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과거에나 지금이나 무질서 속에 갇혀있다. 그것은 4.11 총선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과거 지난날의 사회주의자들을 발본색원하지 못한 후유증이라고 볼 수 있다. 그 한 예를 보면 북한 탈북자 북송 저지 국제여론 형성을 위해 우리 국회의원들이 제네바의 유엔 인권사회를 방문한 이후 북송문제에 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우리와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들이 인류애를 외치며 탈북자 북송 반대 집회를 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 제주 해군 기지와 이어도에 관해서 국내 좌파들이 손가락 걸고 약속이나 한 듯 한결같이 “중국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건국 이래 남방해역에서는 그 어떤 분쟁이 단 한번도 없었다. 한국 해군의 몸집 불리기를 위한 이런 무모한 도전은 중국을 자극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발언처럼 들리는 이 말은 통합진보당의 심상정 공동대표가 한 집회에서 한 것이다.중국이 ‘도련(Island Chain)’ 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제주 앞바다는 물론 동아시아 인근을 자신의 해역화 하려는 사실에도 눈을 감고 귀를 닫고 듣지도 않으려고 한다. 중국 정부의 장관급 인사가 관영
1977년 4월 14일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 본부 (서울시 용산구 동자동 18-7)에 사무실을 두고 (침례회보) 명칭으로 (등록번호 라 2221호) 문화공보부에 등록했다. 1977년 5월 7일 박경배 목사를 발행인, 김용도 목사를 편집인으로 해 복간 제1호를 발행했다. 침례신문의 근간(根幹)은 1955년 8월 19일 서울시 중구 충무로5가 55번지에 사무실을 두고 ‘침례회보’ 명칭으로 제3종 우편물 인가를 얻어 기독교한국침례회 기관지로 발간하게 됐다. 시작부터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경영에 많은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나라의 경제가 어려워 국민들의 삶이 말할 수 없이 힘들었기 때문에 당시의 교회들도 경제적인 자립할 수 있는 교회들이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위기를 맞으면서도 침례회보는 매월 발간됐다. 그러다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1970년 7월1일 169호 발간을 끝으로 자진 폐간하게 됐다. 이렇게 7년간의 공백기를 끝내고 1977년 5월 7일 복간 제1호를 발행해 이번 주 발행되는 신문이 복간 1,000호를 맞이하게 됐다. 침례신문의 발전을 위해 1979년 5월 이사회를 구성하고 제1대 이사장 겸 사장에 송종호 안수 집사가 취임했다. 또한
교단 총회가 2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지난 1년동안 총회는 교단의 여러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며 ‘침례교회의 푸른 계절’을 이뤄내기 위해 노력했다.지난 두 차례에 걸친 총회 의장단 예비 후보자 토론회를 통해서도 교단에 대한 여러 현안을 논의하며 다양한 방안들이 제시됐다.특별히 농촌교회와 미자립교회에 대한 교단 총회의 대안은 반드시 현실로 이뤄내야 할 시대적 과업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여러 회기를 겪으면서 농어촌교회와 미자립교회 대책을 제시했다. 제대로 현실화 된 내용이 있는지 묻고 싶다. 1년에 4천여 만원의 예산으로 농어촌교회와 미자립교회를 살리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또한 미자립교회 지원에 대한 예산은 제대로 확보되지 못하고 교회 재난이나 경조사 관련 등에 한해 총회 예산이 집행되고 있어 다른 사업보다 우선적으로 농어촌교회와 미자립교회에 대한 총회 지원이 아쉬운 한 해였다.적어도 대안을 세웠다면 그에 대한 계획과 예산 집행, 후원 방안 마련 등 구체적인 로드맵이 제시돼야 할 때이다.예장통합 총회를 비롯해, 합동총회, 감리교, 기장총회 등 주요 한국교회 교단들은 매년 미자립교회에 대한 대안 마련과 농어촌교회를 살리기 위한 여러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