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게임기의 부활, 23년 만에 부활한 ‘공중보건장학제도’ 대량 미달! 세상 사람들도 부활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뭔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실체는 모르고 결과만 가져다 쓰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찬양한다. 주님과 함께 일으켜 세워진 우리는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간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갱이이다. 그런데 우리는 진정 성경적인 부활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은 진짜 금요일에 돌아가셨는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금요일’(Good Friday)에 죽으시고 ‘부활절’ 주일 이른 아침에 죽음에서 일어나셨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안식일(보통 토요일) 전날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금요일에 죽으신 것으로 믿고 있다. 아니다. 예수님은 수요일 날 돌아가셨다. 그분께서 죽으신 다음 날의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정규 안식일 즉 토요일의 안식일이 아니었다. 그 날은 매년 한 번 있는 안식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안식일이 큰 날이었기 때문이다(요 19:31). 이러한 큰 안식일은 한 주의 어떤 요일이라도 될 수 있으며 그 해에는 분명히 목요일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예비일(수요일)에 십자
산상수훈의 내용 중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께서 당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며 의식과 형식에 치우쳐 오직 사람들이 보아주기를 바라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사거리나 길거리에서 구제를 하거나 기도하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경계를 시키시는 한편, 그들의 그러한 모습을 외식과 위선으로 단정하시고 본받거나 답습하지 않아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려는 그러한 행동에 대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더욱 실감하게 하시려고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2,5,16)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니까 그들이 행하는 그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일이 틀림없는데, 하나님께 받을 상보다, 먼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려고 하는 그 마음으로 하나님보다 사람을 먼저, 그리고 사람을 더 의식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한 보상이 되어버려서 하나님이 따로 갚아 주셔야 할 상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이 직접 하신 이 말씀을 주님의 임재 앞에서 생각해 보면, 오늘 이 시대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전반적인 면에서의 모습을 생각해 보지
성 평등, 동성혼 합법화 등이 포함된 법무부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에 대해 한국교회가 결사반대하고 있다. 양성평등을 부정하며 남녀 구별은 물론 건강한 성관념마저 없애려는 ‘성(젠더)평등 정책’인 NAP는 더 늦기 전에 바로잡아야 한다. 지난해 8월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NAP가 동성애와 동성혼을 옹호·조장하는 젠더(gender) 평등을 추구하는 데다 교계가 가장 우려하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안양시기독교연합회(대표회장 임용택 목사)와 군포시기독교연합회(대표회장 김재용 목사), 의왕시기독교연합회(회장 이영학 목사) 등은 시내 곳곳에 180여 개의 플래카드를 걸고 NAP에 포함된 동성혼 허용, 성 평등 정책, 차별금지법 등의 조항을 모두 삭제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안양시, 군포시, 의왕시 외에도 서울, 부산, 광주, 세종, 울진, 전주, 제주, 천안, 청주 등 광역시·도에 소재한 각 기독교연합회 및 시민단체들은 최근 2000여 장의 플래카드를 동시에 게시, NAP에 포함된 동성혼 허용, 성평등 정책, 차별금지법 등의 삭제를 촉구했다. 사실상 한국교회의 주요 교단이 다 참여하고 있는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소속 교단장들은
제이슨 맥코이 선교사 가족 미국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말콤 펜윅 선교 130주년 기념 및 세계한인침례인대회(영적성장대회)에 잘 사는 미국을 한국으로 모시면서 굳이 비행기표까지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니 이 일을 준비하면서 “비용이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해야 한다”는 박종철 총회장의 결단에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은퇴하고 미국에 돌아간지도 수십 년, 남편이나 아내는 이미 고인이 된 채 홀로 살고 계신 은퇴 노인 선교사에게 1000달러가 넘는 비행기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액수였다. 이번 대회 최고령 참가자인 현복자(Betty Jane Hunt) 선교사는 4월 11일로 만 93세가 된다. 1958년 30대 초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한국에 와서 67세에 은퇴해 고향에 돌아가기까지 자신의 청춘을 한국에 바쳤다. 침례교 교회진흥윈이 생기기 훨씬 이전, 지금 진흥원이 하고 있는 일을 시작해 침례교회의 개척과 발전을 도왔던 그는 자신의 생애에 한국 침례교회가 자신을 재정적으로 후원해 한국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며 나이를 잊은 채 환호했다. 앤 윈더스 켈리 선교사 (미국 정착후 결혼, 사진 왼쪽
최근 몇 년 동안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들을 보면 경제계나 정계, 종교계 등 가릴 것 없이 명망 있는 사람들의 민낯이 언론에 드러났다. 이들은 우리가 쉽게 할 수 없는 일들이나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사회적 인지도를 높여왔다. 하지만 그 이면에 온갖 불법을 저지르며 비도덕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두 얼굴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익히 경험할 수 있는 인간 세상의 이치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선한 사람이 되거나 악한 사람의 길을 선택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근 한국교회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지탄과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문제가 교회 지도자, 즉 리더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회는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이다. 신앙의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불신자들을 인도하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섬김과 나눔을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하지만 지도자의 강한 리더십이 자칫 교회의 리더십인양 행사하며
최근 들어 매일 순간순간 습관처럼 읊조리듯 묵상하는 말씀이 요엘서 2장28절 말씀인데 이 말씀이 왜 나를 이렇게 매료시키는가?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이며”라는 이 짧은 두 문장은 내 가슴을 뛰게 한다. 늙은이들이 꿈을 꾸며 살아가는 세상, 젊은이들이 이상을 바라보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신나는 세상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최근 우리네 삶들을 돌아보면 너무 많은 자조적인 말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늙은이와 젊은이들의 꿈과 비전을 억압하는 용어들이다. 이런 말이 있다. “당신 참 젊어 보인다 라고 말을 듣는 순간 당신은 이미 늙은 것을 기억하라.”고 했지만 늙은이가 되는 기준이 머리털의 희고 검음의 차이인가? 하지만 그 기준은 꿈을 꾸지 못하고 “과거만 회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늙은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이상을 잃어버린 순간 그들은 이미 정상적 젊은이라고 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런 현상들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리적 현상이다. 이 현상에 그리스도인들이 무비판적으로 무임승차하고 있지 않은지 묻고 싶다. 늙은이를 꿈꾸지 못하게 하고
한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은 크게 3세대로 구분되어 있다. 오늘의 사회가 있기까지 과거에 수고하고 땀 흘리는 세대로 ‘공경과 섬김’의 대상인 1세대와 2세대는 지금 우리 사회를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세대로 ‘격려와 협조’의 대상이다. 또한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책임을 지며 땀 흘릴 제3세대는 ‘투자와 양육’의 대상인 것이다. 바람직한 사회는 이 3세대가 한데 어울려서 서로 공경, 격려와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함께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계층, 학력, 연령, 이념, 지역별로 나라는 사분오열로 갈가리 찢어져 있다. 사회 통합을 앞장서서 견인해야 할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따라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거나 심지어는 즐기고 있다. 그 결과 남북분단보다 남남분열을 더 우려하는 목소리가 비등해져가고 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교단과 교회는 함께하는 공생(共生)의 몫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가? 불행하게도 그 대답은 “아니요”이다.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반목과 대립 분열의 내홍을 겪지 않는 교회와 교단이 드물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부여받은 교회 내에서조차 함께하는 삶을 이루어가지 못한다면 교회 밖에서 공
우리 민족과 교단역사에 있어 올 한 해는 매우 뜻깊은 해다. 삼천리금수강산에 들불처럼 일어났던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이고 침례교단으로는 펜윅선교 130주년을 맞는 해이다. 그런 만큼 2019년 한해는 우리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합심으로 기도하며 꽤나 민첩한 움직임을 가져왔다. 몇 년 전부터 역사교과서에 교회가 민족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 이바지했던 사건들이 제대로 기술되지 않았다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있으며 제헌국회가 기도로 시작했다는 부분을 언급하며 대한민국의 국가 정신에 교회가 한 축을 담당한 일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우리 교단은 타 교단에 비해 조용한 상황이다. 물론 올해 영적성장대회를 펜윅선교 130주년 기념대회로 치르기 위한 준비가 이뤄지고 있지만 교단 차원의 적극적인 역사 발굴은 아직 미흡한 상황이다. 신사참배에 반대해 교단이 해체된 아픈 역사는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교단들 가운데에서도 분명히 흔치 않은 우리만의 자산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교세가 강하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도 선교를 위해 헌신하길 주저하지
꿈이 아니었다. 신장에 이상이 생겼다. 몸과 다리, 발과 손, 온 몸이 커져 가고 있다. 가슴이 답답해서 숨을 쉴 수 없다. 응급차의 벨소리를 들으며 응급실에 들어 왔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만 현실을 받아 들이기 쉽지 않다. 많은 양의 피들이 채취되어 검사실로 옮겨져 성분별로 계산 돼 나온다. 추가 검사가 진행된다. 신속하다 계산된 결과에 따라 알 수 없는 약들이 투명한 작은 관을 통해 몸 속으로 들어 온다. 몸에 나타나는 반응들이 정해진 시간이 따라 모니터링되고 의사들이 모여 치료 방향이 결정되면 환자와 보호자에게 전달되고 시행한다. 투석의 방향으로 결정되어 시술이 시행됐다. 배에 있는 복강이 여러 가닥의 튜브를 삽입하는 외과 수술을 했다. 수술을 하는 가운데 복강에 있는 엄청난 양의 오염된 체액이 나왔다. 건강한 성인이면 복강 안에 두 말 정도 들어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나는 투석을 거부했다. 인터넷을 보면서 많은 정보를 알게 됐다. 투석을 한다하더라도 삶의 정해진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삶을 조금 연장시킬 뿐이다. 오래 살았다. 이만큼 살면 됐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고백을 했으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침례도 받았다. 신
하나님께서 늦둥이로 저희 가정에 주신 아들이 올해 열여덟 살 고등학교 2학년이 됐다. 하나님의 은혜로 무던히 잘 자라 주던 아이가 고등학교에 올라오면서 학교생활을 힘들어하고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모에게는 말을 못하고 제 형에게 전학을 시켜 달라고 하면서 그간의 힘들었던 고층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지방에 있는 기숙사형 학교로 어렵게 전학을 시켜줬다. 소수의 학생을 강도 높게 교육하는 규율이 엄격한 학교라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다짐받고 해 줬는데 이번에는 다시 원래 학교로 역 전학을 시켜 달라는 것이다. 철없는 아이의 생각이라지만 어디 세상일이 어떻게 제 마음대로 된단 말인가? 오늘은 부끄럽지만 곤히 잠자고 있는 아들의 방에 들었다가 책상 위에 써 놓고 하나님 앞에 떼를 쓰며 기도한 기도문이 있어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한 페이지를 올려본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 저를 다시 OO고등학교로 올 수 있도록 간곡히 요청드리면서 다짐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너무 멀리 돌아온 시간이 아쉽고 후회가 들어 자꾸 눈물이 납니다. 제가 처음 우리 학교에 지원하게 된 동기는 부모님 연세가 지긋하시기에 제가 열심히 공부해 자립해서 부모님을 도와드리고 싶은
조국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아름다운 전통은 존중하고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전통이 전혀 성경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진리가 전통이 될 수 있지만, 전통이라고 해서 항상 진리는 아니다. 많은 교회에서 사순절이 시작됐다. 사순절이 성경에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순절(Lent)은 성경에 없다. 그렇다면 사순절(四旬節)은 사람의 전통이요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 불과하다(골2:8).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받았던 고난을 생각하며 기도와 절제의 삶을 산다는 사순절! 사순절을 지내는 그 신앙과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성경에 없는 이교도의 절기를 지킬 수는 없지 않겠는가. 사순절은 어디서 왔는가 사순절(四旬節)은 부활절 이전 40일을 금욕하며 지내는 절기를 말한다. 사순절은 주일 6번을 빼고 계산하기에 실제로는 46일 간이다. 특별히 사순절 절기가 시작되는 날은 ‘재의 수요일’(Ash Wendnesday)이라 불린다. 2019년 올해 사순절은 부활절(Easter)이 시작되기 전인, 3월 6일부터 4월 20일(부활절 이브)까지다. A.D. 325년 니케아공의회(council of Nicea)에서
올해는 침례교 선교사 말콤 펜윅이 우리나라의 복음을 씨앗을 뿌린지 130년이다. 그동안 침례교 역사를 홍보하고 가르치는 일은 신학교 수업 등 교단 내부적인 일로 여겨왔다. 우리교단 총회(총회장 박종철 목사)는 오는 4월 22일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말콤 펜윅 한국선교에 대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이어 4월 30일에는 강원도 홍천 비발디 리조트에서 말콤 펜윅 130주년 기념대회 및 침례교세계한인대회(영적성장대회)를 연다. 이 대회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일제 식민지 통치에 항거하고 저항했던 한국침례교회가 펜윅의 선교적 관점과 비전을 얼마나 품고 있는지 재조명할 계획이다. 침례교회는 초기 원산과 강경, 공주, 칠산, 문경 등에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하지만 일제의 1940년대 신사참배 강요와 교단의 탄압은 성경중심의 침례교회에 큰 타격을 입혔다. 결국 교단이 폐쇄되고 교단의 모든 재산이 몰수되는 사건을 겪으면서 일제 탄압의 항거하고 교단 차원에서 신사참배 거부라는 자랑스러운 유산을 남겼다. 이제라도 우리가 교단의 역사를 새롭게 정립하고 앞으로 한국 침례교회가 이를 계승할 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할 때이다. 펜윅 선교의 의의와 평가
결과를 떠나 북미정상회담은 대한민국을 비롯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빅 이벤트였다. 한국전쟁 이후부터 한반도의 상황은 중동과 함께 세계의 화약고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만큼 북미정상회담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우던 평양 땅에 다시금 교회를 회복시키길 바라는 한국교회에게 북미정상회담은 크나큰 의미로 다가왔다. 특히 우리 교단에게도 북한 땅은 언젠간 다시금 십자가를 바로 세워야 할 고향이다. 교단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말콤 펜윅 선교사는 26세 되던 1889년 12월 어느 날, 한국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고 1901년 원산에서 복음을 전하며 교단의 기틀을 닦았다. 공주, 강경, 칠산 등지에서 복음을 전하던 엘라씽선교회를 인수한 후 신명균 목사를 통해 충청권에서도 활발한 복음 사역을 펼쳤지만 원산에서의 사역을 빼놓고 침례교의 역사를 논할 수는 없을 만큼 그곳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재 북한에 억류돼 있는 침례교 선교사들도 아직 풀려나지 않은 채 고초를 겪고 있기 때문에도 북한의 문을 여는 기도는 절대로 소홀히 해선 안된다. 그렇기에 원산을 비롯한 북한 땅의 회복을 위한 기도가 교단 안에서 중점적
3·1절을 한 주 앞두고 전국의 주요 교회들은 100년 전 그때처럼 태극기를 휘날렸다. 한국교회총연합은 회원교단 소속 전국 교회들과 한국교회 공동 예배문으로 1919년 3월 한반도 전역과 특히 오늘의 대한민국을 위해 일어났던 기독교인들의 믿음과 애국애족정신을 되새기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100년 전 그날에 독립을 목소리 높여 외친 신앙선배들을 기억하며 예장합동 총회(총회장 이승희 목사)와 예장통합 총회(총회장 림형석 목사) 등 주요교단 소속 교회들은 지난 2월 24일 주일 오전에 공동예배를 드린데 이어 특별히 예장합동 총회는 오후 서울 서대문교회에서 교단차원의 3·1운동 100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리며 3·1운동을 되새겼다. 100주년 기념예배 공동예배문은 1919년 독립을 열망한 신앙 선배들을 기억할 수 있게 제작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예배에 사용한 성경본문은 이사야 10장(12-21절)과 로마서 8장(1-11절)으로 이 말씀은 1919년 만세운동 직후 배포된 ‘독립단 통고문’에 제시된 본문으로 알려졌다. ‘독립단 통고문’은 기독교인들에게 일본에 대한 비폭력 시위를 당부하며 매일 말씀으로 무장할 수 있도록 한 일종의 지침서이기도
#장면 1. 계시보다 왕을 원함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의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이는 사사시대를 한 줄로 표현하는 문장이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우리에게도 왕을 달라고 호소한다. 자신들이 이방민족에게 공격을 받고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강력한 왕이 없어서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후 여러 우여곡절 끝에 사무엘을 마지막으로 사사시대가 종료되고 왕국시대가 펼쳐진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는 물론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했던 그런 시대가 열렸다고 보기엔 무리가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열왕기서나 역대서를 보더라도 하나님 뜻에 합한 왕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장면 2. 엠마오 제자들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고자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다. 마침 유대민족은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전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구원에 대한 관점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줄 정치적 메시아를 원했던 제자들과 인간을 원죄에서 벗어나게 해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예수 그리스도, 이러한 두 구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