읊조리듯 묵상하는 말씀이 요엘서 2장28절 말씀인데 이 말씀이 왜 나를 이렇게 매료시키는가?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이며”라는 이 짧은 두 문장은 내 가슴을 뛰게 한다. 늙은이들이 꿈을 꾸며 살아가는 세상, 젊은이들이 이상을 바라보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신나는 세상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최근 우리네 삶들을 돌아보면 너무 많은 자조적인 말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늙은이와 젊은이들의 꿈과 비전을 억압하는 용어들이다. 이런 말이 있다. “당신 참 젊어 보인다 라고 말을 듣는 순간 당신은 이미 늙은 것을 기억하라.”고 했지만 늙은이가 되는 기준이 머리털의 희고 검음의 차이인가? 하지만 그 기준은 꿈을 꾸지 못하고 “과거만 회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늙은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이상을 잃어버린 순간 그들은 이미 정상적 젊은이라고 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런 현상들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리적 현상이다. 이 현상에 그리스도인들이 무비판적으로 무임승차하고 있지 않은지 묻고 싶다. 늙은이를 꿈꾸지 못하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