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전 교회를 개척하고 하나님 앞에 서원하면서 성경중심의 목회가 무엇인지 항상 고민하고 그 길을 걷기위해 노력했습니다. 여러 차례 교회를 이전하고 건축하며 오늘의 이 곳까지 오면서 한결같은 심정은 바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루시며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새샘교회가 있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목회자에게 교회 개척은 숙명과도 같은 사역이다.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교회는 세워져야 한다. 많은 교파가 있고 교회가 있지만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품은 목회자에게 이 땅에서 복음 전파 사명자로 부름 받은 그 길을 가기 위해 교회 개척은 무모한 도전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였다. 새샘교회 서성래 목사는 신대원 시절인 1993년 4월 17일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따라 나눔교회를 개척했다. 나눔교회는 온양지방회가 천안지방회에서 분립할 때, 처음으로 분지방회를 통해 세워진 개척교회였다. 서성래 목사는 “당시 부사역자의 길도 생각해 봤으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개척 목회에 소명을 주셨다. 나눔교회는 비록 작은 상가교회로 시작했지만 시작부터 말씀중심, 교회중심, 성도중심으로 제자를 양육하고 훈련시키는 사역에 모든 목회의 포커스를 맞췄다”고 설명했
“말씀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 뿌리교회가 성도들에게 머리와 가슴에 박히도록 강조하고 있는 마음입니다. 지난 6년 동안 말씀 안에서 이뤄지지 않은 일이 없다는 것을 교회 공동체가 경험하면서 코로나 팬데믹 가운데 있지만 교회가 이 땅에 희망임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봅니다.” 2016년 1월 17일 연고도 없는 아산에서 교회를 개척한 김진혁 목사는 이사야 27장 6절의 말씀을 근거로 교회명을 ‘뿌리교회’로 명명하고 아산의 도농복합지역의 농가주택을 임대해 2월에 설립예배를 드리고 시작했다. 천안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했기에 되도록 천안교회에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선정한 곳이 바로 아산이었다. 모교회의 지원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랐던 김목사는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뜻을 기억하며 오직 복음, 오직 말씀 중심의 목회 철학을 구현하고자 몸부림쳤다. 김진혁 목사는 “뿌리교회가 세워질 때, 뜻하지 않은 섬김과 동역의 손길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이는 목회자의 성품도 중요하지만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감동으로 일어났다고 믿고 있다”며 “당시 교회를 개척할 때, 함께한 가족이 지금도 귀한 목회 동역자로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뿌리교회가 탄탄하
서망교회의 문을 열고 나서면 저 멀리서 부둣가와 푸른 바다가 넘실거린다. 경관 하나는 최상의 조건이다. 은퇴 후 평안하고 조용한 노후를 보내기에 충분한 곳이다. 서망교회 담임인 김승환 목사는 이러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그에게 처음부터 농어촌목회에 대한 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김 목사는 서울에서 40여년 동안 목회를 해온 베테랑이다. 그는 파주의 교하에서 정착을 도모했으나 신도시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서울 삼호교회(안종대 목사)와 수원 원천교회(김요셉 목사)에서 잠시 지내게 됐다. 하지만 스태프로 활동하기에는 나이가 많아 새로운 목회지를 찾아 나섰고 그렇게 만나게 된 것이 지금의 서망교회였다. “교회 리스트를 쫙 뽑아보니까 갈 만한 교회는 여기밖에 없었어요. 다들 이런저런 조건을 내걸고 그랬는데 좀처럼 내 상황과 맞는 곳을 찾기가 힘들었죠. 그런데 서망교회가 환영한다는 의사를 표시하니까 한번 답사를 가보기로 했죠.” 당시 서망교회는 2년 동안 사역자가 없는 상태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터였다. 담임목사로 이름이 올라온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예배를 드리지는 않았다. 교회 곳곳에 얼룩진 곰팡이와 거미줄이 서망교회의 안타까운 현
“우리 안에 하나님의 비전이 없다면 이 세상과 절대로 구별되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우리가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을 지켜 나아가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교회는 그 비전을 기억하며 25년을 달려왔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며 앞으로 세밀한 하나님의 음성에 따라 포도나무교회를 어디로 인도하실지를 듣고 따르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포도나무의 삶을 실천하며 교회 개척 1994년 10월, 포도나무교회는 여주봉 목사가 한 성도의 가정과 함께 예배를 드리며 시작했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의 삶을 사는 성도와 교회를 세우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여주봉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 삶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이루는 열매가 가득한 교회를 꿈꾸게 하셨다”며 “이 하나님의 비전을 포도나무교회가 품으며 그 길을 따라가기 위한 철저한 믿음과 순종의 길을 걷게 됐다”고 설명했다. 여주봉 목사는 교회를 개척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으로 요한복음 15장 4~5절을 교회의 영구 성구로, ‘오는 세대들과 열방을 책임지는 교회’를 영구 표어로 삼았다. 포도나무교회는 “회복과 부흥”이
“섬 지역 선교 목적으로 방문했던 진도에 정착한지도 벌써 18년이 되어 갑니다. 함께 울고 웃으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 줬던 사랑하고 고귀한 성도들과 지역사회의 지도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도전은 힘겹고 어려움이 있기에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고 기도 없이 갈 수 없기에 오늘도 무릎 꿇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국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 진도는 전라도를 대표하는 섬으로 주변에 완도, 신안, 관매도, 조도 등에 많은 군도들이 분포돼 있다. 과거 뱃길만 가능했던 곳이 이제는 대교가 놓아지면서 자유롭게 통행하며 놀라운 변화의 물결을 타고 혁신적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다. 섬의 모습과 도시의 모습이 공존하는 진도! 그 교두보에 진도 늘사랑교회(이규선 목사)가 위치해 있다.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 경기도에서 목회하던 이규선 목사는 매년 진도에 미자립교회 선교를 위해 방문하고, 힘들고 척박한 환경과, 성장을 기대하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매진하는 섬 지역 목회자들의 헌신과 충성을 보면서 마음에 늘 진도지역 목회자 부부를 위로하고 격려해 왔다. 이 목사는 “그 당시 12개 침례교회가 정말 어려움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편견 없이 품어주는 공동체가 돼야 한다는 것을 누구나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장애인에 대한 교회의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장애인들을 교회의 구성원으로 이들을 받아들이기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애인도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님의 사랑에 목마른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좀 더 넓은 마음으로 그들을 교회의 구성원으로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장애인 선교 동아리인 ‘한사랑장애인선교회’를 통해서 장애아동을 위한 예배와 봉사로 헌신하며 장애인 선교의 꿈을 키워온 한덕진 목사는 지난 26년 동안 장애인 사역을 전개하며 교회가 장애인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져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는 사역자였다. 그는 1999년 12월에 경기도 평택에 평안밀알선교단을 세우고 2006년 3월에는 경기도 안성에 사회복지법인 평안밀알복재재단을 설립해 장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섬기면서 장애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하지만 장애인 또한 하나님께서 보내신 귀한 자녀임을 교회에 알리고 교회가 장애인들을 품도록 동역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개척의 초기에는 여러 가지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지역교회는 새로운 시대의 도전 속에 교회의 비전을 찾고 미래를 준비한다. 이는 농촌교회라 할지라도 담임 목회자의 의지와 성도들의 마음으로 교회는 부흥 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꿈꾸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72년 전에 한국전쟁 중에 충남 서천에 자리 잡은 지원교회(이재우 목사)는 지역 재건과 풍요로운 농촌의 삶, 이농현상으로 사라지는 마을, 지역 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 귀농귀촌의 새로운 풍경, 코로나19 상황 등의 모든 것을 온몸으로 받았다. 한적한 마을 초입에 위치해 있는 지원교회는 문산면 지원리와 구동리를 품으며 지역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교회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 무너져가고 있는 농촌의 현실을 보면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다시 세워나가고 있다. 예배와 전도! 복음의 열정으로 세워져가는 농촌교회 지원교회는 무엇보다 예배에 집중하며 예배를 통해 성도 개인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교회이다. 주일 오전예배는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며 말씀 중심의 예배를 오후예배는 찬양예배로 성도 모두가 함께 찬양하고 율동하며 특별한 활동을 펼치며 교회학교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수요저녁예배는 기도 중심 예배와 말씀 강해를, 365일 새벽예배,
세워진 지 36년이 지난 보전교회는 전라남도 진도에 위치한 작은 시골교회다. 이곳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강희정 목사는 보전교회의 세 번째 담임목사로 28년째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신학교 시절,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남들이 가지 못하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서원 했던 강 목사는 목회가 자신만 힘들고 마는 것이 아닌 가족에게도 그 영향이 미칠 수 있다는 생각에 4학년 2학기를 2달 남겨놓은 시점에서 그만 도피를 하고 말았다. 당시 그는 “하나님 차라리 내가 돈을 벌어서 선교를 하겠습니다”라며 영농 후계자로 선정을 받아 50~60마리의 돼지를 키우며 양돈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매스컴에서 돼지고기에 대한 안 좋은 주장이 전파되자 돼지고기 값이 폭락해 6000만원의 손실을 입었다. 이러한 시점에 강 목사는 현재의 이주희 사모와 중매로 결혼을 했다. 당시 이주희 사모는 다리에 골육종 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그때는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를 잘 몰랐어요. 그럼에도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듯 나 또한 십자가를 지겠다고 서원했죠. 그런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살리셨던 것처럼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농어촌 목회에서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일까? 고령화와 인구감소로 인한 불안한 미래, 인프라 부족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자립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많은 농어촌 목회자들이 자립을 위해 이중직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이번 탐방의 주인공인 상도교회 박용윤 목사 또한 농사를 통해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 과거 약초인 홍화씨를 비롯해 땅콩, 오미자, 감나무 등 여러 농사일을 경험한 박 목사는 현재 복숭아와 양봉을 통해 목회 자립을 꿈꾸고 선교하는 교회를 목표로 나아가고 있다. 사명 하나로 험지를 택하다 전라남도 장성군에 위치한 상도교회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농촌 시골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논과 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고, 시골마을 특유의 대문이 활짝 열린 집 마당에는 고추를 말리는 모습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28세 전도사 시절이었던 박용윤 목사가 처음 이곳에 둥지를 틀었을 때 깜짝 놀랐던 것은 연로한 노인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박 목사가 처음 상도교회에 부임했을 당시 포장된 도로를 찾기 힘들었다고 한다. 초가집에 지금은 보기 힘든 아궁이가 있는 그러한 마을이었다. “가깝게 지냈던 목사님이 이사하면서 같이
제2의 새로운 사역을 시작할 때는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우리의 동기 부여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고 바라는 뜻에 따라 우리가 그 계획 속에 움직이는 것이다. 독일 드레스 덴에서 18년 동안 선교 사역을 감당 하던 안창국 목사(인물 사진)는 또다른 부르심에 따라 선교지에 후임 목회자를 세우고 국내에서 라이트하 우스김포교회(경기도 김포시 구래 동)를 개척하며 새로운 목회 사역의 시작을 열어갔다. 코로나19로 선교지 또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국내에서도 코로나 시기 가운데 교회를 개척하기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안창국 목사와 공유교회 플랫폼을 활용한 새로운 형태의 교회인 라이트하우스김포교회에 있었다. 안창국 목사는 교회진흥원을 비롯해 울릉도에서도 교회를 섬겼으며 대전에서는 교회를 개척하며 다양한 목회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가 누구 보다 많은 임지를 선택하고 옮겨 갈수 있었던 것은 항상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그의 신앙관 때문이었다. 안 목사는 “아내와 함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나아가는 훈련을 끊이지 않고 해왔다”며 “그것이 어떠한 곳에 가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하고 그 방향대로 행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고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