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 11:5) 성경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유독 에녹만은 우리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유념해 볼 필요가 있는 인물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 만은 특별히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데려갔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그 때 당시 평균수명의 절반도 살지 않은 상태에서 더 좋은 곳으로 빨리 데리고 갔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 찾는다면 하나님은 창세기 5:24절에 이렇게 에녹에 대해서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동행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세상의 상식과 지식을 초월한, 그것도 모든 사람들이 통과하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길 정도로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푸신 것일까요? 2012년 3월, 저희 집에 큰아들이 어느 날 아무런 한마디 예고도 없이 “아버지, 저 장가가고 싶습니다.”라고 마음을 털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나 예견치 못한 고백을 들
또한 이들의 “간접적인 신앙적 후예들”에는 침례교인들(Baptists), 퀘이커교도들(Quakers,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 크리스천 교회(Christian Church),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들 교회(Brethren in Christ Church) 그리고 제자들(Disciples)이라 불리우는 교회들 등이 있다.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은 근대적인 의미의 자유교회(Free Church) 혹은 신자들의 교회(Believers’ Church)의 원천이 되었던 사람들이다. III. 초창기 침례교운동과 그 성격 1. 초창기 침례교운동 영국 분리주의자들(English Separarists)의 교회였던 게인즈보로 교회(Gainsborough Church)의 담임목사 존 스마이드(John Smyth)와 그의 교우들은, 영국국교회와 왕실로부터의 핍박을 피해 1607년에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집단이주를 하였다. 암스테르담에서 빵공장을 운영하던 메노나이트 교인인 얀 문터(Jan Munter)라는 사람이 이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자신의 빵공장에서 기거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이
몇 년 전에 사회적 반향을 크게 불러일으키며 상영되었던 영화 “도가니”를 보면서 가슴 아퍼하며 장애인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적 이 있습니다. 광주 인화학교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울분과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뿐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입니다. 여전히 사회에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존재함을 봅니다. 장애인에 대한 시선은 아직도 차가운 게 우리의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전국의 5 만여 교회 중에 장애인 사역부가 있는 곳은 불과 300 여개 밖에 없습니다. 아직도 한국교회 안에서의 장애인 사역은 마치 미전도종족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거의 방치되어 있는 게 사실입니다. 또 하나의 선교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시설이나 프로그램에서 장애인을 배려한 것을 찾아보긴 쉽지 않습니다. 4월 20일은 국가가 정한 장애인의 날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지난 4월 17일을 장애인 주일로 지정했는데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교회들이 장애인에 대한 설교나 어떤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교회들이 상당수가 될 것입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한
장기臟器기증 무릇 생명체는 태어날 때 받은 몸으로 한 생애를 살다가 영혼이 떠난 육체는 다른 생명체의 먹이가 되거나 한 줌 흙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죽음 후에도 자신의 몸의 일부를 필요한 사람에게 주어 생명을 연장시켜 줄 수 있는 길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장기기증이다. 장기기증은 생존자끼리도 가능하지만 대게는 우리 몸에서 영혼이 떠난 후, 즉 뇌사(腦死) 상태에서 장기를 적출하는 사후기증이다. 잠시 다른 나라의 장기기증 정책을 살펴보았다. 외국의 장기이식 현황 스페인은 국가적으로 국립병원을 통해 장기기증 관련 의료인을 양육해서 코디네이터로 활용하며, 프랑스는 매년 6월 22일을 “장기기증의 날”로 정하고 장기 기증을 거부하지 않는 국민은 모두 기증 서약자로 간주하는 적극적인 정책을 펴고 있으며, 미국은 대부분의 주(州)에서 운전면허증을 교부 할 때 기증 여부를 물어서 기증동의자는 면허증에 기록한다. 2013년 통계에 의하면 미국 국민의 48%가 장기기증 서약자이다. 국내 장기이식 현황 우리나라는 1991년에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박진탁 이사장)가 결성되어 2014년 말까지 3,770건의 장기 이식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2015년 말 현재 대기자가 26,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합의된 갈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 구조가 다양해질수록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열심을 다해 살아왔습니다. 그 결과로 성공의 달콤한 열매를 맛보며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독교 안에서조차도 교회나 교단행사에서 누구누구는 성공하셨다고 침이 마르도록 축하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가하고 부러워하는 그 성공이 참된 성공인가? 우리 속담에 관 뚜껑을 닫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논하지 말라는 말처럼 우리가 평가하는 성공이 진정성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감히 성공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존재인지? 성공이라는 결과물의 실체가 무엇을 말하는지? 성공이란 한 사람이 이루어낸 업적인가 아니면 사람들로부터 받는 갈채인지 그 사람의 명예나 경제적인 풍요인지? 만일 이런 것의 성취가 성공이라면 이것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성공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니 모세야 말로 성공한 인물로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12
2006년 이용규 선교사님의 “내려놓음”이라는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어디를 가나 “내려놓음”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보거나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내려놓음”은 내가 내려놓으면 그때서야 내 삶에 하나님께서 어떤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 인도하시며 역사하시는 지를 깨닫게 되는, 우리가 다 알고는 있지만 막연히 실천이 잘 안되는 부분에 대한 강한 도전이 되는 책이라고 다들 감동의 얘기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내려놓음”은 비기독교인들에게도 많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 “내려놓음”으로는 부족함을 아셨는지 속편 형식의 “더 내려놓음”이 2012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내려놓음”의 참된 본질과 의미를 실질적으로 묘사하면서, 실제로 어떻게 “내려놓음”을 실천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거기에 대한 오해도 풀어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근본적으로 이 “내려놓음”이란,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자아가 죽음을 맞이하고 하나님으로 우리 안을 가득 채운다는 의미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 우리 안이 가득 참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우리 삶에 흘러나오는 우리의 언행심사가 바로 “내려놓음”의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하
2. 신령주의자들 “신령주의자들”(Spiritualists)은 신앙생활의 권위를 성령(Holy Spirit)님께 두었다. 성경 말씀보다도 성령님의 조명과 직통계시를 보다 더 중요한 권위로 인정하면서 역동적인 신앙을 중요시하였다. 자연히 이들은 지상의 가시적인 교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고, 위기적인 시한부 종말론에 집착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신앙은 자칫 감정주의(Emotionalism)와 신비주의(mysticism)와 극단적 주관주의(extreme subjectivism)에 빠지곤 하였다. 또 이들 중 일부는 당시의 피압박계층이었던 농민들이 폭동이나 전쟁을 일으킬 때 선두에 서서 지휘하기도 하였고, 무력을 동원하여 이 지상에 천년왕국을 건설하고자 기도하기도 하였다. 독일 농민전쟁(German Peasants' War, 1524~1525)이나 뮌스터 폭동사건(Muenster Revolt, 1534~1535)도 이런 부류의 시한부 종말론에 빠졌던 극단적인 신령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불미스러운 사건이었다. 이 부류에 속하는 신령주의자들로는 토마스 뮌쩌(Thomas Muenzer, 1490~1525), 니콜라스 스토르크(Nicholas Storch)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와 화육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성은 먼저 하나님의 아들로 제시되었다. 하나님은 그가 계획하신 역사의 때에 그의 아들을 세상에 내보내시되 여자를 통해 태어난 한 인간이 되게 하셨고 율법의 백성 중 한 사람이 되게 하셨다(갈4:4). 바울은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성에 담긴 독특한 국면 곧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성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존재로서는 다윗의 혈통으로 태어나셨으며 하나님이 다윗과 맺으신 약속의 성취로 오신 그리스도이시다(롬1:3).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성결의 영이라는 하나님의 존재로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권능과 생명과 영광의 존재로 변형되신 분이다(롬1:4).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존재로 사셨던 분이면서 동시에 지금은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과 생명을 가진 분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제시함에 있어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바울은 기독론적 찬송시(빌2:6~11)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성에 관한 전체적인 국면을 제시한다. 바울은 여기서 선재, 화육, 십자가, 부활, 그리고 승귀(영광의 올리우심)로 표현되는 신학적 개념을 사용하여 예수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지만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소중한 단 한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모리야를 향해 짐을 지고 올라가던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22:7)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22:8). 이삭은 비록 나무는 자기 등에 지고 갔지만 자기 자신이 제물로 바쳐져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갔습니다. 그래서 자기 말고 다른 제물을 찾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오지만 자신을 제물로서 드리지 못하고 다른데서 제물을 찾고 있는 우리가 현대판 “이삭”입니다. 바울사도는 “형제들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자기를 제외한 다른 제물만을 구하면서 다른데서 찾고 있습니다. 만일 한국교회가 자기를 제물로 하나님께 기꺼이 내어 드렸다면 지금의 현실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제물되지 못하고 살 궁리만 했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침체를 불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 살던 고장에는 산우리, 새신바우, 안골, 장수바우, 아치나리, 방갓, 여우골, 거촌, 무섬 등의 마을과 지역 이름이 있었다. ‘산우리’는 산울타리라는 의미, 거촌(居村)은 사람이 사는 마을, 장수바우는 마을 입구 언덕에 큰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 아치나리는 작은 시내를 뜻한다. 방갓은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이 부모를 여윈 죄인으로서 하늘을 볼 수 없다 해서 일정 기간 쓰고 다니던 대나무를 쪼개 만든 삿갓이다. 방갓은 방갓장이들이 모여 살면서 생긴 마을일 것이다. 무섬은 마을 둘레로 물이 돌아나가는 ‘물돌이 섬[마을]’이라는 뜻인데 한자를 병용하면서 수도리(水島里)가 됐다. 일찍이 설총의 이두(吏讀, 또는 鄕札)의 영향을 받아 땅과 마을 이름이 많이 변형되었으나 지명의 차음(借音)과 차훈(借訓)을 따라서 양지마을을 양촌리(陽村里)로, 음지마을을 음촌리(陰村里)로 바꾸고, 까마귀고개, 또는 까막재는 까마귀 오(烏) 자와 고개 현(峴) 자를 써서 오현(고개)라고 쓰는 등 이해하기는 좀 어려워도 본뜻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는데 일본어식 표기가 사용되면서부터는 의미가 전도(顚倒) 되는 경우가 많았다. 뜻이 뒤바뀐 땅 이름 작은 논(땅)
1. 갈릴리 바다와 사해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행20:35) 30년 전 성지순례에서 우리 일행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텔아비브에 내려 성도인 예루살렘을 보고 여리고에 내려가 이어서 맛사다를 보고 사해에서 쉬었다. 들은 대로 몸이 바다위에 뜨는지 속옷 입은 채로 수영하러 들어가는데 가이드는 말렸다. 눈에 소금물이 들어가면 큰일 나니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양해를 구하고 수경을 끼고 들어갔는데 처음이라 수영하기가 만만치 않아 하늘을 보고 누어 팔과 다리를 벌리고 조금씩 움직여도 부력으로 둥둥 뜬 몸은 잘 나아갔다. 우리는 이어서 요단강변 길을 따라 갈릴리 바다(게넷사렛 호수 또는 디베랴 호수)에 이르렀다. 울창한 숲과 만년설로 덮여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의 국경이 되는 해발 2814m의 헐몬산에 내린 비나 눈이 녹으면 계곡을 따라 가이사랴 빌립보를 지나 갈릴리 호수에 이른다. 갈릴리 호수는 분화구로 추측되는 곳으로 물이 고였다가 그물을 요단강을 따라 사해로 내려 보내주기 때문에 갈릴리 호수는 살아있는 바다로 미생물이나 플랑크톤 및 각종 물고기들이나 이끼와 수초가 번식하지만 사해는 지중해 해저
사도행전의 핵심 역시 예수님의 부활 복음서와 함께 사도행전에 수록되어 있는 사도들의 설교와 선교 이야기 속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그 주된 내용으로 되어 있다. 베드로의 반복되는 설교 속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었다(행 2:14~36; 3:15; 10:40~41). 바울의 설교 가운데 부활은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행 13:36~38). 심지어 부활을 도무지 믿지 못하고 어리석은 일로 여기는 스토아학파나 에피큐리안학파의 사람들에게도 굳이 그는 부활을 강조하여 설교하였다(행 17:18, 31).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설교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죽어간 순교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역사서 다음에 수록된 바울서신(로마서부터 빌레몬서까지)이나 히브리서와 일반서신은 예수님의 부활을 그 전제로 두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바울신학의 기초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서 부활 신앙을 세 가지를 적용하고 있다. 첫째로, 예수님의 즉각적인 다시 오심(imminent parousia)이다. 바울의 두 번째 부활 신앙의 적용은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께서 지금 교회 안에 내주 하셔서 성도들이 의롭게 살도록 격려하며 힘을 주신다는 그의 확신에 있다. 이 내용은
3. 종교다원주의 모판, 종교다원화 현상 선전 동성애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종교다원주의와 종교다원화 현상은 어떤 관계인가? 종교다원화 현상은 우리 시대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지속한 사회적 환경 중의 하나이다. 한국 사회도 오랫동안 종교다원화 사회였고, 이스라엘을 둘러싼 문화도 마찬가지였다. 종교다원화 현상이 우리 시대의 산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를 마치 이 시대에 발생한 독특한 하나의 사회적인 현상처럼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럴까? 종교다원주의는 종교다원화 현상 주장과 밀접한 관련을 한다. 그런데 일부 그리스도인은 평화, 사랑, 대화와 같은 어감이 좋은, 긍정의 의미를 주는 용어들에 현혹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종교다원주의자가 되어가면서 표면적으로는 종교다원화 현상을 말할 뿐이지 종교다원주의자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또는 각 종교가 나름대로의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일 뿐이며, 이를 믿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자신이 무엇을 지지하는지를 모르거나 아니면 종교다원화 현상을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의 틀(frame)에 빠져서 그 실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종교다원주의는 먼저 종교다원화 현상이라는 사회 구조를
한국보건산업연구원의 불임 실태에 대한 2013년 표본조사에 따르면 기혼부부중 13.5% 즉 부부 일곱 쌍 중 한 명이 불임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유는 결혼 연령이 늦어지고 공해와 오염 등으로 인한 생리적인 변화등과 각종 스트레스로 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특별한 이유나 목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아기를 갖는 게 축복인 시대가 되어가고 있음을 봅니다. 그만큼 임신과 출산이 만만치가 않은 세상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목이 타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하갈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마엘로 인하여 사라는 온갖 서러움을 자신의 몸종에게 받고 있었던 터였기 때문입니다. 하갈은 자기가 임신한 줄 알게 된 때부터 사라를 노골적으로 무시했는데 이스마엘을 낳고 14년 동안 얼마나 자기 주인 사라를 힘들게 했겠습니까? 그러던 차에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말씀하신대로 돌보시고 행하심으로 약속의 아들로 성령을 따라 난 이삭(이쯔하크)을 주신 것입니다(갈4:28~29). 하나님은 인간과 다르셔서 한 번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고 실행하시며(민23:19) 변개치 않으시고 거짓말 하지 않으십니다(삼상15:29). 그리고 후회하지 않으십니다(롬11:29). 솔직히 말하면 저를 비
고전적 성경 해석 원칙 가운데서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것은 점진적 계시라는 대 전재 위에 제시한 E. J. 카아넬의 “다섯 가지 규칙”으로 보인다. 첫째,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해석한다 바울은, “율법은 장차 올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온전한 계시가 나타날 때는 그림자는 사라지고 원형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히10:1상). 그림자의 원형은 계시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이다. 이 원칙을 무시하고 여전히 구약성경을 온전한 계시로 믿는 자들에 대하여 바울은,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하고 탄식했다(고후3:15). 수건을 벗으려면 주께로 돌아가야 한다(16절). 둘째, 서한이 복음서를 해석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시면서,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라]”하고 말씀 하셨다(요16:12-13). 복음서는 성령이 오시기 전에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말씀이나 서한은 그 성령께서 오신 후에 기록된 말씀이다. 예언은 그것이 성취될 때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