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협의회는 그림2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교회의 주요 사역기관들과 각종 교회위원회, 집사회, 그리고 전담사역자들로 구성된다. 주요 사역기관들을 대표한 책임자들(기관장들 : 교회학교 교장, 제자훈련부장, 여선교회장, 형제회 또는 남선교회장, 교회음악부장)들, 그림에서는 지면상 재정위원회와 위원장, 예배위원회와 위원장만 보여주지만 교회의 모든 위원회 위원장들이 포함된다. 그리고 안수집사들로 구성된 집사회를 대표한 집사장이 구성원이 된다. 이러한 구성은 교회 전체의 사역과 프로그램 및 활동들을 통합적으로 구상하고 통제하며 조장함으로써 원활한 유기체로서의 교회 활동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킬린스키와 워포드는 “Board는 조직의 다양한 기능들에 대한 궁극적 책임을 가지는 기본 단위”라고 하면서 각 기관이나 조직들은 그들 중 한 명을 Board의 회원이 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그림2에서 담임목사와 사역자(교육목회자, 음악목회자, 또는 선교목사 등)는 교회협의회를 의미하는 원을 벗어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위원회나 조직을 갖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외의 작은 원들의 경우 그 위치가 교회협의회와 교회협의회 밖으
필자는 지난 번 기사에서 부활현현의 체험이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믿는 부활신앙을 낳았으며 이 부활신앙은 부활신학을 담은 신앙고백과 복음선포(케리그마)로 표현됐다는 것을 제시했다. 부활신앙은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출발점이며 중심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약성서의 모든 내용들은 바로 이 부활신앙의 시각과 입장에서 기록됐다. 필자는 기독교의 중심적 신앙이며 기독교 신학의 출발점과 중심점이 된 부활신앙을 태동시켰던 부활현현의 체험에 대한 보다 더 구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도 지적했다. 그래서 이번 기사에서는 최초 사도들이 경험했던 부활현현의 체험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려 한다.신약성서에서 부활현현의 체험은 두 가지 종류로 제시된다. 하나는 열 두 사도들의 체험인데, 그것은 사복음서에서 빈무덤 사건과 함께 공통적으로 다뤄진다. 다른 하나는 사도 바울의 체험인데, 그것은 바울 서신들에서 간헐적으로 제시된 반면 사도행전에서 집중적으로 3회에 걸쳐서 제시되었다(행 9장, 22장, 26장). 부활현현 사건에 담긴 신학적인 국면을 제시하는 점에서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제시한 것과 사도행전에서 사울의 체험으로 제시된 사건에서 좀 더 구체적이며 직
블레셋이 골리앗을 앞세우고 히브리군대를 위협하고 있을 때 사울왕은 골리앗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골리앗에 맞서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므로 사울왕은 많은 재물을 포상하고, 가문의 세금을 면제해 주며, 자신의 사위로 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어걸었던 것이다(삼상17:25). 그런데 뜻밖의 인물이 골리앗을 무찔렀다. 베들레헴출신의 촌놈 다윗이라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적적인 승리에 많은 히브리백성들이 그를 칭송하며 추종하는 사태로 발전하자 사울왕은 다윗을 견제하려는 옹졸한 마음에 사로잡혀서 사위로 삼겠다는 약속을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 했다. 사울왕은 애초에 내걸었던 현상조건을 변경해 일방적으로 또 다른 조건을 내세웠다. 블레셋남자들의 생식기 100개를 가져오면 자신의 딸 미갈을 아내로 주겠다고 했다. 이 조건은 블레셋남자 100명을 반드시 죽여야만 채울 수 있는 조건이므로 내심 다윗을 전투 중에 죽게 하려는 속셈이었다(삼상18:25). 하지만 사울왕의 계략은 완전히 빗나갔다. 죽으라는 다윗은 죽지도 않고 오히려 200개나 되는 포피를 확보해 의기양양하게 사울왕 앞에 나타났다. 사울왕은 다윗에게 자신의 딸 미갈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다행스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의 침례교회들이 통치기구로서의 교회협의회라는 조직을 교회 내에 두고 있지 않거나 또는 이에 상응하는 타교단의 유사 조직을 여과 없이 교회에 받아들여 활용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한국에서의 침례교회가 침례교회다운 회중정치를 정착시키는 일에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음을 주목한다. 따라서 본 연구의 목적은 침례교회의 회중정치를 정착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는 침례교회 교회협의회의 구성과 운영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밝히고 한국침례교회들에게 적합한 적용점들을 제안하는데 있다. I. 전체 교회구조 속에서의 교회협의회의 위치회중민주주의 정치를 중심으로 하는 침례교회는 그 전체적 구조를 다음과 같이 그릴 수 있다. 아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교회의 최고의결기관은 사무처리회이다. 교회 전체에 관계된 사안들에 대한 궁극적 결정권은 전체 회중들로 구성되는 사무처리회가 가지며 이를 위해 교회는 전체의 결정을 요하는 사안에 대하여 사전에 보다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교회 전체에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즉 사무처리회는 즉각적으로 언제든지 개최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향한 주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도록 충분
말의 위력에 대해서는 새삼 재론의 여지가 없다. 특히 지도자의 말은 구성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느냐, 분열시키느냐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리더십 덕목이다. 따라서 말을 잘 할 필요는 없다 해도 잘 말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말보다 더 큰 위력은 웃음에 있다. 유머에 있다. 윈스턴처칠의 리더십도 사실 이것이었다. 물론 그는 노벨문학상까지 탈 정도로 말 잘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웃음과 유머 역시도 명성이 자자했다. 한 번은 강연을 하러 단상에 올라가다가 그 육중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걸려 넘어졌다. 그러자 숨죽이며 그의 입장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 웃긴 모습에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처칠은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저 때문에 웃을 수만 있다면 저는 또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더 큰 박수로 화답했다. 결국 그의 그 여유있는 웃음의 리더십이 세기의 영웅을 만든 셈이다.나도 요즘 성도들로부터 곧잘 듣는 말이 있다. 전에 비해 확실히 그렇다. “목사님. 목사님이 전보다 많이 여유로워지신 것 같아 좋아요. 웃는 모습도 많아지셨고….” 칭찬인지 뭔진 몰라도 하여간 전보다 나아졌다니 감사하다.그도 그럴 것이 난 요
CBS 열린 간증 프로젝트『Amazing Grace』에 우리 교회 열한 명의 성도들이 출연했다. 게임 중독자, 마약 중독자, 알콜 중독자, 도박 중독자, 조직 폭력배, 우울증 환자, 안티 기독교, 심지어 자살 중독자까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는 다양했지만 그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오직 ‘부활의 복음’이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었던 이들과 20여년을 함께 해 온 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 있다. 그것은 ‘복음이면 다 된다’는 큰 확신이다. 복음은 로마서 1장 16절 말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래서 복음은 이 세상 어떤 사람도 변화시킬 수 있으며 그 어떤 문제도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CBS 간증 프로젝트『Amazing Grace』에 나간 열한 명의 간증자들이 그 증거이다.그런데 지금까지 나의 목회를 돌아보며, 과거에도 동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했는데 ‘왜 지금과 같은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과연 어디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첫째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Nothing but Jonah`s sign) 없다’는 것을 강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마 12:39). 서기관
이 글은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출간된 복음과 실천(50)에 나오는 박영철 교수의 글을 발췌, 게재한다 침례교회 회중정치에 대한 이해와 건강한 침례교회를 세우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다. 편집자주들어가는 말본질 그 자체가 공동체인 교회는 그것이 하나의 유기적 몸으로 세워져나가는 일에 있어서 누가 어떻게 교회를 조정(control)하는가의 문제가 침례교의 회중정치(congregational polity)를 성공적으로 시행함에 있어서 매우 결정적 요소이다. 군주정체의 독단적 모순을 피해 회중 전체가 교회 일에 책임을 지고 적극 참여하는 일은 반드시 공동체 전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묶어주고 다양한 사역들을 기획하고 준비하고 시행하고 통제하고 평가하고 통치하는(governing) 책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나 조직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담임목사 한 사람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거나 또는 비정상적으로 소수의 교인들의 권리만 강조되어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따라서 교회가 회중정체를 적극적으로 살리면서도 효과적으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는 책임과 권한이 부여된 통치(governing) 기구나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물론 이러한 일은 회중 전체와의
요즘 인터넷을 통한 소통이 활발하다. 세상살이가 복잡다단하고 바빠서 실제로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늘 부족하기 때문이다.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는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상에서 단체 채팅 등의 방식으로 동창회도 하고 각종 계모임도 하며 활력을 얻는다. 동창들이나 친구들의 성공적인 소식을 접하면서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한다. 이러한 면에서 온라인상의 채팅방은 긍정적인 소통방식이다.그러나 이러한 소통방식이 때때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때도 있다.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체면이나 자존심으로 인해 본심을 숨기는 사람들에게 다른 동창들이나 친구들의 화려한 성공소식이 오히려 의욕저하라는 부작용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물론 실제보다 부풀려서 자신의 성공담을 늘어놓는 사람들도 많지만, 필요이상으로 남에게 자신을 비교하며 비관하는 사람들이다. 친구들의 성공이 나를 위축시키고, 친구들의 행복이 나를 불행하게 한다. 이러한 부러움은 필경 시기심이나 미움으로 변질된다.열정적으로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자들을 바라보며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저렇게 요란을 떨어야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가? 저렇게 시끄럽게 떠들어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가
서른네 살, 처음 예수를 믿고 뜨거운 마음에 “제자를 삼으라(마태복음 28:19~20)”는 주(主)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대학 캠퍼스에 뛰어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목회는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왜 사람이 변하지 않는지 그리고 왜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체가 세워지지 않는지를 고민하면서 그 흔한 여행 한 번 못하고 20여 년 동안 오직 한 우물만 팠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밤이 새도록 고민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답을 찾지 못해 혼자서 시내를 무작정 걷기도 했다. 아무리 찾고 찾아도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사도행전을 수없이 읽고 또 읽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래서 결국 얻은 고민의 해답이 바로 ‘부활의 복음’이었다. 왜 ‘부활의 복음’이어야 하는가?첫째,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이 헛되고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7~18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나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
5개월전 일이다. 지인 몇 부부와의 모임 중에 무릎을 치며 깨달았던 것이 있어 소개한다. 너무 못난 얘기라 부끄럽지만, 혹 나 같은 이 땅의 남자들이 또 있을까봐 용기 내어 말한다.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내가 가졌던 결혼관에 관한 얘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지난 20년간 한 아내의 좋은 남편이 되지 못했다. 물론 남자로서 세상 돌아다니며 나 즐기고 싶은 걸 즐긴 건 아니다. 자식들 밥을 굶긴 것도 아니다. 적어도 남자는 그 책임은 져야 한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겐 결정적인 부족함이 있었다. 바로 아내의 편이 되어 주지 못한 일이다. 남편으로서 경제적인 것 책임져주고 엉뚱한 짓 안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여겼을 뿐 아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편 되어주는 일’은 정말 부족했다. 이런 생각이 순간 스친다.예를 들어 어려서부터 한 고향에서 자란 둘도 없는 정말 친한 친구가 어느 날 새벽 2시에 연락도 없이 집을 찾아왔다 하자. 그러면서 하는 말이 “친구야. 내가 정말 이 밤에 너 밖에 생각이 안 나서 왔어. 나 며칠만 네 집에 좀 머물 수 있겠냐? 이유는 묻지 말고….”그러면 그 부탁을 웬만해선 거절 못한다. ‘얼마나 급한 사정이면, 이 밤에 나밖에
우리 교회에는 참으로 특별한 삶을 살았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교회는 춘천에 있지만 전국 각지에서 유별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목회 현장에서 만나보기 어려운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다 몰려온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왜 우리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몰려오는지 참으로 의아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것은 ‘세계 선교’라는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한 전조(前兆)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게임중독자, 마약중독자, 알콜 중독자, 도박 중독자, 조직 폭력배, 우울증 환자, 안티 기독교, 심지어 자살 중독자까지…. 이들은 이 세상의 문제라는 문제는 다 들고 교회로 온 것 같았다. 이들을 통해 이 세상 임금 마귀가 던져 주는 생각 중 하나만 받아먹어도 그 생각에 이끌려 평생을 허비하게 되는 것을 봤다. 게임, 도박, 자살, 우울, 쾌락, 이성(異性) 등 각 사람의 환경에 맞는 가장 타당한 생각이 들어오고 그 생각이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 오는 특별한 그 사람들을 통해 바울이 이 세상을 배설물이라고 한 이유를 정확히 보게 됐다. 이 세상의 어떤 프로그램이나 교육으로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을 놓고 씨름하는 동안 초대교회를 세운
기독교 복음은 20세기에 한국에서 꽃을 피웠다. 20세기 전반부에 일제에 의한 식민지 치하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혹독한 탄압과 해방 후 6.25전쟁의 참혹한 상황 속에서 많은 순교자들과 헌신되고 충실한 복음의 일군들을 통해 유일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유일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신앙이 확립됐다.20세기 후반부에 산업화와 민주화의 국가적인 발전과 함께 기독교 복음의 활발한 전파와 교회의 부흥이 이뤄졌다.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전무후무하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힘차게 전파됐고 교회의 숫자도 폭발적으로 증가된 가운데 오늘에 이르게 됐다.기독교 선교 2세기를 맞이한 지금 한국교회는 교회 내외적으로 많은 문제와 도전에 직면해있다. 교회 내적으로는 부흥의 활력과 전도의 열매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물론, 목회자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교회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교회 외적으로는 많은 이단들이 출현하여 기독교 복음을 혼란하게 만들고 있으며 종교다원주의 파도가 밀려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진리의 유일성을 무너뜨리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의 산물로 나타난 종교다원주의 사상과 주장은 부활과 성령과 계시라는 초
유도에 패자부활전 규정이 있다. 8강 진출자들은 우선 A1, A2, B1, B2 그룹으로 나뉘고, 각 그룹 승자가 4강에 진출한다. 8강전에서 진 4명의 선수들은 A, B 그룹에서 패자부활전을 펼친다. 이후 4강전에서 결승에 오르지 못한 2명이 내려오면, 패자부활전에서 이긴 2명과 엇갈려 싸우는데, 여기서 나오는 2명의 승자에게 동메달을 준다. 4강에 올랐어도 동메달을 따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8강에서 지더라도 동메달을 딸 수 있는 것이 유도패자부활전의 묘미이다. 태권도에도 패자부활전이 있다. 유도처럼 동메달리스트도 2명이다. 그러나 경기 방식은 조금 다르다. 결승에 진출한 두 선수에게 패한 선수들은 4강에서 패한 선수들과 맞붙어 동메달을 노릴 수 있다. 첫 경기에서 패했어도 자신을 이긴 선수가 결승까지 진출한다면 동메달을 획득할 기회는 얼마든지 남아 있는 것이다. 강한 선수에게 한번 패했다고 끝이 아니라 또 한 번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가 이 제도에 들어 있다.여호수아 7장에 보면 아이성 전투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손도 안 대고 큰 성 여리고를 무너뜨렸던 히브리 백성들은 교만해져서 여리고보다 훨씬 작은 아이성과의 전투를 아주 쉽게 생각했다.
나는 예수님을 믿은 후 마태복음 28장 18-20절의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1986년, 무조건 대학 캠퍼스에 들어갔다. 그리고 강원대학교 여대생 6명을 만나 시작된 제자 양육은 2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내가 제자 양육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제자를 삼는 것만이 복음으로 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며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때 당시 나는 춘천이 아닌 외지(外地)에서 온 6명의 여대생에게 나의 인생 전부를 드렸다. 주변에서는 그런 나를 보면서 너무 무모한 일이라며 말리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 복음화를 위해 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길러내는데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은 사람이 보기에는 미련하고 더뎌 보여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가장 지혜롭고 빠른 길이다. 나의 목회 철학은 오직 ‘사람을 키우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어떻게 제자 훈련을 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교회 안에는 사람을 키우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많이 있다. 일대일 양육을 비롯해 소그룹 성경 공부 모임, 소수의 제자 훈련반, 가정 교회 등 다양한 양육 방법들을 사용한다. 이러한
지난 주 집안에 외사촌 동생 결혼식이 있어 다녀왔다. 덕분에 외삼촌들과 이모님들도 오랜만에 만났다. 자연스럽게 식사자리에서는 옛이야기도 오갔다. 주로 내가 여덟, 아홉 살 때 외가에 함께 살면서 그 외삼촌, 이모들과 경험한 얘기들이다. 지금도 생각난다. 가정예배 때 대표기도하던 이야기, 산에 나무하러 가던 이야기, 개울에서 멱 감던 이야기, 쇠죽 끓이던 이야기, 논에서 일하다가 거머리 붙은 이야기, 새참 먹던 이야기, 두부 만들던 이야기, 약 팔던 이야기, 누에 기르던 이야기, 똥 퍼 나르던 이야기, 등목하던 이야기, 자전거 배운 이야기, 리어카 타고 가다가 이빨 부러진 이야기, 장닭한테 쪼인 이야기, 소뿔에 받친 이야기, 친구들과 농협 창고 앞에서 자치기하던 이야기, 반장자리 뺏겼다며 날 무지 괴롭혔던 친구 이야기 등…. 새겨진 진한 추억만큼이나 할 얘기도 많았다. 그 중 따뜻한 온돌방 이야기는 단연 빠지지 않았다. 한 겨울 밤 군불 제대로 땐 아랫목에다 제각각 발들을 모아놓고는 뭐가 그리도 재밌었는지 밤새 재잘거리다가 한둘씩 곯아떨어지던 추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따뜻한 온돌에서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몸과 마음은 얼마나 거뜬했는지 모른다. 그러면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