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는 고종(高宗)의 정비(正妃)이며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어머니이다. 명성황후는 아버지 여성부원군 민치록과 어머니 한산 부부인 이씨의 소생으로서 아명(兒名)은 아영(또는 자영)이다. ‘민비(閔妃)’는 일본인들이 황후를 비하해서 만든 호칭이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고, 숙종(肅宗)의 모친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와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민아영은 열네 살 때인 1866년 신정왕후 주씨와 흥선대원군에게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어 명성황후가 됐다. 처음에 화기애애하게 시작된 대원군과 민아영의 관계는 황후가 낳은 왕자가 대원군이 지어 보낸 탕약을 복용한 후에 급사한 사건 이후에 급격이 나빠져서 정적이 됐다. 명성황후는 감히 흥선대원군의 권위에 도전해서 결국 그를 권좌에서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1882년에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과도하게 지원하다가 훈련도감에서 월급도 받지 못하고 천대 받다가 해고된 군인들이 군란(壬午軍亂)을 일으키자 장호원으로 피신하면서 권력을 상실하고 대원군이 복귀해서 민씨 일가의 세력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해서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하고 다시 권력에 복귀해서 1884년 12월 4일, 김옥균 박영효 서
일본의 작가 구리 료헤이가 1989 년에 발표한 “우동 한 그릇”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1972년 섣달 그믐날 저녁, 도쿄의 “북해정”이라는 음식점에 한 어머니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우동 한 그릇만 시켜도 되느냐고 물었다. 주인은 물론 된다고 대답하고 우동 한 그릇에 젓가락 세 개를 놓아 줬다. 그 후 그들은 섣달 그믐날 저녁마다 그 식당에 가서 우동 한 그릇을 주문했고 주인은 그때마다 몰래 소바 1인분 반을 더 올려줬다. 그런데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어느 해에는 우동 두 그릇을 주문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에 식당 주인은 어머니가 두 아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됐다. 부인의 남편이 직장에서 사고를 일으켜 죽으면서 여덟 명이 다치고 회사에도 큰 손해를 입혀서 그 가족은 십여 년 동안 일해서 그 날 빚을 다 갚고, 기념으로 우동 두 그릇을 주문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 “북해정” 식당에는 그 가족의 발길이 끊어졌다. 그러나 그 식당은 섣달 그믐날 저녁마다 손님이 아무리 많아도 그 가족이 앉았던 자리에는 “예약석” 팻말을 붙여서 비워놓고 그 가족의 사연을 알고 있는 단골손님들과 함께 그 가족을 기다렸다. 그런데 십 수 년이 지난
낮과 밤의 일기 차가 심하다. 낮에 뜨겁던 날씨가 새벽엔 찬 기운까지 돌아 이불이 생각나게 한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신다. 이곳 진도에 비가 오지 않아 늦게 벼를 심어 이제 좀 자라나고 있는데 날씨가 추워지면 물속에 잠겨 있는 뿌리가 겨울인 듯 착각하여 열매도 맺지 않고 썩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을 때에 심고 추수할 때에 추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말이다. 어느 비가 오는 날이었다. 차를 운전하여 산 비탈길을 가는데 산 아래에 차들이 많이 모여 있다. 눈 여겨 보니 누군가 산 위에서 장례를 치르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씨에 일하는 사람들이 힘들겠구나 생각을 하며 지났다. 몇 일이 지난 화창한 어느 날 비슷한 장소를 지나가는데, 마찬가지로 차들이 길가에 서 있고 산 위에서 묘지를 만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문득 몇 일전 비가 오던 날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쓴 웃음과 함께 입에서 기도의 소리가 나왔다. “주여 좋은 날 좋은 시에 주님 앞에 가게 하소서.” 그리고 마을에서 한글학교를 하며 어르신들과 함께 불렀던 노래가 생각났다.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신사는 원래 일본의 민간 종교인 신도(神道, Shintoism)의 사원으로서 처음에는 조선에 거류(居留)하는 일본인들을 위해 들여왔으나, 1910년 한일합방 후에는 조선인에게도 참배, 즉 태양신을 상징하는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遙拜)하는 행위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1925년에는 사립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다가 조직적 반발에 부딪혀 잠시 멈칫하더니, 1935년을 전후해서는 총독부가 앞장서서 학교뿐 아니라 교회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교계는 찬·반 의견이 엇갈려 기독교가 양분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 일본은 조선을 합병할 목적으로 ‘황민화(皇民化) 운동’을 시작해서 내선일체(內鮮一體) 사상을 선양하는 한편 사회 전반에 조직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조선의 언론인, 지식인, 교육자, 종교인들이 이에 저항하자 일제는 언론사를 폐간하고, 교회와 학교는 폐교하고, 외국인은 추방하고, 내국인은 투옥했다. 일제는 1945년 6월까지 조선 땅에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 면 단위에 건립된 작은 규모의 신사 1,062 곳을 세웠는데 총독부는 이것도 부족해서 각 급 학교에 ‘호안덴’(奉安殿)을 세우고, 집집마다 ‘가미다
간증은사집회가 많이 열리고 있다. 믿음 속에서 개인적으로 체험한 특별한 하나님 체험들을 다른 성도들과 공유하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유익하다. 하나님을 맛보아 체험하라고 하신 시편 34편의 찬송과 같이, 간접적으로나마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함에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때로 우려할만한 간증은사집회들과도 자주 만난다. 예컨대 천국을 보았다는 강사들이 나서서 천국을 비성경적으로 홍보한다든지, 무당 냄새가 나는 강사를 강단에 세워놓고, 문제 있는 교인들로 하여금 예언기도를 받게 하면서, 헌금 얼마를 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는 위험한 발언들을 쏟아놓는 집회들도 있다. 이러한 집회들이 일시적으로는 불신자들을 끌어 모으는 등 교회에 유익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독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연예인들과 같이 대중인지도가 높은 강사들이 등장하는 간증집회는 무슨 목적으로 집회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할 때가 많다. 물론 강사들 중에는 진정으로 거듭난 믿음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신앙인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간증집회를 하는 것인지, 버라이어티쇼를 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영적 혼란을 주는 사례도 많이 있다. 이러한 부류
성경은 이야기다. 하나님은 안내 책자나 신앙 교과서를 주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대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거나 하나님을 직접 만났거나 그분이 하시는 일을 목격한 사람들의 실제 경험을 모아 엮는 이야기책을 주셨다. 하나님이 이런 이야기책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이야기를 통해 가장 자연스럽게 배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경의 진리를 이야기로 전달하는 방식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 뿐 아니라 영적 재생산 과정을 촉진한다. 그 이유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그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건 순서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사복음서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이야기가 시대 순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각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그분의 전반적인 계획을 점차 알게 되고 그 속에서 성경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좀 더 확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인간의 삶을 보면 거의가 이야기로 채워졌고, 이야기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다. 강의나 설교와는 다르게 누구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이야기 듣기를 좋아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살아가는 존재다. 인간의
한국교회에서 대체적으로 장로교는 ‘칼빈주의’를 따르고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교회는 ‘알미니우스주의’를 따른다. 침례교는 초창기에는 알미니우스주의를 지지하는 일반침례교회와 극단적 칼빈주의를 따르는 특수침례교회로 양분됐다. 그러다가 18세기 말에 온건한 칼빈주의를 토대로 한 복음주의 침례교 교리가 나타나 일반침례교회와 특수침례교회가 통합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교회들은 두 입장을 모두 혼용하고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두 견해가 성경적인 구원론을 모두 담을 수 없는 불완전한 견해라는 것이다. 성경은 예정도 말하고 있고 성도가 타락할 가능성도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어느 부분만 발췌해서 자신의 교리를 주장하는 데 이용하지 말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모든 부분을 담을 수 있는 구원론을 연구하는 겸손한 신앙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네덜란드 신학자 야곱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는 원죄와 하나님의 은혜의 주도권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상호협력적 관계로 파악했다. 그가 독자적인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선행은혜’의 개념이었다. 어거스틴-칼빈의 죄론을 수용하면서도 이중예정과 불가항력적 은혜개념을
우리나라에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 입국한 것은, 알다시피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916d.)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902d.)이다. 그러나 역사는, 개신교 선교의 효시를 독일인 선교사 귀츨라프(Karl F. A. Gutzlaff)가 미국 상선 암허스트 호에 승선해서 배가 충청도 홍주만 고대도에 잠시 기항한 동안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한 1832년과 영국인 선교사 토머스(R. J. Thomas)가 제너럴셔먼호에 승선했다가 성경 한 권을 남기고 평양성 부근 대동강 변에서 순교한 18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뿐만 아니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오기 1년 전에 의료 선교사로 입국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알렌(H. N. Allen)이 명성왕후의 친정 조카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하고 고종황제의 어의(御醫)가 됐던 것도 조선선교의 효시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젊은 선교사들은 한국에 오던 해부터 인재 육성 계획을 실행에 옮겼으니, 아펜젤러는 첫 해에 학생을 모아 가르치면서 한글 장려운동을 시작해서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 받았고,
‘하나님 나라’의 성경적 개념은 통치와 영역의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 주기도문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간구(마 6:10)할 때, 그것의 의미는 하나님의 통치 즉 다스림을 의미한다(cf. 눅 19:12, 15; 요 18:36; 마 10:15).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가 추상적으로 이 땅에 임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하면 반드시 그 결과가 나타나기 마련이고 바로 이 나타난 결과로 형성된 질서의 세계가 바로 왕국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하나님의 뜻대로 형성된 세계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하나님의 통치와 영역으로 정의할 때, 하나님의 통치와 그 통치 영역은 우주적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우주적, 보편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천지창조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기초이며 하나님 나라 자체다. 창조의 세계는 영적이든 물적이든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통치에 속하므로 이는 곧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통치이며 동시에 우주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을 목회자의 입장에서 깊이 이해하여 폭넓은 시각을 갖게 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한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자기
또한 부활의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해 준다. 예수의 죽음은 율법 아래의 저주의 삶을 끝내고 부활로서 시작된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는데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통하여”(갈 2:16)라는 언급은 단순히 예수의 사역,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에서 나타난 계시에 대한 신앙을 지칭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현재적인 계시를 지칭한 것이다. 주어적 속격 해석으로써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는 말은 현재 구체적인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일에 동참함으로써 (믿음의 역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실증해야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형으로 하여 몸소 그의 고난과 부활을 공유, 체현했으며 그의 신자들에게도 역시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고난과 부활을 체현하며 살 것을 권고했다. 결국 주어적 속격 해석은 바울의 기독론에서 고백과 실천이 통합된 믿음의 삶을 살게 한다는 장점이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신실성의 표현으로 이 해석은 죽기까지 복종한 그리스도의 순종이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의 신실성의 표현이라는 바울의 사상
‘위그노’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 칼뱅의 개혁을 지지하던 개신교 신자들을 경멸하는 호칭으로 만들어진 합성어이다. 프랑스에서의 개혁운동은 1559년 파리에서 칼뱅주의 신앙고백인 <개혁파신조>가 발표되면서 불이 붙었다. 프랑수아 1세는 위그노에 대해 관대했기 때문에 그의 통치기간 중에 위그노는 큰 세력을 형성해서 프랑스 인구의 6분의 1과 전쟁 영웅꼴리니(Gaspard de Coligny)제독과 스페인의 자치 왕국 나바라(Reino de Navarra)의 군주 앙투완느 까지 위그노가 되었다. 이처럼 위그노의 세력이 강해지자 가톨릭교도들로 구성된 기즈 당(Les Guises)이 반발했고, 이에 발맞춰 프랑수아 2세는 위그노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1560년에 프랑수아 2세가갑자기 사망하자 미망인 까뜨린느(Catherine de Medicis)는 메디치 가문의 증손녀로서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왕위를 계승한 샤를 9세와 손잡고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는 위그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까뜨린느는 국왕의 승인을 받아 1572년 8월 24일, 성 바돌로메오(St. Bartholomew) 축제일에 기즈 당과 군대와 가톨릭교도들을 동원해서 꼴리니 제독을 살해하고 위
멀쩡하게 잘 나가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넘어지는 경우가 있다. 대중의 존경을 한 몸에 받다가도 어느 한 순간, 사람도 지위도 다 잃는다. 과연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일까? 이유는 뭘까? 이에 나를 포함한 우리 모든 목회자들이 새겨볼 성경적 교훈들이 여기 있다. (지난 호에 이어 / 첫째, 선줄로 생각해서이다. 둘째, 경고를 잘 듣지 않아서이다. 셋째, 길 아닌 길을 가고자해서이다. 넷째, 회개가 없어서이다.) 다섯째, 뿌리가 약해서이다(마 13:21). 멀쩡하게 생긴 나무도 뿌리가 약하면 비바람에 쉽게 넘어간다. 그래서 외모보다는 내면이 더 튼튼해야 한다. 그래서 신앙도 기초가 중요하다. 성경에서도 씨앗이 돌밭에 뿌려지면 처음에야 좀 올라오겠지만 환난과 박해가 일어나면 금세 넘어질 거라고 했다. 그러니 믿음도 목회도 기초부터 배워라.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라.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넘어지지 않는다. 그래야 큰 나무로도 자라고, 열매도 잘 맺는다. 여섯째, 장애물을 치우지 않아서이다(렘 6:21). 이는 자기 약점을 잘 관리하지 못했다는 뜻도 된다. 놀랍게도 사탄은 당신이 무엇에 약한지 너무도 잘 안다. 물론 당신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내가 어떤 유혹에
2) 하나님나라 관점 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는 과정의 이야기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듯이 통독하기보다는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온 거대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성경 속으로 빠져드는 경험을 하게 되고 시공간을 초월한 영적 만남을 체험할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창조-타락-구원-완성의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 이것은 점진적으로 이 세상 속에 완성된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는 성경이야기는 방대하지만, 네 가지 핵심 틀을 가지고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것은 창조-타락-구원-완성이다. 이런 기본적인 핵심 내용은 하나님 나라와 언약과 관계 속에서 진행된다. 따라서 목회자는 성경읽기의 한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을 읽어나가면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과 언약에 대한 내용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성경이야기 속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다.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성경을 가리켜 ‘가장 좋은 책’ 또는 ‘책 중의 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의 ‘특별한 책’이나 ‘책 중의 책’으로 끝나는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유대주의(율법의 행위)에 대해 전통주의 관점은 ‘행위-의’의 종교로 간주했고 새 관점은 ‘언약적 신율주의’에서 찾고자 했다. 더 나아가 두 관점을 조화시켜보려는 새로운 중도적 입장은 유대교를 언약적 신율주의 내에서 ‘행위-의’의 요소를 지닌 종교로 간주했다. 이러한 세 가지 해석은 갈라디아서에 등장하는 문제의 진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 모두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바울의 계시적 전망으로 이해하려는 새로운 접근법도 제시되고 있다. 즉 바울의 계시적 전망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동일한 치유책과 구원의 길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가 옛 관점과 새 관점을 포용해 구원론적인 관점과 사회학적인 관점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갈라디아서에서 등장하는 이러한 문제들은 편협적인 한가지의 관점으로만 이해하는 것보다 신론적, 기독론적, 성령론적인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폭넓게 이해할 때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구원론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리처드 B. 헤이스에 대한 평가 1991년 세계성서학회 모임인 SBL 모임에서 주어적 속격을 주장하는 리처드 헤이스(Richard B. Hays
-기원- 개혁교회 종교개혁의 두 주류는, 알다시피 제네바의 칼뱅과 취리히의 츠빙글리이다. 츠빙글리는 대학을 나온 청년들을 모아서 “예언모임”을 만들어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미사제사, 성인숭배, 면죄부 판매, 고해성사, 연옥교리, 및 비성서적 교황제도 등 67개 조의 개혁과제를 토론하면서 로마가톨릭교회와 맞서 개혁을 이끌었다. 이 “예언모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콘라드 그레벨, 펠릭스 만쯔, 게오르게 불라우락 등이었으며 이 모임은 후에 ‘스위스 형제단’으로 발전해서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모체가 됐다. 그런데, 츠빙글리가 아나뱁티스트의 국가관을 비판한 것으로 보아 그 당시에 이미 ‘아나뱁티스트’로 불리는 다른 종교집단들이 있었던 것 같다. 츠빙글리는 ‘신자의 뱁티즘’을 주장한 그의 제자들과는 달리 유아세례를 지지했고 1525년 1월 17일부터 시작된 제3차 신학 공개토론회에서는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오직 신자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한 제자들을 심하게 꾸짖기까지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츠빙글리와 ‘스위스 형제단’은 결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1월 21일 밤에 ‘스위스 형제단’ 회원들이 펠릭스 만쯔의 집에 모였을 때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