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에서 자유합니까? 아직 율법아래 있습니까?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왜 주셨을까요?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라고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율법은 변명할 것이 없도록 모든 입을 막고, 죄를 깨닫게 하여 온 세상을 심판아래 있게 하려고 주셨습니다. 율법의 잣대로 선악을 따지면 죄 없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기 전에도 사람들은 죄를 지었으나 그때는 죄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웃집에 탐나는 물건이 있어 훔치러 갔다가 여의치 않아서 그냥 돌아왔으면 율법이 없을 때는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온 후에는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조항 때문에 탐내는 것도 죄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율법이 온 후로는 행위뿐만 아니라 마음에 품은 것까지 죄가 되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마음으로 탐내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고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도 다 죄가 되니 율법은 모든 사람이 빼도 박도 못 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을 죄인 만들어서 꼼짝없이 심판 아래 들어가게 하는 죽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보혈로
가족 시스템 이론에서는 문제아로 지목된 그 한 사람을 온 가족의 문제를 대표하는 대변자로 본다. 엄마에 의해 중고등부 수련회에 끌려온 한 자매가 있었다. 아이가 집에서 얼마나 말썽을 부리는지 도저히 통제가 되지 않자 엄마는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자매를 수련회에 앉혀놓고 돌아갔다. 머리색, 옷차림 등 수련회에서도 단연 튀어 보였던 이 자매는 수련회 내내 시큰둥하게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집회나 찬양, 나눔 등 순서에 할 수 없이 앉아있긴 했지만 도통 관심은 없어 보였다. 거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 모두가 둥글게 둘러앉아 자신이 돌아갈 삶에 대해 나누고 기도를 부탁하는 자리가 있었다. 내내 말이 없던 자매가 한마디 툭 던졌다. “우리 집은 나만 없으면 행복해요. 제가 제일 문제거든요. 근데… 내가 맞으면 우리 엄마가 안 맞아요.” 이 자매는 가족에게 늘 골치 아픈 문제아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가족을, 특히 엄마를 보호하는 구원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자매에게 주어진 축복의 한마디를 통해 자매의 삶이 달라졌다. 가족의 문제아가 아니라 보호자라는 한마디는 자매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눈을 바꾸어 놓았다. 더 이상 문제아로 살 필요가 없어진 것
요즘은 감사관이라는 위치에서 상담기관이나 장애우 복지기관에 감사를 나가다 보니 늘 문제점을 찾아내는 과정을 반복한다. 상담기관이나 복지기관들 중에 어느 한 곳도 나쁜 의도로 시작된 곳은 없다. 나름대로 마음과 몸이 아픈 사람들을 돕고 섬기고자 하는 귀한 마음으로 시작된 기관들이다. 그곳에서 일하는 상담자나 사회복지사들 또한 더 없이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좋은 마음으로 시작이 됐다고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좋은 의도로 설립이 된 기관이라고 해도 중간중간 스스로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서류상으로나 행정적으로 정부에서 요구하는 기준치에 못 미칠 때는 정부에서 지불했던 돈을 다시 토해내야 할 때도 있고 여러 과정을 거쳐 시스템을 뜯어고쳐야 할 때도 있다. 감사의 과정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가 지적될 때 기분 좋아하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싫으나 좋으나 찾아오는 정기적 감사와 문제 해결을 보는 관점은 그 상담기관이 어떻게 진화해 나가느냐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 문제가 지적될 때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서 펄펄 뛰는 책임자들도 있다. 감사관이 나타나면 적대감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가능한 한 어떤 요청에도 협조하지 않으려 한다. 심
칼 융의 분석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정신구조를 페르소나, 자아, 그림자라는 개념으로 구분 지어 설명한다. 페르소나는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착용하던 가면을 뜻하는데 ‘외적 인격’, 즉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을 말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모습이고 행동규범이다. 목사, 사모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한다는 기대치이다. 그런데 대외적으로 보이는 그 페르소나 뒤에는 그림자가 존재한다. 우리 안에 있는 부도덕하고, 부정적이고, 가리고 싶은 더러운 면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온전한 인간이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당연히 목회자나 사모에게도 이 그림자는 존재한다. 말씀을 들고 강단에 호기 있게 서면서도 사람들의 반응이나 비판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주일의 나와 주중의 내가 다르다. 사람들이 몰라야 하는 허물들이 셀 수도 없다. 자신이 얼마나 쪼잔한지, 찌질한지, 뒤끝이 작렬하는지, 얌체인지, 비겁한지 절대 들킬 수 없다. 하지만 그림자는 잠시 숨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언제나 은혜만 끼치며 살 수 없고, 맞는 말만 하고 살 수 없다. 안타깝게도 교회에 오는 사람들의 모든 문제를
2년 전 즈음 엄청나게 빠른 성장을 이룬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한 대형교회 목사가 해임됐다. 미국에서도 규모로 치면 다섯 손가락에 꼽히도록 큰 교회의 성장을 주도한 목회자였다. 알코올 남용과 정신적 문제들, 그리고 가정불화가 원인이 됐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소신을 대외적으로 강하게 피력하던 또 다른 목사가 동성애자 파트너에 의해 마약 복용 및 동성애의 전력이 폭로되기도 했다. 미성년자와의 성매매가 발각되어 목을 매 자살한 목회자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이든 한국이든 잊을 만하면 교계에서 목회자의 외도나 성추행, 설교 표절 등의 가슴 아픈 소식이 들려오곤 한다. 주위 교회들과 사역자들의 귀감이 되고 선망이 됐던 목회자들의 불명예스러운 사임은 교회와 동역자들에겐 큰 충격과 실망이 된다. 사역하던 교회의 근간을 흔드는 폭풍이 된다. 외부에서 기독교를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에 더욱 거센 공격과 비아냥의 빌미를 주기도 한다. 그 유혹에서 자신을 지켜내지 못했던 목회자들을 보며 돌을 던지기보다는 같은 목회자나 사모로서 안타까움과 두려움을 금할 수 없다. 그 유혹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그 연약함에서 누구도 예외일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의 분명한
비밀유지는 상담의 가장 중요한 원칙 중에 하나이지만, 위급한 상황들을 고려한 예외가 있다. 상담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알려줘야 하는 원칙이기도 하다. 비밀유지가 기본 원칙이지만 예외가 있음을 미리 말해주는 것이다. 첫째, 내담자나 타인이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이다. 상담을 하러 와서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울하거나 속상하거나 불안할 때,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갈 수도 있다. 너무 화가 날 때,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살이나 타살을 암시하는 말을 할 때는 홧김에 한 말 일지라고 절대 가볍게 넘기지 말아야 한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지, 진심으로 의도가 있는지, 방법을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는지 확인해서 위험의 정도를 가늠해야 한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그친다면 절대로 스스로나 남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유서를 쓴다든지, 주변 정리를 한다든지, 때와 장소, 방법 등 구체적인 계획을 말하고 의도를 드러낼 때는 당장에 조치를 취해야 한다. 지켜볼 수 있는 가족에게 연락한다든
상담사로서 매년 자격증 재발급을 위해 들어야 하는 과목 중 하나가 윤리학(ethics)이다. 상담을 하면서 옳고 그른 것도 구분을 못해서 매년 수업을 반복해야 하는가, 이 재미없는 과목을 굳이 또 들어야 하는가 투덜대기도 한다. 하지만 해를 거듭해 갈수록 윤리적 삶의 강조가 상담과 사역에 얼마나 중요한지 통감하곤 한다. 아주 약간의 판단 착오가 내담자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도 있고, 잠깐의 느슨함이 법정 싸움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담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목회자에게도 마찬가지의 윤리 강령이 적용된다. 돕고자 하는 선한 의도로 시작된 상담이 자칫하면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기본윤리는 물론 성경이 기준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주님 앞에 어떤 모습이 바른가는 우리를 디자인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정확한 기준을 제공한다. 그래서 윤리학은 이미 말씀에 뿌리를 둔다. 하지만 상담의 윤리강령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상황에 조금 더 구체적이고 법률적인 틀을 제공한다. 상담의 윤리학에서 가장 강조되는 원리 중 하나는 비밀유지(confidentiality)의 원칙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같지만 비밀
사람은 누구나 죽음이 두렵고 죽음 앞에 서게 되면 본능적으로 마음이 약해지고 의지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던 베드로조차 자기 목숨의 위협을 느꼈을 때, 의지가 흔들렸고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무섭고 치욕스러운지를 아셨기 때문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세 번이나 같은 기도를 간절하게 드리셨는데 기도의 결론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셨고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인류를 위한 대속 제물로 죽음에 내어주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게 하셔서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 한번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누이들이 찾는다고 하자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라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하나
예수님의 삶을 보면 언제나 약한 자들과 함께 하셨다. 먹을 것을 주시고 병을 고치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으며 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셨고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사셨다. 그러므로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약한 자들을 돌아보며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배우지 못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온 성민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세리장 삭개오를 찾아가 친구가 되어 주시고 삭개오의 집에서 1박을 하셨다. 온 동네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말하는 여인 마리아도 만나셨고 간음 중에 잡혀 온 여인에게도 관용을 베푸셨다. 나병환자, 맹인,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인 없는 장애인, 귀신들린 사람, 중풍병자, 각색의 병든 자들을 찾아 가셨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고 고아와 과부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하지만 그러고도 예수님은 환영받지 못했고 멸시당하며 핍박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반대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교회에서도 돈 많은 부자나 사회적으로 높은 사람, 유명한 사람은 환영하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은 적당히 대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먼저 낮아지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을 낮추어 사람의 형상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6~7)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낮추시고 우리를 찾아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했고 우리 마음에 예수를 영접하고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었다. 우리가 낮아져야 세상 속에서 말씀을 실천하며 빛으로 살 수 있다.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예수님은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자기를 낮추시고 우리에게 오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로 살려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에서 영광 받는 삶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인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영광 받으려 했기 때문에 오히려 멸시를 받게 됐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
인류 역사상 지금보다 풍요로운 시대는 없었다. 지금은 지나온 시절보다 훨씬 더 나아지다 못해 흘러넘친다. 먹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더 많다. 한 해 우리나라 음식물 쓰레기 처리 비용이 1조원 든다고 한다. 이를 경제적 가치 손실로 보면 그 금액이 25조원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삶이 이렇게 편리해지고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각박하다. 그래서 오늘날 가장 흔한 질병은 바로 우울증이요, 신경 쇠약증이다. 지금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 우울증 환자가 더 많이 속출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되는 걸까? 우리는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노력한 만큼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지쳐 있고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 세계에서는 결혼해서 자녀를 갖는 것보다 더 많은 스펙을 가지려고 한다. 그래야 이 불안한 시대를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편안한 삶, 멋진 삶을 추구하고, 꿈꾸지만 그것이 가능할까? 보이는 세상은 신기루와 같다. 한 순간의 즐거움은 얻을 수 있지만 금방 허무감이 몰려온다. 사람들은 쾌락이 자신을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부하거나 포기하지 못하고 열심히 취하려고 한다
세상을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고, 일이 잘 안 풀리고, 속상한 일이 많더라도 만약 독자께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기 바란다. 아직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독자님은 신앙생활을 해 보면 왜 신앙생활 하는 것을 감사해야 하는지 곧바로 알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질을 높이고 보람된 삶을 살기 위해 주말마다 골프, 등산, 낚시 등 레포츠를 즐기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이러한 취미가 육체적, 정신적 건강관리를 위해 필요한 활동임은 틀림없지만 인간 내면에까지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신앙생활은 모든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도 영향을 미치며 영의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매우 중요하다. 필자가 말하는 신앙생활이란 예수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다. 신앙생활로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성령의 체험을 한다면 인생이 변하고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지켜줄 뿐만 아니라 자녀양육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데도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올바른 신앙생활은 행복한 인생, 행복한 가정, 영원한 내세를
상담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대화의 기술은 단연 공감이다. 상대의 아픔과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공감을 통해 드러난다. 상담의 90퍼센트가 공감만으로 이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감이 100퍼센트가 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더 나은 방향으로 걸을 수 있도록 도전해야 할 때가 온다. 혹은 허용되는 행동과 허용되지 않는 행동에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법정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편지를 안 써준다고 상담소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펄펄 뛰다 돌아간 내담자는 다시 상담을 받을 기회를 상실한다. 가족과의 관계가 칭찬으로만 일관할 수 없다. 물론 칭찬을 충분히 많이 해야 하지만, 문제가 있는 행동을 지적하고 선을 그어야 할 때도 많다. 아이들에게 늘 잘한다고만 할 수는 없다. 지나친 칭찬과 허용이 아이를 망치기 때문이다. 배우자에게 잔소리를 아예 안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회 안에서도 성도 간의 관계가 위로하는 것에서만 그칠 수는 없다. 늘 편을 들어주면 상대방과 틀어질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제 좀 그만 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언제까지 똑같은 불평을 계속할 것인지, 언제까지 주저앉아 있을 것인지 답
공부가 재미있거나 학교가 신나서 학교 가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가야하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억지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다. 그러나 분명 공부가 재미있고 좋아서 열심히 하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학생은 스스로 공부하기 때문에 성적이 향상되고 목표를 성취할 때마다 성취감을 느끼며 더욱 재미있게 공부한다. 자기 주도적 학습법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선생님의 강압이나 부모님의 잔소리 때문에 공부하는 학생은 같은 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자기 주도적으로 공부하는 학생에 비해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 주도적 학습을 하는 학생은 공부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공부를 하지만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눈치를 살피며 억지로 공부하는 학생은 불평하면서 하기 때문에 성과에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하고 성적이 안 나온다고 야단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초등학생인 주안 주찬 형제가 방송에 나와서 놀라운 암산 실력을 보여 주어 시청자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인 동생 주찬이는 100만 단위의
상담소를 찾은 C씨는 교회 갈 때마다 자신을 싫어하는 듯 보이는 한 할머니가 신경 쓰인다고 했다. 이유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하고는 인사도 잘하고 말도 잘 섞으면서 유독 자신만은 경계하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한 번은 자신을 말없이 지나쳐가려 하길래 얄미운 마음에 일부러 길을 이리저리 막아 앞서 가지 못하게 했다나… 그 할머니와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괜스레 내 흉을 보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생겼다. 그 할머니가 신경이 쓰여 교회를 나가는 것이 시큰둥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다른 교회로 옮겨볼까 생각도 했다. 참다못해 한번은 작정하고 따져 묻기로 했다. 도대체 왜 자기를 싫어하냐고 대놓고 물어보겠다며 씩씩댄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할머니가 정작 자기를 싫어하는 것인지,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낯을 가리는 것인지조차 확신이 없다는 데 있었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열은 받는데 뭐라고 따져야 할까? 얼마 전 ‘언니의 따끈따끈한 독설’이라는 짧은 강의를 유튜브에 연재하는 한 강사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중 한 강의의 주제는 ‘은근히 나를 싫어하는 사람 상대하는 법’이다. 언제나 칭찬받고 싶고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심은 비단 크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