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규적인 교회사역을 통해 도움을 주지 못하는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의 문제는 설교로 해결되지 못했고 헌신이나 기도나 성례전 등을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았다. 외적인 믿음의 표현으로 기도를 하고 헌금을 드리고 죄를 자백하는 일은 계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욱 깊은 회의와 절망으로 빠져 들어갔다.”(데이빗 A 씨멘스) 한국교회의 21세기 목회는 가정중심 목회와 치유상담 목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한국 사회의 현대 가정들은 사회적, 경제적, 교육적, 종교적인 차원에서도 위기를 맞고 있고 이혼과 별거, 폭력, 가출, 일 중독, 알코올 중독, 성 중독, 이혼, 자살, 청소년 비행 등으로 역기능 가정들이 심각하게 늘어가고 있다. 교회지도자 가운데 가정사역과 가족 상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막상 교회 안에서 가정사역을 시작하고 싶어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와 가정은 결코 분리할 수 없으며 서로 공생적인 관계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건강한 가족으로 구성된 가정이 행복하고, 행복한 가정이 모인 교회가 힘이 있다. 교회안의 가정사역에는 교육적인 접근과 치유 상
목회자와 사모로서, 혹은 교회의 리더로서, 분노의 섣부른 표출은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교인들 중 누군가 ‘시험’을 들었다고 한다면 이는 그나마 자신의 마음 상태에 어느 정도는 책임을 지는 말이다. 이 말은 어찌 보면 갈등을 통해 교회가 든든해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는 사단의 역할도 인지한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즘 흔하디 흔한 ‘상처받았다’는 말은 자신이 피해자임을 직간접적으로 암시한다. 상처를 입힌 가해자가 있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분노를 겪거나 목격한 성도들이 이 때문에 교회를 떠났다는 이야기도 종종 있다. 소그룹의 리더와 갈등이 생기고 격한 말이 오가면 그룹원 또한 그 신앙공동체를 떠나기도 한다.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중책을 맡은 리더로서 알지 못하는 사이 누구에겐가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아서라도 우리는 조심하고 참는다. 목회자들이, 목자들이, 교회의 리더들이 화나는 일이 있어도 속으로 다 삭이고 기도로 ‘푸는’ 것을 미덕으로 안다.그런데 이렇게 참고 참은 화가 온데 간 데 없어지면 좋으련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분노가 여과 없이 분출될 때 내 주위 사람들에게 크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하
집을 지을 때 계획을 하고 준비가 되면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설계도면이 그려지고 건축허가를 받고나면 집짓는 작업을 할 수 있다. 먼저 터 고르기를 하고 기초공사를 튼튼히 한 다음에 골격을 만들고 벽을 쌓고 지붕을 올리며 순서를 따라 배관공사 전기공사를 하면서 공사가 진행된다. 이 말을 하는 것은 먼저 할 것을 먼저 하고 나중할 것은 나중하며 우선순위를 따라 공사를 진행해야 하는데 간혹은 배선 공사를 빼먹고 공사를 했다가 이미 굳어진 시멘트를 깨내고 배선 공사를 하느라 고생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집을 짓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진행하면 순조롭게 잘 진행이 되는데 우선순위가 없으면 혼란이 생기고 틀어진 것을 나중에 바로 잡으려면 몇 배나 더 힘들게 수고를 해야 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 때도 때로는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겹치면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 우선순위를 정해 놓으면 우선순위를 따라 처리해 나가면 쉽게 정리가 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6:33) 예수님은 이 말씀 앞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우리 안에 행하시는 하나님은 성령하나님이시며 성령께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마음에 소원을 일으켜 그 일을 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존재를 인정하고 성령의 인도 받는 삶을 살아야 신앙생활이 행복하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필자가 청리교회에 초청을 받고 부임 했을 때는 갓 서른의 젊은 목사였다. 일찍 결혼하는 바람에 아이 둘의 아빠가 되긴 했지만 얼굴이 동안이어서 나가면 총각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당시에 한창 오토바이 붐이 일어나서 시골 교회에 목사님들이 오토바이를 많이 타기 시작을 했을 때였다. 그 때는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고 부럽기도 했다. 부임해 며칠 지난 어느 날 집사님이 불러서 나갔더니 남자 집사님 두 분이 효성에서 나온 100cc 신형오토바이 한 대를 마당에 세워 놓고 목사님께 드리는 거라며 키를 건네주는 데 생각 밖의 선물에 큰 감동을 받고 기도를 했던 기억이 생생
평상시 자주 들리는 김밥집이 있다. 김밥을 먹으려는데 지갑이 없다. 갑자기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과 걱정이 밀려왔다. 어디서 잃어버렸나? 카드 분실 신고를 해야 하나? 아니면 집에 두고 나왔나? 분명 지갑의 분실을 인식하기 이전에는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지갑이 내 주머니에 없다는 자각으로 염려와 걱정이 생겼다. 그렇다면 현재의 인식으로 생긴 고통에 대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 고통을 없앨 수도 있지 않을까? 빅터 에밀 프랭클(Viktor Emil Frankl)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유태인 차별 정책과 유태인 말살정책으로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는 유태인 의사로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나 나치가 독일의 정권을 잡으면서 직업과 재산을 빼앗기고 가족도 뿔뿔이 흩어졌다. 자신도 포로수용소에 수감 되어 소유물을 다 빼앗겼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결혼반지가 그의 손에 남아 있었다. 반지는 오직 하나 남은 그의 희망이요, 꿈이 되었다. 이 죽음과도 같은 고통의 삶이 끝나면 이 반지로 사랑을 약속한 자기 아내와 재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이었다. 그러나 간수가 그 반지까지 빼앗아갔다. 프랭클에게는 단순히 반지가 아닌 꿈과 희망을 빼
사람들은 행복하기위해 돈을 벌어야하고, 행복하기위해 성공해야하고, 행복하기 위해 승진해야하고, 행복하기위해 집을 사야하고, 행복하기 위해 차를 사야하고, 행복하기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을 이루고 소유하기위해 열심히 노력하는데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 맞는 말도 아니다. 큰 목표를 성취했을 때도 행복하지만 행복은 소소한 일상에서 느끼며 누리는 것인데 사람들이 직장에서 승진하려고, 사업에 성공하려고, 돈을 많이 벌려고 너무 애쓰고 경쟁하다가 스트레스 받고 가족에게 짜증내고 그러면서 오히려 불행에 빠진다. 요즘 도시인들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농촌으로 산속으로 가서 살면서 이렇게 살아보니 큰 것을 이루지는 못해도 하루하루 삶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고백한다.사람들은 큰 목표만 중요하다고 그것만 이루어지면 다 될 것처럼 생각 하는데 소소한 일상으로 날마다 즐겁고 행복하게 살다보면 목표들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날마다 행복하게 살기로 뜻을 정하고 사는 사람과 아무 생각 없이 환경에 끌려가며 사는 사람과는 차이가 많다. 날마다 행복하게 살기로 뜻을 정하고 살면 행복한 날이 더 많고 불행에 빠져도 빨리 행복모드로 바꿀 수 있다. 자신
우리는 크리스천이라서, 혹은 목회자라서, 혹은 집사라서 화를 내면 안 된다. 아니,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분노를 제거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는다. 미국에서는 분노 때문에 사고가 나고 감옥에 가면, 의례 Anger Management 그룹에서 치료받거나 수업을 들으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의 조절에 관심이 많다. 분노를 다스리고 없애버리고 싶어 한다. 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한다. 실수를 저지르고 창피한 일이 생길까 걱정하고, 분노라는 감정을 한편으로 치워버리려 애쓴다. 이전에 내 안에서 일어나는 분노 뒤에 숨은 많은 이슈와 감정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면, 이제 이 감정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있다. 분노의 감정이 우리의 상처에서 기인한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상처를 없애고 분노의 씨앗을 파내버릴까 고민한다. 그런데 그 첫 단계는 의외로 분노의 뿌리를 없애버리는 것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왜냐하면 분노하는 감정을 먼저 인정하는 데에서 분노 조절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니타 팀페는 ‘분노는 나의 힘’이라는 저서에서 역설한다. “화를 내는 모습은 모범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기쁨이나, 슬픔, 두려움과 같
정신분열증은 부모의 갈등으로 엄마와 자녀는 역기능적인 공생 관계를 갖게 된다. 이러한 ‘삼각관계’에 있어서 실제로 엄마는 자신이 어린 시절 원가족에서 상처를 받았을 가능성이 많다. 결국 미성숙한 엄마는 자신의 감정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아이와 역기능적인 밀착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처럼 다세대를 거쳐 가족의 문제를 만들고 유지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보웬은 ‘미분화된 가족 자아군’과 ‘삼각관계’ 개념을 검증하였다. 가족은 방향이 각기 다른 여러 개의 힘이 상호 작용하여 균형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살아있는 자아덩어리라고 볼 수 있다. 순기능은 가족이 하나의 자아덩어리이면서 각 구성원의 자아경계가 분명하여 다른 구성원과 밀착이나 단절처럼 역기능적 관계가 아닌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관계다. 가족의 상위체계와 하위체계가 서로 어우러져 각 구성원이 분화를 이루고 성숙해가며 건강한 다음 세대를 준비하게 된다. 가족은 두 개의 기본적인 힘이 있는데 하나로 모이려는 융합성과 각각 나뉘어 독립적이 되려는 개체성이다. 개체성과 융합성의 비율은 몇 대 몇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져 순기능적이거나 역기능적인 행동패턴이 나타나고 다음 세대에 영향을
T양은 자살 시도 후에 병원에서 상담소로 보내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이었다가 자살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성형중독으로 수십 번을 수술하고, 수없이 많은 남자 친구와 살다가 한 젊은 남자친구의 손에 살해당했다. 부모의 관심에서 벗어나있던 그녀는 어릴 때부터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하며 컸다. 그 상처를 지우려 평생을 죽도록 일만 하면서 살다가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순간, 그녀는 이 미친 세상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가진 모든 약과 술을 섞어 먹고 쓰러져 있던 그녀는 병원에서 눈을 떴다. 누가 자신을 발견했는지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직 이곳에 남겨두셨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세상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의 상처와 분노를 그 앞에 쏟아내고 씻어내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자신과 같이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돕는 에너지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 알코올 중독자들을 돕는 상담자로 일한다. 그녀가 필자에게 마지막으로 해준 말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은 거의 없어요. 내 상처 때문에, 내 분노 때문에, 난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우리나라에서는 양을 쉽게 볼 수 없지만 강원도 대관령 양떼 목장에 가면 양떼를 볼 수 있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양은 귀엽고 온순한 짐승이라는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실제로 양은 귀엽고 온순한 동물이지만 양은 멀리 보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고 한다. 양은 저 앞에 구덩이가 있는 줄도 모르고 가다가 구덩이에 빠지거나 낭떠러지에 구르고 길을 잃고 헤매다가 사나운 짐승에게 잡혀 먹히기 때문에 꼭 양을 지키고 인도해줄 목자가 필요하다고 한다. 양은 목자의 인도를 받으면 안전하고 부족함이 없지만 목자의 인도를 받지 않고 곁길로 가면 고난을 당하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사야53장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고 했듯이 우리는 내일 일을 모르고 한 치 앞도 모르고 사는 것이 눈먼 양과 같다. 그러면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데 목자의 인도를 받지 않고 고집부리며 제멋대로 살기 때문에 때로는 낭패를 당하고 길을 잃고 방황하며 헤매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다. 내일일도 모르고 한치 앞을 모르는 눈먼 양 같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시겠다고 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