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날 교회 모든 행사를 끝내고 느긋한 마음으로 KBS TV 9시 뉴스를 켰다. 놀랍게도 우리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성탄절 날 매스컴이 전하는 반응은 너무나 차갑고 냉정하고 비정하기까지 했다. 대한민국 국민 18.4%만이 한국교회를 신뢰하고, 48.3%는 아예 신뢰하지 않는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저 잣대로 절간을 들이댄다면 어떨까? 항변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마음은 참 서글펐다. 왜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예수님의 3대 사역(말씀, 교육, 치유)은 잘 아는데 그 사역 못지않게 많은 시간과 마음을 두신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떡 사역’은 잘 모르는 것 같다.마가복음 6장에 5병2어로 5,000명, 8장에 7병2어로 4,000명을 두 번이나 먹이셨다. 마지막 때 양과 염소를 가르는 심판의 기준은 뜻밖에도 얼마나 예배 많이 드렸냐? 얼마나 기도 많이 했냐가 아니라 “내가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나를 찾아 도왔느냐?”고 물으신다.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 받았으면 되었지 행위구원을 강조하는 것이냐?는 반론이 있겠으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진정한 믿음은 삶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가짜라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네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사60:1,4)묵은 해는 지나갔고 미래의 기약은 없으나 새해의 대망을 품고 온고지신의 문턱에 섰다. 한 살의 나이를 더 먹은 것은 인생의 경륜이 한 단계 고양된 것이다. 희노애락의 한 해인 2012년을 돌이켜 보고 숙고하여 새해의 웅비를 품는 것이다. 낙관주의와 적극적이며 진취적 사고방식에다 목표를 향한 열정에 밝은 미소를 주라.작은 피라미 물고기도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고 작은 어선도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거늘 또 한 해를 살아가면서 역류와 강풍의 노도를 맞더라도 온갖 비난과 청천벽력 같은 실망과 좌절에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천지를 창조하신 그 말씀이 아니라고 하면 ‘아니요’하고 말씀이 옳다고 하면 ‘예’하라. 말씀을 보고 영감 받은대로 기도하고 응답받으면 주저말고 즉시 실천궁행하라!모세는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스라엘을 인도했고, 여호수아는 모세를 이어 70세에 가나안 땅을 정복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고향땅 보금자리를 떠나 가나안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따라 믿음으로 순종하
간증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내 삶속에서 보여주며 증명하는 것이다. 간증은 내 삶속에 개입하신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이므로 간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시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짧은 글 속에서 3번이나 자신이 어떻게 핍박자 사울에서 전도자 바울이 되었는지를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바울은 다메섹을 향해 성도를 체포하러 가다가 백주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전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터닝 포인트의 포스트가 주님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간증은 내 삶에 성공 스토리가 아니고 눈물겨운 내 고생담도 아니다. 간증은 우여곡절 끝에 찾아온 복권 당첨 같은 행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간증에서 하나님을 빼내어도 스토리 전개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그는 간증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삶을 이야기 하는 자다. 내가 성취한 과업이 아무리 거대해도 대 기업체의 오너가 성공스토리를 말하듯 한다면 그는 자기를 자랑하는 자이지 간증자라 말 할 수 없다.그래서 내 안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경험이 없다면 그는 아직 성도가 아니기에 간증할 말도 없는 것이다. 인격적인 만남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분을 정확히 알고 그분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와 감격이 있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 또 자기의 원대로 자기의 마음대로 살고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 오열을 터뜨릴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겠는가?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뜻만을 푯대로 해서 쫓아가고 있는지? 하루를 계획할 때에도 하나님의 뜻에 우선순위를 두고 생각하고 계획하는가? 매순간, 매시간 또는 매일매일 우리는 결단을 내릴 때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가? 오늘 이일을 먼저 하고, 저일을 나중에 할 것인가? 또 언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어떤 결단을 내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있는가? 육하원칙 보다 앞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어떤 표준에 의해서 그 많은 결정을 하고 있는가? 정말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결정하는가? 자신의 생각과 기분을 따라서 행동하는 일은 없는가? 가령 우리가 직업이나 직장을 선택할 때, 기타 모든 선택에서 학생이라면 학교를 선택하고 학과를 선택하고 진로를 결정할 때에도 주님의 뜻을 살피고 있는가?예를들어 독신생활을 하는 것이 좋은가? 결혼하는 것이 좋은가? 대상자는 누구를 선택하는가? 이혼을 해야 되는가? 또는 재혼하는 것이
우리나라 영자, 순자처럼 어느 나라나 흔한 이름이 있다. ‘마리아’는 유대사회에서 그렇게 흔한 이름이다. 산골처녀의 임신은 수치스런 일로서 누구에게도 축하받지 못했다. 당시사회에선 목숨을 담보한 두려운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늘에선 온 천사가 축가를 불렀을 것이다. 그녀가 잉태한 아기 예수는 인류역사를 B.C/A.D로 나뉘는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감격스런 마음으로 찬가(The Magnificat)를 불렀다. 내용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하나님이 어떻게 큰일을 행하실 것인가를 노래하고 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사역에 자신이 도구로 쓰여짐에 죽음도 사랑하는 이로부터의 버림받음도 각오했다. 소명(召命)은 생명보다 귀한 것이다. 주님이 쓰시겠다면 기꺼이 내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내 사사로운 감정과 이익을 주장하지 않는다. 나 같은 자가 주님께 쓰임 받는 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감격할 따름이다.누가복음에만 있는 ‘마리아의 찬가’ 속에는 3가지 가장 반 복음적 존재가 무엇인지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자, 둘째는 권세있는 자, 셋째는 부자다(눅1:51-53). 사랑과 자비의 화신처럼 믿는 성모마리아가 메시야 아기예수를
“방금 목사님으로부터 소개받은 조세형입니다. 저를 서울침례교회에 간증할 수 있도록 세워주신 목사님과 교회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여섯살 때 고아가 된 후 어려서부터 배운것은 도둑질로 반평생 넘게 교도소를 드나들었습니다. 절도죄로 수감되었으나 탈옥하여 6일만에 안동에서 다시 붙잡혀 수감되었을 땐 15년형을 받았는데 7년째 되던해에 교회와 성도들의 도움으로 교도소내에서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로 교화되어 55세에 모범수로 출소했고 이렇게 여러 교회의 초청으로 신앙간증을 하고 다닙니다... 사실 집털이를 한번하면 3,000만원씩 생기고 또 금은방털이를 하면 억대의 수입이 생길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간증해봤자 몇십만원 밖에 생기지 않아도 감사함으로 받습니다”(중략)우리 성도들은 그의 간증을 듣고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조세형은 57세의 나이에 300여명을 거느린 중소기업의 사장인 39세의 이은경과 1999년 행운의 결혼을 하고 아들도 낳았으나 얼마 후 이혼하게 되었다. 2000년 7월 선교활동차 일본에 건너갔는데 도쿄의 한 주택가에서 그놈의 도벽이 발동하여 빈집 털이로 일본 경찰의 집요한 추적에 붙잡혀 3년 반 옥고를 치루고 2004년 귀국 후 집에 칩거하더니
“한 목사님, 미국서 공부하는 우리 국원이 위해 기도해 주세요!”경제적으로 어려워 유학비를 송금하시지 못할 때마다 아마 가끔 기도를 부탁하셨으리라. 오늘의 총장 취임은 그 어느 누구보다 남편 없이 삼남매를 키우느라 애쓰신 방 원장의 기도 때문이었으리라. “목사님 얘를 좀 보세요!” 한번은 자매복지회 설교를 한 뒤 근래에 입원한 14세의 미혼모를 소개하시는데 만삭이 된 배를 보이고 두 손목을 들어보였다. 철사줄로 손목을 묶어 가두었는데 계속 탈출하려 하니 철사줄이 손목을 갉아먹어 피가 흐르다가 상처가 굵은 팔찌자욱처럼 피가 엉켰는데 잘 간호하여 상처가 나아지고 있었다. 가련한 14세 미혼모를 안고 우리는 함께기도하며 눈물을 닦았고 우리 서울교회도 그 때부터 작지만 선교비를 보내게 되었다.한국이 낳은 테레사 같은 어머니 방호선 원장의 자비와 사랑으로 배국원 신임총장도 탁월한 지도력에 학사행정을 잘 수행하여 침례신학대학교를 그가 나온 연세대, 사우스웨스턴 신학교 및 하버드대 같은 세계적 명문신학대학교로 발전시킬 것을 기대하면서 저는 목메인 기침소리로 축사를 더 길게 못하고 말았으나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 될 것을 희원하며 기도하는 바이다. 방호선 원장은 서울시
우리에게는 ‘주는 대로 도로 받고 행한 대로 보상을 받는 법칙’이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고 또 최상의 선물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으니 하나님께 드려 봉사하고 또 그런 몸 된 교회를 섬겨 봉사하고 드림이 마땅하다. 이렇게 주는 자는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뜻은 반드시 상급이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이웃을 돕는 것은 상급을 받을 수 있는 훌륭한 행위이이다. 예수님의 황금율(Golden Rale)에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예수님은 악하고 게으른 종을 책망하셨다. 무엇인가 심어야 하고 헤쳐야 모으는 것이다.아브라함이 성문에 앉아 지나가는 세 사람에게 대접을 잘했는데 그 들이 바로 천사였으며 이로 인해 조카 롯과 두 딸을 구원해 냈다. 마노아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천사를 잘 대접한 결과 삼손을 선물로 받았다. 엘리야를 먼저 대접했던 사렙다 과부는 3년의 기근에서 아들과 잘 살아났고, 엘리사를 잘 대접했던 수넴 여인의 조밀한 대접은 기도로 아들을 낳게 했고 또 그 아들이 죽었을 때 되살아난 기적을 보았다. 베드로와 성도들을 잘 구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5,6).“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11:1).“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아느냐”(마25:26).저는 농부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보고 배우며 돕고 체험했다. 벼, 밀, 보리, 감자, 옥수수와 콩, 조, 수수, 팥, 메밀이며 참외, 호박, 수박, 가지, 고추, 토마토 등이며 과목으로 감, 능금, 대추, 괴염, 배, 밤, 복숭아 등의 과일도 계절을 따라 먹을 수 있었다. 가축도 소, 돼지, 염소, 닭, 토끼, 개 등을 잘 키워 잡아먹기도 했다. 영적인 세계와 신앙의 세계에 있어서도 똑같이 심어야 거둔다. 마음에 좋고 선한 생각을 심고, 말과 행동을 심고, 시간을 아껴서 부지런히 심고, 재능을 최선으로 발휘하고 노력하면 주님의 청지기로 넘치는 수확을 거둔다.주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
중세 카톨릭교회는 교황의 말을 성서의 권위와 동일시하였고 교회는 의식화 되었고 성자들의 유물까지 숭배하는 미신 및 우상화했다. 종교개혁의 시발점은 교황 레오 10세가 성베드로 성당 건축기금을 위한 방법으로 속죄부 판매를 질타하면서 위텐베르그 성당 정문에 96개조의 항의문을 부착한 것이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구원함을 받는다고 주장한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장을 받고도 불태우고, 그 후 브름스에서 열린 교황청의 협박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사생결단의 종교개혁을 단행했다.교직자들의 귀족화에 대해 “백성들은 누더기 옷을 입고 사는데 성직자들이 비단옷을 입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꾸짖었던 죤 위크리프는 결국 이단자로 정죄되었고,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주장한 죤 후쓰도 결국 화형을 당했다.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7화(마24)를 경고하셨던 예수님께서 오늘의 현실을 보시고 무엇이라 책망하실까? 교권투쟁을 위해 감투야합을 마다하지 않고, 불의와 불법, 부정부패에 세속적 방법을 감행하는 중세교회의 실상을 마치 답습하기라도 하는듯한 오늘의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시대의 종교개혁을 외칠
내 출생지는 아니지만 나의 어린 시절 대부분은 충남 예산면 오가면에서 자랐다. 집 앞에는 20여 그루의 감나무가 있어서 감에 얽힌 사연이 많다. 봄철 감꽃이 노랗게 피면 그 감꽃도 먹었고 감꽃을 실로 꿰어 목걸이를 하면 감꽃 향기가 온 몸에 배였다. 끔찍한 기억은 소금물에 우린 땡감을 너무 많이 먹어 진땀을 흘리며 아무리 힘을 주어도 변이 나오질 않아 엄마 엄마 소릴 지르면 어머님은 들기름 바른 나뭇가지로 항문을 후벼 배변의 문제를 해결 주신 것이다. 가을철 감을 딸 때면 높은 가지는 내가 다람쥐처럼 이리 저리 넘나들며 감을 따 밑으로 던지면 잘한다고 칭찬해주는 어른들이 내 발밑에서 내려다 보여 으쓱했던 추억도 있다. 긴 대나무 끝을 V자로 파서 감가지를 꺾어 따는데 어떤 감은 대나무가 비틀려도 꺾이지 않는 감이 있는가 하면 어떤 감은 건드리기만 하면 툭 떨어지는 홍시감도 있었다. 박살난 홍시감은 잘만 하면 윗부분은 먹을 수 있어서 안타까워하면서 맛있게 먹었다. 영혼구원이 감 따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영혼은 5년 10년이 가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를 전도하다 내가 지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영혼은 기다렸다는 듯이 주님 앞으로 나온다. 스펀지
요즘 세상은 어느 것이 옳고 그르냐보다는 어느 것이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얻느냐가 중요한 기준점이 되고 있다. 아무리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어도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남들이 다 그러는데….’라는 단서를 붙이기도 한다.여론(與論)은 태풍과 같아서 거세게 밀어 올 땐 큰 힘을 갖지만 지나고 나면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지는 속성이 있다.안철수 씨는 그 여론의 기세를 몰아 이 나라 대통령 후보로까지 물망에 올랐지만 여론이 꺾이자 후보사퇴를 선언하고 지금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되어 시골로 내려갔다. 각 언론사마다 여론조사를 발표한다. 어느 지역에서 어느 만큼의 지지를 얻고 있는지를 예측 해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여론은 무엇으로 (전화, 편지, sns 등) 몇 시에 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문항이 어떤 가에 따라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나타난다. 문재인과 안철수씨는 지지도냐 적합도냐를 갖고 피 말리는 논쟁을 펼쳤다. 온 국민이 무얼 묻고 있는지 다 아는 판에 문재인? 안철수? 그렇게만 물어도 될 일인데…. 인류 역사에 여론의 최대 피해자는 나사렛 예수
서해안 괭이 갈매기들은 서로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알을 낳고 오랜 기간 그 알을 품으려면 경사면이 아닌 평평하고 아늑한 자리는 필수요소이기 때문이다. 중국 광저우 지하철에서 자리다툼으로 60대 노인과 20대 청년이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다가 힘이 달린 노인이 청년의 귀를 물어뜯는 사진이 인터넷에 화제다.수많은 직장인들이 이른 아침부터 출근 전쟁을 벌이며 바쁘게 뛰는 것도 한 자리 높게 오르려 안간힘을 쓰는 것, 결국 자기 한계점에 머물면 그 자리에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다가 씁쓸히 퇴직한다. 언제나 자리는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므로 북한의 인민 대회장에 누가 몇 번째 자리에 앉았는가는 중요한 관심사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누가 크냐?’고 자리다툼을 벌였다. 어떤 제자는 잽싸게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자기 아들을 좌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치맛바람을 일으켰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은 제자들은 분을 내었다. 예배당의 앞자리는 어떨까?열심히 공부하려는 학생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릎 앞에 말씀을 집중하듯 앞자리는 은혜가 쏟아지는 명당자리요 금자리다. 대부분 설교 시간에 조는 사람들은 뒷좌석
내 바둑 실력은 40년 전 5급, 지금은 손 뗀지 오래니 감각이 많이 둔해졌을 것이다. 바둑에 큰 대마(大馬)가 몰릴 때 하수(下手)의 눈에는 아무리 오래 고민해도 그 묘수가 보이질 않아도 고수의 눈엔 금방 보인다. 설령 그 싸움에서 진다해도 하수는 그 사석(死石)을 이용해 반대편 싸움에서 더 많은 집을 차지하는 큰 판을 볼 줄 모르니 하수의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인생에 고수들을 멘토로 삼고 그들의 풍부한 인생 경험들을 전수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까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 보면 참 아쉬운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 나 혼자 맨땅에 헤딩하듯 살아온 나는 인생에 멘토가 있는 사람이 참으로 부러웠다. 넉살이 없어 그런 분들을 스스로 찾아가지도 못한 채 시골 냇가에서 개헤엄 치듯 그렇게 살아왔다. 이제 어언 60이 넘어서니 젊은 목회자들의 애쓰는 모습이 애처롭다. 어떤 전문가를 배출하는데 일정 자격 요건을 갖춘 사람들을 모아 훈련시키는 기관이 연수원이다. 사법연수원, 기업연수원, 교사연수원, 공무원연수원….영혼을 포함해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인생의 전반을 상담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가르쳐 지키게 할 사명을
군 제대 후 KT에 입사하여 직장 예비군으로 편성되었을 때 첫 느낌은 민방위복 입은 40대들이 너무 늙어 보여 이상했고 지금은 반대로 군복 입은 젊은이들이 너무 애송이같이 보여 이상하다. 세월이 흐른 만큼 세상이 달라 보이나 세상은 변할 리 없고 내가 변한 것이 분명하다.아내가 상의도 없이 내 환갑(還甲)잔치를 베풀고 교인들을 식당으로 초대했다. 내 생일을 축하하겠다는 마음일 터이니 뭐라할 순 없으나 솔직히 고마운 마음도 별로였다. 요즘 누가 60을 오래 살았다고 잔치하나? 가까운 지인들에게 초청장 없이 식사나 한번 하자하고 여행이나 다녀오는 것인데 굳이 이런 자리를 베푸는 것이 3년 후 본인의 회갑잔치를 기대하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교회에서 운영하는 노인대학도 은빛대학이라 부르는 마당에 누가 늙어가는 것을 좋아할까마는 그러나 늙음을 보톡스 주사로 막아보려 안간힘을 쓰고, 늙은이가 청바지 입고 파마하여 고부라진 머릿결로 이마를 가리는 것도 추해 보인다.환갑(還甲)은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를 합쳐서 60갑자(甲子)가 되므로 태어난 간지의 해가 다시 돌아 왔다하여 회갑(回甲)이라하니 한마디로 한 바퀴 다 돌아온 인생이니 살만큼 살았다는 뜻이리라.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