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20년 전의 일이다. 아내는 추위를 잘 타고 나는 더위를 잘 탄다. 어느 여름날 밤이었다. 창문에 붙여 놓은 침대에서 창가가 내 자리인데 그 이유는 시원한 바람이 창문을 타고 솔솔 들어오기 때문이다. 잠을 자는 무의식중에 다리를 창문틀에 얹고 자고 있었나 보다. 갑자기 어깨에 불이 났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때렸던 것이다. 비몽사몽간에 ‘무슨 일이야?’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씩씩대며 ‘사람이 몰인정하게 등을 지고 자?’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화장실에 볼일을 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내 다시 누워 잠을 잘 잔다. 아내가 남편 다리를 창문에 빼앗겨 질투한 것인지 아니면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전 날에 아내를 서운하게 한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한 가지 내가 인식하는 것은 아내는 가해자고 나는 피해자라는 사실이다. 설령 내가 아내에게 잘못한 일이 있다 해도 잠자는 도중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십분 양보해도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바꿀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화가 나서 소리를 내거나 싸우게 되면 잠자는 어린 아이들까지 힘들어 질 수 있기에 참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아마도 한동안 감정을 참고 있다가 잠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몇 칠
행복한 삶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전문가들이 이론을 가르쳐주고 있지만 행복한 삶이 이론을 알고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실천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지난 호에 ‘말로 표현하기와 작은 것을 누리며 감사하기’ 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이번호에는 단순하고 즐겁게 살기 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한다. 단순하고 즐겁게 살기나는 복잡한 것을 싫어하지만 살다보면 자꾸만 복잡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책상 위를 정리 해놓고 나도 며칠만 지나면 책장에서 꺼내놓은 책과 매일 배달되는 우편물들이 책상위에 수북이 쌓여 복잡해진다. 결국은 버리면서도 혹시나 필요 할까? 혹시나 보게 될까? 해서 두다보면 복잡해진다. 그래서 한 번씩 버릴 것은 버리고 정리를 하는데 정리한다면서도 미련이 남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게 되는데 정리를 하는 것도 일이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한 번씩 돌아보며 단순하도록 정리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이사하지 않고 한집에서 오래 산 집은 집안이 복잡하고 살림살이가 많은데 몇 년마다 이사를 한집은 집안이 정리 돼있고 살림도 단촐 하다. 이사할 때 마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정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집안에는 쓰지도 않으면서 버리자니 아
“행복하지 않아요” “나는 죽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은 나를 성공했다고 부러워 하지만 아니요, 나는 불행해요” “예수만 믿지 않았다면 벌써 목숨을 끊었을 거예요.”가정 사역을 하다보면 소위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행복의 조건을 완벽하게 모두 갖췄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불행하다며 눈물짓는 사람들을 만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미국의 3대 자동차 회사중 하나인 포드자동차의 창업주 헨리 포드에 관한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가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려 할 때 많은 기자들이 몰려 마지막 인터뷰를 할 때였다. 어느 신문사 기자가 묻기를 “회장님은 평생을 자동차를 위해 일하셨고 자신의 자녀들만큼이나 자동차를 사랑하셨는데 혹시 다시 태어나신다면 또 자동차 회사를 경영하시겠습니까?” 그때 당대의 재벌중 한사람이었던 헨리포드는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기자양반,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나서 지금의 아내와 다시 살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을 해도 괜찮소.” 그 때 미국 국민들은 비로소 알았다. 헨리 포드가 돈이 많거나 재벌이라, 아니면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행복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헨리 포드의 행복은 가장 가까운 아내와의 사랑의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가정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주례사 중 두 번째 단계는 바로 연합이다.“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 2:24)”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떠남에 이어 연합의 중요성을 제시한다. 연합의 과정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전제가 된다. 50%를 훌쩍 넘어선 이혼 중 소위 ‘성격차이’가 제일 많은 표면적 이유가 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성격차이’는 이미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이루어지는 전제이다. 사람마다 독특한 개성과 자라난 환경의 차이 등으로 자신과 성격이 똑같은 사람을 만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자신과 비슷한 성격의 사람과는 더 많이 부딪치기 마련인데다 애초에 서로 끌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성격차이’를 운운하는 부부를 만났을 때 자신과 똑같은 성격의 배우자를 만나면 좋을 것 같은지 물으면 대부분의 대답은 의례 ‘No’이기 마련이다.연합의 원리는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내 배우자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정과 관계에 관한 많은 서적들이 남녀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데에서 연합이 시작되기 때문이다.어느새 남녀 차이에 관한 서적의 고전이 되어버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원하기는 하지만 행복한 삶을 위한 실천적인 노력이 부족한 것 같다.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람일수록 애정표현이 서툴고 마음은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필자도 말로나 행동으로도 잘 표현하지 못했는데 조금씩 노력하다보니 많이 좋아졌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듯이 처음엔 서툴러도 자꾸 하면 좋아지고 실천할 때 더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된다. 말로 표현하기우리는 표현하는데 서툴러서 사랑하지만 사랑한다는 표현을 잘 못한다. 나는 표현을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한 솥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라도 표현하지 않는 상대방의 마음까지 알기는 어렵다. “여보 사랑해요” 라고 한마디만 하면 사랑하는 마음이 전달되고 그 말을 들음으로 얼굴에 미소가 피고 행복해 진다. 자녀들에게도 “아들아 사랑한다.” “우리 예쁜 딸 사랑해” 라고 하면 아빠 엄마의 사랑이 자녀들에게 전달이 되고 사랑을 전달 받은 자녀들은 자신감이 생기고 행복한 마음을 갖게 된다. 전문가들은 행복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정서 표현’이 중요하기 때문에 표현을 자주 하라고 권한다. 가족뿐 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웃이나 직장 동료들에게도
우리의 신앙은 악한사단의 궤계를 이겨야만 합니다. 人生에는 세 가지 싸움이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 자연과 인간과의 싸움입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따뜻한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잔인한 적이요 라이벌이기도 합니다. 과학기술과 기계는 인간이 자연과 싸우기 위한 위대한 무기요 도구입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자연을 이용하고, 다스리고, 정복하기 위한 싸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과 인간의 싸움입니다. 개인과 개인 간의 생존경쟁에서부터 나라와 나라와의 전쟁, 민족과 민족의 갈등, 공산 세력과 자유 세력과의 투쟁에 이르기까지 인간세계에는 수많은 싸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싸움을 원하지 않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싸우면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세상에 패배처럼 분하고 괴로운 것이 없습니다. 나라와 나라의 싸움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죽음으로 전락하는 것이요,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패배는 자멸을 의미합니다. 어떤 나라는 지구상에서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무장이 없는 곳에 평화가 없고, 힘이 없는 곳에 자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사의 냉엄한 현실입니다. 그리고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새롭게 시작하는 가정을 위해 첫 번째 단계로서의 ‘떠남’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 2:24)”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제시한 떠남의 원리에서 실제적인 측면으로 제일 먼저 경제적 독립이 강조되었다. 오늘은 그 두 번째로 부모로부터 심리적, 정신적 측면에서의 독립을 살펴보고자 한다. 흔히 부모에게서의 정서적인 독립은 마마보이나 Daddy’s girl들이 부모에 대해 심리적인 의존성을 극복하는 과정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정서적 독립성을 다루고자 한다. 바로 부모와의 상처를 현재 관계에서 반복하고 있는 부부들의 역동에 관한 것이다. 교회에서 결혼을 하겠다고 찾아오는 커플들을 위해 예비부부 상담을 하거나 신혼부부들을 위해 성경공부반을 열 때, 필자는 꼭 원 가족(Family of Origin)에 대해 나누도록 한다. 새롭게 가정을 이루고 두 사람이 하나가 되었지만, 가만히 부부의 역동을 살펴보면 두 사람이 아닌 네 사람이 함께 사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신랑과 신랑의 부모 그리고 신부와 신부의 부모가 함께 살면서 어릴 때부터 반복해 오던 가족의 역동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염려한다. 전문가들의 국내외 정세나 경제 전망이 낙관적이지 않으면 염려는 더욱 커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있다. 청소년 때는 상급학교 진학과 대학입시 인생의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고 청년이 되면 군 입대와 취업, 결혼에 대한 염려로 고민한다. 장년이 되어도 직장생활과 승진 사업경영과 자녀교육 등 인생의 짐은 더 무거워지고 건강과 노후생활에 대한 염려가 추가된다. 사람마다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기 때문에 누구나 고민하고 염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염려가 지나치면 내면에 불안심리가 들어와 평안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불안이 가득 채워져 삶이 불행하게 된다.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다마태복음 6장34절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고 했다. 예수님은 내일 일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너무 염려하여 부정적으로 생각 하지 말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면 내일가면 내일이 해결되고 다음 주에 가면 다음 주가 해결 되듯이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2~4)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제거되기에 붙어 있어야 된다는 설교를 들으면 두려운 마음이 들지 모른다. 그러므로 항상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실까 생각하며 더 열심히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려 노력 할 지도 모른다. 아마도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이 아버지의 명에 순종하지만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을 모르고 자신의 행위로 장남의 자리와 재산의 지분을 지키려는 노력과 유사하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라는 아버지의 사랑의 고백은 단지 재산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이 한 생명 됨을 나타낸다. 작은 아들은 방탕했으나 끝까지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주님이 요한복음 15장 3절에 ‘너희는 이미 깨끗하여졌다’고 선언하셨음에 주목하자. 자신이 아
근간에 50대 여성이 상담을 요청했다. 남편이 시도 때도 없이 소리를 지르고 때로는 목을 조르고, 주방에서 칼을 가지고 죽인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어서 이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하면 조금 마음이 안정되어서 견디곤 했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남편을 보면서 많은 갈등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여성은 남편을 치료하고자 여러 병원을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남편이 중증이므로 입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입원문제가 녹록지 않아 이곳에 온 것이다.사실 이런 삶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서로 좋은 관계를 가지고 살아도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인데 날마다 고성과 폭력과 갈등관계가 깊어 고름을 낼 지경이면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남편이 이렇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야기 중에 남편이 어릴 적에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함을 알게 됐다. 형과의 나이 차이가 상당했는데 아마 원치 않는 임신으로 사랑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러니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에게 사랑은 고사하고 동물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아야 할 나이에 학대를 받고 자랐으니 그 마음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과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교회생활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신자들 중에는 자기교회에 대해 불평불만을 말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교회시설이 안 좋다. 식당이 좁다. 주차장이 없어 불편하다는 불만에서 목사님 설교가 어렵다. 헌금을 강조한다. 설교가 길다. 사람을 차별한다는 등 벼라 별 불만을 널어놓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다. 어느 교회도 완벽한 교회는 없고 목사도 완벽한 목사는 없다. 서로 협력해 아름다운 교회를 세워 가는 것이 목회자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자기교회의 부정적인 것만 찾아서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은혜 받고 은혜로운 신앙생활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행복 할 수가 없다.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은혜 받고 신앙생활이 행복해야 마음에 평안이 임하고 모든 행사가 형통하고 삶이 행복하다. 부모가 교회에 대해 불평하거나 목회자를 비판하고 부정적인 말을 하는 가정의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없다. 자녀들의 마음속에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주게 되면 자라면서 교회생활을 거부 할 수 도 있고 목회자를 존경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어느새 2013년이라는 묵은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신년이 되었다. 새해를 맞으면 우리는 참 많은 새로운 결심들을 한다. 새로운 목표, 새로운 관계, 그리고 새로운 자신을 꿈꾸며 새로운 계획으로 부푼다. 올해는 성경 통독을 하리라는 결심에 별반 벗어나 보지 못한 창세기를 다시 펼치기도 하고, 배에 왕(王)자 근육을 다시 꿈꾸거나 다이어트를 선포하며 헬스장에 발을 딛기도 한다. 올해는 기어코 결혼을 하고 싶을 수도 있고, 소원해진 가족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싶을 수도 있다.새로운 시작은 꿈과 희망을 생각하게 하기에 참 좋다. 그런데 새로운 걸음을 내딛는 중요한 순간에 문득문득 우리의 생각, 혹은 우리의 발목을 붙드는 존재가 있다. 바로 우리의 과거이다. 우리가 겪었던 과거의 경험들이다. 나를 배신했거나 상처 주었던 누군가의 존재가 새로운 관계의 형성을 방해하는 복병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고 현재를 사랑하지 못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일어났던 불행이 또 반복될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다시금 사람을 믿고, 사람을 사랑하기가 두려워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뼛속까지 사무친 과거의 기억들로 만들어진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은 마음의 생각과 입술의 말에 의해 만들어진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부정적인 사람 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산다. 그러므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행복하게 살기위해 내가 살고 있는 도시, 내가 생활하는 지역, 내가 거주하는 동네를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그곳에서의 삶이 행복하다. 내가 사는 곳이 다른 곳과 비교해서 환경이 열악하고 시설이 부족하고 불편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타박하고 불평한다고 좋아질 것도 아니고 속이 시원할 것도 없다. 더 좋은 도시로 더 좋은 동네로 이사를 가던지 그럴 수 없다면 내가 사는 곳의 좋은 점을 찾아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좋은 점을 말하고 살아야 행복하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신도시에 있는 몇 억짜리 최고급 아파트에 살아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변두리 작은 집에서 살아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 환경이나 조건보다도 자신의 긍정적인 마음이 중요하다. 나는 참 좋은 도시에 살고 있다.19년 전 제가 울산에 오기 전에 울산에 대해들은 것은 부정적인 것뿐이었다. 울산은 공업도시라 공해가 심하고 울산은 노사분쟁이 심하여 늘 데모를 하고 태화강이 썩어서 냄새가나고 대학도 없고 문화시
얼마 전, 현직 조직폭력 단체에서 상당한 시간을 몸담았던 청년이 상담을 받으러 왔다. 건장하고 우람한 체구에 누가 봐도 예사롭지 않은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눈빛은 무엇인가 애처롭고 슬픈 모습이 엿보였다. 그는 지금 조직폭력으로 유명한 단체에서 중간급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30대의 청년이었다. 그의 고민은 다른 것이 아니고 얼마 전에 꿈을 꾸었는데 자기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때부터 머리털을 민 삼손처럼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싸움도 할 수 없고 적을 향해 늘 일삼던 그런 욕도 나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조폭으로서 점점 낙오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배에게도 꾸지람을 받고, 후배들에게도 눈총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싸움으로 인해 몸에 상처가 나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상처를 다 치료한 후 무엇인가 이상 징후를 발견했는지 정밀 검사를 요구했다.검진을 해보니 간암 2기 판정이 나왔다. 하긴 벌써부터 몸에는 해독되지 않음으로 생긴 이상이 있는 것을 알기는 했었다. 고민하는 가운데 아주 큰 결심을 했다. 그것은 이제 이 조직을 떠나는 것이다. 여기서 더 있다가는 아
지방에서 한 자매가 올라왔습니다. 면접 상담을 위해 만나기까지 이동 전화로만 수 개월 상담을 해 온 자매였는데 아주 어렵게 만남이 성사되었습니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발신자 번호없음’이 뜨곤 했던 자매였습니다. 사뭇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자신을 알릴 수 없는 자매의 아픔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은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아픔이었습니다. 딸의 인생을 자신의 욕망으로 함부로 망가뜨린 아버지를 향한 분노보다는 이야기하며 몸을 떠는 자매가 너무도 안쓰러워 살며시 안아주었습니다. 23세에 이미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두 아이 모두 10대에 낳았네요. 아이들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입니다. 비록 태어난 지 백일 전에 입양되어 친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이 딸에게 지금의 아버지는 분명 자신의 아버지였습니다. 천륜을 어긴 딸과 남편의 부적절한 관계를 눈치 챈 어머니는 남편과 딸을 두고 집을 나갔습니다. 어머니의 가출 뒤에 아버지의 음주가 더해졌고 딸에 대한 성적인 폭행도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교회의 맨 앞자리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었습니다. 거의 주일예배를 빠지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