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게들을 모아 통에 넣어두면 한 마리도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어떤 게가 기어 올라가면 다른 게들이 다리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어오르고 다리를 잡고 떨어지면 다시 다리를 잡는 것을 반복한다. 결국 다 같이 한자리에 모여 공동운명체로 죽음을 기다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크랩 멘탈리티’라고 한다.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보통 이상으로 뛰어난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한다. 서로 비슷한 환경의 사람이 자신보다 잘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자신도 그렇게 올라갈 생각보다 끌어내리려 한다. 처음부터 자신들과 같은 대오에 있어야 할 사람이 올라가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자신보다 앞서가는 사람을 제거함으로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자기 삶을 불만족하게 하는 비교대상을 끌어내림으로 심리적 안정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자신의 무능력을 상대적으로 부각시켜 주며 앞서가는 그 자체가 거슬린 것이다. 그래서 끌어내려 같은 계층에서의 이탈자를 제거하고 통 속의 결속을 다지려는 집단착각을 한다. 함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올라가는 자를 볼 때 배신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앞서 가는 자로 인한 차이만큼의 소외와 박탈감이다. 하향 평준화시켜 통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알베르 까뮈(Albert Camus)의 소설, ‘이방인(L’Etranger)’의 첫 문장이다. 주인공 뫼르소가 한 말이다. 요즘 조국교회에 상식이 죽었다. 신앙은 기적이지만, 신앙생활은 상식이다. 은혜만 되면 되는 게 아니다. 많이만 모으면 정통(Orthodox)이 되는 게 아니다. 전통(tradition)이라고 다 맞는 것이 아니다. 익숙하다고 올바른 것도 아니다. 말에는 숨이 있고 글에는 혼이 있다. 누구나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시대이지만, 특별히 목사는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다. 말과 글을 어법에 맞게 쓰는 것은 예의요 상식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다. 원래는 경제논리이지만 나쁜 것이 많아지면 좋은 것이 사라진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교회용어가 그렇다. 교회나 예배에서 쓰이는 용어가 국문법에 맞지 않는 것이 많다. 문제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10년 전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바로 쓰기를 하고 있다. 예배나 교회모임에서 대표기도는 기도인도로, 중보기도는 중재기도(이웃을 위한 기도)로, 사회자는 인도자로, 대예배는 주일아침예배로, 헌금은 봉헌으로, 축제는 잔치로, ‘기도드렸습니다’는 ‘기도드립니다
현시대를 일컬어 낙관주의,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시대라고 한다. 이러한 죄악이 관용한 시대에 쓰임 받는 지도자들이 돼야 한다. 기왕에 부름을 받았으면 의의 병기로 쓰임 받고 잘 했다고 칭찬받아야지, 불의의 병기로 쓰임 받다가 버림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목회자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물론 다수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다. 한국의 목회자들은 자기 십자가 지기를 싫어한다. 어쩌면 십자가 지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성경에서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을 바르게 전하고 가르쳐야 할 목회자들 자신부터 성경을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임을 잘 알고 있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생명력이 있어야 할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버렸고 형식만 남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배를 드리니 은혜는 없고 감동이 없으며, 형식과 외식적인 예배가 되어 버린 것이다.이런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면 바로 세상의 혼탁함에 휩쓸리고 만다. 아까운 시간을 드려 예배를 드리면 무엇하겠는가? 안타깝고도 개탄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지경에 이르고 있는데도 목회자들은 나 몰라라 한
얼마 전 어떤 신문에 감정가 526억 원 규모의 대형 교회가 경매에 나왔다는 기사가 난 것을 보았다. 그 기사에 따르면 2009년 감정가 277억에 경매에 나왔던 교회 이후로 종교시설로는 최대 규모의 경매 물건이라는 것이다.십여 년 전 천주교 교인인 지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수도권의 모 신도시에 살고 있었는데 성당에 다니며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도 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기네 성당은 신도시에 들어선 성당인데 막상 주민들이 입주하기 시작하면서 이사 온 신자들이 예측을 넘어 엄청나게 몰려드는 바람에 지어놓은 시설로 감당하기 어려워 쩔쩔매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개발이 진행된 상태에서 다시 땅을 사는 것도 어렵거니와 새로 지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난감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그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침(?) 그 신도시에 교회 몇 곳이 예배당을 너무 크게 짓는 바람에 건축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부도를 내게 되었고 자기들이 그것을 사서 성당으로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목사인 내게 마치 자랑하듯 이야기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얄미운 생각도 들었지만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심리학자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게 되었다. 담임 선생님이 자기 반 아이 중 한 명을 무작위로 선택해서 의도적으로 계속 칭찬을 하게 했다. “너 요즘 공부하는 자세가 좋아졌어. 공부에 재미를 붙였나봐. 너 다음달에 틀림없이 성적이 오를 거야. 요즘 아주 잘하고 있어요” 두 세달 후 그 학생은 정말 성적이 향상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작년 11월 하순 KBS 뉴스에 보도된 내용이다. 프로축구 ‘황선홍’감독이 이끄는 포항팀 숙소에 드나드는 입구에 고구마를 담아둔 컵 두 개를 비치해 놓았다. 한 고구마 컵에는 선수들이 오가며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말을 하게 했으며, 나머지 고구마 컵에는 기분 나쁜 말과 저주스런 말을 하게 했다. 두 달이 지난 뒤 결과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칭찬과 격려를 한 고구마는 고구마 순이 무성하게 잘 자랐으며, 나머지 기분 나쁜 말과 저주스런 말을 한 고구마는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금년 6월 동아 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삼성 중공업 거제 조선소 건조팀 사무실 책상에 양파를 컵에 담아 놓았다. 물이 담긴 컵에 하나는 “기분 좋은 말”이라는 쪽지를 붙였고, 다른 한 컵에는 “기분 나쁜 말”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세계의 시계가 될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세계에 대한 ‘징조’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을 보면 역사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알 수 있으며, ‘종말의 때’를 아는 시각표를 보는 것과 같다. 종말의 날에 대한 분명한 징후의 하나는 세계의 눈이 이스라엘로 모아진다는 것이다.현재 이스라엘을 둘러싼 중동문제야말로 세계의 화약고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분명 ‘성경이 말한 대로 세계는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역사상 유태인만큼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운명을 살아온 민족은 없다. 그들은 조국을 잃어버리고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으면서 2000년 동안 유랑생활을 했으나 멸망하지 않고 나라를 재건했다.조국이 멸망한 민족으로서 5대 이상을 단일 민족으로서 순수성과 아이덴티티를 보존한 것은 유태인을 빼고는 달리 존재하지 않는다. 유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유태인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이미 예언한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마24:34)여기서 ‘이 일’이라고 말한 것은 앞서 언급
6월 30일부터 7월 12일까지(12박 13일)의 기간 동안에 침신대 학생들과 침례교목회자들과 성도들 11명이 16세기 종교개혁과 관련된 현장들을 답사하며 당시 개혁가들의 숨결과 개혁정신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보살핌 속에 무사히 돌아왔다. 우리 학교로서는 처음으로 기획한 종교개혁 답사여행이었는데, 유럽 4개국(스위스, 체코, 독일, 네델란드) 약 20개의 도시들을 방문하여 견학하는 여정이었다, 특히 이번 여정은 루터 쯔빙글리 칼빈 등 주류종교개혁가들의 현장뿐만 아니라, 16세기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와 관료후원적 개혁가들(Magisterial Reformers)들로부터도 이단으로 정죄받아 핍박을 당했던 아나뱁티스트들의 유적들을 답사하고 동시에 초창기 침례교회의 태동과 관련된 유적들을 견학하는데 중점을 뒀다. 스위스 취리히 그로스뮌스터 성당 근처 최초의 신자의 뱁티즘(believer’s baptism)이 이루어졌던 펠릭스 만쯔의 집이 있던 거리(Neustadtgasse), 초창기 스위스형제단(Swiss Brethren)의 지도자였으며 최초의 신자의 뱁티즘을 베풀었던 콘라드 그레벨이 살았던 집(Neumarktgasse), 펠릭스 만쯔가 수장당하여 순교했던 리마트 강
우리나라의 청소년 자살이 사회문제로 급부상하고 있다. 아직 청소년 자살 사망률의 절대적인 수치는 다른 연령대에 비해 높은 편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청소년 자살의 증가 추세가 다른 연령층에 비해 빠른데다 이른바 ‘자살예비군’으로 불리는 청소년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점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적신호이다.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1년 아동, 청소년(10~19세)의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는 5.5명으로 60~70대(50.1~84.4명) 고령층은 물론 30~40대(30.5~34명) 장년층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낮다. 자살 이유 역시 성적 비관과 가정불화, 우울증, 학교 폭력 등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원인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경찰청 경찰범죄분석통계에 따르면 2010년 10~20세 인구의 자살원인은 정신적, 정신과적 문제가 28.0%로 가장 높았고, 남여문제(12.7%), 가정문제(12.4%)가 뒤를 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자살의 원인이 개인적인 문제로 분석되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청소년 자살의 문제는 결코 가벼이 다뤄질 문제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 가장 주목해 봐야 할 부분은 청소년
탤런트 차인표가 진행하는 “땡큐”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았다. 마침 이효리를 중심으로, 10여년 선배로 유명 가수였다가 지금은 훌륭한 셰프(요리사)가 된 이지연, 그리고 10년 쯤 후배인 원더걸스의 예은이 이런저런 속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진행자는 공개적인 연인인 이상순이라는 답이 나오길 기대하며, “음악 멘토가 누구 있느냐?”고 했더니, 이효리는 의외로 윤영배라고 했다.(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다.) 음악적으로나 인생의 여러 문제를 그와 상담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관계가 되었는지 묻자, 이효리와 첫 만남에서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와~’라든지 ‘얼굴이 활짝 펴지며 반가워요~’라든지 하는 반응이 없이 그저 그렇게 별다른 표정이 없더란다. 오히려 그래서 진실하게 가까워졌다고 한다. (사실 그는 이효리에 대해서 잘 몰랐다고 한다.)‘목사가 무슨 이효리 이야기를 이렇게 하고 있나?’ 하겠지만, 그들 삶의 이야기가 내게는 설교로 들려오더라는 것이다. 엉뚱한 생각 같지만 ‘우리가 부러워하거나 혹은 우쭐한 마음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나를 끌어당긴다. 우리가 인기에 편승하고, 세상적인 가치 기준과 비교 경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유명
지난 6월 1일, 미국의 한 공립학교 졸업식에서 일어났던 놀라운 일이다. 적어도 우리로서는 감동 그 자체였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피켄스 카운티의 리버티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였던 로이 코스트너 4세가 “어렸을 때부터 나를 하나님께 인도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내가 말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다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후 졸업식 대표로 준비했던 고별사를 연단에서 찢어 버린 다음, 큰 소리로 주기도문을 암송했다. 이에 졸업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로 화답했다. 리버티 고등학교를 비롯한 피켄스 카운티 학군의 공립학교들은 “종교로부터의 자유 재단”이라는 단체의 압력으로 지난 학기부터 공식 행사에서 기도를 금지했었다. 이에 대하여 코스트너 4세가 항의를 하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그는 모 방송 인터뷰에서 “학교에서 기도를 몰아낸 것은 내가 겪은 최악의 일이었다”며 “나는 하나님을 옹호하고 싶어 졸업식에서 주기도문을 암송했다”고 했다. 어떤 이는 미국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들이 특별한 일이겠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유신론(theistic) 시민 종교(civil religion) 전통 위에 설립된
늑대는 좋은 털을 가진 멋진 동물이다마는 불행히도 평판은 좋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만화나 책, 동화 등에서 다른 동물들을 속이고 약탈하는 나쁜 동물의 대표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늑대가 동화책에서조차 이러한 동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늑대는 야생 동물들 뿐만 아니라 양이나 가축을 공격한다. 늑대는 자기가 먹을 수 있는 분량보다 더 많은 동물들을 죽인다. 바로 이 점이 늑대가 악한 것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늑대는 여우나 개와 아주 가까운 혈통인 것이다. 그래서 그 외모나 습성이 거의 비슷하다. 늑대는 새끼를 낳으려고 굴을 판 후, 여우와 같이 새끼를 조심스럽게 훈련시킨다고 한다.그들의 가족들은 매우 강하게 뭉쳐 있다. 늑대의 가족은 어미와 아비 그리고 4~6마리의 새끼로 구성되며 항상 떼를 지어 이리 저리 돌아 다닌다고 한다. 그들은 혼자 사냥하거나 짝을 지어 사냥한다. 보통 몸무게가 45kg 인 늑대는 아주 빠른 속도와 지구력을 지니고 있어 한 시간에 32km를 달릴 수 있다.필요하다면 하루에 160~320km를 갈 수도 있다. 늑대의 음흉하고 나쁜 이미지는 밤을 기다렸다가 공격하는 습성에서 나온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늑대
여름수련회는 교회학교(주일학교)의 일 년 행사 중 가장 비중이 큰 프로그램이다.교회마다 여름 행사를 많이 준비하고 있다. 특히 여름수련회의 성패가 학생(아동)들의 신앙성장과 교회학교의 부흥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들의 여름수련회를 내실 있게 준비하여 학생(아동)들의 신앙성장과 교회학교의 부흥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또한 교회에 행사 프로그램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안전사고에 대한 대책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할 것이다. 지난 주 충남 안면도 해병대 극기 훈련 중 공주사대부고 학생들의 익사 사건은 참으로 안타까운 비보였다. 안전대책의 허술함으로 일어난 인재였다고 한다. 이에 교회들의 여름수련회를 준비함에 있어 안전대책을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이다.특히 한국교회는 주로 자연환경이나 시설이 좋은 곳을 수련회 장소로 많이 정하지만 이스라엘의 신앙훈련의 장소는 광야였다는 것을 참고 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 에 보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마11:7)에서 교회들은 이 말씀을 “너희가 무엇을 하려고 수련회에 나갔더냐?”로 바꿔서 수련회 준비에 적용하고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시원하고 물 좋은 곳에서
우리나라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용어가 많다. 대표적인 “대예배” 참석인원이 가장 많은 일요일 낮 교회 예배를 흔히 대예배라 부른다. 대예배가 있으면 “소 예배”도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없다.신앙적으로 보면 어떤 예배도 소예배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예배를 비롯한 예배 용어가 상당수가 잘못됐다는 게 많은 학자들의 견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최근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개최한 한국교회발전연구원 제8차 연구발표회에서 “한국교회 예배용어, 이것만은 고치자!”에서 서울신대 조기연 교수는 교회에서 관행처럼 쓰이는 여러 표현을 바로잡자고 제안했다. 비성서적, 비신학적, 비기독교적인 낱말이거나 어법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수정의 근거로 들었다. 조 교수는 우리나라 교회에서 사용하는 예배용어 중 잘못된 게 많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 당신”에서처럼 하나님을 당신으로 부르는 것도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당신은 3인칭에선 극존대어로 쓰일 수 있지만 2인칭에선 존대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 “아버지, 당신”이라고 할 수 없듯이 이와 같은 말은 고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주여, 하나님 아버지시여!”도 잘못된 표현이라 할 것이다
어느 목사님이 겪었던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다. 하루는 장로님 한 분이 목양실로 찾아오더니 노트 한 권을 꺼내 놓는다. 그 노트에는 그 목사님이 부임해서 지금까지 설교한 내용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목사님은 자신의 설교에 얼마나 은혜를 받았으면 이렇게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기록을 했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했다. 그러나 그 다음이 걸작이었다. 그 장로는 노트를 접어놓은 곳 몇 군데를 펴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예화는 몇 년 몇 월 몇 일에 쓴 거고, 이 본문은 몇 년 몇 월 몇 일에 사용했던 본문입니다. 그런데 재탕을 하시다니요.” 그 순간 그 목사님이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고 고백했다. 예화는 좋은 것이면 다시 사용할 수도 있고, 성경본문에서 한 번 설교로 완벽하게 할 수 없을 때는 또 다시 선택할 수도 있고, 또한 필요성이 있다면 다시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때 그 목사님은 생각했단다. ‘아하, 똑같은 설교를 듣고 기록을 해도 이런 목적으로 기록하는 사람도 있구나. 저 열정을 긍정적인 곳에 썼더라면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텐데.’ 내가 생각해도 그 열정이 아깝기만 하다. 그런데 실상은 이 사람에게 목사의 설교가 문제가 되
여름이 시작되면서 분주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휴식을 떠오는다면 그건을 바로 ‘여름휴가’를 먼저 생각할 것이다. 육체의 회복을 위해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제일 먼저 ‘여행’을 생각해본다.요즘 아침 출근길의 기차안이나 전철에서의 풍경은 ‘내 손안의 스마트폰’이 인간의 편리함속에 혼잡한 세상의 조급함속에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노인들이 가끔 젊은이들에게 전철역에 대하여 묻고 있어도 모두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있어 누구 하나 대답하지 않는 세상이 됐다. 모두들 귀를 이어폰으로 막고 음악이나 자기의 세계에 빠져있기 때문이다.영성운동가인 리처드 포스터는 그래서 “분주함이 이 시대의 대적”이라고 말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말씀하셨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진정한 ‘쉼’은 무엇일까? 고민해 보아야할 과제가 아닐까 싶다.우리의 일상에서 뉴스들이 우리에게 힐링의 역할을 할 때가 있다. 침례병원이 부산 초량에 있을 때, 병리과장으로 경북의대 출신이신 허만하 박사가 재직하고 계셨는데 부산문단에서는 유명하신 시인으로 활동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허 박사가 얼마전 대한민국 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