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글사형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아주 오래된 형벌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언제부터 사형이 시작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다만 인간이 역사를 기술하기 이전, 특히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법률을 적용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고 추측할 뿐이다. 국제엠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의 2008년 사형관련 통계에 의하면, 2008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2,890건의 사형집행이 있었고, 이중 72퍼센트가 중국에서 발생했다고 발표했다.한편, 유럽에서 사형 제도를 존치하는 국가는 벨라루스(Belarus) 뿐이다. 국제엠네스티 아이린 칸(Irene Khan) 사무총장은 “사형 제도는 궁극적으로는 잔인하고 비인도적이 거나 굴욕적인 형벌이다. 참수형, 전기의자형, 교수형, 독극물주사, 총살형, 투석형 등은 21세기에 더 이상 존재할 여지가 없다”라고 밝혔다.우리 사회에도 사형제도 폐지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2001년 이후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천주교가 주도하기 시작한 사형제도 폐지 운동에 개신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 유교 등이 참여하면서 이 운동은 범 종교운동의 하나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사형제도는 종교뿐 아니라 사회, 정치,
1. Calling과 Mission소명과 사명을 혼동할 때가 많다. 소명은 하나님의 부르심(God’s calling)이다. 사명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God’s given mission)이다. 소명의 중요함은 ‘누가 불렀냐’ 이고, 사명의 중요함은 ‘무엇을 맡기셨냐’ 이다. 소명과 사명의 좋은 예로 베드로를 들 수 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라’ 라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이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라는 것은 하나님의 맡기신 사명이다. 그러므로 소명은 내가 왜 여기 있는가? 라는 질문의 답이 되고, 사명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의 답인 것이다.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Charis)이다. 왜냐하면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택이 소명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은사(Charisma)를 주신다. 2. 영성 리더십의 소명소명은 리더를 흔들리지 않게 한다. 리더에게는 리더만이 갖게 되는 어려움과
일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12:1-4은 A씨리즈에서 사순절 두 번째 주일에 사용되었지만 A씨리즈 일반 주일 다섯 번째 주간에 제시되고 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도 C씨리즈의 일반주일 두 번째 주간에 나오는데 12주 후 일반주일 열네 번째 주간에 다시 나온다. 이와같은 지적은 향후 개정 표준성구집의 다각적인 연구와 새로운 구성의 필요성을 요청한다. 4. 교회력과 성구집을 활용한 설교 자료들교회력과 성구집을 활용한 설교를 실행하려면 기본적인 자료가 요청된다. 가장 기본적인 자료는 “성구집”이다.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개정 표준성구집’은 3년을 주기로 1년 52주에 해당하는 구약의 말씀, 서신서의 말씀, 복음서의 말씀, 그리고 시편의 말씀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나 이한진은 성구집 자체만으로는 교회력과 성구집을 활용하여 설교하고자 하는 설교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현재 국내에서 출판되고 있는 두 개의 자료를 소개했다. 그중에 첫째는 ‘예배와 설교 핸드북’이다. 이 책은 현재는 한일장신대학교 정장복 총장이 1984년 장신대학교 예배 설교학 교수로 재직 중일 때부터 “표준성구집
필자는 사도 바울이 부활의 예수를 만난 체험을 통해 부활현현의 체험과 부활신앙의 관계를 살펴보고 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사울의 체험을 세 번이나 제시했는데, 그 체험담은 부활의 예수라는 초월자의 존재를 보고 듣는 묵시적 체험의 형태로 제시됐다. 사도행전 9장에서 누가는 사울의 체험을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비취고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시청각적 체험으로 제시했다누가는 또 아나니아가 주님의 명령을 받고 사울을 찾아가 주님의 소명을 전달하는 과정에 관한 묘사에서 “다시 보다”라는 동사를 세 번이나 사용하여 사울의 체험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에게 보이신(나타나신) 부활현현 사건인 것을 제시한다. 사울은 이 체험을 통해 바리새파의 전통에 의해 그의 의식세계를 가리고 있었던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며 “다시 보는” 극적인 내적인 변화를 갖게 됐다. 사울은 이제 부활의 예수를 인정하게 되었고(빌 2:9~11), 나아가 그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님으로 영접하게 됐으며(롬 10:9), 그리고 그 예수를 중심으로 하나님과 세계와 존재를 다시 보게 됐다(고후 5:17).누가는 사도행전 22장에서 사울의 체험에 대한 두 번째 묘사를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의 체험담을 말하는 간증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사무엘하6:21~22)찬양자를 비난하는 미갈을 향해 다윗이 당당하게 반론을 폈던 이 선포적 예언 속에서, 두 번째로, 진정한 찬양과 경배의 핵심은 기억과 감사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찬양은 찬양의 대상을 높이며 자랑하며 인정하는 것이다. 경배는 높이며 자랑하며 인정하는 대상에게 완전히 굴복하는 것이다. 찬양의 본질인 높이며 자랑하며 인정하는 것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칭송’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칭송은 공개적인 것이 원칙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까지 감안한다면 비공개적인 것도 가능하다.무엇을 칭송하는가? 간단하게 말한다면 찬양받으실 분의 역사와 능력과 속성이다. 찬양받으실 분의 역사와 능력과 속성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들음과 체험이다. 들음은 로마서10:17에 기록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신 것과 같이 주님에 관한 기록인
2. 성구집을 활용한 설교매주 교회력을 중심한 예배에서 성구들이 봉독될 때, 설교자는 그 가운데 하나의 성구를 택하여 설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설교 계획은 다양한 면에서 권장된다. 성구집을 활용한 설교의 유익한 점으로는 다음의 내용들을 포함한다.첫째, 성구집은 짜임새 있는 설교 계획을 가능하게 한다. 효율적인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 목사라면, 좋은 설교는 급조되지 않으며 적절한 시간 속에서 성숙됨을 알 것이다.성구집을 활용할 때 설교자는 이미 준비되어 있는 성구들에 대하여 미리미리 설교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확보한다. 충분한 시간을 통하여 준비되는 설교는 설교자의 깊은 묵상과 폭넓은 자료 수집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보다 질 높은 설교를 창출해 내게 한다.하나의 설교는 설교자의 가슴에서 되새겨지고 먼저 감동됨으로서 완숙한 내용으로 준비된다. 토요일 아침에 설교 본문을 찾아 서둘러 준비된 설교는 이미 계획된 본문을 가지고 설교자의 가슴과 생각 안에서 숙성되어 나온 설교와 질적으로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나아가 성구집을 사용하면, 설교자는 본문을 찾기 위한 시간 낭비를 없애고 효율적인 설교 준비에 집중할 수 있다.둘째, 설교자로 하여금 본문 중심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사무엘하6:21~22).법궤가 다윗성에 무사히 이송됨으로 인하여 기쁨의 찬양으로 충만했던 다윗이었다. 하지만 찬양의 열정으로 뜨거웠던 그를 향해 부정적인 말과 어투로 힐난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아내 미갈은 영적으로는 여전히 어린 아이와 같은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에 다윗의 마음을 충만하게 채우고 있었던 하나님의 영은 다윗으로 하여금 미갈을 향해 강력한 교훈의 입을 열게 하셨다. 다윗이 미갈을 향하여 선포했던 이 말씀은 촌철살인의 예언적 설교로 손색이 없다. 이 말씀은 미갈 뿐만 아니라 찬양에 무지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유익한 교훈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첫 번째로, 진정한 찬양과 경배는 영적인 시야가 열린 자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육신의 눈은 믿을 게 못된다. 프리즘이라는 장치가 없으면 빛 속에 담겨 있는 여러 가지
성구집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그 역사를 같이 한다. 성구집의 낭독은 초대교회 시대부터 전통적인 기독교 예배의 한 부분이었는데 4세기 경 교회는 교회력을 따르면서 성경 본문을 준비하여 예배시에 봉독했던 것이 관찰된다. 그러나 종교개혁 때 일부 교회들이 교회력과 전통적인 성구집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산물이라 간주하여 이의 사용을 배제했다. 금세기에 와서야 교회는 성구집이 기독교 유산의 소중한 것임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성구집의 역사는, 유대 회당에서 사용된 것부터 고대, 중세 교회를 거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퍼져있다. 현대 성구집은 3년 주기 성구집으로서 “개정 표준성구집”이다. 현대 교회는 종교 개혁 정신이 약화되고, 청중의 다양한 문화적 필요에 대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부응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전통적인 교회력과 성구집의 지침을 따르기보다는 그때그때의 상황에 대처하거나 청중의 필요를 주제를 고려하여 설교하는 것을 선호하게 됐다. 현대교회가 성구집에 입각하여 설교계획을 세우는 것은 교회의 전통을 되새기고 부활시킴과 동시에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회복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2. 성구집의 역사 1) 유대교 회당 시대: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필자는 기독교인들이 가진 부활신앙 곧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에 믿는 믿음(롬 10:9)이 부활현현의 체험이라는 하나님의 계시의 결과로 주어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라는 주제에 집중해 거기에 담긴 신학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부활현현의 체험을 부활의 주님께서 여러 증인들에게 ‘보이신’ 사건으로 제시했다(고전 15:5~8). 그것은 하나님이 부활하신 주님의 존재를 여러 증인들에게 보여주시는 계시의 결과로 인하여 그들에게 ‘보이신’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부활의 주님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초월적인 계시 행동이 먼저 있었고 그 결과로 사람들은 그 계시를 받아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초월의 존재를 “보게 되는” 시각적인 신비의 체험을 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그 체험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갈 1:12) 혹은 “하나님의 계시”(갈 1:15~16)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그 체험의 결과로 부활의 주님을 깊이 인정하고 인식하게 됐으며 그 체험을 자기의 사도직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는 그의 사도직이 의심을 받을 때마다 그 체험의 결과로 갖게 된 복음의 확신과 전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주님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주님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주님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주님의 쉴 곳 없네.”최근 교회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성도들과 함께 불렀던 이 노래가 여전히 내 마음과 입술에 맴돈다. 왜일까? 이 노래만 읊조리면 높았던 마음도 금세 낮아지고, 욕심 가득찬 마음도 왜 텅 비어지는 것 같을까? 아무래도 이 노래에 무슨 마력이 있는 듯하다. 하덕규 집사가 지었다는 이 노랫말은 무엇보다 지금의 내 마음을 정확히 집어낸다. 노랫말 하나에 여지없이 내 마음을 들킨다. 정말이지 난,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실 자리마저 뺏을 만큼. 알량한 자존심과 고집과 교만이 목회자 마음에 먼저 채워져야 할 풍성한 주의 은혜를 다 밀어낸다. 심지어 주일 아침조차도 오늘 우리 공동체에 주실 하나님의 은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기독교회는 예배 갱신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예배 현장에 두 가지의 변화가 시도됐다. 하나는 예배에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따라 말씀과 성찬의 균형이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기 후반에 들어 나타난 변화로서 성구 봉독과 설교가 예배의 핵심 요소로 자리잡게 된 것이었다. 설교가 예배의 핵심 요소로 자리하면서 현장 목회자들에게 설교는 그들 사역의 중심이 되었다. 매주 주일 아침 예배를 비롯한 주요 예배들과 새벽예배, 철야예배, 그 외 특별 예배 등등으로 수많은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목회자 입장에서 균형잡힌 설교사역을 위한 설교계획은 매우 중요한 관점으로 부각됐다. 물론 목회자들은 설교 준비를 위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할 수 있지만, 그에 앞서 어떤 특정한 설교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효율적인 설교 사역을 위한 설교자의 지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특정한 설교 계획이 수립되어 있지 않은 목회자에게 ‘다음 주일 설교 본문을 무엇으로 정할 것인가?’라는 생각은 언제나 사역의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 목회자들의 설교사역을 돕는 설교계획 방법에는 몇 가지가 고려될 수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교회력
필자는 기독교인들이 가진 부활신앙이 부활현현의 체험에 기초한 것으로서 사람에게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혹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라는 것을 제시했다. 이것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롬 10:17)라는 사도 바울의 교훈에서도 제시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원어로 ‘레마’인데, 이 레마는 기록된 계시의 말씀이 감동과 능력으로 다가오는 생동적인 말씀을 가리킨다. 곧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레마”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하여 선포되는 감동된 말씀을 듣는데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레마” 곧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감동의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는 것이다.사도 바울은 그가 전파한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전 15:3-4)라는 것이며 그 부활하신 주님의 현현을 체험한 사람들의 명단을
이탈리아에서 유학했던 친구가 어느 늦은 밤에 자동차에 기름을 넣으려고 주유소를 찾았던 적이 있다. 밤이 깊어 다른 곳은 문을 다 닫았고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열려 있던 셀프주유소를 찾았다. ‘5만리라’를 현금투입구에 넣은 후 기름을 넣고 있는데 기름통이 넘치기 시작했다. 그 당시 ‘5만리라’면 기름통의 약 절반 정도밖에 채울 수 없는 금액인데 이상하게 흘러넘쳤다. 아뿔싸. 경유주유기를 들고 휘발유주유기로 착각했던 것이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경유를 가솔리나(Gasolina, Gasolio)로 부르고, 휘발유는 특별히 벤지나(Benzina)라 부르므로 주의가 요망된다. 휘발유차에 경유를 가득 넣었으니 초비상이 걸린 셈이다. 당장 차를 뒤집어서 기름을 다 토해내야 하는데 새벽 1시에 도와줄 직원이 있겠는가? 불행 중 다행으로 이미 밑에 조금 깔려 있던 휘발유 덕분에 기적적으로 차의 시동은 걸렸다. 길길거리는 소리를 내며 집까지 돌아왔다. 하지만 그 차는 며칠 뒤 고속도로에서 엔진이 눌어붙어 완전히 죽어버렸다. 휘발유차에 경유를 넣었던 그날 밤의 사건으로 인해서 바로 그날 낮에 맛보았던 뜨거운 영적 체험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밀라노한인교회의 임마누엘찬양선교
6. 교회의 목적 성취에 비추어 프로그램을 평가하고 그 결과를 교회에 보고한다.교회협의회는 교회 사역의 질적 발전과 향상을 위해 부단히 각 프로그램들을 평가하고 보완되거나 계속 격려할 사항들을 파악하여 다음 연도의 계획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핸드릭스(Olan Hendrix)는 “경영 통제의 한 정의는 ‘사역의 진행과 그것의 완성을 점검하는 일’이다.…어떻게 우리가 진행 중인 사역을 누군가가 점검하고 조정하는 책임을 지지 않은 채 계획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하겠는가?”라고 언급하면서 교회협의회의 평가기능을 강조한다.이상과 같은 임무와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파워스(Bruce P. Powers)가 지적하는 교회협의회의 임무들은 추가적으로 고려할만한 사항들이다. 비록 그것들이 앞서 언급한 기능들 중에 포함되긴 하지만 별도의 항목으로 고려함으로써 더욱 충실한 교회협의회의 기능수행이 가능해질 것으로 믿어진다. 그것들은 첫째, 교회로 하여금 그 사명을 이해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도록 돕는다. 둘째, 교회와 지역사회의 필요 연구를 조정한다. VI. 교회협의회의 운영대부분의 경우 목회자는 교회협의회의 회장직을 맡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회의는 회장의 회
담임목회로만 쳐도 벌써 20년째 맞이하는 주일이다. 하지만 주일을 맞는 목회자로서의 마음은 여전히 매주일 특별하다. 반드시 승부를 걸어야만 하는 결전을 앞둔 최전방 장병 마음 같다고나 할까? 무척이나 두렵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맛난 음식을 열심히 준비하는 주부 마음 같다고나 할까? 흥분도 되고 신도 난다. 마지막 해산을 앞두고 숨을 고르는 분만실의 산모 마음 같다고나 할까? 기대와 긴장이 교차된다. 타향에 갔다가 명절 되어 고향을 찾아오는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 마음 같다고나 할까? 그렇게 설렐 수가 없다. 준비는 늘 부족한데 날짜만 벌써 내일로 다가와 버린 시험을 앞둔 수험생 마음 같다고나 할까? ‘과연 잘 치를 수 있을까’하는 마음에 사뭇 초조하다. 각종 사고와 질병으로 고통하며 ‘나 좀 고쳐달라’며 찾아온 환자를 맞는 의사 마음 같다고나 할까? 어떻게든 그들을 말씀과 성령으로 치유해주고픈 심정이다. 그러니 이 마음을 누가 알까? 오직 주님만이 아신다. 매 주일 이 마음을 누가 진정시켜 주실까? 오직 주님만이 진정시켜 주신다. 이 긴장과 흥분과 설레임과 초조함과 두려움과 간절함을 주님이 아시고 오늘도 멋지게 사용해 주신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