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마태복음 1장 24~25절 곤란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큰 믿음 최인선 담임목사
[주일예배] 욥기 23장 1~9절 기도의 논리를 가지라 한국침례신학대학교 피영민 총장
[주일예배] 요한복음 16:1~15 성령 하나님을 아시나요? 최성은 담임목사
[주일예배] 마태복음 25:31~40 천국가는 믿음에서 천국을 사는 믿음으로 아신대학교 정홍열 총장
매년 부과되는 종부세에 대하여도 만전을 기하자. 교회는 담임목사 사택을 제외한 나머지 주택에 대한 ‘법인일반세율신청서’를 세무서에 제출하는 절차가 아직도 이해부족과 미제출의 혼란이 있다. 한교총과 더불어 안내하면서 어수선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법인일반세율신청서’를 제출하기 전에 이미 교회는 보유하는 사택 중에서 교회 고유목적에 사용된다면 비과세로 인정받아 취득세와 재산세의 납부를 하지 않고 있어야 될 것이고 올해 종부세 또한 문제될 게 없을 것이다. 교회에 속한 모든 부동산에 대해 원점에서 전문가와 함께 재검토하자. 교회의 부동산에 대해 근본적으로 관리하는 체계가 교회내부와 주위의 전문가에게서 부족함이 많이 느껴진다. 이제부터라도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준비를 해보자. 교회에서 발생하는 중요한 이슈가 많은데 그중에서 퇴직금지급제도에 대하여 오해가 많다. “총회 헌법, 연회와 지방회 규정, 교회의 정관에 간단한 문구로 퇴직금을 지급할 수 있고, 그 외에 추가 퇴직공로금을 지급할 수 있다”는 정도의 규정을 갖추고 퇴직금 지급을 준비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 교회의 실정이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규정만을 근거로 퇴직금을 산정해보면, 교역자의 현실적인 사례비의
제한적 무오성이란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필요한 복음의 내용에는 오류가 없지만, 그 이외의 진술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제한적 무오성의 진영에는 ‘믿음(복음에 대한 성경적 원리)과 실천(윤리)’은 오류가 없고 다만 구체적인 역사적, 자연 현상에 대한 묘사에는 오류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좀 더 급진적인 주장은 성경의 역사적, 자연적 현상에 대한 묘사뿐만 아니라 성경은 구원에 대한 직접적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윤리적, 신학적 주장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제한적 무오성의 옹호자는 ‘오직 성경으로’나 ‘성경의 권위’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뜻 보면 교회가 전통적으로 주장해온 성경의 완전한 무오성을 믿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제한적 무오성을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성경의 모든 부분이 성경이 다루고 있는 주제의 최종 권위가 될 수 없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20세기 후반 제한적 무오성을 주장한 대중적인 인물은 침례교 신학자 버나드 램와 스탠리 그렌츠 그리고 장로교 신학자 도날드 블러쉬 등이다. 이들의 제한적 무오성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칼 바르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이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구원의
종교인과세가 시작되고 6년차가 됐지만 눈에 띄는 세무조사나 종교인소득의 신고 오류로 인한 가산세가 부과됐다는 소식을 거의 접하지는 못했다. 우리 교회와 종교인들은 종교인과세제도가 시행된 처음과 별다른 차이가 없음을 알고 “별거 아니구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계가 세금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세월을 살아온 것과는 다른 시대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와 종교인의 큰 댐에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세금이라는 작은 구멍이 생겼다는 것이다. 사실 교회와 종교인에게 2018년의 종교인과세제도 시행 이전 오래전부터 공익법인으로서의 교회는 세금 문제에 노출이 되어 왔으며 특히 부동산의 취득세과 보유시 재산세 및 종합부동산세, 특히 부동산 처분시의 양도세는 종교계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부과되어 온 사실을 지울 수가 없다. 세법은 일단 공표되고 나면 종교계가 알든지 모르든지 국세청은 적용만 할 뿐이다. 종교인과세제도는 그것 하나만 보면 그렇게 어렵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아직까지 잘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렇다. 종교인과세제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정비가 되리라 여겨지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공익법인으로서의 교회 의무사항 위반시 증여
교회 개척할 때 맨 처음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함께 개척 교회를 이룰 사람들과 예배를 드릴 장소이다.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매우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함께할 사람들이고, 함께 모일 장소라고 할 수 있다. 함께 교회를 세워갈 사람들은 매우 중요한데, 일단 이번엔 사람보다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려고 한다. 나는 지금까지 두 번의 교회 개척을 경험했다. 예전에 대전에서 교회를 개척했고, 이번이 두 번째의 개척이다. 대전에서 개척할 땐 가장 먼저 예배실을 구하는 것에 신경 썼다. 나는 주로 서울에서 살았고, 서울의 교회에서 섬겼기에 가장 익숙한 지역은 서울이나 수도권이기에 서울 근교에서 개척하려는 마음을 가졌는데, 그 당시 내가 서울 근교에서 개척하는 것을 반대했던 분이 있으셔서 두 번째로 친숙한 도시인 대전에서 개척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 교회가 사용하던 빈 예배실이 있는 상가건물의 한 층을 세내어 교회를 시작했다. 전통적인 스타일로 꾸며져 있던 예배실의 모든 의자들과 강대상 등의 시설을 필요한 교회에게 무상으로 드리고 예배실을 새롭게 꾸미는 데 꽤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갔다. 다행히 그 당시 처형이 필요한 개척자금을 헌금
제한적 무오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성경에서 구원과 윤리에 대한 부분만 오류가 없고 나머지 비종교적 부분, 즉 역사적, 자연 현상에 대한 부분은 오류가 있다고 믿는다. 이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은 자신을 불오성주의자(infallibilist)라고 부른다. 그러나 불오성(infallibility)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오류를 발생시킬 수 없는 것’(unability to err)이다. 그렇다면 불오성은 오류의 현존이 없다는 무오성보다 훨씬 강력한 표현으로서 오류가 절대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 무오한 문장을 진술한다. 자신의 직업, 나이, 이름, 거주지에 대해 정확 무오한 진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무오성이 우리가 어떤 문장을 진술할 때 불오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오류가 섞인 진술을 하며 때로는 의도적으로 거짓된 진술을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오한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불오한 존재라면 결과적으로 언제나 무오한 진술을 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불오성은 필연적으로 성경의 요구한다. 그러므로 교회 역사에서 두 개념은 오랫동안 사실상 동의어로 사용되어 오다가 제한적
내가 교도관으로 첫발을 내딛게 된 곳은 천안에 있는 개방교도소라는 곳이다. 우리나라에 많은 교도소가 있지만 말 그대로 유일한 개방교도소다. 수용자들끼리 자치제가 운영되고 식사도 함께 하며 외부에 공장 출역도 가능한 그야말로 출소를 앞두고 있는 모범수들만 모여있는 곳이다. 이곳에 와 보니, 소장님이 아주 훌륭하고 존경받는 믿음이 좋은 장로님이 계셨는데 마침 나는 기독교를 담당하고 있었던 터라 수용자들 위한 부흥회를 구상해 보라는 지시가 있었고 마침내 모든 수용자를 대상으로 무려 3일간 오후 집회가 진행됐다. 교도소라는 특수성을 고려할 때 부흥회를 개최하고, 그것도 직원 가족들이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예배 중에 헌금시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분명, 수용자들은 드릴 수 있는 현금을 소유하지 못하는 상황인데도 헌금시간을 넣어두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직원 가족들이 드린 물질로 어려운 수용자와 그의 가족을 돕자는 취지로 귀한 시간을 배려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예배를 은혜 가운데 마친 후 헌금 바구니를 정리하던 기독신우회 직원 한 분이 나에게 달려왔다. “주임님, 헌금 바구니 안에, 검정 뿔테 안경이 들어 있는데요. 이거 뭐죠?
성령은 성도들이 하나 되도록 사역하신다(엡 4: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현실은 성령의 사역에 관한 견해 차이로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음도 사실이다. 같은 성경을 사용하면서도 성경 구절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입장이 서로 달라진다. 그러기에 본 연구자는 이런 상황을 인식하면서 성령의 사역에 관해 연구할 때는 성경을 의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에 의존하여 성령 침례에 관한 견해를 설명하고자 한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을 통해 계속됐다는 사실에 관심을 모으며 시작한다. 그러나 사도들이 사도행전의 주체가 아니고 성령이 주체이시다.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이 다른 보혜사요, 돕는 자요, 교사가 되신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사람들의 생활과 전도의 모든 것을 살아계신 구주요, 높임 받으신 주로서의 그리스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계획은 그리스도의 계획이다(행 1:8). 그러나 그것을 할 수 있는 응력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시작부터 끝에 이르는 전 과정은 성령의 역사이다. 이런 점에서 사도행전은 성령에 의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뤄진 역사이기에
[주일예배]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있을 때 사도행전 15장 1~29절 안희묵 대표목사
[주일설교] 새로운 시대...믿음의 감각을 깨우라 사사기 1장 1~10절 김인환 담임목사
[주일설교] 옛 뱀 마귀를 이기는 비결-2 요한계시록 12장 7~12절 이욥 담임목사
[주일설교] 주님 사랑의 힘으로 요한복음 15장 9~11절 나성화 부목사(부산백향목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