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속담에 ‘Haste makes waste’라는 말이 있다. ‘서두르면 망친다’라는 뜻이다. 신앙생 활도 그럴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Word)과 하나님의 뜻(Will)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Way) 을 알아야 하는 것,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고 하셨지만 어떤 방법으로 왕이 될것인지는 말씀해주지 않으셨고, 다윗은 지금 계속 도피생활 중이다. 이게 뭔가 싶은 때도 수없이 많았을 것, 그런데도 다윗은 서두르지 않는다. 기다림의 대가, 기다림이 승리를 불러왔다. 조급한 사울 왕 본문은 도망자 다윗이 하길라 산에 숨어 있다는 십 사람의 밀고로 시작된다. 사울은 즉각 정예 용사 3000명을 이끌고 토끼 사냥하듯 다윗을 잡겠다고 나섰지만(2절) 정작 결정 적으로 승기를 잡은 것은 다윗이다. 상황은 24장과 비슷하다. 엔게디 동굴에서 용변 보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고도 옷자락만 베고 살려준 것, 그때 사울은 감동을 받고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며 헤어졌었는데 자신을 죽이려고 추격해오던 사울과 그 군사들 모두가 다 깊이 잠이 들었다. 다윗 입장에서는 엔게디 동굴
“자신의 책임을 안고 현실에 참여하라.” 우리 사회가 무질서하고, 불안하며, 혼란한 이유는 책임지지 않는 간섭주의자들이 만들어내는 스킨인 더 게임(Skin in the game/나심 탈레브/비지 니스 북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택과 책임의 불균형이 가져올 위험한 미래에 대한 경고를 3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지식, 정보, 균형 첫째는 “지식(知識)”으로 가짜 지식인들이 쏟아내는 헛소리다. 지식인이나 전문가를 자처하면서 무책임하게 내뱉는 거짓말로 우리 사회는 검은 백조가 출연하게 된다. 지금은 지식이 없어 서가 아니라 지식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다. 넘쳐 나는 지식 중에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것이 실력이다. 둘째는 “정보(情報)”로 상위 3%가 고급정보를 독점하는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간다. 정보의 독식으로 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사건과 아빠 찬스를 이용해 50억 클럽에 가입한다. 지금은 부도 세습이며, 권력도 대물림이 되어가고 있다. 요즘 성장하는 교회는 모(母) 교회 찬스를 사용 거나 아빠 찬스를 이용한 교회들이다. 셋째는 “균형(均衡)”으로 보상받기를 원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권리는 주장하지만 의무를 피한다.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깊은 밤 지방회 목사님 사모님들과 20여년 만에 찾아가는 고향이라 설레임과 함께 심한 멀미를 걱정하며 울릉도로 가는 크루즈선에 올라탔다. 코로나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울릉도 지역 침례교 미자립교회를 순방해 함께 기도하고 격려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선교의 열정을 회복하기 위해 올해 지방회 특별사역으로 지방 회장님께서 일일 순방일정으로 계획했다. 이튿날 아침 동이 틀 무렵에 비행장 건설 예정지인 사동항에 도착했다. 울릉지방회 총무이신 태하교회 김차곤 목사님, 도동교회 정치호 목사님, 저동교회 최성환 목사님께서 마중을 나오셔서 차량 운전으로 종일 수고하셨고, 가이드는 울릉도에서 3년 동안 목회하셨던 박용주 목사님께서 담당하셨다. 일주도로를 비롯해 지역사회가 얼마나 발전하고 정비가 됐는지 30대 초반까지 살았던 내가 오히려 외인이 된 것처럼 이곳저곳을 물어보며 감탄사만 연발했다. 맨 처음 도착한 곳이 사동 교회였다. 몇 년 전 수해를 입어 힘들었는데 총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들의 후원과 기도에 힘입어 아름답게 건축돼 있는 모습에 감사했다. 다음으로는 중령교회를 찾았다. 나의 고향교회이다. 교회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지난날의 생각들로 눈물이 앞을 가렸다. 특
지난 1970~80년은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와 경쟁해서 자본주의가 승리했다. 공산주의는 70년의 수명을 다하고 무너졌다. 승리의 원인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보다 ”인간욕망“을 더 효과적이며 합리적으로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이긴 것이다. 자본주의 치명적 결함 그런데 자본주의는 두 가지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자본주의는 그냥 풀어놓으면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신(新) 자본주의(야수 자본주의)”가 된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보다도 야수 자본주의가 판치고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죽여야 사는 적자생존, 이긴 자가 싹쓸이하는 승자독식,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쟁투로 정치적으로는 보수와 진보가 치열하게 싸우는 양극화, 세계 1위 자살과 이혼율, 저출산, 초고령화, 계속되는 산업재해, 환경파괴가 그 증거다. 또 하나는 “과잉생산”이다. 인간의 무한 욕망을 무한 긍정하는 성장지상주의인 신(新)자본 주의는 과잉생산을 중단시킬 수가 없다. 인간의 무한 욕망은 무한 생산을 하고, 무한 생산은 자연을 파괴시킬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생산을 멈추는 순간, 넘어지는 자전거와 같다”는 표현처럼 수요가 없어도 계속 생산해 내야 한다.
머물 곳 없이, 안식처도 없이 계속 쫓기는 다윗,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다. 설상가상으로 멘토이자 영적 스승인 사무엘 선지자마저 죽었다 (1절). 민족의 지도자요, 선지자인 사무엘을 잃은 온 이스라엘이 다 슬피 울었지만 아버지 같은 영적 후원자를 잃은 다윗은 장례식에 갈 수조차 없다. 오히려 본토에서 가장 먼 아라비아 반도 최남단 바란 광야로까지 피신간다. 거기서 마온 사람인 한 부부를 만났다. 남편 나발은 어리석은 사람이었지만 부인 아비가일은 총명한 여인, 그들을 만나 일어났던 에피소드를 통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게 뭔지를 생각해 본다. 어리석은 사람, 나발 나발은 다윗이 그의 목장을 보살펴주면서 알게 된 지역의 부자였다. “양이 삼천, 염소가 천마리”(2절), 당시 시골에서 이 정도면 큰 부자, 2절뿐만 아니라 6절에서도 그를 ‘부하게 사는 자’ 라 했다. 문제는 그가 부자답지 못했다는 것, 그는 자신의 부를 합당하게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 다윗이 먹을 것 좀 달라고 부하들을 보냈지만 아예 모른다고 했다. 배은망덕, 어리석은 짓이다. 결국 이 일 때문에 목숨도 잃고, 재산도 잃고, 아내도 잃는다. ‘나발’의 이름 뜻이 ‘바보’ ‘미련한 자’인데 이름처럼
다윗의 힘든 도피생활이 이어진다. 사면초가의 어려움에 빠진 다윗의 긴박감이 잘 드러나는 본문, 가는 데마다 사울이 따라온다. 사울이 미처 오지 못해도 신고자들 때문에 피할 곳이 없다. 물론 비극만 이어진 것은 아니다. 추격자 사울에게 잡힐 뻔한 위기가 스릴있게 전개되는 것은 맞지만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가 빛이 난다. 하나님과 밀월관계였다 23장 1~13절의 내용은 도피생활 중에 있었던 여느 에피소드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일라 지역이 블레셋에 의해 공격당하고, 주민들은 타작마당을 습격당해 애써 수고한 농산물을 빼앗긴 다. 그 사실을 안 다윗은 자기 몸 하나 피신하기도 바쁜 때였지만 그일라 백성을 불쌍히 여겨 블레셋을 공격하려 한다. 당연히 다윗의 사람들은 반대했다. 그들은 기가 막힌다는 반응이었다 (3절). 그러나 다윗은 블레셋과 싸우고, 그 전투에서 이겨서 그일라 주민을 구한다. 다윗의 호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지랖 때문일까? 아니다. 이게 진정한 지도자의 마음이다. 다윗은 마치 이미 왕이 된 것 같다. 왕은 백성을 책임지는 자리, 자기가 희생되더라도 백성을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지도자인데 다윗은 왕의 품성을 잃은 사울과 달랐다.
모든 사람은 어떤 사물에 대한 자기의 이해를 표현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비록 눈이 먼 시각장애인이라도 코끼리를 접한뒤, 기둥 같다느니, 벽 같다느니라고 느낌을 말할 수 있다. 그들이 코끼리를 만진 경험이 일치점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코끼리임에는 틀림없다. 모 든 공식에서분모(分母)는 동일하고 단지 분자(分子)가 틀린다고 해도 분모에 변화가 없다. 1/5이나 3/5에 있어서 분모 5가 같으면 분자인 1과 3은 5의 자녀요 형제다. 그런즉 1과 3은 싸울 일이 없다. 성경에 관한 학자들의 설명을 읽어보면 시각장애인 촉상 같은 느낌이 든다. 어떤 학자는 구원의 교리를 강조하고 또 어떤 학자는 성경론을 강조한다. 또 어떤 학자는 종말론을 강조한다. 자기들이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이 제각기 있다. 그런데 똑같은 주제를 놓고 설명이 분분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로마서 강좌에 있어서 로이드 존스는 찰스 핫지, 존스토트, 그리고 칼 바르트와 의견을 달리한다고 솔직히 언술하고 있다. 학자간의 의견 차이는 학문의 성격상 가능하다. 문제는 내 것은 맞고 네 것은 틀렸다고 말할 때 시각장애인들의 코끼리 접촉에서 벌어지는 의견의 차이다. 나는 여전히 로이드 존스를
다윗의 망명, 도피생활이 시작된다.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없었지만 반란을 우려한 사울 왕의 집요한 추적 때문이다. 유대나 베들레헴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었기에 결국 다윗은 살기 위해 놉 땅으로, 블레셋 땅 가드로, 아둘람 굴로, 모압으로, 헤렛으로, 엔디게 동굴로, 바란 광야로 돌며 무려 15년 동안 긴 도피 생활을 한다. 사울 왕이 죽어서야 그 지긋지긋한 도피 생활을 끝낼 수 있었는데 감사한 것은 그 도피생활을 하나님이 줄곧 도우셨다는 것이다. 놉, 아히멜렉의 도움을 받다 다윗이 급히 달아났던 곳은 놉이었다. 당시 사울 왕국의 수도 기브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다윗은 엘리 가문을 잇는 제사장 아히멜렉이 있는 곳으로 간다. 급하게 도망치느라 다윗 일행은 먹을 것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기에 제사장에게 먹을 것을 요구한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올렸다가 내온 진설병밖에 없다고 한다. 성소의 상 위에 차려 놓는 열두 덩이의 떡,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는 것, 하나님께 드리는 음식물이라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다(레24:9). 그런데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과 그 소년들의 곤궁한 처지를 보며 이 원칙을 무시하고 소년들이 성적인
불교의 교리 중에는 살생을 금하고 있다. 살생은 사람의 생명을 죽여서는 물론 안 되고 또 모든 것의 생명을 무의미하게 심지어 오락형 식으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중들은 차라리 동물을 죽여서 얻게 되는 고기 먹기를 금하고 채식을 주로 한다. 그러나 식물에도 생명은 있지 않은가? 그러니 모순된 교리 아닌가? 물론 무의미하게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만 이런 종교의 교리에 한계가 있다. 성경에는 살생하지 말라는 것은 없고 살인하지 말라는 있으니 이것이 타 종교와의 또 한 가지 차이점일 것이다. 여하튼 불교지도자들인 중들은 고기 먹기를 금한다. 그런데 혹 어떤 중이 생선회를 즐겨 먹는다 해도 남이 보는 데서 바다낚시를 하지는 않는다. 나는 중이 사냥하거나 낚시질하는 것을 평생에 한 번도 본 바가 없다. 생선회는 먹어도 낚시질을 하지 않는 중의 양심과 태도에서 나는 이런 교훈을 취한다. 속담에 눈치 빠른 사람은 절간에서도 새우젓을 얻어먹는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모든 살생을 금지하는 절간에도 새우젓 숨겨두고 먹는 모양이다. 그들 나름대로 덕을 세우기 위한 조치인듯하다. 그것을 성경은 덕을 세우라고 했다. 소위 건덕(建德)이니 “모든 것이 내게 가하
사람은 누구나 관계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그물망은 날로 더 촘촘해지는데 든든하면 건강하게 살지만 끊어지면 치명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본문에는 든든한 관계의 그물망으로 ‘어왕다’(어차피 왕이될 다윗)의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엉킨 그물망 다윗은 단 한 번도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출마한 적도 없다. 졸지에 기름 부음을 받기는 했지만 뜻밖의 일이라 긴가민가했을 것이다. 그리고 골리앗을 물리쳤던 것도 영웅 되려고 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 심부름 갔다가 열받아 나섰는데 얼떨결에 영웅이 된 것, 그런데 이 일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다. 국민들은 영웅 대접하는데 사울 왕은 자기를 대적자로 여긴다. 사울 왕과의 그물망이 걷잡을 수 없이 엉킨다. 여인들이 부른 노래 때문에 큰일했다고, 잘했다고 칭찬하던 사울 왕이 돌변한다. 이성을 잃은 것 같다. 불같은 질투심으로 그날부터 아예 죽이려 한다. 벽에 박아 버리겠다고 창을 던진다(18:11). 18장 10절에 보니 ‘그 이튿날’이라 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싸워 이기고 돌아온 바로 다음 날, 어제 그렇게 좋아하던 왕이 두 번씩이나 창을 던져 죽이려 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