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한복음 14:17). 원수가 있었습니다. 미워도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베드로전서 3:9)는 말씀을 머리로는 암송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으로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 사람은 도저히 용서 못 하겠습니다”라고까지 할 정도로 마음을 좀처럼 추스르기가 힘들었습니다. 마치 요나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알면서도 도무지 순종하고 싶지 않아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행동했던 것처럼 전인적 부패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198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을 다닐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아침에 학교를 등교하기 위해서 차를 타고 언덕을 넘어 내리막길 터널을 통과하는데 갑자기 자동차가 뱀처럼 자유자재로 달리기 시작하면서 한쪽으로 급격히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얼마나 두려운지 핸들을 똑바로 꽉 잡고, 속도를 서서히 늦추면서 터널을
설교자가 성서 문학 장르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성서 저자가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문학 장르의 차이와 관계없이 일반적인 성서해석의 대전제이다. 하지만, 본문 안에서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뜻을 찾아감에 있어, 그가 선택한 문학 형태를 고려하는 것은 보다 섬세한 저자의 저술 의도를 파악하는 데 필요하다. 왜냐하면 특정한 메시지를 특정한 문학 장르를 빌어 밝히고 있는 저자의 의도는 그 문학 형태의 특성 안에서 정확하게 파악될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 성서적 설교는 효율적인 전달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이 시대의 청중에게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으로 증거하기 위한 과제를 부여받는다. 성서적 설교는 교회를 세우는 근간이며 복음 증거를 위한 중요 요소이다. 일반적으로 석의가 약하다고 지적되는 한국교회 설교는 보다 본문 해석에 근거한 본문 중심의 설교를 수행할 과제를 부여받는다. 성서적 설교를 위한 여러 관점 가운데 하나로서 성서의 문학 장르 특성에 따른 본문 해석은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이번에 다룰 구약의 시편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찬양이며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확신이다, 동시에 인간은 어떤 자
(qa,natoj kai. o` deu,teroj qa,natoj) 죽음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가장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죽음은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바람 같은 존재이다. 장례식에 참여하는 사람 중에 조금만 현실에 놓여 있는 죽음에 대해 숙고해 본다면 죽음만큼이나 비밀스럽고 무서운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도 없다. 어제만 해도 유연하고 부드럽던 몸이 오늘은 돌덩이나 쇳덩이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는 시체로 변해 있는 것을 무엇으로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가? 헬라인들은 순간적으로 닥친 죽음의 가면을 벗겨버리면 영원한 영혼의 자유가 있는 이데아의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현인들은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군인들은 전쟁에서 용맹스럽게 전사하는 것을 남자다운 행동으로 여겼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나타난 죽음에 낭만적인 요소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이 죽음을 결단하고 맞이하는 모습과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완전히 상반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다정한 친구처럼 여기고 살기 위하여 도주하는 것보다는 독물을 마시며 죽는 것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육체에 갇혀 있던 영혼이 해방되어 영원한 세계로 귀환한다는 헬라 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보배로운 피라고 해서 “보혈”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양이나 송아지의 피를 뿌려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사람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양이나 송아지 같은 짐승이 대신 피를 흘리고 죽어야 했습니다. 짐승의 피를 뿌려서 죄를 용서받는 제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수도 없이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대로 십자가에 달려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며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님의 보배로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맥아더 장군이 참호 속에서 어린 병사와 나눈 대화가 6월이면 더욱 생각이 난다. 후퇴하라는 명령이 없어 포탄 속에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이 어린 병사에게 “집에 가고 싶지 않느냐?”, “부모님이 보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에 “다른 소원은 없고, 우리는 지금 맨 주먹으로 싸우고 있는데, 놈들의 전차와 대포를 까부술 수 있는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라는 대답을 듣고 인천상륙작전을 결심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한인교회를 하는 많이 교회들이 미국인 교회 건물을 빌려 예배를 시작한다. 임대를 하던 무상으로 사용을 하던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대부분의 한인교회들이 현지 미국인 교회 건물을 사용하게 된다. 요사이는 빌려주지 않는 교회들도 있고 또 임대로도 내야 하는 곳이 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쾌히 건물을 내어주고 함께 예배를 드린다. 해마다 6월이면, 미국에서 공부하며 한인교회목회를 할 때 함께 했던 미국인 교회들이 더욱 생각이 난다. 피부색도 인종도 다르고 처음 만난 사람들임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는 것 때문에 좋은 교제를 나눴던 얼굴들을 잊을 수가 없다.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은 많은 미국인 교회들 안에 한국전이나 월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존 스티븐 아쿠와리란 탄자니아 마라토너가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선수들이 이미 다 결승선을 들어선 지 한 시간이 지난 후 경기장에 힘없이 뛰어들어 왔습니다. 그는 경기장을 뛰어들어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피투성이의 다리에 붕대를 맨 상태로 다리를 질질 끌며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결승전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는 처음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텝이 꼬이면서 옆 사람과 부딪혀 쓰러지면서 부상을 입었고, 의료진들은 더 이상 달리기에는 무리라는 진단을 내렸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느 취재기자의 보도기사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관중석엔 불과 수천의 관중들이 남아 있을 뿐이었고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엔 호루라기와 오토바이 소리, 그리고 비상등의 불빛이 어둡고 차가운 멕시코시티의 저녁에 스산한 기운까지 느끼게 만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자들이 다시 몰리면서 ‘이제 이번 마라톤 경기의 마지막 주자가 오고 있습니다’라는 장내 아나운서의 발표가 있었다. 탄자니아의 존 스티븐아쿠와리 선수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다리는 붕대가 감겨져 있었고 붉은 피가 새어 나오고
난 무명인입니다! 당신은요?/ 당신도 –무명인- 이신가요?/ 그럼 우리 둘이 똑같네요!/ 쉿! 말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떠들어 댈 테니까 말이에요. - 잘 아시잖아요!/ 얼마나 끔찍할까요, 유명인이 - 된다는 건/ 얼마나 요란할까요/ 개구리처럼 긴긴 6월 내내/ 찬탄하는 늪을 향해/ 개골개골 자기 이름을 외쳐대는 것은/ 에밀리 디킨슨의 시 ‘무명인’입니다. 시인은 박수받는 Somebody 유명인이 되고자 쉼 없이 제 이름을 개골거리기 보다, 무명인 Nobody로부터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돌아보자고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 승리한 믿음의 영웅입니다. 그러나 악한 왕비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려 하자 달아나 하나님께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면서 낙심합니다. 엘리야는 나만 남았다고 한탄합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19:10b). 그 때 하나님은 7000명의 무명 의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엘리야 홀로 의인인 줄 알았
먼저 마소라 본문의 각 4절을 살펴보자. 사무엘상 31:4 .h;yl,[; lPoYIw" br<j,h' Ata, l~Wav; jQ'YIw" daom] arEy: yKi wyl;ke acenO h~b;a; alw] ybi AWlL]['t]hiw] ynIrU~q;d]W hL,aeh; !ylirE[}h ;Wa/by: A@P, Hb;% ynIrEq]d:w] *B]r]j' #lv] wyl;ke acenOl] lWav; rm,aYow" 역대상 10장 4절 .h;yl,[; lPoYIw" br<j,h 'Ata, l~Wav; jQ'YIw" daom] arEy: yKi wyl;ke acenO h~b;a; alw] ybi AWlL]['t]hiw] h~L,ae~h; !ylirE[}h; Waboy: A@P, Hb;% ynIrEq]d:w] *B]r]j' #lv] wyl;ke acenO Ala, lWav; rm,aYow" 두 평행 본문에서 3절 마지막에 사울이 ‘떨었다’는 표현은 마소라 본문 그대로를 존중한 것이다. 사울이 떨었지만, 사무엘상 구절에서는 아직 사울이 생명을 위협할만한 부상은 입지 않았다. 반면 역대상의 기록에 의하면 사울은 이미 3절에서 활에 쏘여 중상을 입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요한복음서에서 ‘인자’(사람의 아들) 칭호는 공관복음서와는 사뭇 다르게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에 걸쳐 많이 사용됐으며 또한 요한은 인자 칭호를 통해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유일성과 그 유일한 분이 주시는 구원의 유일성을 강력하게 제시했다. ‘인자’는 표면적으로는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의 존재로써 유대인들이 보기에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유력한 집안 출신도 아닌데 기적적 일들을 행하시며 감동적인 교훈을 가르치는 분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인자’는 근원적으로는 영원한 권능의 인격의 하나님이신 로고스이시며 화육해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 속의 한 인간으로 사셨으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의 존재로 복귀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이번 호에서는 요한복음서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된 인자 말씀(요 13:31)을 통해 화육의 사명을 완수하신 인자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존재로 돌아가심에 관하여 알아본다. 요한복음서에서 ‘인자’에 관한 마지막 말씀은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과 가진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을 배반하게 될 가룟 유다와의 대화와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배반의 마음을 간직한 채 만
어느 충청도 산골마을 아래와 윗동네에 젊은 나무꾼과 나이든 나무꾼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명한 대장장이가 만든 도끼를 각각 하나씩 사서 젊은 나무꾼과 나이든 나무꾼이 같은 장소에서 시합이라도 하듯 나무를 베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나무꾼은 그 젊음의 힘을 자랑하듯 쉼 없이 열정적으로 나무를 패듯이 베었고, 나이든 나무꾼은 짬짬이 쉬어가며 나무를 베었습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일을 마치고 서로가 해놓은 나무를 보던 젊은 나무꾼은 쉬지 않고 벤 자신의 나무가 훨씬 많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적어서 놀랐습니다. 그 모습을 본 나이든 나무꾼이 그 이유를 말해 줍니다. “자네는 오늘 하루 쉴 새 없이 도끼질을 했지만, 나는 잠시 짬을 내어 쉬면서 무뎌진 도끼날을 다시 세우며, 나무를 베었기 때문이라네” 성경에 신랑을 맞으러 나간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열처녀 모두 등과 기름을 가졌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자니 불을 밝히는 기름을 넉넉히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신랑이 오기도 전에 기름이 다 타서 등불이 꺼질 것입니다. 이때 슬기로운 처녀들은 다른 그릇에 충분하게 여분의 기름을 채워왔지만 미련한 처녀들은 등에 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1. 인정 198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샌프란시스코 미술대학(Art Institute of San Francisco)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순수 미술을 공부하는 곳이라서 그런지 학생들의 외모와 사생활과 그리고 저들이 그리는 그림들이 저에게는 대다수가 상당히 혼란스러웠습니다. 학생들 중에는 동성애자들도 있었고, 쉬는 시간에 대마초를 피우는 것은 예사로운 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그리는 그림들 대부분이 너무 잔인하고도 포학한 내용이 많았으며, 인간의 성에 대해서도 너무나 문란하고 난잡하기가 짝이 없는 마치 지옥 세계를 방불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저들과 함께 공부하려고 하니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 학교에서 졸업할 때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졸업을 눈앞에 두게
진도에 내려와 4년이 안된 시간에 벌써 3번이나 이사를 했을 때 아내가 한 말이다. 그러고 보니 미국에서도 11년 사는 동안 대여섯 번은 이사를 한 것 같다. 계획도 없이 이사를 하며 새 집으로 거처를 옮기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떠나는 날 그 많던 모든 짐들을 다 정리하고 나눠 주고 없앤 후에 가방 몇 개 들고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어렵게 그 많던 짐들을 정리하며 이제 짐 없이 살자고 다짐하며 살았지만, 십여 년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때도 또 무엇이 그렇게도 많이 쌓였던지 이것저것 다시 버리고 나서 가방 몇 개 들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땅 끝인 진도에 오면서는 또 다짐하고 다짐했다. 하지만 4년도 채 안된 시간에 다시 이사를 하며 쌓아놓은 짐들을 정리하니 그렇게 말할 만도 하다. 무슨 짐들이 이렇게 많은지 짐을 옮길 때마다 나눠줄 것과 버릴 것이 그렇게도 많은데 쌓아놓고 살았던 것이다. 이사를 하며 버리는 연습을 하는 것 같다. 아니 솔직히 지금도 아직 박스에 담겨 풀지 못한 짐도 있다. 다시 언제 또 거처가 옮겨질지 모르는 생활에서도 당장 쓰지 않는 것들은 쌓아놓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천국에 가야 할 때도 너
목회자 모임에서 부산에 있는 Y목사님이 대표기도를 하면서 “예수님은 왕이시요,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했는데 그것이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게 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 믿기 전에는 열심으로 도를 닦아온 ‘수도자’였다. 알지 못하는 전능자를 찾아서 자신과 합일을 이루며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서 참선을 해왔다. 그것을 위해서 직장을 바꾸기도 했고, 설악산 지리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련을 쌓는 경력이 아주 많았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고, 베드로처럼 주님 기뻐하시는 신앙고백을 하는가가 궁금했다. 그의 얘기로는 기도원에서 어떤 목사님을 만나 영성에 관한 대화를 나눈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했다. 그 목사님은 그에게 최고의 큰 도(道)를 알려주겠으니 믿어보지 않겠냐고 권유하면서 십자가의 도를 전해줬다는 것이었다. 그 후 산에다 텐트를 치고 몇 개월 함께 머무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며 기도하는 생활을 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여러 가지를 경험했는데 이런 것도 있었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 한 번은 기도하는 데 하늘에서 레이저 광선 같은 빛이 자기 머릿속으로 들어오면서 지금까지 도를 닦으며 쌓아온 모든 것들을 부수며 날려버
그 동안 모아온 글들을 엮어 ‘우리는 주님의 동산이다’이란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그리고 졸작이지만 여러 선, 후배 목회자들과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막상 누구에게 선물한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고, 우체국을 통해서 보내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책을 받았다는 연락조차 없었지만 대부분 핸드폰으로 말이나 글로써 감사의 뜻을 전해왔다. 그들 중에는 감동 있는 글이기에 몇 시간 만에 다 읽었다거나 부부가 함께 읽었거나 교인들의 모임에서 독후감을 나눠봤다고 알려줬다. 이 목사님은 신학교 교수, 병원 원목, 교회 담임 목회자 등을 역임한 선배이시다. 이 분이 카카오톡으로 나에게 글을 보내주셨다. “김 목사님, 선물해준 책을 매일 밤마다 한 편씩 읽고 있어요. 매 편에서 귀한 의미를 얻습니다. 앞으로도 매일 밤에 한 편씩 읽을 거예요” 두 달이 지난 후 그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밤 마지막 편을 읽었어요. 그동안 잠자기 전에 한 편씩 재미있게 읽어왔어요. 179페이지에 오자가 있던데 고치면 좋겠어요” 이 분은 연세가 우리 나이로 88세인데 어쩌면 후배가 쓴 책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눈의 피곤으로 책 읽기를 그만 둘 수 있을 텐데 끝까지 읽어주셨
지난 원고에는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상황에서 예수님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자기의 죽음을 땅에 떨어져 심겨지는 밀알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에 나타난 의미를 살펴봤다. 이번에는 그 말씀의 연장선에서 예수님이 자기의 증언을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질문과 그것에 대답하신 말씀에 담긴 인자의 존재에 관하여 살펴본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무리의 반응을 전달한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말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12:34). 무리는 율법에 기초한 메시아관을 지적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인자에 관하여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함을 언급한다. 여기서 무리가 가진 메시야관이 무엇이며 또 그들이 올리어지심에 관한 예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지가 제시된다. 먼저 무리는 율법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현존을 말한다고 간주한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에서 지금까지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의존하고 있는 율법이 무엇인지는 구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