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고 힘든 여름을 지나 어김없이 가을이 왔고 그 가을은 잠시 동안 아주 찬란한 풍경을 선사하고 떠나가고 있다. 비대면의 시대가 체질화되어 가고 그로 인한 많은 변화에 적응하며 사고와 정서도 서서히 변하고 있는 불확실한 시대에도 자연은 여전히 그대로 창조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사람도 변하고 환경도 변하지만 때가 되면 계절이 바뀌고 단풍이 드는가하면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부스러지고 바람결에 사라지는 낙엽을 애달파할 겨를도 없이 늦은 가을비와 함께 겨울은 성큼 우리 곁에 와있다. 빠르게 변화하지만 본질을 잃지 않고 예측이 가능한 자연의 순환을 보며 사람이 얼마나 가벼운 존재인가를 느끼게 된다.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는 절절한 사랑의 약속도, 언제나 한결같겠다던 신의의 다짐도 환경과 상황에 따라 언제 그랬냐는 듯 변해버리고 마는 마음의 연약 함이 자연 앞에서 참 부끄러워지는 가을이다. 눈앞에 보이는 지금의 작은 이익을 취하기 위해 비겁해지고 옆의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더많이 가지고 누리고 싶은 욕심에 신념과 의리를 아무 망설임 없이 버려버리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접할 때마다 마음은 더 추워 지고 허전해 찬바람만큼이나 스산해지는 가을이다. 그러나 절망할
요즘 들어 평안이라는 말, 혹은 자유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자주하게 된다. 특히 민족 대 명절을 지나면서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소소하지만 작은 평온함이 이다지도 귀한 것인가를 새삼 알게 됐다. 공기가 그러하듯, 햇볕을 당연하게 일상 속에서 누리며 살았듯, 자유함과 평온함을 너무나 당연시하고 그것에 대한 가치를 크게 두지 않았던 우리들의 지난날을 반성하지 않을 수없다. 코로나19로 겪는 상황도 그렇지만 학령인구 절벽의 심각한 상황을 지나가고 있는 대학가는 이제 본격적인 입시 기간을 맞아 평온할 수만은 없는 형편이다.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위기에 맞닥뜨린 대학들, 특별히 지방대학들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신음소 리는 남의 일이 아니다. 언론에서 앞 다투어 다루고 있는 기사가 지방 대학들의 어려움이고 그들이 예측하는 결과는 지방대학의 절반 이상이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이라는 것이다. 대학은 더이상 형설의 공을 쌓는 명예의 전당이 아니라 “교육의 블랙 홀”이라고도 하고 대학교수를 영업사원에 견주어 표현하는 그야말로 웃픈(?)현실이다. 그렇게 구걸하듯 모집된 학생들의 자존감이나 애교심은 매우 낮고 가르치는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기독교가 경시되고 교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때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현실은 답답하다. 물론 일제 강점기와 혹독한 전쟁 속에서 신앙을 지키고 기독교의 가치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교회는 어려움 속에서 더 단단해지고 믿음의 기준은 분명했었다. 신앙의 절개를 지켜내고자 갖은 시련을 겪었지만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많았고 그들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 교회는 세워지고 성장했다. 역설적으로 고난과 시련이 혹독하고 그 수위가 높을수록 신앙의 사람들은 굳건해졌고 더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나라의 경제 수준은 높아졌고 생활은 윤택해졌고, 문명은 상상 그 이상으로 발달한 현시 대의 교회는 오히려 위축되고 성장과 부흥은 멈춰진 듯한 이유는 무엇일까? 급진적인 환경의 변화와 사고의 가치관의 현저한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즉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생각에서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우리 삶의 가장 근원적인 가치관의 기준은 무엇인가를 깊이 성찰해 봐야 한다.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무엇을 위해 우리는 혼신을 다해 노력하며 살아왔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과연 우리 삶의 주인이 여호와
기독교에 대한 인식과 반응이 요즘처럼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시대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은 소수만이 갖는 느낌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인지 기독교인으로 바르게 사는 것 자체도 많이 힘든 시기다. 겉보기에 정의롭고 명예롭더라도 이해관계가 맞물린 상황에서의 모습은 전혀 다름을 목도할 때마다 무엇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의 태도인가 하는 원론적인 질문과 마주하곤 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또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들을 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상이라는 명제를 더 절실하게 고민하게 하는 여름이다.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앞에서 우리는 근본주의적인 정죄함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녀라는 특권의식 때문에 무작정 관대해서도 안 된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하는 중요한 단어는 균형이다. 율법의 적절한 적용과 사랑을 기초로 한 관용의 절묘한 균형, 올바른 지적과 사랑의 용서 사이의 균형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기울지 않게 중심추와 같은 역할을 한다. 문제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고 부딪혀 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기준과 잣대는 늘 유동적이다. 관계의 거리에 따라, 손익의 계산법에 따라 변한다. 그때는 틀렸지만 지금은 맞기도 하고 과거에는
이제 겨우 끝나는 줄 알았다. 전염병의 어둡고 긴 터널도 끝이 보인다는 희망을 가졌었다. 그런데 갑자기 더 무서운 전파력을 가지고 우리의 일상을 묶어버리는 코로나-19 앞에서 우리는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과 맞닥뜨리며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답답함을 경험한다. 거의 반년을 끌어온 팬데믹 상황은 우리들의 일상을 완전히 바꾸고 있고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적응하며 생활 패턴과 습관마저 수정하고 있다. 주변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온전하게 안전한 나라도, 도시도, 장소도 없다. 그저 하루하루를 조심조심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긴장감으로 견디며 살아내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에 기막혀 한다. 막막한 현실 앞에서 문득 떠오르는 라틴어 문장이다. 바로 종교개혁의 5대 표어 중 하나인 “Sola Gratia” “오직 은혜로”란 말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것, 이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것 자체가 바로 은혜 때문이 아닐까? 사람의 힘으로 그 어떤 일도 완전히, 온전히 할 수 없음이, 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현실은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우리의 얄팍한 지식도, 그렇게 경이롭게 바라보던 과학의 논리도, 생명의 신비한 비밀의 영
아득한 기억 속에 묻혀있는 젊은 날 어느 지점에서 만난 시의 제목이 갑자기 기억 밖으로 나온다. “홀로서기”라는 제목의 시였는데 처음 대하고 읽으며 마음을 채우며 공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서정윤님의 시, “홀로서기”는 맹렬하게 공부하고 있었던 메말랐던 시기에 감성을 깨워준 시였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아마 이렇게 시작한 시였을것이다. “둘이 만나 서는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 만나는 것이다”라는 표현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며 감동했다.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 외우며 “아무도 대신 죽어주지 않는 나의 삶,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라고 다짐했던 기억은 지금도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그 시절에는 홀로 지내거나 혼자라는 것은 참 서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보편적인 정서였는지 이 시는 꽤나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시간이 지나는 것만큼 환경도, 사람도 변했다. 요즘은 오히려 홀로인 것이 편하고 자유롭다는 생각이 일반적이 됐다. 더군다나 코로나19의 여파로 사회적 거리두기, 생활 속 거리두기 등으로 더욱 홀로 지내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홀로 서기를 훈련할 필요도 없이 그저 혼자서 즐겁고,
처음엔 이러다 말겠지 했다. 조금 지나고 나서는 두려웠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면서 두려움은 원인 모를 짜증을 유발했다. 그러다가 이제 서서히 지쳐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예배마저 제대로 드리기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영혼이 메말라가고 일상은 가라앉아 버렸다. 원인도 알 수 없고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만든 현실이다. 의학자들에 따르면 코로나19는 생물이 아닌 단백질 분자라고 한다. 단순한 단백질 분자가 세포 등에 흡착되면 변형되어 공격인자와 중폭세포로 전환된다는데 이렇듯 미미한 존재의 출현에도 맥없이 무너지는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이처럼 연약하면서도 그동안 우리는 의학과 과학의 발달을 맹신하며 자신만만해 왔다. 그 무모한 자신감이 이번 사태를 악화시킨 원인일 수도 있다. 이 정도쯤이면 괜찮겠지하는 안일함으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책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엄청난 현실을 하루하루 살아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예배를 자유롭게, 마음껏 드리지 못하는 상황 앞에서 예배의 소중함과 자유의 고마움을 깨닫고 있다. 만남이 제한되면서 인연의 소중함도 함께 알게 됐다. 언제나
온 나라가 코로나 19바이러스로 공포와 답답함에 싸여있는 참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모르는 불안감, 언제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불확실성에 대한 무서움이 모두의 마음을 어렵게 한다. 예기치 않았던 질병이나 재해가 다가올 때 우리는 사람의 힘으로 저항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는 자각에 놀라곤 한다. 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면서 인공지능의 능력에 의지해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았던 기대감과 들뜸이 얼마나 허망하고 공허한 것인가를 새삼 깨달으며 인간의 한계를 뼈아프게 실감하게 된다. 이런 자각이 하나님 앞으로 갈 수밖에 없는 가난한 마음을 만들어야 하는데 사람들의 가슴은 더 얼어붙는 것은 현대인의 오만함의 결과일 수도 있다. 현대인들은 개인의 인권이라는 미명 아래 절대 주권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절대적 존재에 대해 탐구하고 인지하려는 노력조차 포기하는 듯하다. 인간의 극히 제한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전부라고 믿으며 오만과 편견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기막힌 현실이 만들어 내는 폐해 중 하나가 알 수 없는 바이러스의 공격일 수 있다. 21세기 첨단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교만함에 비해 우리가 미개하고 불편했
조금 긴 휴식의 시간이 주어지는 연휴나 휴가기간에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인지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고 그 시간속의 자신과 마주할 때가 많이 있다. 이번 설 연휴도 예외 없이 그렇게 과거 속의 나와의 해후를 한다. 지난 시간 속에 나는 웃고 있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눈물 그렁한 모습일 때가 더 많은 것은 아직도 내면은 성장기이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위로도 해 보지만 마음 한켠에는 찬바람이 분다. 언제부터인가 나를 포함한 인간관계를 바라볼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생각이 모두들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연민의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불쌍하고 안쓰럽다는 표현일 수도 있다. 일상 속에서 부대끼는 많은 어려움, 그로 인한 고민과 갈등을 겪는 나자신에 대한 가여움도 있지만, 그보다 그렇게 어려움을 주는 대상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클 때도 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은 또 얼마나 어렵고 무거울까하는 생각이 들면 미움이나 원망보다는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연약한 모습으로 방황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아주 오랜만에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
한해를 새로 맞이하고 기대와 각오로 그 첫날을 시작하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며칠을 남겨두고 있다. 새해를 맞고 또 때가 되면 그 해를 보내는 것이 습관이 되어 해가 바뀌는 것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 연말연시가 되면 나를 돌아보고 새로운 꿈을 꾸려는 노력을 위한 결심을 하기도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한해의 마지막이 왔고 나의 과거의 시간들과 이별을 해야만 한다. 내가 살아낸 한해, 나의 모든 것을 함께 한 과거 시간들을 잘 보내주고 새로운 시작과의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 마음을 비워야 할 시기가 바로 연말연시인 것 같다. 한해의 맨 끝자락에서 듣고 싶은 음악, 문득 하이든의 기적교향곡을 떠올리게 된다. 교향곡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프란츠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은 고전교향곡의 형식과 구조를 완성한 작곡가이기도 하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과 같은 후세의 작곡가들에게 창작의 방향을 제시한 선생의 역할을 한 작곡가이기도 한 하이든이 서양음악사에 남긴 의미는 매우 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