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라는 개념과 의무라는 개념은 서로 상반된 개념처럼 보인다. 실제로 현대사회와 국가들이 이 두 개념을 보완하지 못해서 사회갈등을 조정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자유와 의무는 우리가 믿는 성경의 진리이다. 특히 우리 침례교 선조들에게 있어서 자유와 의무는 그 누구보다 투철했고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침례교도들은 어떤 정부나 체제 아래서도 신앙의 자유와 의무를 굽히지 않고 주장해 왔으며 실천해 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자유와 세상을 살아가면서 시민으로 지켜야할 의무가 성경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미가선지자는 신앙의 자유와 시민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본문은 진정한 신앙의 자유와 시민으로서 의무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그 질문을 우리에게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세상과 국가, 정부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교회는 자유를 가질 권리가 있다. 그 바탕은 교회의 지체가 되기 위해서는 각 개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사실 고통마저도 성서의 가르침은 개인이 겪는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에의 동참으로 보고 있으며(골1:24), 죽음은 영생의 과정의 필연적인 부분이라 여긴다(고전15:51~54). 그렇기에 신자들에게 있어서 삶에서의 고통과 죽음은 단순한 육체의 아픔과 소멸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의 여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에서 정점을 이루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발자취를 닮아가는 과정이며 성숙함과 성화(聖化)에 이르는 단계를 밟아가는 일이라 하겠다.나아가서 완화돌봄의 과정에서 수반되는 하나님과 사람에의 ‘의존’(dependence) 역시 부끄럽고 피해야 할 과정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삶의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과정이며 완화돌봄과정에서 생기는 고통과 의존함과 불안과 두려움은 하나님을 포함한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게 만든다. 따라서 목회자는 효과적인 완화돌봄을 통하여 영적으로는 숙명적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가운데 섭리적이며, 자신과 하나님 모두와 평화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의 재해석을 통하여 의미를 발견하고 긍정적으로 반추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3) 목회상담 패러다임의 전환으로써의 완화돌봄전통적으로 목회자의 돌봄은 ‘요람에서
창설목적 이슬람국가 라고 불리는 “아이에스”(IS), 또는 “이시스”(ISIS)는 일찍이 1999년에 “유일신과의 성전”(JTJ)이라는 기치 아래 ‘알카에다’에 충성을 맹세하고 그 하위 조직으로 창설된 바 있다. 그러나 그 후 이렇다 할 활동이 없다가 2014년 1월, 이라크 서부와 시리아 일부 지역을 점거하고 이슬람국가(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Syria])라는 국호로 독립을 선포하면서 ‘지하드’(투쟁, 또는 聖戰을 뜻함) 조직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영토는 한반도 보다 큰 32,132km², 인구는 800만 명가량, 언어는 아랍어, 통화는 니나르(IQD)와 파운드(SYD)를 사용한다. 투쟁 방법은 타 종교에 대한 적대정책, 세계 문화유산 파과와 밀매, 무분별한 세력 확장 등이며, 이를 위해 납치, 화형, 참수, 강간, 집단 테러 등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영국인 데이비드 헤인즈를 참수하고 일본인 고노 겐지와 언론인, 의료인, 민간인 등을 무차별 공개 처형하는 것 등을 볼 때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배타적인 무장단체가 틀림없다. 유관 테러 조직들 1) 알카에다(al-Qaeda)는 1988년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의 세 번째 현현은 제자들이 현현하신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많은 고기를 잡은 후에 예수께서 마련한 아침 식사 자리에 제자들이 참여하게 된 것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진행한다. 제자들은 실패와 낙심하는 상황에서 예수께서 준비한 생선과 떡을 먹으면서 주 예수와 교제를 나눈다. 주 예수는 제자들이 실패하고 낙심하는 현장에 다시 찾아오시어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신다. 그리고 제자들로 하여금 함께 계시는 주님을 통해 새 힘을 얻고 그들의 사명을 위해 다시 도전하는 용기와 능력을 얻게 하신다. 요한은 이것을 통해 제자들이 부활의 예수를 생생하게 만나는 자리는 바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도전하며 고난을 당하는 현장이라는 것을 부각시킨다.저자는 베드로가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을 쳐서 예수에게 가는 동안에 다른 제자들의 행동을 설명한다: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21:8). “작은 배”는 ‘배’와 동의어적으로 사용된다(6:24; 눅 5:2). 그러나 요한의 상징성에 주목하는 학자들은 배는 사도적 공동체들을 포함하여 보다 더 큰 의미의 교회를 가리키고 작은
공공시설에는 대게 이용 요금표가 붙어 있다. 이용자들에게 요금을 받아서 그것으로 시설을 유지해야하기 때문이다. 사람들 가운데는 그런 일을 위해 재산을 쾌척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무상으로 이용하려는 이들도 있다. 미국 개척 시절에 어떤 사람이 저 유명한 촌시 데퓨(Chauncey Depew) 철도회사에 무료 정기승차권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는 얼마 후에 회사로부터 아래와 같은 답장을 받았다: 월요일: “너는 우리 가운데로 지나가지 못하리라” 민수기20:18화요일: “한 사람도 건너가지 못하게 하였고” 사사기3:28수요일: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 하리로다” 나훔1:15목요일: “이 세대가 지나가지 [않으리라]. 마가복음 13:30금요일: “그것으로 영원이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리라]” 예레미야5:22토요일: “그리로 지나갈 자가 영영이 없겠고” 이사야34:10일요일: “배 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1:3(Ludlow 메모 참조)내용인즉 삯을 내고 표를 끊기 전에는 기차를 탈 수 없다는 말이다. 상냥한 거절은 절반의 승낙과 같다”는 말처럼, 촌시 데퓨 회사의 “무임승차 불허” 답신에는 딱딱한 거절 대신 유머와 풍자가 넘친다. 회사
사실 말기 암환자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고통이다. 말기 암환자의 약 90%가 고통을 호소하며 이 가운데서 절반정도 환자가 겪는 고통의 정도는 치통 또는 그 이상 정도의 고통이며, 약 25-30% 환자는 거의 산모의 산통에 버금할 정도 또는 그 이상의 고통을 경험한다. 심한 통증은 환자의 본래 인격을 파괴하기까지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즉, ‘의학적인 치료에 환자의 병세가 더 이상 긍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점차 악화되어 가까운 시일 내에 임종을 맞을 것으로 예상되는 상태의 환자에게 통증관리를 포함한 신체적, 실존적, 심리정서적, 그리고 영적 영역에 대한 조력과 완화를 목적으로 제공되는 돌봄’이 완화돌봄이다.완화돌봄의 주된 대상은 대체로 다음의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임종 전 수개월 또는 수주 전까지 비교적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는 환자이다. 둘째는 급작스러운 사망에 이를지 모를 점진적으로 악화되는 만성적인 장기부전 환자의이다. 셋째는 대부분의 병약한 노인들에 해당되는 꾸준히 진행되는 오랜 시간에 걸친 기능약화 환자이다. 일반적인 완화돌봄의 개입 단계는 환자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즉, 가정에서 간병인의 도옴을 받는 외래돌봄부터 시작하여 요양병원으로
저마다 오늘도 인생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가 온몸으로 전해진다. 안 그래도 피곤한 그들의 삶일 텐데 오죽했으면 이 새벽에도, 이 밤에도 기도한 번 해보겠다고 나왔을까? 그들의 눈망울에서조차 그들의 무게가 읽힌다.멀쩡하게들 차려입고 폼 나게 앉아는 있지만, 그게 그렇게만 보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아마 내가 저들의 목회자이기에 더 그랬을 수도 있겠다. 다행히 기도로 그 삶의 무게를 해결하려는 모습들이 있어 고맙다. 하지만 그 자리에 나오기까지의 저들의 삶, 기도 후에도 여전히 이어지는 저들의 삶의 무게는 부인 못할 현실이다.생각해보니 정말 우리 인생들은 이런저런 져야 할 짐들이 많다. 어떤 이는 불행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자란 것부터가 짐이다. 게다가 학업의 짐, 취업의 짐, 결혼의 짐, 아내로서의 짐, 남편으로서의 짐, 부모로서의 짐, 자녀로서의 짐, 관계의 짐, 직장이라는 짐, 사역이란 짐까지…. 게다가 나의 육체, 성격, 능력에서 원래부터 부족하게 갖고 태어난 태생적 한계로 인한 짐. 게다가 내가 굳이 지지 않아도 되는 짐,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인한 짐들까지 그냥 지워지기도 한다.그렇다면 우린 이 짐들을 어찌해야 할까? 버려야 할까? 떠안아야 할까? 이를
교회 사역자를 표현하는 명칭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 중 하나가 “일꾼”(고전 4:1)일 것이다. 일꾼은 일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사실 “꾼” 자가 붙은 말은 해당 분야에 숙달된 사람, 그것 밖에 모르는 사람, 그 일에 몰입한 사람 등 전문적인 기능을 갖춘 사람을 지칭한다. 그런데 부정적인 말이 많은 것 같다. 사기꾼, 노름꾼, 말썽꾼, 장난꾼. 긍정적인 것은 소리꾼, 일꾼 그리고 뭐가 있을까? 일꾼이란 일에 전문적인 식견과 숙달된 기능 그리고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태도로 무장된 사람을 말한다. 목회자는 어떤 일꾼이 되어야 할까? 1.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목회자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인 복음과 교회를 맡은 하나님의 일꾼이며, 복음의 일꾼이고 교회의 일꾼이다.목회자는 예수 그리스도께 부름 받고 세움 입은 사도적 사명자로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담당한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그리스도 때문에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처럼 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해야 한다.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는 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모든
오늘의 세계는 지구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크고 직은 일들을 동시적으로 보고 듣는다. 빠른 뉴스와 현장감은 좋지만 한 가지 염려는 사람들이 서로 수준에 맞지 않는 생활양식과 다른 가치를 단순 비교하는 습관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실제로, 우리에게는 국가적 중대 사안을 무조건 일본에 비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에 비해 국가 경쟁력과 국민총생산(GDP)이 각각 4배씩 크며, 세계 100대 기업에 일본이 스물여덟 개가 들어 있는 데 반해 한국은 단 세 개가 들어 있고, 노벨 과학상 수상자는 일본이 열여섯 명인데 비해 우리는 아직 한 사람도 없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기술, 의술, 질서와 안전 문제, 외교적 위상 등이 우리 보다 월등히 앞서 있어서 몇 가지 근접 분야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비교 대상이 아니다.얼마 전 한 여론조사 기구가 느닷없이 새누리당의 유모 의원을 차기 대통령 예상 후보자의 인기 서열 1위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지지 도(度) 조사란 특정 인물의 특정 지위에 대한 정치 사회적 적합성과 국민의 공감 지수를 가름해서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특정 사안과 연관 지어서 전격적으로 조사하는 것
20세기 최고의 신화해설자로 불리는 조셉 캠벨(Joseph Campbell)과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빌 모이어스(Bill Movers)의 TV 대담 초고를 재구성한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이란 책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내 삶의 빡빡함을 들어낸 여백 같은 안식(安息)은 어미 된 동물이 알을 낳은 뒤 품어 부화시키듯 인간의 삶에도 새로운 미래와 아이디어를 만드는 전기(轉機)가 된다는 의미이다. 백번 맞는 말이다. 정말 여백(餘白)은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이다. 이처럼 우리 인생에도 창조를 위한 여백은 정말 필요하다. 심지어 오늘 조간(朝刊)에 어떤 기사가 실렸는지도 모르고 지난 날, 스마트폰도 없이도 지낸 날, 먹고 사는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도 해본 날, 늘 보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 있어 보고, 늘 만나던 사람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본 날. 심지어 생각의 전원마저도 꺼둔 날. 그런 채우지 않은 빈칸 같은 날이 절대로 필요하다. 놀랍게도 바로 그 날에 창조의 씨앗은 뿌려진다. 그 땅에서 새싹이 틔워진다.왜 우리는 마음이 답답할 때 눈을 들어 하늘을 볼까? 멀리 바다라도 찾을까? 거기에 뭐가 있다고? 바로 여백 때문이
I. 서론: 연구의 필요성한국사회는 저출산과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2000년 고령화 사회(Aging Society, 노인인구 7.3%)로 2018년에는 고령사회(Aged Society), 2026년에는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전체 인구의 20.8%(1,035만 명)로 초고령사회(Super Aged Society)에 진입하며, 2045년에는 노인인구가 전체인구의 38.2%를 차지해 세계 최고령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이같은 고령화로 인하여 1999년 이후 2010년까지 연평균 3.5%의 암 발생 증가율을 보이고 있으며, 국가가 사망원인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983년부터 2012년까지 30년 사이에 한국의 암 사망률은 2배 이상이 되었다. 2014년 9월 23일 통계청이 발표한 ‘2013년 사망원인 통계’에 의하면 2013년 암으로 사망한 사람은 7만 5,334명으로 전체 사망자의 28.3%를 차지했다. 이는 2012년 암 사망자 7만 3,759명 보다 1,575명(2.1%) 증가한 것이다. 암치료기술이 발달하여 인구 10만명당 암사망율은 줄어들고 있으나 여전히 전체 사망에서 차지하는 암으로 인한 사망자는 늘어나고 있다.이와 함께 말기암 환자의 돌
-의식전환의 필요성-우리나라의 자살 통계를 소개한 바 있거니와 최근의 발표에 의하면 2,010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서 자살한 사람이 무려 15,566명이나 된다. 차제에, 성경에서 자살한 인물들과 그 동기를 찾아보았다. 자살한 성경 인물들1)아비멜렉이 세겜 망루를 공격하다가 한 여자가 던진 맷돌 위짝에 맞아 두개골이 깨지자 여자의 손에 죽는 것이 부끄럽다면서 부하에게 칼로 찌르라고 해서 죽었다(삿9:52~54).2)삼손은 다곤 신전을 무너뜨리고 자신도 깔려 죽었다(삿16:23~31).3)사울 왕은 길보아산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다가 화살을 맞아 죽게 되자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기 칼에 엎어져 자결했다(삼상31:1~6).4)압살롬의 난을 주도한 아히도벨은 목매어 죽었다(삼하17:1~23).5)유다 아사 왕 27년에 시므리가 모반을 꾀하여 즉위했으나 7일 만에 싸움에서 폐하자 요새에 들어가서 불을 질러 성을 태우고 자신도 소사했다(왕상16:15~20).6)예수를 판 유다는 목매어 죽었다(마27:3-10; 행1:16~18).이들의 자살의 동기는 권력욕으로 인한 배신과 반역(아비멜렉, 아히도벨, 시므리), 시기심(사울), 분노(삼
다니엘서 12장 1절부터 3절의 문학적 기교와 신학적 교훈-(1) 서 론다니엘서 12장 1절부터 3절은 비록 짧지만 중요한 본문이다. 왜냐하면 다니엘서 전체의 구조 속에서 신학적 절정(climax) 부분이 될 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에서 부활 사상에 관해 가장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본문이기 때문이다. 또한 구약성서 본문을 문학적인 방법들을 통해 연구하는 학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도 이 본문은 다양하고도 뛰어난 문학적, 수사학적 기교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다니엘서 12장 1절부터 3절에 내포되어 있는 다양한 문학적 기교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근거로 하여 구축할 수 있는 신학적 교훈들을 제시하는 것을 이 연구의 기본 목적으로 삼고자 한다. 그리하여 구약성서 본문의 신학적 교훈들이 본문 자체의 문학적 요소들에 관한 연구들을 통해서 충분히 발견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하고자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의 설교자들이 설교를 준비하려 할 때에 본문의 신학적 교훈들과 본문의 문학적 기교 연구와 아울러 그것들에 근거한 설교의 전달 방식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I. 다니엘서 연구사다니엘서는 “수많은 논쟁의 원천이 되어 왔는데, 특히
신약성경에 담긴 신학 산책요한복음에서 부활현현의 체험과 부활신학(12)필자는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의 세 번째 현현 사건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주 예수의 세 번째 현현 사건이 단순히 물고기(생선)를 잡는 사건이 아니라, 주 예수의 선교 위임에 따라 복음을 전파하러 나간 선교 현장에서 갖게 된 체험을 나타낸다는 것은 지난 호에서 다루었다. 제자들은 주 예수의 선교 위임에 따라 담대히 선교의 현장에 나가 수고했지만, 주 예수의 도움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저자는 제자들의 실패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현현을 알린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21:4). “이른 아침이 되어갈 때에”라는 언급은 밤의 어두운 혼돈의 물결로부터 낮의 빛이 임하는 새로움의 시작을 알린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갔을 때가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이었던 것과 같이,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열매가 없는 허탈한 제자들에게 밤이 물러가고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주 예수의 현현은 이번에는 “바닷가에 서셨다”라는 표현을 통하여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시던 때의 모습으로
노래와 음악으로 풀어보는 성경이야기(291)전적으로 의뢰의 노래찬송가 중에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하는 노래가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찬송가의 선율은 인도의 민요에서 차용된 것이고, 가사를 쓴 작사자는 ‘썬다씽(Sundar Singh, 1889~1929)’이라고 한다. 썬다씽은 힌두교의 귀족계급에서 태어났지만, 그 당시 그 근처에 다닐 공립학교가 없어서 영국 사람들이 세운 사립 미션스쿨에 입학했다. 그는 성경공부시간마다 성경을 찢어버리는 등의 반항의 세월을 보내다가 14세 때 모친이 별세한 이후부터 급격히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도마에게 보이셨던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하여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다.16세 때부터 이슬람국가인 아프가니스탄, 티벳 등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20세 때 사도요한 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정식 신학공부를 마친 이후, 실종된 40세가 될 때까지 티벳선교에 자신의 황금기를 아낌없이 바쳤다. 추운 겨울날 눈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힘들게 업고 가다가, 자신만 살겠다고 먼저 가버렸던 동행인이 오히려 먼저 눈 속에 얼어 죽어 있음을 발견했다는 일화는 대단히 유명하다. 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