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다섯째날 방문하기로 했던 유대인 최후 항전 요새인 마사다 국립 공원이 우리의 여정 넷째날까지 오픈하고 바로 다음날부터 며칠간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전해져 금일의 일정과 후일의 일정을 바꿔 진행하게 되면서 갈릴리 침례식 다음날인 네 번째 날 문제의 요단강 침례터를 전격 방문하게 됐다. 원래의 침례식 거행 장소였음을 밝히자 아이들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1차 때보다 모여든 순례객의 수가 현저히 줄어 혼잡은 덜했으나 여전히 강물은 혼탁했고 뚜렷한 기준없는 차림 혹은 탈의한 채로 강물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적잖이 보이니 차갑긴 했지만 잔잔한 유속과 맑은 수질의 갈릴리에서 오롯이 우리들만의 침례식을 거행함이 선물처럼 여겨진 모양이었다. 엘리야의 뒤를 이어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활동했던 엘리사가 여리고성의 물을 소금으로 치유해 새롭게 만들었던 일을 기념하며 보존되고 있는 여리고 동편 엘리사의 샘을 지나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셨던 일명 시험산 조망 스팟을 지나던 중 잠시 들른 휴게소에서 외국인 성지순례객을 태운 한 버스의 기사를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는 3년 전 1차 뿌리 이스라엘 원정대를 태우고 순례 기간 내내 정을 나누었던 기사 리프핫이었다. 더욱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향후 어떤 목회로 나아가야하는지에 대한 고민들을 나누고 해법을 모색하는 다양한 콘퍼런스와 모임이 열리고 있다. 하지만 어째선지 이런 행사들은 아는 사람만 아는 경우로 그치거나 사상누각에 그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중직 문제 등 이미 10년은 훌쩍 지난 이슈가 아직도 새로운 것처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교회의 변화는 오리무중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물론 변화들을 위한 움직임은 있었다. 새로운 목회를 추구하며 도전하는 이들이 교계 언론에 소개되고 있기는 하지만 어떠한 큰 운동으로 발전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던 것이 현실이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콘텐츠의 개발 및 선점, 그리고 이를 통한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우리 교단의 경우 어떠한가? 6년 동안 침례교단에 몸을 담으면서 느낀 감상은 굉장히 인싸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교단의 미래발전을 위한 담론들이 오가는 소식보다는 체육대회나 나들이를 다녀왔다는 기사들, 어디어디에 후원했다는 기사로만 신문이 채워지고 있다. 물론 이런 일들도 없어서는 안되겠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최근 종료된 라이즈업뱁티스트같은 행사들이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교
6월 9일부터 진행한, ‘다음세대부흥위원회’ 주관의 전국 침례교회 릴레이 기도회가 한국교계의 모 주요 언론지에 기사화됐다. 이 기사는 김인환 총회장의 발언을 빌어 “‘다음 세대가 무너지고 있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자복하며…아울러 다음 세대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고 후원하며 침례교회의 미래를 바라보기를 원한다’고 취지를 밝혔다”라고 전한다. 김인환 총회장의 발언에 포함된, 지금 다음 세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통찰력과 다음 세대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한다는 당위성, 그리고 간절한 소망은 전적으로 동의할만하다. 아니, 어떤 누구라도 감히 부정하지 아니할 것이다. 특히, 두 번째 문구 “우리의 모습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자복하며”라는 말은 절실하게 맞는 말이다. 정확하게 맞는 말이기 때문에, 그리고 다음 세대가 무너진 중요한 원인제공자가 바로 지금 우리이고,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에, 비록 가슴이 아프더라도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진실하게 받아들이고 부족함 없이 철저하게 바로 잡아야 한다. 정말이지, 올바른 방향설정이다. 그런데 12일간에 걸쳐 진행되는, 12개 교회의 명단은 우리 교단의 대표적인 교회들인 셈인데 모범적이며 바람직한 모델일까에 대해 의구심이
최근 서울시가 서울퀴어문화축제 주최 측의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했다는 소식이 알려져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서울시는 기독교 단체가 청소년 행사를 같은 날에 신청했다는 이유를 근거로 들었다. 불허 사유를 CTS문화재단에게 돌리기보다는 지금까지 퀴어축제에서 발생한 상식에 어긋난 행위들을 지적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도 불허 결정을 내린 것은 매우 합리적인 처사라고 본다. 현재 퀴어축제 측은 서울시의 불허 결정에 장소를 을지로 2가로 변경하기로 했다고 한다. 퀴어축제는 서울만의 문제가 아니다. 춘천은 물론 대구에서도 그들의 야욕은 멈추지 않았으나 다행히 두 도시 모두 퀴어축제 개최에 대해 강한 반감으로 인해 퀴어축제 측의 기대대로 흘러가는 일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사실 퀴어축제를 막아낸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동성애 진영은 포괄적차별금지법과 평등법, 학생인권조례, 국가인권기본계획(NAP) 등을 통해 계속해서 마수를 펼치고 있고, 혼인평등법과 비혼출산지원법, 생활동반자법 등 ‘가족구성권 3법’의 입법 시도로 전통가족 체계의 붕괴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 이 와중에 한국 보수
중국에서 존 로스가 들었던 뜻밖의 비보는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가 사망한 것이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일명 토마스 선교사는 누구인가? 그는 조선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이자, 또 개신교 선교사 중 최초의 순교자라고 알려져 있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많은 사람들이 왜 그리 최초에 의미를 두고 연연한지 모르겠지만, 상식이라는 측면에서 각각 최초들이 누구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조선 최초의 선교사라고 하면, 조선 땅을 처음 밟은 선교사를 의미한다.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 제너럴셔먼호를 통해 선교사 최초로 평양에 왔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는 이보다 1년 전인 1865년에,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지원으로 연평도에 온 적이 있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대로 그가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1832년에 충청남도 보령시에 속한 ‘고대도’라는 섬에서 복음 사역을 했던 독일인 개신교 선교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칼 귀츨라프’ 선교사다. 귀츨라프는 ‘고대도’ 도민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써주고, 이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물론 이것이 한글 성경 전체의 번역을 한 것이 아니지만, 비록 단
12일 동안 열린 말씀과 기도의 축제인 라이즈 업 뱁티스트(대회장 김인환 총회장)가 지난 6월 9일 지구촌교회(최성은 목사)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지난 12일 동안 매일 저녁은 침례교회 공동체가 기도로 하나 되는 시간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을 이겨내기 위해 시작된 라이즈 업 뱁티스트는 목회자들에게는 힘과 위로를, 성도들에게는 코로나로 힘든 일상에 복음의 활력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년 동안 해마다 열린 라이즈 업 뱁티스트를 통해 침례교단은 기도하는 교회란 이미지와 기도를 통해 위기를 극복한 공동체임을 대내외에 강하게 심어줬다. 코로나 엔데믹을 라이즈 업 뱁티스트로 사실상 마무리하며 명실상부 기도로 코로나를 극복한 교단임을 알리고 확인한 자리였다. 2023년 라이즈 업 뱁티스트는 코로나 이후를 대비하는 기도회로 특별히 다음세대를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집중으로 기도하는 시간으로 진행돼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12명의 주강사 설교자들은 교단의 미래인 다음세대를 향한 메시지를 선포했고 특히 사역 활성화에도 힘을 보탰다. 12일간의 말씀을 상고하며 말씀과 기도의 동력을 의지해 다음 사역을 계속해서 준비해야 할 때이다. 다음세대부흥위원회가 주관하는 잇따른 여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나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셨음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일생 중에 그분을 떠나지 않을 것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맹세합니까?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저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삶 속에서 전하는 자로 살겠습니까?” 호수의 풍광이 간신히 짐작될 만큼 이른 새벽이었다. 우리의 죄된 심령처럼 어둠이 깔린 그 시간 속에서 우리 아이들의 영혼과 온 생애 위에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이기를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순례 여정 셋째날의 첫 행보인 침례식을 행했다. 아멘! 아멘! 우리 모두의 심령 안팎에 마침 태양이 떠올라 서로가 은혜로 상기된 얼굴을 뚜렷이 볼 수 있을 즈음 아마도 전무후무할 갈릴리 호숫가에서의 침례식이 마무리됐다. 이곳보다 그리스도를 풍기는 곳이 또 있을까. 순례 중의 침례의식은 의례히 예수님께서 몸을 담그셨던 요단강에서 행해지나 우리는 변화를 주고 싶었다. 1차 순례 중 요단강에서 한 성도님이 침례를 받으셨는데 장소가 품은 의미는 충분했으나 지극히 현실적으로, 무엇보다 생각 이상으로 탁했던 강물과 전 세계의 순례객들이 몸을 담그고 드나들어 매우 혼잡스러
6월이 우리 앞에 당도했다.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 6월을 우리는 호국보훈의 달이라 한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6월 한 달 만큼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한 순국선열들을 기리며 여러 행사들을 갖는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초등(국민)학교에 다녔을 때만 하더라도 “우리는 한민족”이라던지 “너희가 통일의 주역”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지난해 발표된 국민 통일의식조사에서 20대와 30대의 40.9%와 35.3%가 “통일은 불가능하다”라고 응답한 결과를 놓고 본다면 과거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구호나 교육들은 그다지 효과를 못 본 것 같다. 이제 점점 민족적 동질성마저 희박해져가는 요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말이 그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2030세대들에게도 할 말은 많다. 지금 내 앞에 닥친 수많은 일들이 삶을 조여오는데 통일이 아무리 좋다고 떠들어봐야 쇠 귀에 경 읽기 수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통일 세대는 우리가 아닌 아버지 세대에서 결정지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점점 통일에 대해 회의적으로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6월은 동족상잔의 비극과 그로 인한 아픔을 기억하는 날이다. 올해는 6·25라 부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3년이자 종전 70년을 맞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분단의 상처와 이산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한반도에서 같은 민족,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데다 잠시 전쟁을 휴전한 상태로 지내오고 있다. 1950년부터 3년 여 시간 동안 남북한 전체 인구 가운데 300만 명이 죽거나 실종됐으며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또 경제적인 측면에서 전국토가 피해를 입었으며 산업기반 시설은 80% 이상 복구 불능상태가 됐다. 전 세계가 전쟁으로 초토화된 대한민국이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만큼 동족상잔의 비극은 파멸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이란 말처럼 전쟁의 상처를 극복,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대한민국은 폐허 속에서 기적처럼 다시 일어섰으며 누구나 할 것 없이 서로의 희생과 헌신, 희망을 바라보면서 고통을 감내했다. 교회 또한 함께 헌신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다시는 한반도의 민족의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12일간의 기도와 말씀 축제인 ‘라이즈 업 뱁티스트’ 전국침례교회 연합기도회(라이즈 업 뱁티스트)가 지난 5월 29일 함께하는교회(김인환 목사)를 시작으로 대장정에 올랐다. 12일 동안 12개 교회에서 교단을 대표하는 12명의 목회자들이 함께하고 있는 이번 연합기도회는 코로나 엔데믹을 맞아 교회의 새로운 회복을 기대하며 다시 한 번 침례교회에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는 시간을 제공하고 있다. 라이즈 업 뱁티스트는 코로나 팬데믹이 극심했던 2021년 침례교회가 함께 코로나를 극복하고 제한된 대면 집회를 비대면으로 함께 하자는 취지로 열렸던 기도회다. 첫 해인 2021년은 지구촌교회(최성은 목사)에서 12일 연속으로 진행했고, 2022년은 전국 12개 교회에서 교회의 회복을 부르짖었다. 올해는 김인환 총회장이 섬기는 함께하는교회를 시작으로 대구와 이리, 진해, 서울, 용인, 논산, 판교, 대구, 부산, 춘천, 분당 등에서 교단을 대표하는 교회에서 매일 저녁 8시 열리고 있다. 이번 라이즈 업 뱁티스트는 특별히 교단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다음세대부흥위원회(사무총장 안동찬 목사)가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교회의 회복은 미래세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비록 사람이 믿는 것이며, 사람이 믿기로 결단해 믿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늘로부터 오는, 그 기원과 출처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하심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바울은 이 내용을 간단히 압축해 ‘선물’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엡 2:8~9). 그래서 교회를 좀 다녔다고 한다면 이 내용과 이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따라서 누구든지 믿음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이 구절의 개념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몇이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런 류의 의구심이 조금도 들지 않는 경우도 있다. 대개는 크게 실패하거나 낙담하거나 큰 죄책감에 짓눌려 견디지 못한 채 하나님 앞에 엎드린 사람들이 보여주는 믿음의 경우다. 성경적 믿음의 정의에 기본적으로 깔린 개념은 ‘도구’이며, 나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며,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인데, 정말이지 사람이 이 기본개념에 충실해지는 것은 자신감, 자존감, 자부심을 상실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실패의 상태에 있을 때, 의기소침해져 있을 때, 자신감을 잃었을 때 겸손한 태도를 갖
드디어 우리나라도 코로나 엔데믹을 선언했다. 정부는 오는 6월 1일 대부분의 방역조치를 권고로 전환한다고 밝혀 사실상 코로나 엔데믹의 시작을 알렸다. 이는 코로나19 첫 확진자 발생 3년 4개월 만이다. 정부는 “3년 4개월 만에 일상을 회복할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하며 이를 위해 헌신한 의료진과 보건당국, 관련업계 종사자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방역조치는 심각에서 경계로 하향 조정되고 코로나 의무 격리는 7일에서 5일로, 마스크 착용은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과 입소형 감염취약시설, 감역취약시설 보호는 종사자 선제검사 권고로 전환하고 취식도 허용하기로 했다. 사실상 코로나로부터 전 국민이 해방된 것이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여전히 코로나 확진자는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엔데믹을 선언한 것은 현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예방과 감염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으며 현재 의료체계로 감당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고 본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 의무화, 방역조치 등급제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일상의 불편함을 감수하며 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한 처절한 조처였다. 긴급생활지원, 자영업자지원, 세제혜택,
동성애는 반성경적인 죄악으로 성경 곳곳에 동성애에 대한 죄 인식과 이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존재한다. 성적 정체성은 하나님이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으로 시작됐다. 중간의 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남자가 여자가 될 수 없고 여자 또한 남자가 될 수 없는 신의 영역에 속해 있다. 이것은 이미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선택된 부분이다. 하지만 구약과 신약의 여러 사건 중 동성애와 행음으로 인해 타락의 길을 걸었던 인간의 최후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으며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선진국이라 불리는 유럽이나 미국이 동성애를 합법화하며 제3의 성을 인정하고 있다. 자신의 성에 대한 표현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뤄진 창조질서를 파괴해 이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시키는 심각한 상황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에 대한 주요 교단과 교회들이 연합해 동성애를 인정하는 차별금지법과 평등법의 제정을 반대하며 반 동성애 운동을 펼쳐왔다. 교회의 끊임없는 요구와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우리의 사명으로 여길 정도로 교회 전체가 이 문제에 경각심을 가지고 사활을 걸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사역자라는 신분 덕에 두 차례의 여정을 모두 경험했던 나는 1차 순례 내내 아이와 함께 오지 못한 아쉬움을 떨치기 어려웠다. 막 성인이 된 자녀에게 더 이상 부모란 이유만으로 믿음을 강제할 수 없어 안타까워하던 시점에 다녀온 첫 순례였다. 모태 신앙인 혹은 일명 묵은 신자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없이 흘러드는 말씀은, 무시하자니 꺼림칙한 오랜 기록물에 불과한 것인데 그 결정을 따라 나섰더니 강과 산, 광야가 발 아래에서, 눈 앞에서 그날의 그분을 재증언해 줬다. 구멍 난 믿음의 틈새가 메꾸어지는 경험이랄까, 신앙이 새바람으로 환기되는 경험이랄까. 다음 순례는 무조건 딸아이와 동반하리라는 결심을 어여삐 보셨는지 뿌리교회의 2차 순례는 자녀 동반 중심으로 기획됐고 심지어 아이들의 침례식이 여정에 포함됐다. 대망의 순례 첫날 경유 공항인 이스탄불에서 생각보다 긴 출발 지연 상황을 만나 첫날의 원 일정을 모두 소화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게 되어 최적의 이동 경로를 확보하고자 과감히 므깃도 방문을 빼고 가이사랴 항구에 제일 먼저 들렀는데, 3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보다 많은 부분이 보수돼 우기임을 잊을 정도로 빛나는 햇살을 품고서 한층 유적지다운 모습으로 뿌리 2차
우리 교단은 결코 작은 교단이 아니다. 성경과 하나님을 향한 열정도 뛰어나다. 뿌리도 깊다. 게다가 이 땅에 오롯이 하나로 우뚝 서 있다. 따라서 하나가 둘로 갈라져 어느 쪽이 진짜냐, 누가 장자교단이냐는 식의 싸움이 우리 교단에는 없다. 한국 개신교단 가운데 우리와 같은 교단이 없다. 침례교인으로서 당당한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물론, 선배 목사님들의 지혜와 각별한 헌신과 협동의 정신이 맺은 결실이다. 그러나 역할 혹은 기여라는 측면에서는 ‘너무 부족하다’라는 것 역시 사실이다. 두 가지 부분에서 그러한데 첫째는 침례교회의 역사적 뿌리와 정체성에서 그러하다. 고유하면서도 정통적인 역사, 그리고 신학적으로도 완숙한 정치체제를 갖췄다고 평가될 수 있는 교파/교단은 극히 적다.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이 셋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감리교회는 존 웨슬리와 부흥운동이라는 특기할만한 역사를 갖추고 있지만 웨슬리는 충분히 정립된 조직신학을 남기지 않았다. 반면에, 침례교회는 확고한 성경적 신학과 교회론 위에서 출발했다. 교회와 신학의 그 역사성과 정밀성을 피로써 입증했다.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로 탈바꿈하는 데에는 장로교인들의 역할이 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