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회에 걸쳐 일제강점기 한국침례교의 항일운동사에 대해 개괄적으로 진술했다. 이제는 신사참배 거부로 일제에 의해 수난당한 교단 대표 32인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그 순서는 예심에 회부된 9명을 먼저 언급하고, 비록 기소유예 처분으로 풀려났으나 감옥에서 동일한 고초를 겪은 23명에 대해 다룰 것이다.
이종근 목사(李鍾根, 1891-1945)
이종근은 1891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5형제 중 맏아들로 출생했는데, 그의 집안은 대대로 양반 가문이었고, 부친은 지역의 유명한 한학자요 선비였다. 이런 배경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고, 유년 시절은 북만주의 소란대미에서 보냈다. 그는 의지가 굳건하여 무엇이든지 결심하면 꼭 하고야 마는 성격으로 인해 마을 어른들과 친구들로부터 “의지의 사나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1908년(17세) 함경북도 경흥과 간도를 순회하던 펜윅이 간도에서 이종근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는 이내 개종을 했다(이때 최성업, 이종만, 장진규 등도 함께 개종). 펜윅의 간도 순회 이후 1909년부터 간도지역 전도가 활발하게 이뤄졌고, 이후 부흥하기 시작해 제4차 대화회(총회) 때에 간도구역이 설정됐다. 그는 입교 초기부터 교회 생활을 성실하게 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면서 틈틈이 이웃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종근은 개종 후 얼마 되지 않아 전도인으로 소명 받았고 서간도의 양무촌, 집안현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1919년 만주의 종성동에서 개최된 대화회에서 문규석, 손상열, 김용제 등과 함께 교사(전도사) 직분을 받았는데, 그는 문규석과 함께 배당된 구역에서 목사를 보좌하며 북방지역 전도 활동을 했다. 1922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개최된 제17차 대화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았고, 이곳 경흥과 만주지역으로 파송 받아 순회 사역을 했다.
이종근 목사가 함경북도 경흥과 간도를 오가며 활동하는 동안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를 통해 동아기독교에 온갖 탄압과 박해를 가했다. 당시 제4대 감목이던 김영관 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완강히 거부했고, ‘달편지’를 통해 전국교회에 호소했다. 그런데 이것이 일제의 간계로 교단 내 분란(교단의 감목 지시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일제 당국의 지시를 따를 것인가에 대한 것)으로 발전하자 김영관 목사는 감목(총회장)직을 사임했고, 이종근 목사가 1940년 제5대 감목으로 피선돼 교단의 총책임자가 됐다. 이종근 감목은 “숨님(성령)의 권능이 행하시는 대로 다룬다”라는 신앙적 결단에 따라 신사참배와 황궁요배에 대한 일제의 강요에 굴하지 않고 교단의 신앙적 입장을 그대로 지켜나가기로 결의했다.
일제의 압박이 조여오는 가운데 ‘우태호 사건’이 발발했고, 일제는 이를 빌미로 예고 없이 동아기독교회 원산총부에 들이닥쳐 6500여 권의 ‘신약젼서’와 ‘복음찬미’ 그리고 교단의 제반 서류와 각종 문서 등을 강제로 몰수해 갔다. 이후 원산의 헌병대도 1942년 6월 10일 교단총부를 불시에 수색하는 한편 교단 대표인 이종근 감목을 현장에서 전격적으로 체포했다. 이는 천년왕국에 대한 설교와 동방요배 반대 및 신사참배 거부가 치안유지법 위반 및 불경죄 혐의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잡혀온 이종근 감목은 일제로부터 다음과 같은 심문을 받았다.
문: 예수가 재림한다는 데 어떤 지위로 재림하는가?
답: 성경 말씀대로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왕국을 건설하신다.
문: 천년왕국을 건설하면 일본도 그 통치에 들어가는가?
답: 그렇다.
문: 일본의 천황폐하도 불신 시는 멸망하시는가?
답: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었다.
문: 찬미가 7장에 “대왕님 예수”라 했는데 예수는 천황폐하보다 더 높은 대왕인가?(그때는 일본도 망하고 천황폐하도 예수 통치하에 들어 가는가?)
답: 전 세계가 통이 되는 동시에 예수님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문: 국체명징(國體明徵)에 위반이면 불경죄에 해당하는 것을 모르는가?
답: 신앙 양심에서 답하는 바이다.
문: 단체 대표인 감목이 그렇게 답변할 때 간부는 물론이고 전 교단 내 지도자들도 같은 신조를 지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답: 같은 성경으로, 같은 신앙을 소유하는 것이 합치되는 이론일 것이다.
1942년 6월 10일에 체포될 당시 이종근 감목은 지천명(知天命)을 바로 넘긴 51세의 나이로 온갖 고문과 입에 담지 못할 모욕을 받으며 혹독한 감옥생활을 견뎌야 했다. 그는 원산 헌병대 유치장에서 그해 여름과 겨울을 보냈고, 이듬해인 1943년 5월 1일에 이르러 함흥 교도소로 이감됐다. 15일간의 재판 결과 함께 체포된 32명 중 이종근 감목을 비롯한 노재천·전치규·김영관·백남조·장석천·박기양·신성균·박성도 등 9명은 예심에 회부되어 재차 투옥됐고, 다른 23명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1943년 5월 15일에 석방됐다.
이종근 감목은 조선총독부 검사 와타나베 레이노스케(渡邊 禮之助)에 의해 1943년 5월 28일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에 예심이 청구됐는데, ‘예심청구서’에는 그의 범죄 사실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제1 피고인 이종근은 어렸을 때 서당에서 수년간 한문을 배우고, 성장하여 농업에 종사하던 중 동아기독교회의 교리 신조를 따라 타이쇼(大正) 2년(1913년) 침례를 받고 교인이 됐고, 타이쇼(大正) 8년(1919년) 교사가 됐고, 타이쇼(大正) 12년(1923년) 목사가 됐고, 쇼와(昭和) 12년(1937년) 3월 감목으로 선임되어 현재에 이른 자이다. 함경남도 원산 영정 소재의 동 교회 총부에 있어서 첫째, 쇼와(昭和) 16년(1941년) 8월 중으로 날짜는 상세하지 않지만 원로인 피고인 전치규 전 감목, 명예 목사인 피고인 김영관 외 4명을 소집하여 재만 지방교회가 만주국 기독교국에 포섭 통합하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방책을 협의했고, 그 실행위원으로 하여금 피고인 전치규 외 3명을 만주에 파견할 것을 결의해 보냈다. 둘째, 쇼와(昭和) 16년(1941년) 5월 15일부터 쇼와(昭和) 17년(1942년) 1월 상순경까지 3회에 걸쳐 조선 내 각 구역에 포교 자료인 동아기독교회 편찬 성서 약 30부, 복음 찬미 약 1700부를 배포하고, 셋째는 위 기간 중 매 주일 수요일의 예배 시에 신자 김중출 외 30명에게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및 천년왕국의 출현을 기원한 내용의 설교를 했다.”
예심에 회부된 9인 중 전치규 목사가 1944년 2월 13일 병으로 옥중 순교했고, 2월 15일 이종근 감목을 제외한 7인(노재천·김영관·백남조·장석천·박기양·신성균·박성도)이 병보석으로 인해 임시 출옥했으며, 같은 해 5월 10일 함흥재판소는 동아기독교회에 교단 해체령을 공표했다. 1944년 8월 8일 임시 출옥했던 7인은 재수감 되어 공판이 계속됐고, 9월 7일에 이르러 이들의 재판이 종결됐는데, 7인은 집행유예 5년으로 석방되고, 이종근 감목은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45년 3월 말 옥중생활 2년 9개월을 마치고 석방된 후 가족과 함께 간도로 이주했다.
해방 이후 간도가 중국 공산당에 의해 장악되면서 기독교 박해가 심해지자 이를 피하기 위해 1946년 10월 김영관 목사가 나진으로, 이종근 목사는 종성동으로 이주했다. 더불어 박형순 목사(김영국 감로 둘째 사위)가 나진으로, 최성업 목사가 청진으로, 최헌 교사(전도사)가 종관진 교회로 오게 됐다. 해방은 됐으나 신탁통치로 인해 남북이 단절된 가운데 1947년 초 나진교회에서 총부의 재건과 교단수습 총회가 열렸다. 제1회 총회장에 이종근 목사, 부회장에 박형순 목사, 고문에 김영관 목사가 선임됐다. 북한 내 각 구역은 감로와 교사들에게 위임해 구역순찰을 하며 교회 재건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했다. 1948년 제2회 총회가 나진교회에서 개최됐을 때, 총회장에 최성업 목사, 부회장에 박형순 목사, 고문에 이종근 목사가 선출됐고, 각 부장을 선임해 구역을 순회하게 했다. 이후 북한의 침례교는 김일성 중심의 공산정권이 강화되면서 탄압과 박해로 점차 쇠퇴해 가다가 1950년 6.25사변 이후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중국 공산당을 피해 다시 종성동으로 돌아왔으나 이종근 목사를 향한 박해는 계속됐다. 공산당들이 수시로 교회에 찾아와 “예수 믿지 않겠다”라는 말을 듣기 위해 이종근 목사에게 많은 매질을 가했고, 그럴 때마다 그는 “지금까지 예수를 믿어 온 목사가 당신들에게 어떻게 안 믿겠다고 하겠느냐?”고 하면서 끝내 굴하지 않고 고통을 참았다. 이종근 목사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몽둥이로 마구 때리자 급기야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때 공산당들이 “이제 죽었으니 갖다 버리라”라고 하면서 동구 밖에 버렸는데 얼마 후 깨어나 돌아왔다. 이후 이종근 목사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으나, 그의 동생인 이종수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공산당들에게 모진 탄압과 박해를 계속 받았고, 결국 이로 인해 순교했다고 한다. 이때가 해방 직후인 1945년이었고, 향년 54세였다.
이종근 목사 순교 이후 직계 가족들은 북한에서 뿔뿔이 흩어져 그 존재 여부를 알 수 없고, 막내 따님인 이종선 집사만 중국에서 한의사로 활동하면서 7남매(4남 3녀)를 훌륭하게 신앙으로 양육했다. 특히 둘째 딸은 연변침례신학교를 졸업한 후 전도사로 활동했고, 슬하에 두 자녀 모두 목사가 되어 현재 사역하고 있다. 그중 맏딸 최선희 목사는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 중국과 북한선교 사역자 양성을 위해 2004년에 설립된 동아시아신학교(경기도 안성 소재)에서 ATA 인정 신학대학원의 전임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오지원 목사
한국침례교회사연구소 소장
(사)침례교 역사신학회 이사
ohjw794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