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한마음교회가 추구하는 세 가지 핵심 가치는 ‘복음! → 교회 공동체! → 세계선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이다. ‘복음’으로 ‘교회 공동체’가 세워지고,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의 지상 사명인 ‘세계 선교’를 감당하는 것이다. 만약 이 순서를 거꾸로 하여 ‘세계 선교’가 사명인 사람들끼리 모여 교회 공동체를 만든다면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 공동체는 세워지지 않는다. 오직 교회 공동체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태동이 되고, 이러한 교회 공동체가 세계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 16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교회 공동체는 ‘복음’이라는 반석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반석 위에 세워지지 않는 교회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마7:26~27).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2:36)”고 강력히 선포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십자가 사
계시록 5장, 14장에 등장하는 ‘새 노래’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새 노래’가 낯선 음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평생 하나의 찬송가만 부른다 할지라도 부를 때마다 감동이 일어나고, 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으로 뜨거워진다면 이 찬송가도 새 노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현상은 보편화하기 어려운 극히 드문 사례이다. 이것도 혼자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지, 전체 회중이 함께 하는 회중찬양시간에는 개인의 특수성을 보장해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30분에서 한 시간까지 이어지는 회중찬양시간 내내 똑같은 찬송가만 부를 수 없다.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찬양시간은 기쁨의 시간이 아니라 엄청난 고문의 시간이 될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익숙한 노래만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찬양의 열정이 부족하다. 오랫동안 불러온 것이니 악보를 보지 않고도 노래가 술술 나온다. 레코드 틀어놓은 것처럼 자동으로 찬송가가 흘러나오니 편하다. 몸도 편하고 머리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다. 주님 생각 없이도 노래할 수 있다. 감동도 없고 눈물도 없지만 잘 부를 수 있다. 딴 생각하면서도 박자 하나 틀리지
나는 왜 사람이 변하지 않는지 그리고 왜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 공동체가 세워지지 않는지를 고민하는 가운데 이 시대가 ‘사도행전을 건너뛴 시대’임을 알게 됐다. 나는 이것을 통해 이 시대의 영적인 실상과 초대교회를 세운 원형의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됐다. 그 이후 나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나 자신의 명예와 우리 교회의 성장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은 것이다. 그리고 초대교회를 세운 부활의 복음으로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을 보면서 ‘복음이면 다 된다!’ 는 큰 확신을 갖게 됐다. 오직 복음으로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 많은 프로그램이나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이면 사람이 변화되기에 충분하다. 20여년의 목회를 하면서 나는 다른 많은 목회자들처럼 왜 사람이 변하지 않는지, 왜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 공동체가 세워지지 않는지 그 이유를 찾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봤다. 강한 훈련도 시켜 봤고, 성령의 능력 측면도 강조해 봤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근본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변하는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장 큰 고민은 생명이 생명을 낳는 ‘복음의 생명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길고 머나 먼 항해 끝에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기쁨은 얼마나 컸을까? 사과나무에서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의 기쁨은 또 얼마나 컸을까? 밤잠을 설치며 고생한 노고를 다 잊게 만드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그 발견들은 발견자 자신과 그 발견의 가치를 나눈 온 인류의 기쁨이 됐다.요즘 나도 그러하다. 성경을 그렇게 오랫동안 읽고 배웠고, 오랫동안 가르치기도 한 전문가이지만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지고의 가치를 발견한 나는 요즘 너무나 기쁘다. 그것은 바로 성경을 주신 하나님이 우리 인류에게 무엇을 그토록 주고 싶어 하셨는지를 발견한 기쁨이다. 어찌 이를 인디아나 존스가 십계명 든 잃어버린 성궤를 타니스 성에서 발견한 것에 비하랴. 신비의 돌을 중국 미궁의 사원에서 발견하고, 거룩한 성배를 요르단 페트라에서 발견하고, 크리스털 해골을 페루 마야문명 본산지에서 발견한 기쁨에 비하랴. 이 발견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인간이 알 수도 없는 하늘의 비밀에 관한 것이기에 비교도 할 수 없는 발견인 것이다. 그 첫째는 ‘행복’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작품 ‘에덴’은 행복동산이었다
처음 예수를 믿고 뜨거운 마음에 기도원에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기도원 원장은 사도행전 8장 14~17절 말씀을 증거하면서 안수를 받아야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방언이 성령님이 임하신 증거라고 하며 방언을 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성령론에 대해 올바로 정립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을 때 받는 성령님을 특별한 안수나 기도를 통해 받으려고 하거나 자신들 안에 이미 내주(來住)하시는 성령님을 인지하지 못하고 성령을 받기 위해 다른 노력들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을 받을 수 있는가?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주인으로 믿을 때’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을 믿을 때 즉시로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나온다. 이런 경우들로 인해서 성령을 받는 방법들에 대해 많은 오해들이 생기며 한국교회 가운데 많은 문제점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왜 성령을 즉시로 받지 못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다,첫째,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임하신 성령님의
신참들이 먼저 품삯을 받다니? 뭔가 조짐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1시간 일한 자에게도, 12시간이상 일한 자들에게도 품삯은 동일했다. 아침 일찍 들어와서 더 고생한 고참들은 더 많은 품삯을 기대했으나 저들의 꿈과 기대는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분노가 치민 고참들은 주인에게 대들었고, 주인도 한 발 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주인은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하는 역설적인 단호한 말로 결말을 지어 버렸다. 일찍 들어온 일꾼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에 대한 열심이 감소하게 되어 건성으로 일을 마치게 된 것과는 달리, 늦게 들어온 일꾼들은 미안한 마음에 정말 열심히 일했을 것이며, 일에 대한 열정으로 마음이 뜨거워진 상태에서 일을 마치게 되었을 것이다.아마도 주인은 작업량보다는 일꾼들의 뜨거운 마음을 더 원했던 것 같다. 설교는 반복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기도도 중언부언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회중찬송가의 무한 반복에 대해서는 별로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 어떤 교인은 평생 똑같은 찬송가만 부르고, 회중 전체가 찬양할 때도 그 찬송가만을 부르기를 원한다. 어떤 목회자도 자신이 익숙한 찬송가만 주보에 올린다
내가 교회를 다니게 된지 2년 정도 지났을 때, 영적 세계에 대해서 눈이 열리는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마귀’가 실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늘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살아온 나에게 보이지 않는 ‘마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 충격으로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리고는 성경에서 ‘귀신’이라는 단어에 모두 동그라미를 치며 성경을 자세히 읽었다. 나는 마귀가 실제 존재하고 있음을 성경이 분명히 증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하게 여겼었던 것이다.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마귀’가 실제로 존재하고 우리들의 실제 삶에 역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모든 사람들이 다 마귀에게 속고 사는구나!’였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요8:44)로 ‘돈만 있으면, 명예만 있으면, 뭔가 소유하면 행복할거야!’하는 생각을 사람들 마음속에 넣어 준다. 사람들은 마귀가 주는 이 생각에 속아 일생을 마귀의 종노릇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마귀에게 속아 평생을 종노릇 하다가 지옥에 갈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껴 교실마다 다니며
1. 성도들을 향한 고마운 마음이 날마다 일어 기쁘다난 군목을 오래 했었다. 그래서 몸에 밴 익숙한 문화 중 하나는 예배당 자리를 간편히 채우는 것이다. 주일이든, 특별행사든 지휘관에게 미리 전화를 걸어 내가 원하는 숫자를 얘기하면 어김없이 그 숫자만큼 병사들을 보낸다. 그래서 내게 예배당 자리 채우는 일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다 민간목회 8년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내가 전화한다고 동원 가능한 교인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말하나마나 불가능하다. 결국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은혜와 감동이 있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다. 더구나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그 무엇도 안된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요즘 난 너무 기쁘다. 주일마다 어디서 그렇게 사람들이 오는지 모르겠다. 내가 전화한 것도 없다. 부탁한 것도 없다. 그냥 오신다. 나도 일일이 물어보고 싶다. “어떻게 오늘 이렇게 예배에 오시게 되었느냐?”고…. 성령께서 다 해주시는 것 같다.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한다. 2. 성도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갖게 되어 기쁘다지난 주일 저녁, 식사를 같이 한 집사님. 올해 일흔 되신 대한민국 최고령 택배기사이다. 주일을 제외한 매일 새
나는 어려서부터 운동을 해서 웬만한 일에 대해서는 대범하게 넘어가는 성격이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만은 이해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쉽게 넘어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나의 인생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밤새도록 고민했고,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말씀은 몇 년을 고민했다. 이렇게 고민하던 중에 말씀이 풀어졌을 때의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정말로 춤을 췄다.삼위일체에 대한 나의 고민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시작됐다. 나는 막연히 하나님은 숫자적으로 한 분이신 줄 알았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절을 읽는데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 또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두 분이 나오는 것이다. 내가 처음에 교회를 다닐 때는 하나님은 숫자적으로 한 분인데 구약에서는 성부의 모양, 신약에서는 성자의 모양, 현 교회 시대에는 성령의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리고 한 사람이 집에서는 아버지. 직장에서는 교사, 교회에서는 집사인 것처럼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세 가지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배웠다. 삼위일체를 이렇게 배웠던 나에게 요한복음 1장
블레셋으로부터 법궤를 돌려받은 벧세메스 사람들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자신들의 마을로 들어온 것을 복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저들의 영적 무지로 인해서 그 좋은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사실 기회를 날린 정도가 아니다. 법궤를 구경하다가 무려 50,070명이 죽임을 당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레위인이 함께 있었지만 그 역시 영적 무지로 인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정확한 제사법조차 몰랐으므로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자신들의 경내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치워버리기를 원했다. 그래서 히브리사람들 중에서 법궤를 모실 수 있는 다른 레위인을 찾았을 것이고, 그중에서도 벧세메스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레위인의 집을 찾았을 것이다. 그곳이 바로 벧세메스로부터 14.5km 떨어진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이었다. 그러나 법궤로 인한 비극은 계속 되었다.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70년이나 머물렀지만, 그 역시 그의 아들 웃사가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피할 수 없었다. 웃사가 다윗성으로 법궤를 이송하는 도중 급사한 이유를 대부분이 레위인이 꿸
교회성장연구소(본부장 이장석 목사)에서 발행하는 월간 교회성장 11월호에 ‘간증 사역을 통해 교인들과 소통하는 창의적 목회’로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는 춘천한마음교회를 소개했다. 아직까지 우리 교회에 ‘교회 성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부끄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 성장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교회를 컨설턴트 하는 연구소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한마음교회 성장의 비결을 함께 나눔으로 신약성서적인 교회를 추구하는 우리 침례교단 가운데 조금이나마 유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기록한다. 최근 시공간을 초월해 소통이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 ‘빅 데이터(Big Data)’가 새로운 트렌드(Trend)로 급부상하고 있다. 빅 데이터란 말 그대로 엄청나게 큰 데이터를 말한다. 이 빅 데이터는 가까운 미래 예측을 비롯하여 많은 영역에서 활용이 되고 있다. 그 중 스포츠 분야에서 빅 데이터를 활용한 사람이 바로 전 SK 와이번즈 감독이었던 김성근 감독이다. 그는 오직 어떤 타자가 어떤 투수에게 강한가 하는 데이터를 분석하여 각 상황에 맞는 선수를 기용했다. 교회성장연구소 이장석 목사는 김성근 감독이 데이터 분석 야구의 선구자라면 춘천 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
1. 어떻게 하면 주일예배자 모두가 적어도 예배 시작 15분 전에 입장 완료할 수 있을까? - 우리가 청와대에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면 15분이 아닌 1시간 전부터 그 앞에 가서 기다릴 텐데. 우리 성도들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대한민국 대통령보다 가볍게 생각하진 말아야 할 텐데. 하나님으로 하여금 너무 많이 기다리시지 않도록 성도들을 어떻게 잘 가르칠까가 고민이다.2. 어떻게 하면 예배가 끝나고도 성도들이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예배드린 시간만큼 정도는 교회에 머무르게 할 수 있을까? - 초대교회는 그랬는데 현대교회는 왜 안될까? 그때보다 삶이 많이 바빠져서 일까? 하기야 얼마나 바쁘셨으면 예배가 끝나기도 무섭게 목사와 인사 나누는 자리에서조차 휴대폰을 귀에 대고 나오시는 분들도 계실까? 우리 교회가 영화관이 아닌 이상 끝나기가 무섭게 인사도, 교제도 없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만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국수로, 커피로 붙드는 것도 한계가 있어 보인다. 3. 어떻게 하면 예배, 기도, 말씀, 교제, 목장, 가정이 늘 주님의 생명력으로 살아있게 할 수 있을까? -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그 모든 것도 다 살아있어야 한다. 살아있는 예배만이 사람을 회복시
나는 서른 한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처음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에 말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그 때 제일 많이 고민했던 문제 중 하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과연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직접 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였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런 고민을 해 봤을 것이다. 요한복음 6장 62절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하려느냐” 이 말씀을 보고 ‘어떻게 사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직접 뛰어 본 적도 있었다.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항상 기뻐하라” 이 말씀을 보면서는 어떻게 인간이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고민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성경의 말씀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어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과 인간의 힘으로 지킬 수 있는 말씀 또한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깨달은 이후 나는 이 세상에서 배운 가치관으로 성경 말씀을 접근하려고 했던 나의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내려놓게 됐다.‘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과연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직접 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라
아비나답은 기럇여아림에 있는 자신의 자택에서 몇 년 동안이나 법궤를 모셨을까? 설교하는 목회자들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에서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크게 ‘20년설’과 ‘70년설’로 나뉜다. 20년설은 사무엘상7:2에 기록된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로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에 근거한다. 성경에 20년이라고 명문화되어 있어서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이 사무엘상7:2이 기록될 당시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20년설이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20년설이 명기된 사무엘상7:2이 기록될 당시에 사무엘이 주도했던 미스바대성회가 있었다. 사울왕도 등장하기 전이다. 그러므로 사무엘상7:2에 기록된 20년이라는 기간은 벧세메스로부터 이송되어 온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렀던 기간을 미스바대성회를 기점으로 계산한 것이다.미스바대성회 이후에도 50년 이상 법궤는 계속해서 아비나답의 집에 머무른다. 사울왕의 집권기간 중에도 역시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사울왕이 죽고 다윗이 왕위에 올랐을 때 비로소 아비나답의 집으로부터 법궤가 다윗성으로 이송된다. 따라서 70년설이 더 정확하다고 판단된다. 아비나답과 관련해서 또 하나의 의문점이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그리고 예수님 안에 어떤 보화가 있는지 몰랐을 때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말씀은 내게 은혜의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스러운 말씀이었다. 뭔가 나의 것을 빼앗기고 손해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예수님 안에 어떤 보화가 있는지를 알게 되니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이다. 왜냐하면 내 생명, 내 자식, 내 물질, 내 인생 등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 된 사람만이 세상에서 참으로 자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요 8:32).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뿐 아니라 ‘풍성한 삶’을 주셨기 때문이다(요 10:10). 그렇다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는 자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축복은 어떤 것이 있는가?첫째, 예수를 주인으로 믿는 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오뚝이 같이 일어난다(고후4:8~10). 예수를 주인으로 믿는 자들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핍박을 받아도,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고 벌떡 일어난다. 사도바울이 말한 이 4가지 상황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의미한다. 예수를 주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