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간첩’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들리게 됐었는데, 최근 소위 이석기 의원 내란 음모 사건을 통해 옛 기억들이 다시 나의 삶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민혁당을 만들어 주사파의 대부로 불리다 전향한 김영환 씨는 이석기 같은 사람들이 전국에 약 1천 명 정도 더 있다고도 하니 숨이 좀 막힌다. 실제로 이석기 의원이 보여준 그간의 행동들이 내란 음모였는지는 앞으로 검찰과 법원의 판결을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작금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국민입장에서 지극히 염려가 된다. 이는 진보와 보수의 대립, 갈등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보수가 있는 한 진보는 존재한다.그러나 진보주의와 종북주의는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이 둘이 마치 하나인 것처럼 인식되어 왔다. 그것은 진보세력과 종북세력 모두 민주라는 이름아래 서로의 목적을 위해 합종연횡 한 결과다. 이번 사태로 어정쩡한 두 부류가 선명하게 분류되기를 희망한다. 보수만이 옳은 것이 아니다. 보수를 견제하고 보수를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진보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진보가 보수를 무조건 비난하고 반대 방향으로만 나간다면 오늘과 같은 종북에게 먹혀 버리는 꼴이 될 것이다.북한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옳은
한국의 많은 교회가 예배 중에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을 고백하고 있다. 요즘은 우리 교단에도 예배 중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가 늘고 있다. 침신대 모 교수의 논문 발표에 의하면 사도신경을 사용하는 교단 교회수가 30%가 넘었다는 통계를 제시했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신앙으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언급하자니, 답답하다 못해 가슴이 조여 온다. 기도하면서 이 글을 쓴다. 그러나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 이 글을 통해서 사도신경의 유래와 역사, 그리고 과연 사도신경의 내용이 얼마나 성경적 믿음과 일치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의 내용을 두 번에 걸쳐서 나누어 쓰고자 한다.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들은 왜 사도신경을 믿음의 고백으로 인정할 수 없는가? 첫째, 익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사도신경은 열 두 사도들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사도신경은 로마 카톨릭의 산물이요 유산이기 때문이다. 셋째, 사도신경은 참 성도들의 믿음을 충분히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 사도신경은 천주교와 신약교회를 함께 묶으려는 종교통합운동(Ecumenical Movement)의 매개체이기 때문이다.로마 카톨릭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무더운 여름, 산에 오르면 산기슭이나 골짜기에서 자라는 늘 같은 자리에서 든든히 서 있는 나무들의 변함없는 모습에 마음이 머문다. 봄에 새순이 돋아 연초록의 작은 잎들이 뜨거운 태양볕에 푸른 잎의 싱싱함을 드러내고 서 있는 물푸레나무. 이름의 느낌처럼 푸르고 싱그러움이 눈이 부실 지경이다. 가지를 꺾어 물에 담그면 푸른 물이 우러난다고 해서 붙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새로 자란 가지 끝에 작은 꽃이 피고 가을에는 갈색의 열매를 맺는다.산에서 자라고 혼자서 있는 나무들도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나무의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자신이 나약해지고 현실이 가혹해져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인생의 물음이 바로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이다.조엘 오스틴 목사는 ‘최고의 삶’에 대해 “믿음이 이긴다, 이제 믿음으로 당신의 시대를 열어라”로 이시대의 상심한 이들에게 일상생활에서 희망의 메시지로 그의 저서를 읽는 동안 믿음과 용기로 충전 하는 상황도 있었다.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보느냐 하는 관점에서 그 사람의 그림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같은 상황의 문제라도 부정적인 마인드로 보느냐, 긍정적인 마인드로 생활하고 있느냐에
새 정부 출범 6개월을 앞두고 발표된 세제개편안으로 인하여 전국이 들썩이고 있다. 특히 중산층에게 집중적으로 적용된 세제개편안과 증세는 대통령의 국정 수행능력에 대한 지지율까지 떨어뜨렸다. 급기야 정부는 국민 절반 이상이 반대하는 세제재편안과 증세에 대한 세 부담 기준선을 상향 조정하는 땜질 처방을 내놓았지만, 이미 돌아선 민심은 돌이킬 줄 모르고 연일 들끓고 있다. 야권은 마치 물이라도 만난 듯 어색한 몸짓을 촛불 아래서 남이 하면 스캔들 내가 하면 로맨스를 맘껏 즐기며 안중에 국민이 없기는 매 한가지다.복지와 세금은 불가분의 관계인데, 복지는 외치고 증세는 비난한다. 그렇다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복지는 원하지만 증세는 싫다는 것이 오늘 21세기를 사는 한국인의 정서다. 물론 여기에는 정부의 책임이 제일 크다. 상당수의 국민들은 복지와 관계하여 세금증세의 필요성을 인정 하지만 과세 대상과 적용에 대한 불합리한 형평성에 대해선 분개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작금의 사태는 복지와 세금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하는 시발점이 되었다는데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이번 세제개편안에 종교인 과세가 포함됐다. 그동안 갑론을박하며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알베르 까뮈(Albert Camus)의 소설, ‘이방인(L’Etranger)’의 첫 문장이다. 주인공 뫼르소가 한 말이다. 요즘 조국교회에 상식이 죽었다. 신앙은 기적이지만, 신앙생활은 상식이다. 은혜만 되면 되는 게 아니다. 많이만 모으면 정통(Orthodox)이 되는 게 아니다. 전통(tradition)이라고 다 맞는 것이 아니다. 익숙하다고 올바른 것도 아니다. 말에는 숨이 있고 글에는 혼이 있다. 누구나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시대이지만, 특별히 목사는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다. 말과 글을 어법에 맞게 쓰는 것은 예의요 상식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다. 원래는 경제논리이지만 나쁜 것이 많아지면 좋은 것이 사라진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교회용어가 그렇다. 교회나 예배에서 쓰이는 용어가 국문법에 맞지 않는 것이 많다. 문제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10년 전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바로 쓰기를 하고 있다. 예배나 교회모임에서 대표기도는 기도인도로, 중보기도는 중재기도(이웃을 위한 기도)로, 사회자는 인도자로, 대예배는 주일아침예배로, 헌금은 봉헌으로, 축제는 잔치로, ‘기도드렸습니다’는 ‘기도드립니다
심리학자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게 되었다. 담임 선생님이 자기 반 아이 중 한 명을 무작위로 선택해서 의도적으로 계속 칭찬을 하게 했다. “너 요즘 공부하는 자세가 좋아졌어. 공부에 재미를 붙였나봐. 너 다음달에 틀림없이 성적이 오를 거야. 요즘 아주 잘하고 있어요” 두 세달 후 그 학생은 정말 성적이 향상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작년 11월 하순 KBS 뉴스에 보도된 내용이다. 프로축구 ‘황선홍’감독이 이끄는 포항팀 숙소에 드나드는 입구에 고구마를 담아둔 컵 두 개를 비치해 놓았다. 한 고구마 컵에는 선수들이 오가며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말을 하게 했으며, 나머지 고구마 컵에는 기분 나쁜 말과 저주스런 말을 하게 했다. 두 달이 지난 뒤 결과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칭찬과 격려를 한 고구마는 고구마 순이 무성하게 잘 자랐으며, 나머지 기분 나쁜 말과 저주스런 말을 한 고구마는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금년 6월 동아 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삼성 중공업 거제 조선소 건조팀 사무실 책상에 양파를 컵에 담아 놓았다. 물이 담긴 컵에 하나는 “기분 좋은 말”이라는 쪽지를 붙였고, 다른 한 컵에는 “기분 나쁜 말”
지난 6월 1일, 미국의 한 공립학교 졸업식에서 일어났던 놀라운 일이다. 적어도 우리로서는 감동 그 자체였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피켄스 카운티의 리버티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였던 로이 코스트너 4세가 “어렸을 때부터 나를 하나님께 인도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내가 말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다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후 졸업식 대표로 준비했던 고별사를 연단에서 찢어 버린 다음, 큰 소리로 주기도문을 암송했다. 이에 졸업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로 화답했다. 리버티 고등학교를 비롯한 피켄스 카운티 학군의 공립학교들은 “종교로부터의 자유 재단”이라는 단체의 압력으로 지난 학기부터 공식 행사에서 기도를 금지했었다. 이에 대하여 코스트너 4세가 항의를 하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그는 모 방송 인터뷰에서 “학교에서 기도를 몰아낸 것은 내가 겪은 최악의 일이었다”며 “나는 하나님을 옹호하고 싶어 졸업식에서 주기도문을 암송했다”고 했다. 어떤 이는 미국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들이 특별한 일이겠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유신론(theistic) 시민 종교(civil religion) 전통 위에 설립된
여름이 시작되면서 분주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휴식을 떠오는다면 그건을 바로 ‘여름휴가’를 먼저 생각할 것이다. 육체의 회복을 위해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제일 먼저 ‘여행’을 생각해본다.요즘 아침 출근길의 기차안이나 전철에서의 풍경은 ‘내 손안의 스마트폰’이 인간의 편리함속에 혼잡한 세상의 조급함속에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노인들이 가끔 젊은이들에게 전철역에 대하여 묻고 있어도 모두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있어 누구 하나 대답하지 않는 세상이 됐다. 모두들 귀를 이어폰으로 막고 음악이나 자기의 세계에 빠져있기 때문이다.영성운동가인 리처드 포스터는 그래서 “분주함이 이 시대의 대적”이라고 말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말씀하셨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진정한 ‘쉼’은 무엇일까? 고민해 보아야할 과제가 아닐까 싶다.우리의 일상에서 뉴스들이 우리에게 힐링의 역할을 할 때가 있다. 침례병원이 부산 초량에 있을 때, 병리과장으로 경북의대 출신이신 허만하 박사가 재직하고 계셨는데 부산문단에서는 유명하신 시인으로 활동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허 박사가 얼마전 대한민국 예술
강단에서 설교하는 목사의 모습이 피곤해 보인다든가 목소리가 피곤하면 성도들도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목회도 갖출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몸을 관리하지 못해 피곤으로 겹쳐 신병이 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미련한 소치이다. 그래서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며 적당한 운동으로 체력관리를 스스로 해야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러나’이다. 그러나 온전한 괘도에 진입하기 전에 있는 교회를 부흥성장 시켜야 할 교회에서 담임으로 있는 목사는 시합을 위한 운동보다는 목회를 위한 운동, 건강을 위한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와 가깝게 지내는 목사님이 계시다. 연배와 선후배를 떠나 개인적으로는 그 분의 여러 가지 면을 존경한다. 그러나 그 분의 단점은 운동을 너무 좋아하시어 많은 시간을 운동에 빼앗겨, 교회가 영적으로 메말라 생명력을 잃어가고, 급기야 교인들도 시험 가운데 휘말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분에게 “목사님! 목사님이나 저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에게 맡기신 교회를 보다 부흥시키고 성장시켜야할 상황인지라 시합을 위한 운동은 자제해야 하리라고 여깁니다. 특히 목사님께서는 아직 젊으시니까 지금보다 더 넓은 곳에서의 목회를 준비하셔야
초록의 바람이 부는 여름날 아침 끝나지 않은 전쟁의 아픔을 되새겨본다. 고교생 70%가 6.25를 북침이라고 하는 여론조사의 발표를 보고 너무 충격적이었다. 6.25를 직접 겪는 세대가 아직도 존재해 있는 상황에서 교육 현장에서 진실이 왜곡되고 역사가 왜곡 되는 것이 현실인 것이 더 슬프게 느껴진다.6.25전쟁에 참전한 21개국의 희생자들의 비련의 세계사가 있고 생생한 전쟁사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남침’을 ‘북침’으로 바꿔 생각한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너무 충격적임에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너무 오랜 세월 6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기 때문일 것이다. 바른 역사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전쟁의 비참함과 폐허 속에서 다시 찾은 자유의 땅 국토의 절반이 분단의 아픔으로 살아온 세월이 60년이라는 것에 대해 이제는 태극기와 인공기가 엄연히 존재됨에도 가슴 저리는 아픔의 동족상쟁의 비극 속에서도 여전히 역사는 흐르고 있다. 집나간 가족을 기다리듯 언제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한국 교회들의 기도의 응답이 있을 날을 우리는 기대한다.얼마전, 서울 용산 국방부 구관청사에 걸려있는 현수막을 우연히 보게 됐다. 6.25전쟁으로 폐허가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