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하면 한 번씩 이슈가 되는 기사들 중 아동학대나 배우자 학대 등과 더불어 혐오범죄가 있다. 최근에 묻지마 살인에서 시작되어 논란이 된 여성 혐오 범죄도 있고, 특정한 인종이나 집단에 대한 차별이 핵심이 된 시위들도 있다. 분노의 뿌리를 좀 더 깊이 있게 살펴보는 과정은 한 사람의 상처와 개인사에 관련이 되기도 하고, 아주 깊은 뿌리를 가진 문화적, 역사적 배경이 깔려있기도 하다. 자신을 버렸던 어머니에 대한 불신과 깊은 상처가 여성에 대한 분노로 확대되기도 한다. 술에 취해 자녀를 때렸던 아버지의 기억이 남자라면 치를 떨게 하는 혐오감으로 자랄 수도 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고생이 권위와 재력을 가진 자에 대한 반감과 분노로 뿌리내리기도 한다. 오랜 세월 노예로서 억압받고 학대받으며 살아왔던 역사적 배경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도 경계하고 미워하는 이유가 되었다. 분노라는 감정 하나의 뒤에는 수도 없이 많이 이유들이 있다. 씻어지지 않는 상처가 도사리고 있다. 우리의 성품에 섞여있는 유전자의 영향일 지도 모른다. 우리의 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가 숨어있기도 한다. 분노하는 사람들에게는 작던 크던 그 원인이
정신분열병(精神分裂病)은 역기능적인 사고체계와 오염된 감정의 장애로 인해 통합적인 정상 사고를 하지 못하는 일종의 만성 사고 장애로, 정신분열병이 언어 순화 차원에서 조현병으로 바뀌었다. 주요 원인으로는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이상, 대뇌의 구조 및 기능이상, 유전적 소인, 비이상적인 신경증식, 환경적·사회문화적인 요인 등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장애인 복지법에 우울장애, 반복성 우울장애, 양극성 정동장애(조울증)과 함께 정신장애로 인정된다. 조현병은 특별한 치료법이 없다. 투약 중단 1년 후의 재발률은 70%이며 지속적으로 항 정신병 약을 투여 할 때는 23%로 감소된다. 약 30년의 치료 추적기간 동안에 환자의 1/3만이 회복 또는 증상이 소실되었고 그 밖의 환자는 주증상이 지속되고 있거나 여전히 입원치료 하고 있다. 치료에는 약물치료와 함께 기본적인 생활기능이라든가 사회활동 훈련, 직업훈련과 가정생활의 기능 향상 등 정신사회적 재활치료를 실시하게 된다. 또한 가족치료, 적극적 지역사회기반 치료, 고용 지원, 인지 치료, 직업훈련, 인지행동치료, 약물 사용이 조현증의 치료에 유용하게 쓰인다. 특히 가족 전체를 하나하나 다루는 가족 치료 또는 가족교육이
듀크 대학의 하우어와스와 윌리몬은 교회가 성도에게 닥친 문제 상황을 각자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방치하는 개인주의적 접근 대신 어떻게 함께 그 상황을 아파하고 함께 어려움을 돌파하며 치유와 회복으로 나아가는 공동체적 돌봄 사역을 할 수 있을지 제시한 바 있다. 즉, 대부분의 개인주의적 교회가 성도에게 어려움이 발생하면 그 문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자신들의 호기심을 충족하는 정도의 피상적인 위로방문이나 수군거리는 반응을 보이지만, 공동체적 교회는 일차적으로 당사자의 비밀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주의 깊게 공감적 경청을 하고, 함께 그 자리에 있으며, 이슈에 대한 성서적 성찰을 한다. 이처럼 공동체적 교회는 한 사람의 문제나 아픔을 그 사람만의 것으로 보지 않고 함께 대처하고 회복해야 할 공동체적인 것으로 본다. 그리고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위기 당사자나 가족에게 필요한 것들을 지혜롭게 나누고자 한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통과하며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한다. 이를 통해 위기에 처한 사람과 가족은 교회가 어떤 곳인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 공동체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론적 설교나 강의가 아닌 삶의 위기현장을 통해 체득하고 진정한 제자로 거듭나게 된다. 이런 사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자리한 분노의 뿌리들을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내 안에서 분노의 문을 여는 버튼을 발견한다. 어떤 상황이나 사람으로 인해 이 버튼이 눌러질 때 하찮아 보이는 작은 문제로도 감정적인 폭발을 경험한다. 분노를 조절하는 훈련 중의 기초 단계가 바로 내 안에 존재하는 이 버튼을 찾아내는 일이다. 사람들마다 유달리 민감하거나 잘 상처받는 영역들이 있기 마련이다. 자기 자신의 버튼을 잘 이해하고 있으면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적 회오리로 인해 또 다른 사람에게 생채기를 남기는 일을 줄여갈 수 있다. 그 분노의 뿌리 중 일반적인 것 중에 하나가 Commitment, 즉 상대가 현재의 관계에 얼마나 헌신되어 있는가이다. 많은 청년들이 ‘나만 사랑해 줄 수 있는 배우자’가 이상형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나만 사랑해주는 남자를 찾는 한 자매에게 어떤 형제가 하는 대답을 들은 적이 있다. “차라리 강아지를 키우시죠?” 나와의 관계에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것은 이 자매에게는 가장 중요한 가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한 형제는 헌신이 두려운 족쇄이자 구속을 의미할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던 각자에게 다른 모양으로 ‘헌
목회상담학 박사과정에 있을 때 나의 상담 초점과 방향에 결정적 전환점이 된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국민일보에 ‘내 인생과 학문의 멘토’로 소개한 바 있는 지도교수 브리스터(C. W. Brister) 박사와의 만남이었다. 나는 그와의 만남과 목회적 돌봄 및 상담에 관한 훈련을 통해 교회 중심 돌봄과 상담사역의 필연성과 파워를 접하면서 가슴이 뛰는 순간들을 경험하였다. 교회야말로 아픈 상처를 싸매주고 돌보며 곤경회복을 위한 유일한 하나님의 전략이고, 이를 위한 최고의 자원을 가졌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장 낭비하는 곳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눈뜨게 되었다. 미국의 목회상담학을 개척한 선구자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브리스터 교수는 평생을 영혼 돌봄의 사역을 위해 헌신하였다. 병원이나 일반 상담 센터에서의 상담활동에도 관여한 바 있지만, 마음이 아프고 관계의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상담활동에 있어서 그의 초점은 항상 ‘교회’에 집중되어 있었다. 매주 강의를 기도로 시작하고 끝을 맺으면서 교회가 이 땅의 크리스천들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모르는 교회 밖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돌봄과 치유적 활동을 해야 할지에 대해 강조하곤 하였다. 자신의 신앙과 학문, 및
시골에 나갔더니 온갖 과일들이 가지가 휘어지도록 탐스럽게 열렸다. 태풍도 없었고 병충해도 없어 과일도 벼농사도 모두가 풍년이라고 한다. 올해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없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복을 주시니 우리는 아무것도 걱정 할 것이 없는데 사람들은 모든 것을 남들과 비교하며 불행에 빠진다. 내가 입은 옷과 남이 입은 옷을 비교하고, 내 차와 남의 차를 비교하고, 내 집과 남의 집을 비교하고, 나의 학벌과 남의 학벌을 비교한다. 비교하여 남보다 낫다고 생각되면 우월감으로 교만하게 되고 남보다 부족하면 열등의식을 가지고 불행에 빠진다. 불만 없이 잘 살던 아내가 오랜만에 동창회 갖다 와서는 “순심이는 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도 못했는데, 남편 잘 만나서 고급 승용차를 타고 왔더라.”, “영희 남편은 이번에 부장으로 승진 했다더라.”, “혜선이는 45평으로 이사 간다더라.”하면서 자신과 비교해서 그 친구들보다 자기가 열등하다고 생각하여 기분 나쁘고 자신을 초라하게 만든 것이 남편 탓이라고 생각하여 남편에게 불평을 하며 자신과 남편을 불행에 빠뜨린다. 자녀들에게도 “누구는 전교 일등 했다는데, 누구는 서울대
나는 이전에 교회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서로를 돌아보며 아픔을 감싸주고, 다시 힘을 내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 생명의 공동체로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교회가 친교를 중심으로 모이는 동아리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때를 따라 잠시 모여 서로의 안위를 묻고 즐거운 시간을 가진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뿔뿔이 흩어지는 개인들의 사적 모임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모일 때마다 기도하고 찬송 부르며 말씀도 듣는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 인생의 목표와 방향이 선포되지만 교회를 나오는 순간 세상에서 익숙해진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러다보니 이전에 언급한 에이즈 환자가 직면한 현실, 즉 ‘각자의 문제는 각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세상의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이 교회를 압도하고. 그리스도인의 삶 또한 일반 사회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경우들이 많다. 그리고 세상에서 비호감이 되기까지 하는 상황들이 발생한다. 교회에 혼전임신 청소년이 생긴다면 미국 듀크대학교의 스탠리 하우어와스(Stanley Hauerwas)와 윌리암 윌리몬(William Willimon)은 이처럼
내가 상담사 훈련을 받던 초기에 달라스 소재 파클랜드 종합병원에서 경험한 에이즈 환자의 분노는(지난 1편에 소개된 내용 참조)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주고 있다. 하나는, 사람들의 교회에 대한 인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롤 믿든 안 믿든, 교회를 다니든 안 다니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를 사랑과 은혜가 있는 치유와 회복의 장소로 인식한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그러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경우에도 ‘교회는 그래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내가 파클랜드 병원에서 만난 그 에이즈 환자 또한 교회를 떠나 자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고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바로 교회였다. 그의 마음의 고향, 언젠가 돌아가야 할 영혼의 본향인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교회를 본능적으로 떠올린 것이었다. 교회는 그런 곳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가 있었고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였다면, 이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으로 이 땅에 존재한다(엡 1:23). 하나님은 사람들을 창조하시되 단순히 육신과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넓은 집, 더 좋은 자동차,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더 높은 지위와 명예를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경쟁사회에서는 반드시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기 마련이지만 길게 보면 영원한 승자도 없고 영원한 패자도 없다. 오늘의 패자가 내일에는 승자가 되고 오늘의 승자가 내일에 가서는 패자가 되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많이 소유하거나 더 높아지면 상대적 우월감을 즐기며 자신의 부와 힘을 과시하고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어떤 상황변화로 인해 하는 일이 잘 안되거나 소득이 줄어들거나 지위가 낮아지면 낙심하고 원망하며 곧바로 불행에 빠진다. 상대적 가치로 살면 불행에 빠진다 사람들은 남들과 비교해서 자기가 남들보다 부족하다고 생각될 때 불행에 빠진다. 이런 사람은 상대적 가치로 사는 사람이다. 물질이나 환경이나 감정은 상대적인 것이며 상대적인 것은 다 변하는 것이다. 물질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고 환경은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 사람의 감정도 기분 좋을 때도 있고 기분 나쁠 때도 있고, 좋아
자신에게 있는 분노의 뿌리를 이해하는 작업은 분노조절의 첫 걸음이기도 하다. 내가 별것도 아닌 일에 엄청나게 화가 날 때는 실수를 한 상대방의 잘못도 있겠지만, 내 안에 예전부터 숨겨진 화약고가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있어야 분노 아래 숨겨진 진짜 이슈와 현실을 구분해 낼 수 있다. 문제를 제대로 인지할 수 있다. 실제로는 한주먹 거리의 문제를 집채만 한 문제로 오해하지 않을 수 있다. 한 달간 삐질 일과 5분간 섭섭할 일을 구분 할 수 있다. 그래서 조금 덜, 조금 짧게 화낼 수 있다. W양은 상담소를 들어서면서도 씩씩거렸다. 남편과 한바탕 싸우고 집안을 다 뒤집어 놓고 왔단다. 몇 년째 졸업을 못하고 질질 끄는 남편이 꼴도 보기 싫었다. 빨리 학위만 마치면 얼마든지 좋은 직장에서 모셔갈 만도 한데, 공부해야 한다는 이유로 시간당 기본수당만 주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만 하고 있으니 속이 터질 노릇이다. 자신도 일을 하건만, 옷가지를 정리하고 계산대에서 잔돈을 거슬러 주는, 그저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단순한 직업에 신물이 났다. 자기의 삶이 왜 맨날 이도 저도 아닌가 한숨만 났다. 자신의 삶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켜줄 것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 환경과 상황에 따라 수시로 감정이 변하므로 상황으로 인하여 행복을 잃어버리고 불행에 빠질 때가 많다. 그럼에도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으니 항상 기뻐하며 행복을 잃지 않는 비결이라도 있는 것일까? 필자가 좋아하며 묵상하는 말씀 가운데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는 말씀이 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이 말씀은 현재 어렵고 힘든 고난을 당하여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줄 믿고 믿음으로 인내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반드시 좋은 결과가 주어진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믿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도 말씀을 붙들고 할렐루야를 외치며 행복을 잃지 않으려한다. 필자는 시원한 동태국을 좋아하는데 동태국을 끓일 재료들을 하나하나 따로 보면 동태, 무, 마늘, 고춧가루 간장, 파, 조미료를 따로 따로 먹으라면 먹을 수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솥에 넣고 푹 끓여내면 시원하고 맛있는 동태국이 된다. 합력하여 선이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로 따로 보면 다 힘든 일
지금 이 시대는 분별력이 없어서 혼란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 자신이나 선악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주어질 수 없고, 전혀 반대로 선악에 대한 자기의 모든 지식을 떠나서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시도를 전적으로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이 자기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나는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판단력으로 더욱 풍성하게 되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고…”(빌1:9~10; 롬2:18). “빛의 자녀답게 주를 기쁘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분별하라”(엡5:9). 이러한 관점들은 하나님의 의지의 단순한 인식이 모든 반성을 배제하는 직관의 형식 즉, 첫 번째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소박하게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해야 하며 또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의 단순성을 심리학적으로 의심하며 불순종하는 것도 근본적인 수정을 거쳐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하나밖
나는 이 놀라운 고백적 선포 앞에서 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신학훈련을 마치고 교회 현장으로 돌아가 열심히 성도들을 섬기며 목회사역을 했다. 설교와 교육, 목회행정 등 부족함이 많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는 잘 성장하였다. 적어도 주일에 만나는 성도들이나 교회 상황만 보면 그랬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 자신을 포함하여 성도들의 교회 밖 삶의 주중 생활 현장을 조금만 들춰보면 각양 갈등과 상처, 아픔으로 힘들어하는 성도들의 모습이 보였다.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로 ‘세상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전략이 교회’라는 독일의 목회신학자 본회퍼의 선포가 나의 가슴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 선포는 나를 ‘친구’로 대하며 기독교·목회상담의 멘토요 코치가 되어준 브리스터(C. W. Brister) 박사와의 만남과 대화들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교회야말로 내부 성도들은 물론 지역사회 주민들의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도록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전인적인 돌봄을 제공해야 할 소명과 책임이 있는 곳이었다. 이러한 치유적 돌봄과 상담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교회였다. 이것은 한두 사역자나 훈련된
요즘 우리사회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면 이렇게 가다가 어디까지 가려나 싶어 탄식이 나오도록 사회 규범이나 윤리도덕적 가치기준이 흔들리고 모든 사람들이 상식으로 이해하는 보편적인 가치마저 무너지고 있다. 여학생들이 SNS를 통해 성인들을 유혹하여 성매매를 하거나 성매매를 시키고 돈을 갈취하는가하면 주부들 가운데도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는 수단으로 성 매매를 하고도 별로 죄의식을 갖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 동성애자들이 증가하고 동성애를 인정할 뿐 아니라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고 동성애를 세상에 알리고 확산시키려고 서울 한복판에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모습을 보이며 동성 간의 성행위가 좋다며 호기심 많은 청소년들을 유혹하는 행사를 문화 축제라는 이름으로 판을 벌리고 서울시는 허용하는 세상이다. 낙태는 불법이지만 인생을 엔조이하는데 불필요한 쓰레기를 정리하듯 가볍게 해치우며 생명의 존엄성을 생각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사회에서 존경받아야 할 지도층 인사들마저 앞으로는 명예를 중시하되 뒤로는 뇌물과 성 접대를 받고 성 매수를 하다가 세상에 알려지는 추한 모습들로 사회의 도덕적 가치 기준을 무너뜨리고 있다. 사람들이 세워놓은 사회규범이나 법은
최근에 복고의 열풍을 불러일으킨 드라마가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이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했던 이 드라마의 한 장면에서 한 가정 에 일어나는 알 수 없는 갈등을 다루었다. 갈등은 어머니가 남편과 아들들만 남겨놓고 급히 친정에 다녀와야 했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일어난다. 어머니가 부재한 잠시의 시간 동안 집안 전체는 쓰레기통으로 돌변한다. 집에 남겨진 남자들의 세상은 혼란과 자유의 공간이 된다. 과자 부스러기가 사방에 흩어져도, 팬티만 입고 아무데서나 드러누워도, 아무렇게나 먹고 싶은 대로 먹어도 누구하나 잔소리 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다 어머니 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 되자 이제 맘대로의 편안한 세상에 비상이 걸린다. 남겨졌던 남자들은 최선을 다해서 집안을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는다. 어머니가 자기들을 걱정할 필요 없이 자기들끼리도 잘 지냈다는 것을 증명하고 스스로들을 대견해한다. 그런데 이 남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머니의 반응이다. 꽤 깨끗한 집안과 지시대로 비워진 냉장고를 둘러보던 어머니는 영 시큰둥하다. 어머니의 저기압을 눈치 챈 남편과 아들들은 영문을 알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한 이웃친구의 조언에 따라 막 내아들은 집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