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장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해 주신 말씀입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입을 맞추니”(15:20).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한 목적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15장은 특별히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려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보여줍니다(요1:18) 우리가 본문을 읽는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이해가 얼마나 보족한지 느끼게 됩니다. 현대인들이 가진 문제의 진실은 자연 안에서 자기를 계시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 그분의 심장을 알지 못하며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욥23:3)는 욥의 절규처럼 하면 될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욥의 간절함과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때로는 “자기가 조종할 수 있는 하나님,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 자기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이상한 개념을
세 번째는 ‘본문 안(in the text)’에서 이다. 본문의 의미를 찾는 데 있어서 성경을 처음 기록한 성경저자의 의도가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의미론(semantics)과 구문론(syntax)에 의하여 본문에서 원저자가 의도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성경의 저자는 의도한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성경을 기록하였다(눅 1:1~4; 요 20:30~31; 요일 5:13).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본문에서 성경저자가 의도한 목적과 의미를 파악하는데 기초한다. 건전한 성경 해석의 원칙은 자신의 전제들이 성경이 원래 말하려는 것과 조화를 이뤄 성경과 일치하게 하는 것이다. 성경저자를 통해 의도된 의미와 목적이 본문의 의미와 목적을 정하는데 우선권을 가진다. 따라서 본문을 기록한 원저자의 의도와 목적을 파악하는 것이 해석의 주된 원칙이다. 시드니 그레이다누스(Sidney Greidanus)는 설교가 얼마나 성경적인 가를 알기 위한 기준은 본문의 의미와 의도를 얼마나 충실히 반영했는가 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저자를 통하여 기록한 성경본문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가를 파악하고 또한 현대 설교에 충실히 반영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성경본문은 원저자의 의도된 의미뿐
사무엘상 8장은 매우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양 갈래 길에서 중대한 기로에 서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역사적으로나 신앙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내용입니다. 사무엘이 늙어서 두 아들에게 사사 직분을 맡겼는데 그들은 자기 아버지 사무엘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대가성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했던 것입니다(8:3). 그러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서 라마에 있는 사무엘을 찾아갑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 중대한 요청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다른 나라처럼 자기들에게도 왕을 세워서 자기들을 다스리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시한 기준은 다른 나라들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극적인 어리석고도 무지한 기준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바꿀만한 엄청난 결정인데 집단으로 몰려가 사무엘에게 간청한 이들의 요구를 사무엘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고민에 빠진 사무엘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8:21). 그들이 왕을 요구하며 제시한 기준이 5절에 잘 기록되어 있는데 “모든 나라와 같이”라는 것입니다(20절). 그들이 제시한 기준이 고작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믿음으로 살지 않는 나라였다는 것이 충격적
일본이 대동아 전쟁 중에 한국과 동남아의 소녀들을 강제 동원해서 군의 성노예로 이용한 소위 군 위안부 강제동원문제는 위안부생존자들의 증언과 방대한 기록물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신조(安培晋三) 수상은 지속적으로 이를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 가운데서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대신과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대신은 이를 인정하고 사과했으며(1994년, 1996년), 소다 가스히로(想田和弘) 같은 이는 생전에 자신의 트위터에 2,000번 이상 위안부 고발 기사를 올리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로 한?일 간에 갈등이 깊어지는 가운데 우리 정부는 2015년 12월 18일에 “군 위안부 문제 관련 한?일 합의사항” 5개 조항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합의는 위안부 생존자들과의 의견교환이나 합의 내용에 대한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하고 나온 것이어서 국민을 당황스럽게 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2항은,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하며 아베 총리는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현한다. 3-4항은,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에 보상을 완료한 후에는 피차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 5항은, 소녀상 문제는 한국 정부가 관련 단체와의 협의를 통해 적절히 해결
나라 곳곳이 대설로 난리다. 하얀 눈이 내린 겨울의 모습이 아름답지만 서민들에게는 삶에 어설픈 날씨로 속히 따스한 봄이 오기를 기다려진다. 온도계의 눈금보다 몸과 마음으로 느껴지는 추위가 더 느껴지는 때다. 최남단이라 할 수 있는 진도에도 눈이 내렸다. 새벽 기도를 위해 문을 나서 교회로 향하던 발걸음이 검은 색 차를 덮고 있는 눈을 보고 멈췄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면서까지 자리를 잡고 있는 눈을 사진에 담고 매일 일상처럼 하는 화덕에 나무를 넣고 불을 붙였다. 차가운 겨울에 거실에 있는 나무 화덕 난로가 뜨거운 불을 보이고, 고구마가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고, 난로 위에 주전자를 놓고 따뜻한 물을 마시고 있으니 집에 온 딸이 “산장 온 기분이네.” 말한다. 미국에서도 주택에 살면서 벽난로를 사용했지만, 한국에 와서도 이런 분위기를 만들 줄은 생각지 못했다. 더욱이 시골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쁨 아닌가? 난로 앞에서 차가움을 몰아낸 화덕 난로의 따스함을 느끼며 잠시 신문을 보다 지나온 모든 일들이 하나도 헛되지 않음이 없음을 생각하며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오늘 아침 제자들을 훈련시키시려는 의도가 있으신 듯 큰 광풍이 부는 바다위로 제자들을 몰고 가신
선교여행 차 20시간을 비행기로 날아 도착한 아프리카의 최빈국 ‘말라위’(Malawi)는 생각했던 것보다 환경이 더 열악했다. 흡사 우리나라의 어느 시골역 같은 말라위 제2의 블랜타이어(Blantyre)국제공항부터가 그랬고, 녹슬어 제대로 굴러가지도 않는 수하물 카트부터가 그랬다. 그리고 만났던 모든 사람들 역시 어쩜 그렇게들 새까맣던지, 옷차림은 어쩜 그리 다 남루하던지, 애들은 더 심해서 성한 옷이란 없고, 여인들 또한 아기를 등에 업고서도 물동이를 이거나 나무를 나르는 등의 전형적인 후진국의 모습들이 포착되었다. 길과 집과 상점들 역시도 초라함의 극치였다. ‘아직도 지구상에 이런 나라가 있다니….’ 너무 안타까웠다. 이렇게 사정이 여의치 않다보니 우리 선교팀들의 각오도 다부져야 했다. 며칠 베이스캠프로 사용한 숙소야 그런대로 괜찮았다만, 우리가 본격적으로 사역했던 두 곳(Shire / Kasinje)은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건 물론이고, 핸드폰도 터지지 않았다. 주변엔 상점도 없어 돈이 있은들 뭘 살 수도 없었고, 먹고 자고 씻고 싸고 하는 것 또한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음식도 한국에서 온 손님들이라고 정성껏 준비는 했다지만
고린도전서 15장은 초대교인들이 생전에 주님 재림을 기대했지만 주변에 성도들 한 사람씩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 주님께서 과연 재림하실까? 죽은 사람은 부활할까?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답변으로 우리는 분명히 부활하게 될 것이고 그 날은 스릴이 넘치고 황홀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을 약속의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6장에 와서는 갑자기 우리가 살아가면서 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들과 그 해결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함부로 자동차를 몰아서 안 되며, 그들이 자라서 운전법을 배우고 난 후 차를 운전해야 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귀중한 가치를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돈의 중요성과 하나님께 드리는 규칙과 원리의 가르침입니다. 첫째, 드림에는 그 이유가 분명히 제시돼야 합니다. 바울 사도께서 드림에 대해 말하고 있는 특별한 이유는, 초대교회, 특히 예루살렘교회가 재정적으로 엄청난 어려움에 처해 있어서입니다. 예루살렘성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도시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순례 왔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교회에 머물러 있는 사
스미스는 본문이 이끄는 설교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한다. “해석의 과정을 통해 바른 의미를 얻고, 분문처럼 설교의 구조를 정하며, 본문의 의미나 내용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설교를 전달하고, 본문에서 느껴지는 역동성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본문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본문의 고유한 의사소통 방법을 통하여 얻은 효과가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또한 설교에도 적극적으로 반영하려 한다. 2. 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해석 원칙 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준비는 본문연구로부터 시작된다. 성경을 해석하는 일은 전체 설교준비 중에 기초 과정이고 설교자의 삶에서도 기초와 같은 역할을 한다. 따라서 성경 본문에 충성스러운 학생은 성경해석이 정확해지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모든 설교는 본문의 정직한 주해로부터 나오므로 지속적으로 본문에 가까이 가야 한다. 성령께서는 감동된 말씀의 뜻(요 14:25-26; 벧후 1:21)을 해석하고 분별하는 데 도움을 주신다(요 16:13-15; 고전 2:6-16; 엡 1:18; 골 1:9; 벧후 1:21; 요일 2:20, 27). 하지만, 성경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의미를 무시하고 성경을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영해(spiritual
사랑하며 살자/감사하며 살자/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인생/감사하기에도 모자란 인생인데 /사랑하며 살자 감사하며 살자/아낌없는 마음으로 룻기의 주인공은 단연 룻입니다. 그러나 빛나는 주연을 살려주는 조연이 있듯이 보아스는 룻기에서 없어서는 안될 인물입니다. 보아스가 없는 룻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아스야말로 룻이 거듭나도록 도와준 일등공신이자 평생의 반려자됐습니다. 보아스란 이름은 ‘능한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룻기 2:1에는 보아스를 “유력한 자”라고 소개합니다. 보아스는 모두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와 룻의 운명적인 만남은 성경을 통해 잘 나타나 있습니다(룻2:5~11). 여기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이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칭찬하고 진심으로 축복했습니다(룻3:10). 나오미도 룻에게 확신을 심어줬습니다. 보아스는 당장에 룻을 아내로 삼고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보다 더 앞선 가까운 친족이 있기에 질서를 지키며 기다립니다(룻3:12~13). 하나님의 일은 열심도 중요하지만 질서 또한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은사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라고 강조했습니다(고전14:33, 40). 교회에서 유념해야 할 부분입니
교육기관과 자선단체는 성격상 기부금이 운영자금의 큰 몫을 차지한다. 우리 국민은 유치원 학생부터 대통령까지, 그리고 넝마주이부터 대기업 총수에 이르기까지 등록금과 각종 세금을 통해 국가가 부여하는 재정적 의무를 다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가는 국가재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서 “모금”이란 이름으로 또 다시 국민에게 손 벌리지 않아야 마땅하다 하겠다. 최근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안가(安家)에서 기업 총수들을 독대한 자리에서 모 스포츠재단 설립을 위해 기부금을 종용한 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이 문제에 대하여 비판여론이 비등하자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자청해서 나라를 위해 필요한 일에 쓰려고 모금한 것이며 개인적으로는 한 푼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잘못이 없다고 해명했다. 상식을 가진 국민들은 여기서 숨이 막힌다. 첫째로, 대통령이 국가에 필요한 사업을 추진하려면 예산을 세워서 추진해야 하며, 부득의 모금을 해야 할 경우에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공개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지 좋은 일에 필요하다고 해서 사사로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둘째로, 권력자가 기업인을 독대해서 기부를 요청하는 것은 강요와 다름없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최고 권력자의 요청을 거부하거나 밉보인 명성,
유다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의 이야기입니다. 그에게는 아내 나오미, 또 두 아들 말론과 기론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왔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실한 베들레헴 사람들은 이 흉년 중에서도 베들레헴 땅을 떠나지 않았지만 엘레멜렉은 가족들은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모압 땅이란? 우리가 기억하듯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자기 큰 딸과 근친상간을 통해 태어난 모압의 후손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는 사악한 민족이었습니다. 본래 엘리멜렉 가족은 모압 지방에 정착하기 위해 내려가지는 않았습니다.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1)라고 했습니다. 우리 또한 머물기 위해 세상으로 내려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룻기서를 읽으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본서 어디에도 모압에 풍년이 들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유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등지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이 그곳에 풍년이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베들레헴이 흉년이 들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을 떠난 후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모압으로 내려간 아비멜렉의 두 아들들은 모압의
성경에는 사람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예수님 이전의 구원의 문제, 인간의 불순종을 미리 아신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설치한 이유, 네피림의 정체, 창조 이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 사탄의 배반의 죄의 출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 및 사울왕의 구원의 여부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때때로 지명도 높은 신학자들의 견해를 빌려서 나름대로 해석을 하곤 하지만, 그 신학자들 역시 유한한 인간의 한 사람에 불과하므로 그들의 주장이 곧 바로 정답이 될 수는 없다. 역사상 가장 머리가 비상한 위대한 신학자로 평가받는 ‘어거스틴(Augustinus)’ 조차도 성경에는 사람의 머리로 풀 수 없는 난제들이 많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난제들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겸손케 하시려고 성경에 신비로 남아있는 것이라고 자평했다. 그러므로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을 자의적으로 해석해놓고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단정 짓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것이다. 히브리서 6장에 이미 받은 구원도 취소될 가능성이 있다는 듯한 구절이 있어서, 신학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하지만 이 두 설교 접근방법은 강조점에서 차이가 있다. 학자마다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강해설교는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 생각(what the text mainly says)과 본문의 움직임과 구조(what the text moves or is structured)를 설교에 반영하려 한다. 하지만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본문의 중심 생각과 본문의 구조와 움직임뿐만 아니라 본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의사소통 수단(text’s unique communication method)을 통하여 감성적인 효과(emotional impact)도 현대 설교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려 한다.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설교철학과 방법이 비교적 일관성 있게 체계화된 설교법이다. 그렇다면 본문이 이끄는 설교철학과 방법은 무엇인가? 1. 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특징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기초(theological foundation)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명제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계시하시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계시에 안내받고 반응하여야 한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기록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유래와 의미 청문회는 미국의회가 운영해 온 제도로서 한국에는 1988년에 도입되어서 그 해 11월에 제5공화국 비리와 일해(日海)재단, 광주민주화운동, 언론기관 통폐합문제 등이 다루어졌다. 이채로운 것은, 청문회가 영어로는 단순히 듣는 것(hearing)이라고 표기된다는 점이다. 청문회는 국가가 입법이나 행정상의 결정, 또는 대통령이 국무총리나 대법원장 등 국가의 주요 공직에 지명한 사람이 해당 공직을 수행할 만한 자질과 성실성을 갖추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국회에 조사를 의뢰하고, 국회는 당사자와 관계자 또는 전문가의 의견을 듣기 위해 조사에 필요한 증인, 참고인, 감정인으로부터 증언 및 진술을 청취하고 결과를 관련 기관에 통보하는 제도이다. 잘못 가는 청문회 근래에 연일 계속되는 청문회를 시청하다보니 청문위원들 중에는 증인의 행적에 대한 증거자료까지 수집해서 철저하게 준비해 나오는 위원이 있는가하면 해당 건(件)이나 인물에 대한 자료도 수집하지 못하고 뉴스만 듣고 나온 것처럼 보이는 태만한 위원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이화여자대학교의 부정입학 혐의를 청문한 위원들은 청문회 바로 전에 실시된 교육부의 감사 결과도 읽지 않고 나온 듯 일부 증인들이
신학적 삼위일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며 집을 나와 어디를 가려면 꼭 확인해야 하는 것이 세 가지 있었다. 첫째는 신발을 신듯 차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환경에 차 키를 들어야 한다. 둘째는 차와 함께 필요한 운전면허가 든 수첩을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 길 밖에 없는 도로를 달리다 문제가 생기면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처지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셋째로 필요한 것이 전화기다. 운전을 하고 달리다가도 불연 듯 앞주머니와 뒷주머니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 그리고 대중교통이 발달했다는 한국에 와서는 차 없어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아무나 붙잡고도 말 통하는 한국 땅이니 전화기도 그렇게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착하여 생활하는 곳이 그렇지만은 않다. 시간에 맞추어 오고 가는 버스를 탈 수도 없어 밖을 나가려면 꼭 필요한 것이 차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동안 관리를 못해 취소된 면허도 다시 어렵게 취득했고, 차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것 아시고 귀한 손길을 통해 차도 얻게 되다 보니 밖에 나갈 때마다 미국에서의 생활을 회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손에 키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앞주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