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장 대중화된 통신 매체는 스마트 폰일 것이다. 나도 그냥 전화와 간단한 문자만 주고받는데 스마트 폰이 뭐 그리 필요하겠나 싶어서, 또 남이 사용하는 것을 보니 여간 복잡 한 것 같아서 그럴 시간 있으면 책 한 줄이라도 더 읽을 것 같아서 구임을 미루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스마트 폰 구입해서 스마트하게 살라고 하기에 년 초에 구입해서 사용하고 있다. 처음 몇 날은 익숙하지 않아 고생을 했는데 요즘은 제법 이것저것 사용하는 폭이 넓어졌다. 그중에 카카오 톡이나 이나 카카오 스토리, 페이스 북을 열면 ‘친구’ ‘친구 찾기’ ‘친구 신청’ 같은 문구가 뜬다. 신청에 수락을 누르면 “이제부터는 친구입니다” 라는 문구가 뜬다. 친구! 참 친근한 단어이다. 친구! 하면 편하고 좋다. 그러나 편하고 좋다는 것과 막 대하는 것은 다르다. 함부로 하는 것과도 다르다. 함부로 하거나 막 대하면 불편해 진다. 불편하면 더 이상 친구가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부르셨다. 하루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 이제 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인간은 야누스처럼 양면성을 지니고 사는 존재라고 한다. 천사의 마음과 야수의 본성, 무한한 희망과 더불어 육체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이처럼 한계와 상대성을 지니고 있는 육적인 존재를 극복하고자 인간들은 철학을 연구하고 종교에 의존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육적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인간의 영원한 과제이다. 이와 같은 의미로 우리의 육신적 한계와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무엇인지 깊이 연구하고 생각는 지혜가 필요하다.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은 광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많은 수분과, 약간의 석회, 인, 탄산, 염분, 철분, 유황, 붕소, 마그네슘 등 이것들을 물질적 가치로 환산하면 쌀 한 가마 값도 채 안 된다.이처럼 물질로만 따지면 우리 신체의 가치는 보잘 것이 없다. 게다가 물질은 언젠가는 그 수명이 다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물질로 된 우리 몸은 노쇠하고 후패해져 언젠가는 필시 그 수명이 다하여 티끌로 허무하게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그러므로 그와 같은 제한성을 지닌 몸을 입고 사는 우리는 그 육체의 힘과 미를 절대적인 것으로 의지하거나 자랑할 수 없다. 육체의 제
교회학교 다음세대를 준비하다!를 시작하며 이 글의 기획 의도는 다음과 같다. 교회의 성장 특히 교회학교의 성장에 대한 고민은 있지만 교회 내외적으로 모든 상황이 매우 어려워지고 있기에 개별 교회가 고민하고 준비하기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점이다. 이에 교회가 다음세대를 위해 준비해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방향을 정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 김시백 목사(교회진흥원 아동담당)교회학교 현황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100여년의 역사 가운데 괄목한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순위는 모두 우리나라에 있다고 회자될 정도로 부흥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어느 덧 교회학교의 성장은 둔화되었고, 다수의 교회가 그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는 시점이 되었다. 시골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대도시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되고 있다. 특정한 현상에 문제이기 보다 주일학교에 인원이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추세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전반적인 교회성장의 둔화에 대해 지역과 개별교회에 해당된 사항에 한정된 것으로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하나의 요인으로 교단적인 특수성으로 분석하고 있는 입장이 있다. 교육정책 수행을 분석한 고신총회 교육
최근 들어 한국에서 “다문화”라는 말이 뉴스, 신문, TV프로그램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우리나라가 이미 다문화 사회로의 진입이 벌써 시작됐으며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수용하고 기존의 사회구성원과의 통합을 이뤄야하는 것이 당면 과제임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국제 노동법 제3조에서는 다문화가족은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결혼이민자와 외국인근로자가 대한민국 국민과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결합하여 이룬 가족과 귀화자 가족을 포함한다. 출신국적이 다른 외국인 간의 결혼에 의한 가족과 영주권자 가족은 제외된다. 결혼이민자는 대한민국 국민과 혼인한 후 대한민국에 거주할 목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 또는 이에 해당했다가 혼인관계가 해소된 외국인으로 되어 있다. 간이귀화자는 귀화자 가족에 포함된다. 일시 체류 외국인과 외국거주 다문화가족은 제외하고 있다. 2008년 통계자료에 따르면 국내 거주 외국인은 전체 인구의 1.8%에 해당하는 891,341명이다.이 중 외국근로자, 결혼이민자(국제결혼이주자 및 혼인귀화자) 및 자녀 등은 전체 외국인주민의 71.8%인 640,119명이다. 한국의 경우 서구 유럽의 150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친 다문화
아프리카 남단에 가면 ‘스프링복(springbok)’이라는 영양이 있다. 이 양떼들은 무리가 커지면 이상한 집단행동을 한다. 조금이라도 앞서서 풀을 뜯으려고 서로 달리기 시작한다. 한번 뛰기 시작하면 수천마리 양떼들이 풀 뜯을 시간도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뛰기만 한다. 그러다 해안가에 도달하면 갑자기 설 수가 없어 모두 바다로 뛰어든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같다. 21세기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시대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정글의 법칙(The law of the jungle)을 넘어선다. 무한 경쟁이요 전 방위 경쟁이다. 이것은 결국 무한탐욕으로 이어진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한국은 더 심한 것 같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에 ‘더 나은 삶(OECD Better Life)’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34개국 OECD회원국을 포함한 36개국 국민들이 살아가는 상태를 분야별로 평가한 것이다. 한국은 종합 27위에 머물렀다. 그 중에서도 근로시간과 여가 활동을 토대로 집계한 ‘일과 삶의 균형’ 분야에서는 최하위권인 33위였다. 주간 노동시간은 44.6 시간으로 터키를 빼고는 가장 길었다. 무슨 말인가?
오래 전 친한 친구와 함께 진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며 기도한 적이 있다. 우리는 그 때 대학진학을 앞에 두고 어느 학과를 선택할 것인지를 놓고 작정기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해 안타깝던 차에 친구가 응답을 받았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 뭐라고 응답하시더냐고 물으니 그 친구 왈, 하나님은 내가 어느 학과를 선택하든 개의치 않으신단다. 뭐 그게 응답이냐고 말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아주 정확한 응답이었다. 결국 그 친구는 영문학과를, 나는 신학과를 선택했고 결국은 둘 다 목사가 되어 각각 일선과 학교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과정은 달랐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간 것이다. 우리는 흔히 기도를 하면 족집게 같은 응답을 원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놓고 기도할 때 정확히 이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기를 원하지만 실상 그런 응답은 흔치 않다. 사역을 하다보면 답답한 현실 때문에 고민하는 자들이 찾아와 상담을 한다.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결정을 못하기 때문에 명쾌한 목사의 답을 듣고 싶어서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정답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정답은 이미 자신이 알고 있었다. 단지 정답대로 사는 것이 두려웠을
질문이다. ‘아프리카는 어디에 있는 나라인가?’ 이 질문에 순간 머리를 굴려가며 축척된 지식을 동원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질문은 처음부터 잘못된 질문이다. 왜냐하면 아프리카는 국가가 아니라 대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모를 사람이 있겠는가? 2001년 6월 14일 스웨덴 요텐베리에서 미국의 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Africa is a nation that suffers from incredible disease”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옮기면 이렇다. “아프리카는 엄청난 병을 앓고 있는 국가입니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아프리카는 대륙이므로 nation이 아닌 continent를 사용했어야 맞다. 그가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말실수를 부시즘(Bushism)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는 엉터리 영어를 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본뜻과는 다른 의미로 영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diet’라는 단어의 사용이다. 특히 뚱뚱한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대명사 같은 단어가 되고 있다. 이 diet가 살을 빼는 행위나 운동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diet의 본래 의미는
오늘의 시대는 양성사회에서 단성사회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 남자가 부엌일과 육아를 하고 여자가 축구와 레슬링 씨름을 하기도 한다. 과연 남녀는 같은 존재일까? 남녀는 생물학적으로 분명히 다른 존재이다. 남녀는 생식기뿐만 아니라 가슴 어깨 목소리 같은 제2차 성징으로 뚜렷이 구분이 된다. 그리고 여자의 세포는 x염색체를 2개 갖는 반면 남자는 xy염색체를 갖는다.최근 영국의 러벨배지와 굿펠로우라는 두 학자가 “y염색체에 사람의 태아에서 고환을 만드는 데 방아쇄 역활을 하는 유전자를 발견했다”고 한다. 또한 남녀간의 뇌의 구조가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 미 캘리포니아 대학의 고스키 박사는 뇌의중앙부에 있는 작은 시상하부의 앞쪽 일부가 남자의 경우 여자보다 2배가 크다는 것을 알아냈는데 그 후 학자들에 의해 뇌의 5군데가 남자가 더 크거나 여자가 더 큰 사실을 밝혀냈다.아동들 앞에 심리학자들이 전차대포, 스포츠카 등의 장난감과 젖병, 인형 등을 같이 놓아 두었더니 남자는 전자를 여자는 후자를 택하였다고 한다.이밖에 학업 성적을 보면 남자는 수리에 여자는 언어에 우수성을 보이고 남자는 입체적 위치 감각에 여자는 표정 뒤에 숨어 있는 감정파악에 특출하다는 것이 실험자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어렵고 각박한 시대에 살고 있다. 가장 가까웠던 친구를 성폭행하고 죽이고 시체유기까지 하고 있다. 사회의 무질서와 혼란은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고 이곳저곳에서 비틀거리며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실정이다. 공공질서를 파괴하며 가정에서 폭력이 빈발하고 있는 가운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 동원된 경찰에까지 도전하고 있으며, 국가 재산을 파괴하는 도전 또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모든 단체, 모든 조직, 모든 기관의 지도자들마다 곪고 썩어 터지고 있는 각종 부조리의 상처투성이가 되고 말았다.같은 교단 안에서도 편당을 짓고 내편이 아니면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워도 무조건 반대부터 한다. 한 사람의 인격과 한 단체를 리드 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다고 해도 나와 사상이 다르고 내가 속한 파당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좁은 안목에 매여 있다면 교단의 미래를 열어갈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무엇인가?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문제 해결의 어떤 희망이 보이는가? 정말 이 어려운 시대, 병든 기관과 단체를 치료하고 구원할 신기한 명약이라도 갖고 있는가? 객관적으로 볼 때 분명
태국에 갔을 때 호랑이 쇼를 본 적이 있다. 조련사가 호랑이에게 명령을 하고, 때로는 채찍질을 했다. 혹시나 야성이 발동하여 갑자기 ‘어흥’ 하고 확 덤벼들지는 않을까 마음 졸이기도 했다. 그러나 던져주는 고깃덩어리에 머리를 조아리며 덥석덥석 받아먹고, 시키는 대로 군말 없이 복종하고 있는 것이었다. 신기하면서도, 맹수가 이렇게 고분고분해지도록 훈련된 과정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과 짠한 마음이 앞섰다. 그런데 쇼를 하고 있는 호랑이와, 목회자의 모습이 겹쳐지는 듯해서, 쇼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이 혹시 오늘날 우리 목회자의 모습은 아닐까, 아니 내 모습은 아닐까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바울은 로마서 첫 머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라고 선포하면서 시작한다. ‘벤허’ 영화에서도 보듯이, 로마시대는 영웅이 활개 치던 시대다. 모두가 출세가도를 달리며 영웅이 되고자 한다. 그 대표적 인물이 ‘메살라’다.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죽마고우인 ‘유다 벤허’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만다. 그리하여 ‘유다 벤허’는 발에 쇠고랑을 차고 전투함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도
강원도 정선군 태백시 소재의 함백산은 해발 1,574M이다. 함백산 주름은 동쪽의 태백시와 서쪽의 영월 정선군의 경계를 이루며 뻗혀있다. 2013년 침레교 총회에서 여는 목회자부부 영적성장대회가 열리는 오투리조트를 찾아가는 길은 하늘을 오르는 고원지대의 산행길이었다.“웃음” “회복” “도전”의 주제로 열린 102차의 침례교 한마당의 잔치는 행복했고 즐겁게 함께 웃는 전국 목회자부부 친교의 날이었다. 모두가 느끼는 것은 ‘이런 기회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런 고원의 도시, 산소의 도시, 바람의 언덕, 안개의 도시를 와 보겠는가’는 것이다. 새벽부터 달려온 동청주지방 사모님들의 선발팀과 임원 목사님들의 사모님들이 여러 가지 준비 작업을 도울 수 있었으며 화합의 차원에서 가슴에 달린 노란 ‘스마일배지’는 연신 미소를 머금게 했다.5월은 행사가 많은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등 가정적이며 은혜를 보답하는 가정의 달이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인지 교회나 모든 기관들에서도 바쁘게 지내는 일상들로 동선이 넓혀져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리교단에도 중요한 행사들이 영적 성장대회 책자에 광고로 나와 있었다. 5월30일-6월1일의 제23회 침례교 원로목사부부 초청 위로
집에서 기르는 같은 동물인데도 고양이는 따뜻한 방에서 주인과 함께 자고, 개는 추운 마루 밑에서 잔다. 왜 그럴까? 과학적이거나 실제적인 대답은 아니지만, 우리 조상들에게서 내려오는 대답이 있다.먼 옛날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개와 고양이를 함께 키우고 있었는데 그 정성이 남달라서 비록 자기가 굶는 한이 있더라도 개와 고양이를 굶기는 법은 없었다. 주인의 이 지극한 정성에 보답하기 위하여 개와 고양이는 하나님이 가지고 있다는 귀한 보물을 훔쳐다가 주인을 부자로 만들자고 합의를 보았다.그리하여 둘은 천신만고 끝에 보물을 구하여 집으로 돌아오는데 도중에 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래서 개는 헤엄을 치고 고양이는 보물을 입에 물고 개의 등에 업혀 강을 건너고 있는데 무심코 개가 고양이에게 말을 걸자 고양이가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 바람에 그만 입에 문 보물이 강물 속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 아닌가! 그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여기서도 재난이 되어서 만사를 그르치게 된 것이다. 개와 고양이는 안타까워서 떨어진 강물 속을 들여다보며 발을 동동굴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개는 추운 강바람을 쏘이며 서성거려봐야 헛일이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고양이
5월 마지막 주일이 지났다. 가정의 달이라서 그런지 행사들이 교회 안에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행사가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가정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이다. 가정이야말로 우리의 삶의 보금자리요 행복의 안식처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가정이 행복하도록 복을 주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가정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의 자료가 없어서 1990년대 자료를 보니 미국에서는 하루에 9077명이 태어나는데 그 중 1282명은 사생아이고, 하루에 5962쌍이 결혼하는데 그 중 1986쌍이 이혼을 한다고 한다. 또 하루에 2740명의 아이들이 가출하고, 성폭력은 8분마다, 살인은 27분마다, 강도는 78초마다 일어나고 있으며 33초마다 자동차가 분실된다고 한다. 하버드 대학의 피티릿 소로킨 박사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결혼 5건 중 1건이 이혼으로 끝나고 있는데 부부가 모두 그리스도인으로 매일 가정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경우 1015건의 결혼 중 단 1건의 이혼이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이것을 보더라도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경교육과 가정예배 및 기도를 생활화해야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 될
오월이 다 돼가는 오늘 대전에서는 눈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이른바 ‘꽃샘추위’일진데 벚꽃위에 무심하게 내리는 눈이 가관이라 한컷을 남겼다. 파르르 떨다 못해 코 빠진 벚꽃잎이 봄바람에 흩날려보지도 못하고 때 모르는 진눈깨비에 애처롭게 부대끼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한라산의 때 아닌 눈꽃모습이 보인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아침마다 옷장 앞에서 망설이게 된다. 코트를 입을까, 봄 재킷을 입을까? 뭐, 마음이야 무겁고 두꺼운, 무엇보다 너무 입어서 지겨운 코트 대신에 가볍고 화사한 봄 재킷을 입고 싶지만, 섣부른 선택은 감기를 자초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꽃샘 때문이다. 예쁜 이름에 속으면 곤란해진다.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 이런 무시무시한 속담까지 있을 정도니까. 어쩌다가 거를 법도 한데 꽃샘추위는 꾸어다 해도 한다고 할 정도로 꽃이 필 무렵에는 꽃샘이, 잎이 필 무렵에는 잎샘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특히나 춘분 즈음에 꽃샘은 겨울 못지않게 매섭고 차기로 유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꽃샘바람의 실체는 소소리바람이다. ‘소소리’가 본래 ‘회오리’를 뜻하는 말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면, 어떤 시인이 ‘성깔 남은 바람’이라고 표현했던 시구가 절묘하게 느껴진다
부부도 서로 이해 못하는 시대이다.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그대 있음에 / 내 맘에 자라거늘. / 오, 그리움이여 그리움이여 그리움이여 /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 나를 불러 손잡게 해(김남조의 시, ‘그대 있음에’)우리는 얼마나 남의 근심을 위로하고 남의 고독과 아픔에 동참하고 있는가? 에리히 프롬은 남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의 첫걸음이라고 했다. ‘이해하다’는 영어 단어가 ‘understand’ 아닌가! 그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 밑에 서서 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 그래야, 그럴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의 절실한 사정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인생을 살아오면서 눈물 나도록 고마웠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모두가 한결같이 자기를 이해해 준 사람이라고 말한다. 힘들고 어려울 때, 인생의 험한 고비를 넘을 때, 찾아와서 위로해 주고, 이해한다고 손을 잡아주고, 함께 울어준 사람, 그 사람이 가장 고마운 사람인 것을…. 우리는 얼마나 내 주변 사람을 이해하고 사는가? 내 부모, 내 형제, 내 자식, 내 친구, 그리고 나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얼마나 이해하고 위로하며 사는가? 왜 우리는 바쁘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