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일을 몰라 사람은 막말을 하면 안된다고 한다. 그야말로 언제부터인지 나의 입장이 그렇게 됐다. 나의 남편인 한명국 목사는 줄기차게 침례교세계연맹(BWA)에 몸바친 사람이고 그 덕분에 나는 가정과 교회에 대해 강하게 버텨가는 힘이 생겼다. 어떻게 여기까지 달려 왔는지 지나온 걸음을 되돌아 보니 아득하다. 어린 시절 집에 오면 따뜻한 어머니는 없고 서먹하고 썰렁한 선생님만 있었고 결혼을 해서 나이많은 남편에게 사랑받겠다고 선택은 했지만 남편은 없고, 목사님과 BWA만 있었던 것 같다. 언제 이 우리를 벗어나 볼까도 생각하고 이리저리 안간힘을 써봤지만 탈출하려는 나에게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은퇴하고 새로이 받은 교회는 다시금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전에 정말 나의 의지가 아닌 다른 의지로 전국사모회에 헌신하게 됐다. 스스로 나를 반문해보고 또 불가능이라는 두려움이 나의 영혼을 짖누르기도 했다. 안한다라는 말을 수 없이 내뱉었다. 그러나 어느날 개척 초기 성도 한 분의 전화가 걸려왔다. “사모님 무슨 일 하시지요? 기도 중이 하나님이 사모님께 물질을 보내라 합니다” 나는 소름이 돋았다. 이 길을 비켜갈 수 없는 길이라 여기고 순종하기로 한 뒤
2019년 부활절이 우리 앞에 찾아왔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자신이 직접 부활체로 나타나심으로 그 약속을 확증하셨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 되심을 증명하셨을 뿐 아니라, 그를 믿는 신자들에게도 부활의 소망을 안겨 주신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기까지의 기록을 보면 우리는 주의 길을 따르는 자들의 흥미로운 모습들을 관찰할 수 있다.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도망가는 나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후 누구보다도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고 부활을 목도한 후 용감하게 복음을 전하며 나아갔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숨겼다가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한 후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에 주님을 모셨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의 반응도 제각각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목도한 후 의심하지 않고 바로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한반도의 복음화를 위해 130년 전 조선 땅을 밟은 파란 눈의 청년 말콤 C. 펜윅을 기념하는 기념대회가 오는 4월 30일부터 3박 4일간 강원도 홍천 비발디 파크에서 열린다. 1889년 한국에 온 펜윅은 조선에서 빠르게 한국말을 배우고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지역을 찾아 원산에서 복음전파를 시작했다. 펜윅은 원산과 공주, 강경, 문경, 간도, 연해주에 침례교회를 세우며 침례교회가 조선 땅에 뿌리 내릴 수 있도록 힘써왔다. 펜윅의 선교적 사명을 새롭게 조명해 보기 위해 130주년 기념대회와 세계한인침례인대회(영적성장대회)를 교단적 차원으로 마련했다. “은혜로 130년! 다가올 침례교 시대!”란 주제로 열릴 이번 대회는 사전 행사로 침례교 미래의 로드맵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좌담회(4월 12일), 펜윅 선교 130주년 기념 학술 대회(22일)이 열릴 예정이며 오는 30일에 기념대회와 미남침례회 한국선교부(IMB) 선교사 초청의 밤, 한인침례인 선교사 보고의 밤 등 침례교회가 선교적 사명을 품고 있는 교회임을 선언할 예정이다. 지난 4월 5일 교계 기자 초청 간담회에서 총회장 박종철 목사는 “한국침례교회의 태동은 말콤 C. 펜윅을 통해 시작됐음을 누구도 부인할
토종 게임기의 부활, 23년 만에 부활한 ‘공중보건장학제도’ 대량 미달! 세상 사람들도 부활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뭔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실체는 모르고 결과만 가져다 쓰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찬양한다. 주님과 함께 일으켜 세워진 우리는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간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갱이이다. 그런데 우리는 진정 성경적인 부활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은 진짜 금요일에 돌아가셨는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금요일’(Good Friday)에 죽으시고 ‘부활절’ 주일 이른 아침에 죽음에서 일어나셨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안식일(보통 토요일) 전날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금요일에 죽으신 것으로 믿고 있다. 아니다. 예수님은 수요일 날 돌아가셨다. 그분께서 죽으신 다음 날의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정규 안식일 즉 토요일의 안식일이 아니었다. 그 날은 매년 한 번 있는 안식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안식일이 큰 날이었기 때문이다(요 19:31). 이러한 큰 안식일은 한 주의 어떤 요일이라도 될 수 있으며 그 해에는 분명히 목요일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예비일(수요일)에 십자
산상수훈의 내용 중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께서 당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며 의식과 형식에 치우쳐 오직 사람들이 보아주기를 바라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사거리나 길거리에서 구제를 하거나 기도하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경계를 시키시는 한편, 그들의 그러한 모습을 외식과 위선으로 단정하시고 본받거나 답습하지 않아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려는 그러한 행동에 대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더욱 실감하게 하시려고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2,5,16)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니까 그들이 행하는 그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일이 틀림없는데, 하나님께 받을 상보다, 먼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려고 하는 그 마음으로 하나님보다 사람을 먼저, 그리고 사람을 더 의식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한 보상이 되어버려서 하나님이 따로 갚아 주셔야 할 상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이 직접 하신 이 말씀을 주님의 임재 앞에서 생각해 보면, 오늘 이 시대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전반적인 면에서의 모습을 생각해 보지
성 평등, 동성혼 합법화 등이 포함된 법무부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에 대해 한국교회가 결사반대하고 있다. 양성평등을 부정하며 남녀 구별은 물론 건강한 성관념마저 없애려는 ‘성(젠더)평등 정책’인 NAP는 더 늦기 전에 바로잡아야 한다. 지난해 8월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NAP가 동성애와 동성혼을 옹호·조장하는 젠더(gender) 평등을 추구하는 데다 교계가 가장 우려하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안양시기독교연합회(대표회장 임용택 목사)와 군포시기독교연합회(대표회장 김재용 목사), 의왕시기독교연합회(회장 이영학 목사) 등은 시내 곳곳에 180여 개의 플래카드를 걸고 NAP에 포함된 동성혼 허용, 성 평등 정책, 차별금지법 등의 조항을 모두 삭제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안양시, 군포시, 의왕시 외에도 서울, 부산, 광주, 세종, 울진, 전주, 제주, 천안, 청주 등 광역시·도에 소재한 각 기독교연합회 및 시민단체들은 최근 2000여 장의 플래카드를 동시에 게시, NAP에 포함된 동성혼 허용, 성평등 정책, 차별금지법 등의 삭제를 촉구했다. 사실상 한국교회의 주요 교단이 다 참여하고 있는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소속 교단장들은
제이슨 맥코이 선교사 가족 미국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말콤 펜윅 선교 130주년 기념 및 세계한인침례인대회(영적성장대회)에 잘 사는 미국을 한국으로 모시면서 굳이 비행기표까지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니 이 일을 준비하면서 “비용이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해야 한다”는 박종철 총회장의 결단에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은퇴하고 미국에 돌아간지도 수십 년, 남편이나 아내는 이미 고인이 된 채 홀로 살고 계신 은퇴 노인 선교사에게 1000달러가 넘는 비행기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액수였다. 이번 대회 최고령 참가자인 현복자(Betty Jane Hunt) 선교사는 4월 11일로 만 93세가 된다. 1958년 30대 초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한국에 와서 67세에 은퇴해 고향에 돌아가기까지 자신의 청춘을 한국에 바쳤다. 침례교 교회진흥윈이 생기기 훨씬 이전, 지금 진흥원이 하고 있는 일을 시작해 침례교회의 개척과 발전을 도왔던 그는 자신의 생애에 한국 침례교회가 자신을 재정적으로 후원해 한국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며 나이를 잊은 채 환호했다. 앤 윈더스 켈리 선교사 (미국 정착후 결혼, 사진 왼쪽
최근 몇 년 동안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들을 보면 경제계나 정계, 종교계 등 가릴 것 없이 명망 있는 사람들의 민낯이 언론에 드러났다. 이들은 우리가 쉽게 할 수 없는 일들이나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사회적 인지도를 높여왔다. 하지만 그 이면에 온갖 불법을 저지르며 비도덕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두 얼굴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익히 경험할 수 있는 인간 세상의 이치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선한 사람이 되거나 악한 사람의 길을 선택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근 한국교회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지탄과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문제가 교회 지도자, 즉 리더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회는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이다. 신앙의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불신자들을 인도하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섬김과 나눔을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하지만 지도자의 강한 리더십이 자칫 교회의 리더십인양 행사하며
최근 들어 매일 순간순간 습관처럼 읊조리듯 묵상하는 말씀이 요엘서 2장28절 말씀인데 이 말씀이 왜 나를 이렇게 매료시키는가?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이며”라는 이 짧은 두 문장은 내 가슴을 뛰게 한다. 늙은이들이 꿈을 꾸며 살아가는 세상, 젊은이들이 이상을 바라보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신나는 세상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최근 우리네 삶들을 돌아보면 너무 많은 자조적인 말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늙은이와 젊은이들의 꿈과 비전을 억압하는 용어들이다. 이런 말이 있다. “당신 참 젊어 보인다 라고 말을 듣는 순간 당신은 이미 늙은 것을 기억하라.”고 했지만 늙은이가 되는 기준이 머리털의 희고 검음의 차이인가? 하지만 그 기준은 꿈을 꾸지 못하고 “과거만 회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늙은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이상을 잃어버린 순간 그들은 이미 정상적 젊은이라고 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런 현상들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리적 현상이다. 이 현상에 그리스도인들이 무비판적으로 무임승차하고 있지 않은지 묻고 싶다. 늙은이를 꿈꾸지 못하게 하고
한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은 크게 3세대로 구분되어 있다. 오늘의 사회가 있기까지 과거에 수고하고 땀 흘리는 세대로 ‘공경과 섬김’의 대상인 1세대와 2세대는 지금 우리 사회를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세대로 ‘격려와 협조’의 대상이다. 또한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책임을 지며 땀 흘릴 제3세대는 ‘투자와 양육’의 대상인 것이다. 바람직한 사회는 이 3세대가 한데 어울려서 서로 공경, 격려와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함께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계층, 학력, 연령, 이념, 지역별로 나라는 사분오열로 갈가리 찢어져 있다. 사회 통합을 앞장서서 견인해야 할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따라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거나 심지어는 즐기고 있다. 그 결과 남북분단보다 남남분열을 더 우려하는 목소리가 비등해져가고 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교단과 교회는 함께하는 공생(共生)의 몫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가? 불행하게도 그 대답은 “아니요”이다.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반목과 대립 분열의 내홍을 겪지 않는 교회와 교단이 드물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부여받은 교회 내에서조차 함께하는 삶을 이루어가지 못한다면 교회 밖에서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