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포항지방회 소속 신평교회 이종훈 원로목사입니다. 지난 2년전 자전거 운동을 나갔다가 사고를 당해 지금까지 어려움의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자녀들 외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고 늘 외롭고 눈물 겨울 때가 많습니다.성탄절을 맞아도 우리 내외는 눈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날마다 가정 제단을 쌓으며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그런데 성탄절 다음날인 12월 26일 “택배요”하고 크고 묵직한 박스가 온 것입니다. 주소를 확인하고 뜯어보니 10가지가 넘는 선물들이 꽉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낸 사람의 주소가 적힌대로 전화를 했습니다. 강동지방회 반석제일교회 이유진 목사님이었습니다.반석제일교회 이유진 목사님과 성도들이 원로목사들을 위해 성탄 선물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 많은 선물들을 위해 물질과 정성이 많이 들었을텐데 너무 감사합니다.정말로 우리 사랑하는 침례교 가족들에게 반석제일교회의 목사님과 성도들의 따뜻한 사랑을 알리고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침례교 가족들!새로운 해에는 주님 은혜가 넘치고 넘치기를 기도합니다.이종훈 원로목사 / 포항지방 신평교회
2012년 한해가 지나고 2013년 새로운 한해를 맞이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난해에 대하여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반성과 새해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는 “창조”가 있고 “종말”이 있는 직선적인 역사관 같으나 구원이라는 부활의 새 생명을 가질 수 있는 드라마틱한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관은 우주에서 변화무쌍하게 일어나는 다양성과 융통성 속에서 대전제가 있다. 대전제 앞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성경의 진리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의 신앙 고백과는 상이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런가? 깊이 분석하고 관찰해보면 그것은 비성경적인 현대 사상과 불 신앙적이고 세속화된 인본주의 운동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한하고 인격적인 하나님께 나의 삶을 의탁해 매우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검증된 삶으로 나를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정신적이고 지식적인 우리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다. 우리에게 부여된 2013년의 모든 영역에서 최선
겨울로 들어서자 연일 하얀 눈이 내리고 날씨가 추워져 온 세상이 은빛설원으로 변하여 어디에서든지 아름다운 아기 예수님 기다리는 12월의 무대가 됐다. 올해도 거리와 지하철 역사 마다 구세군의 자선냄비에 아름다운 기부자들의 따뜻한 소식들이 연일 보도 되고 자선냄비를 뜨겁게 하는 ‘이름없는 천사’의 선행들은 우리들에게 따뜻한 온정을 느끼게 했다. 또한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대한민국의 ‘여성 리더’는 첫눈이 그대로 잔설로 남아있는 겨울산 푸르른 소나무의 기상의 오롯함처럼 ‘제18대 대통령 선거’라는 큰일을 치려낸 대한민국은 새로운 활기로 넘쳐나고 있다.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로 세계와 우리나라는 또 한 번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됐다. 장거리 로켓 발사 성공에 북한의 눈덮힌 평양시내 대극장 앞에서 젊은이들이 춤을 췄다는 자축 보도와 북한 핵무장 진전 우려에 대한 ‘상응 대가 경고’와 심각한 불쾌감을 표시하는 각국의 표정들이 추운 겨울을 더욱 꽁꽁 얼어붙게 만들기도 했다.첫 여성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하는 많은 국민들의 마음속에는 각가지의 염원도 포함되어 희망을 갖고 기대하는 바도 클것이라 본다. 선거일정이 발표된 후에 새벽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경외(레19
경청기도는 하나님께 주목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예수님 발아래 앉은 마리아는 경청기도의 산 그림이다. 그녀는 “꼭 필요한 것 한 가지에 전심을 바쳤다” 하나님 앞에 잠잠해지는 법을 배우기란 어려운 일이므로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연습하면 풍성해 지고 충만해진다. ‘경청기도’란 짜릿한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임재를 누리는 데 주안점이 있다. 경청기도 중에 우리 하나님의 너그러운 성품, 즉 우리를 절대 포기하시지 않는 사랑, 억울한 상황을 뒤집으시는 능력, 능력을 자비로 조절하시는 온유하심을 묵상할 수 있다.하나님의 후하심을 오래 묵상할 경우, 우리도 그 성품을 지니고 싶은 갈망이 생긴다. 하나님을 흠모할수록 우리도 욕심을 버리고 후해지고 싶고, 기회가 닥치면 움켜쥐기보다 베풀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바로 그런 의미이다. 나는 내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음과 그분이 나를 사랑하심을 안다. 하나님이 나를 말할 수 없이 귀히 여기심을 나는 안다. 이보다 좋은 것이 또 있을까? 이런 기도로 하나님을 맛보아 알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간절히 원하게 된다. 하나님께 그런 갈급함이 있으면 그
2012년도 몇 일 안 남기고 있다. 한 해가 지나가는 마지막 날에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시작할 때 가졌던 아름다운 희망과 꿈, 기대가 성취된 것보다는 미완성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보게 된다.그리고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하며 새로운 희망과 꿈, 기대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회개를 통해 대청소를 해야만 한다. 한해를 살아오면서 부정적인 생각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 왔었다. 언제나 삶의 모자라는 것과 어두운 면을 찾아서 강조하며 살아온 그리스도인들이 아닌가? 부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모든 면에서 부정적인 꼬투리를 잡는다.진실로 밝고 맑고 환하고 긍정적인 마음이 되지 못하고 무언지 모르게 언제나 어두운 점을 찾고 모자라는 점을 찾고 못된 점을 찾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은 인격이 모두다 부정적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한 해 동안 너무나 소극적으로 살아왔다. 발전과 향상을 저항하는 삶이 소극적이다. 적극적인 사람은 모험적이고, 발전적이며,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소극적인 사람은 언제나 나 홀로 전통주의적이며 안정적이고 보수적으로 살아간다. 그러기 때문에 발전하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
3) 초실절(레23:11)안식일 이튿날에 시작되는 초실절은 “제 팔일”로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첫 열매되심을 정확히 “안식 후 첫날” 부활해 일어나실 것을 예시하심이다(레23:11). 이 날은 안식일이 아니다 “안식 후 첫날”이다(고전15:20). 예언되고 성취된 날 이날이 “주 예수의 날”이다. “주일”, “주의 날”(계1:10) 부활의 날이다.4) 오순절(레23:15~16)초실절의 날부터 칠 안식일의 수효를 세어서(7x7=49) “이튿날”(제 팔일)까지 합해 “오십일”을 채운 날이다. 즉 “하루“를 더한 이 “주의 날”을 합해야 오순절이 되게 하심은(안식일이 아님) 예수 그리스도로 또 다른 보혜사를 이 땅에 보내심의 언약이 완수 되게 하신 “더하여짐”으로 완성되는 “하루“가 “주의 날“이다(레23:15-16, 요14:16~21, 행1:4~5, 2:1~4). 5) 초막절(레23:34~38)칠일동안 화제를 드리고 “제 팔일“에도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이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헌물 (외)에 낙헌 예물 (외)에 드리는 것이라(안식일이 절대 아님을 밝힘). 왜 이날을 “대회” “성회”라 했는가?(레23:34~38) 초막절은 한해 모든 절기와 행
“고르반”의 예(막7:1~23)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라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을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하면 그만이라 하니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하느니라(막7:1~14)고 기록되어 있다.이혼증서를 주어 아내를 내어버릴 수 있다던 당시 바리새인들의 가르침(막10:1~11)도 사람의 교훈으로 예수께 질타를 받았다.그들은 열심이 있어서 “두루 다니며 교인을 삼아 자기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고 천국 문 앞에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하는 자도 못 들어가게 한다”고 책망하셨다.(마23:13~15)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수건과 사탄의 책략(고후3:6~17)사도바울의 율법관을 한마디로 축약한 말은 “의문(율법)”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 하면서 돌에 써서 죽게 하는 율법도 영광이 있어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났으나 장차 없어질 것의 영광에 주목치 않게 하려 하여 수건을 그 얼굴에 씀 같으나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 하냐 그러나 저
▶본 기고는 본사의 편집방향과 다를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 관한 모든 법적책임은 기고자에게 있음을 알립니다.율법과 복음의 관계 옛 법과 새 법의 관계하나님 말씀과 사람의 교훈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사탄의 전략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 엘렌 화이트를 따를 것인가?율법주의를 이용한 사탄의 계략1) 사탄도 성경을 이용한다.(마4:1~11)과거 사탄의 전략은 공포와 위협과 폭력과 파괴로 일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했으나 그 전략이 이제는 많이 변화되고 세련되게 발전하여 예수님을 속이고 넘어지게 하고자 사용했던 변조된 성경 말씀의 방법들로 바뀌었다.(마4:1~11)2) 율법을 준수하라는 사탄의 계략갈라디아교회를 유린한 방법 (갈1:7~9)바울은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다시 말하노니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고 거듭 못을 박으며 다른 복음은 없다고 말하면서 다만 어떤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 너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너희에게 율법의 굴레를 씌워 종을 삼고자 하는데 이 같은 자들은 너희를 이익의 재료로 삼으려 한다고 했다.(갈1:7~9, 2:4 벧후 2:1~3)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은 구약의 율법을 말하
요즈음 나는 내가 알고 있던 상식, 통념 밖의 것들이 보여주는 숨은 뜻들을 하나씩 알아가는 것 같다. 그 중 하나가 맹그로브나무이고 또 하나는 돌이다. 이미 보아 왔던 것들인데 이전에 보았던 것만이 아니고, 알았지만 그 의미가 더 풍성해지는 일상을 적어보고자 한다. 식물은 씨앗이나 포자, 열매, 뿌리, 줄기로 번식한다고 알고 있었던 것이 나의 식물에 대한 상식이었는데 그렇지 않은 나무가 있다고 한다. 새끼를 낳아서 번식하는 식물 중에 유일한 태생종이라 불리는 맹그로브이다. 맹그로브는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카리브해해 섬, 인도, 방글라데시, 미국 플로리다 남부처럼 아열대지방의 해안선 수면에 서식하는데 나뭇가지의 가장자리에 생긴 새끼 나무가 만조 때 바닷물에 떨어지는 신기한 방법으로 번식한다.바닷물에 떨어진 새끼 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뿌리끼리 서로 얽히면서 평균 연간 100m의 속도로 군락을 이루는 데 이렇게 만들어진 맹그로브 습지는 해안의 지반을 지탱해주면서 해일로부터 섬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육지의 영양분이 바다로 쓸려가는 것을 막아준다고 한다.맹그로브의 뿌리와 줄기가 소금물에 잘 견디어 내는 조직을 가지고 있고 나무 군락이 물고기와 새들을 포함한
지구는 좌절의 별이라는 말이 있다. 불운이 겹치고, 운명의 할퀴고, 로또 복권은 번번히 비켜가고, 이 사람에게 속고 저 사람에게 넘어지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좌절하고 비웃음거리가 되고, 만인 대 만인의 경쟁에서 늘 선두권에 서지 못하고 뒤쳐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종(種)’으로써 인간은 진화의 무수한 굴곡을 넘어온 고독한 승자이지만 개인으로서 인간은 모두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들에 가깝다. 물론 승자들도 있다. 하지만 사회 전체로 따지면 그 비율은 극히 미미할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지난 20세기에 급격히 줄어들었다. 세상에는 한 사람의 승자와 한 사람의 패자만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권투, 체스, 윔불던 테니스 대회, 대통령 선거와 같이 둘이서만 승부를 펼치는 경기가 그러하다, 이럴 경우 패자와 승자의 운명이 갈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이고 질서이기 때문이다. 물론 패자의 입장에서는 좌절의 고통이 무척 쓰라리다. 예를 들어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헥토르의 목을 찔러 죽인 다음 그의 두 발에 구멍을 뚫고 황소 가죽 끈으로 꿰어 전차 뒤에 매달았다. 그러고는 말에 채찍을 가해 헥토르를 질질 끌고 다니며 패자를 능욕했다. 호메로
율법과 복음의 관계 옛 법과 새 법의 관계하나님 말씀과 사람의 교훈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사탄의 전략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 엘렌 화이트를 따를 것인가?(2) 복음의 의의와 목적(율법의 선고로 사망에 이른 자들을 살리는 용서와 구원의 복음)죄로 인하여 심판과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인간을 하나님은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기위한 율법 외에 다른 한 법을 준비하셨다.(롬3:21) 마음과 양심이 죄로 인하여 망가진 사람은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 수준인 율법조차도 지킬 수 없기에 속사람을 선한 양심을 치료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살아갈 거듭난 자들의 삶의 방식인 믿음 즉 새사람 새 계명 영으로 사는 하늘 백성의 법을 부여 하셨는데 이것이 마음과 생각에 기록한 법인 복음이다.(히8:10) 이 새 계명이 적용되려면 믿음으로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사는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롬6:1~6. 골2:11~12,요3:3~6)율법의 선고로 인한 공의의 요구된 사망은 예수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어야 되는 죽음(히9:27)으로서 하나님 자신도 의로우시며 예수를 믿는 자도 의롭다 하려 하심이다.(롬3:25~26) 즉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가 우리대신 예수
신뢰 17.6%, 불신 48.4%. 벌써 3년이나 지난 2010년에 보고된 한국교회의 평가다. 종교간 호감도 역시 최하위다. 그럼에도 교회와 목회자, 성도 모두는 자성의 주체를 타자로 돌리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런 현상으로 나타난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오늘날 목회자와 성도의 도덕성과 윤리는 실종되어 갈수록 더욱 세속화되어 가고, 목회자와 성도들은 저마다 부도덕 또는 비도덕적이고 윤리적이지 못한 삶에 대한 양심의 가책마저 상실해 가고 있다.“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은 상당히 반문화적이다”라고 유진 피터슨이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는 그의 저서에서 밝힌 대로 복음을 맡은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성도들은 반세속화로 그 견고함을 지속해야 함에도 세상을 교회 안으로 들여와 21세기의 다른 복음(?)을 탄생시키고 있다.세상을 복음화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상화해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다. 종교개혁주일을 보내면서 교단과 교회 그리고 목회자들은 앞 다투어 개혁을 외쳤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복음으로의 회복을 위한 결단과 삶으로는 선뜻 나서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한국교회에는 범죄는 있어도 징계나 회개는 없는 듯하다. 남이야 어떻게 말하든 내가 옳으면 그것이 복음이고 선이라고
완벽주의를 부추기는 사회의 위력은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에서 비롯되는데, 사회적 동물의 관계지향적 관계에서 비롯된 이 기본적인 욕구는 안타깝게도 ‘착해야 한다’는 명제에 길들여져 왜곡되어 왔다. 좋은 사람들의 완벽주의는 여러가지 사회적 병폐를 낳곤 한다.1) 불가능한 일에도 무턱대고 도전하려 한다.2) 쓸데없는 걱정거리를 만들고 이로 인한 스트레스를 좌절감으로 악화시킨다.3) 친구와의 사이가 쉽게 가까워지지 않는다.4) 욕심이 지나쳐 도통 만족할 줄 모른다.5) 다른 사람이 내 생활이나 인생까지 주도한다.그렇다면 완벽주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완벽해지려는 노력은 항상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완벽해지기 위해, 남의 마음에 들기 위해 산다는 건 엄청난 잘못이다’라고 자기암시를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이를 계속 되뇌이고 묵상하거나 체화될 때까지 적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둘째, 완벽주의를 버리기로 결심하라. 사실 완벽주의가 잘못이라는 사실을 되뇌이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즉 습관을 아주 끊으려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결심도 함께 해야 한다. 완벽주의에서 벗어나리라 다짐했다면 이제부터는 다른 차원의 인생관을 터득할 차례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 옛 법과 새 법의 관계하나님 말씀과 사람의 교훈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사탄의 전략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 엘렌 화이트를 따를 것인가?머리말성령은 슈퍼 베스트셀러이다. 그러나 잘 읽혀지지 않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성경을 제각각 마음대로 해석하고 전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이제는 이단인 비정통의 사람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백일하에 외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주인공이며 중심이 되시고 옳고 그름을 기준하시는 분임에도 이들은 아전인수 격으로 그분을 논단하고 복음의 바른 길에 서있는 성도들을 유혹하고 선동하여 멸망의 길로 이끌어 가고 있다.이들의 성경적 지식은 지극히 편협하고 일천하여 성경을 곡해하고 그뿐 아니라 자신들의 논리에 억지로 꿰어 맞추거나 비상식적 비논리적 비문법적 행위들을 거침없이 행하고 있다.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도 자신들에게 불리하면 버리기도 하고 어떤 말씀은 뜯어 고치고 단어와 문장을 제멋대로 바꾸기도 서슴지 않는다. (계22:18~19) 성경은 절대로 빼거나 붙여서는 안 된다.그토록 제 마음대로 고치고 붙이고 한다면 자신들이 주장하는 그 말씀은 어찌 주장하고 믿고 따르라고 할 수 있다는
아서 브레시와 스키너는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그들은 함께 공도 차고 함께 수업도 빼먹고 데이트도 함께할 만큼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였다. 그래서 한 사람이 군대에 입대하자 나머지 하나도 따라 지원했을 만큼 그들은 절친했다.그러나 입대 후 그들은 다른 곳으로 배치됐고, 그러다가 1942년 바탄이 일본에게 넘어갔을 때 스키너는 포로로 잡혀갔다. 그리고 한 달 후에 아서 브레시도 포로가 됐다. 수용소에서 소문을 통해 아서는 스키너가 근처의 수용소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천신만고 끝에 스키너와 5분 동안 면회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때 스키너는 ‘제로병동’이라 불리는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들이 수용된 감옥에 있었다. 아서가 스키너를 만났을 때 그에게서 생명의 가망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몸무게는 40킬로그램도 채 안 됐고, 퀭한 눈과 쭈글쭈글해진 피부 때문에 70살도 넘은 노인처럼 보였다. 그는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는 상태에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를 보자 아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그렇게 5분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서는 자기가 목에 감고 있었던 손수건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그의 손수건 안에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