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한 교회, 행복한 가정, 행복한 직장, 행복한 사회를 꿈꾼다. 상담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행복하고 싶어서 왔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느껴지는 우울감, 실패감, 불안감에서 벗어나 행복을 느끼며 살고 싶다는 것이다. 상담을 오기 전에 그들은 이미 행복하기 위한 시도들을 해왔다. 미친 듯이 일도 해보고,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이나 마약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일으키는 문제들이 싫어서 모든 사람들과 담을 쌓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오기도 한다. 이혼을 하고 현재의 관계를 끝내기도 한다. 그동안 겪었던 우울감을 없애버리기 위해 약도 먹는다. 문제를 없애고 행복을 추구하는 한 방법이다. 교회를 옮겨 오는 사람들도 옮겨 가는 사람들도 있던 교회의 고질적 문제에서 해방되고 싶어한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비로소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은퇴하신 목사님 사모님께서 드디어 힘겨웠던 목회에서 해방됐다고 너무나 기뻐하며 꽤 오랫동안 교회 근처에는 발도 들이지 않는 모습도 본 적이 있다. 한국 사람도 한국교회도 다 지긋지긋하다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내심 내게는 언제나 저런 날이 올까 부러운 적도 있다.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문
사람들은 빨리만 가면 1등인 줄 알고 열심히 달려가지만 가서 보면 그게 아닌 경우가 있다. 시골 학교에서 가을 운동회를 할 때 동네 아주머니들 달리기 경주를 시키면 꼭 질러가는 사람이 있다. 못 따라 갈 것 같으니까 운동장 가운데를 가로 질러 먼저 결승점에 도착하는 사람이 있는데 먼저 왔다고 1등 상을 주지 않는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빨리 가는 것만 능사가 아니라 바르게 가야 한다. 어떻게 하든지 일등만 하면 되고, 돈만 많이 모으면 되며, 성공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떻게 가든지 서울만 가면된다는 생각, 꿩 잡는 것이 매라는 말처럼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바르지 않은 과정은 언젠가는 탈이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리 일등을 하고, 돈을 많이 모으고, 성공해도 방법이 바르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존경받지 못하고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는다. 신생기업이 권력과 결탁하여 여러 가지 특혜를 받아 사업을 확장하며 급성장하였다가 비리가 드러나 검찰 조사를 받고 오너가 구속되거나 세무조사를 받고 기업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 않는가? 어떤 사람이 정치에 입문하여 승승장구하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다가
상담을 하다 보면 상처를 받은 자들의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듣게 된다. 어떤 때는 그 아픔을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깊고 쓰린 상처들이다. 어릴 때, 잘 모를 때, 대항할 힘이 없을 때 일어난 일들이 태반이다. 그 당시는 몰랐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새록새록 더 아프고 힘들어지는 일들도 있다. 그래서 자신이 받은 상처의 이야기를 처음 하기 시작하면 한동안은 정신적 문제들이 오히려 심해지기도 한다. 불안, 우울, 분노들이 새삼스럽게 치밀어 올라오고, 다 잊은 줄 알았던 기억들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경험을 한다. 치료를 시작하고 나서 자살을 한다거나 상담을 바로 그만두는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아직 그 상처를 들여다 볼만큼 마음이 단단히 준비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상담소를 찾는 이들 중 대부분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표면적으로 다른 이에게 상처와 해를 가한 사람들이 오는 경우도 많다. 법원에서 보내는 것이다. 가족을 때렸다든지, 아이를 강간했다든지, 훔치거나 살인을 저지른 경우도 있다. 다중 인격의 증상을 앓고 있던 사람이 자의식이 전혀 없던 상태에서 세 명의 자식들을 죽인 사례를 다루기 위해서 서너 명의 팀이 함께 상담에 매달린 적도
사람들은 열심히 일 하는데 만 관심이 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만 잘한다고 칭찬하고 쉬는 것을 노는 것으로 보고 부정적이다 보니 쉬는 것을 무시한다. 기업들도 사원들을 열심히 일시키는 방법은 연구하고 경쟁을 시키고 보상을 제공하지만 잘 쉬는 법은 연구하지도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주5일제 근무를 법적으로 정하고 시행하는 것도 건전한 소비를 유발해 관광산업을 발전시키고 경제를 살리기 위한 것과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쉼을 통해 국민들의 건강도 관리하고 삶의 질을 높이며 일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쉬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잘 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져야한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보살피고 상대하느라 식사할 겨를도 없이 일한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고 하셨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막6:31) 예수님은 제자들을 쉬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쉬도록 하시고 예수님도 쉬는 시간을 가지셨다.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 가사
어릴 적부터 재미있게 보아왔던 미국의 인기 있는 가족 시트콤의 주인공이 많은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의 가해자로 떠오르면서 사회 곳곳에서 숨겨져 왔던 성폭력의 실태들이 속속히 드러나고 있다. 이미 국내에서도 문단, 연극계, 연예계뿐만이 아니라 교계에서 벌어진 성폭력이 고발되고 있다. 사회의 저명인사들에게 당했던 성폭력 희생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Me Too’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성폭력의 대상이 됐던 아픔을 평생 지우려 애쓰면서 그늘 속으로 숨어버렸던 여성들이 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고 또 다른 차원의 피해를 입을까 봐 주저앉아 입을 다물었던 그들이 일어나고 있다. 가해자가 누구였는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상담소에서 만났던 수많은 여성들에게 성추행과 성폭행의 경험이 있다. 남성들이 겪은 성폭력의 실태도 만만치 않다. 심리검사를 하다 보면 크고 작은 성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여성들을 찾는 것이 드물 정도로 심각하다. 이 여성들에게 있어 골목에서 튀어나온 바바리맨이나 숨을 못 쉬도록 승객들로 꽉 찬 버스 안에서 어디선가 자신을 더듬는 손처럼 자잘한 사건들은 충격적이고 부정적인
요즘은 농촌에서 벼를 추수할 때면 콤바인이 들어가 벼 베기와 탈곡을 한 번에 해버리지만 콤바인이 보급되기 전에는 넓은 들판의 벼를 사람들의 손으로 다 베야했다. 그 때 넓은 들에 나이 지긋한 어른과 젊은 청년이 논 이쪽과 저쪽에서 벼를 베기 시작하는데 젊은 청년은 힘이 있고 낫질 하는 팔뚝에 근육이 울근불근 하면서 순식간에 저만치 앞서 나가고 있었다. 어르신은 천천히 뒤 따라가며 벼를 베는데 한참씩 베고는 논둑에 나가 잠깐씩 쉬면서 땀도 식히고 물도 마시고 그리고 다시 벼를 베기 시작했다. 청년은 쉬지도 않고 열심히 베면서 저 어른은 나를 따라 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나절 쯤 지나자 청년의 벼 베는 속도는 점점 느려지는 반면에 어르신이 벼 베는 속도는 처음 시작할 때나 다름이 없었다. 점점 청년을 따라 잡더니 해질 녘에는 청년을 앞질러 훨씬 더 많은 벼를 벴다. 청년이 어르신에게 “어른께서 저보다 벼를 더 많이 베는 비결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니 어른의 대답은 “자네는 쉬지 않고 베었고 나는 쉬어 가며 베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어른은 중간 중간 쉬어 가면서 그 사이에 낫도 갈고 에너지 소모를 조절했기 때문에 똑같은 속도로 벨 수 있
몇 달간 골치를 썩었던 문제가 있다. 어느 순간 집 주위에 개똥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개똥이 집 주위의 보도를 따라 열두어 군데에 늘어섰다. 집 주위를 좀 더 유심히 지켜보던 중에 범인이 이사온 지 얼마 안 된 옆집임을 알게 됐다. 아침마다 옆집 식구들이 번갈아 데리고 나온 강아지가 우리집 주위에서 유유히 큰 볼일을 보고 사라지곤 했다. 마주친 옆집 아저씨에게 개똥을 치워 달라고 요구하자 우리를 가리켜 “겨우 이런 일가지고 투덜대는 좋은 이웃”이라며 빈정댄다. 어이는 없고, 화는 치솟고, 이내 복수심이 불타오르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옆집과 개똥을 사이에 둔 전쟁이 시작됐다. 개똥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을 인터넷에서 검색하고, 사람들에게 조언도 구했다. 우스운 고민이지만 생각보다 이런 문제로 골치를 썩는 사람들이 많았던지 이래저래 한 마디씩 거든다. 그중에는 옆집에 개똥을 다시 던지라는, 귀에 착착 붙는 조언도 있다. 별 효과는 없었지만 마당에 뿌리는 약도 사보고, 똥 있는 자리에 깃발도 꽂아보고, Home Association에 이메일도 했다. 우리가 바짝 경계태세로 돌입한 것을 알자, 옆집의 중학생 아이들이 질세라 마당에 장난질을 치고 도망간다. 이쯤 되
한 유명한 목사님께서 교회로 집회를 오셨을 때 이리저리 여행이 많아 시차 때문에 피곤하시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 미국에 오면 밤낮이 바뀌는 시차 덕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두 주 꼬박 고생한다. 그런데 이 목사님께서는 시차 때문에 고생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아무 때나 잠이 오면 자고, 깨면 일어나 책을 읽거나 기도를 하신단다. 아침까지 억지로 자야겠다는 생각이 없으시니, 잠이 안 오는 밤이나 새벽이 고역스럽지 않으신 것이다. 그 말씀을 들으니 문득 갱년기를 그다지 힘들지 않게 잘 지나가셨다는 한 집사님 생각도 난다. 그분에게도 갱년기의 흔한 증상인 불면증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런데 자다 깨지면 그냥 일어나서 이 일 저 일 보다가 잠이 오면 자고, 안 오면 그냥 일어나 일을 가신단다. 그럼 다음 날은 어찌 되었건 푹 주무신다나…. 이 정도로 긍정적이면 불면증이 있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어찌 됐건 다음 날은 잘 테니까. 그러다 또 잠이 안 오면 다른 일 하면 되니까…. 사람들이 상담을 원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증상을 없애는 데에 있다. 다들 골칫거리를 없애고 싶은 건 당연하다. 화가 치미는 현상을 없애고, 불면증을 없애고, 우울감과 불안감을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 원하고 좋은 차타고 넓은 아파트에 살아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 원한다. 대부분 사람들의 심리는 남들이 부러워하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 보다 좀 더 우월하다고 인정받을 때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려고 노력한다. 여성들 사이에서는 어떤 핸드백을 들고 다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가방하나에 수백만 원에서 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가방을 원하는 것은 그런 가방을 들고 다닐 때 부러움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기 때문이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는 말이 있지만 누가 수억 짜리 로또 복권에 당첨됐다고 하면 “복권에 당첨 된 사람치고 잘 된 사람 없다더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저 사람은 무슨 복이 있어 저런 복권에 다 당첨되나 하면서 나도 저런 거 한 번 걸려 봤으면 하고 부러워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심히 돈 벌고 노력해서 명품 옷 입고 명품가방 들고 외제차 타고 다니며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 혼자만 행복하지만 칭찬받는 삶은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
우리 집 앞에는 늘 해마다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무슨 새인지는 모르지만 때가 되면 현관문 앞 베란다 구석에 늘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다. 현관 앞에 떨어지는 지푸라기와 새똥을 치우기 귀찮기는 하지만 매해 그 구석진 자리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새가 신기하고 반갑다. 우리 집에 나도 모르는 사이 매일 왔다가 가는 손님도 있다. 우편배달부이다. 우편함을 저녁때마다 열고 돈 내라는 고지서와 광고지들을 꺼내 뒤지면서도, 나는 혹시 반가운 소식이 없나 기대한다. 요즘처럼 전자메일과 텍스트가 주요 의사소통이 된 시대에도 이메일을 열 때면 문득 생각한다. 오늘은 좋은 소식이 없을까? 뭔지는 모르지만 기쁜 소식이 없을까? 반가운 사람에게 혹 연락이 있을까? 사람들은 연인이 보낸 사랑의 메시지, 가족들의 귀가 시간, 반가운 친구가 밥 먹자는 전화, 직장에 합격했다는 소식, 월급 올랐다는 소식, 상사가 칭찬한다는 소식 등 기분 좋은 연락들을 기다린다. 멀리 대학을 갔던 자식이 돌아오는 명절을 기다린다.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새 얼굴을 기다린다. 좋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좋은 소식을 기다린다. 그 소식들은 지루하고 우울하게 느껴지는 하루에 드리워진 회색빛을 무지개색으로 바꾸기도
K씨는 남편의 침묵이 참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과묵하고 진득해 보였던 남자가 살아가면서 지루하고 무관심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어쩌면 변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속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터에서 들어오면 혼자 방에 들어가 컴퓨터 화면을 보며 지친 심신을 달래는 듯했다. 피곤해서 그러려니 배려하려고 애썼다. 혼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도 반응이 시큰둥한 남편 얼굴을 보면 맥이 빠졌다. 자신이 하루 종일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 육아에 얼마나 지쳤는지, 때론 마음이 얼마나 싱숭생숭한지 도대체 관심이 없는 듯 보이는 남편이 점점 미워지기 시작했다. 과묵한 남편은 이제 사랑이 없는 이기적인 인간으로 비쳤다. 자신이 하는 말을 무심하게, 그저 잔소리로 듣고 넘기는 남편의 주의를 끌려면 더 강한 말이 필요했다. K씨의 언어는 점점 거칠어지고 비난의 톤도 높아졌다. 그럴수록 남편은 더 적극적으로 K씨와의 대화를 피했다. 아내가 매사 부정적으로 투덜대는 말들이 듣기 싫고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K씨는 어떤 점을 걸고 넘어지면 말없는 남편조차 발끈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피곤하다고 늘어져 있는 남편에게 차고 청소를 시키던지, 집안에서 얼마나 형편없는 남편이자 아빠인지를 일깨워
목회자에게, 교회 중직들에게, 혹은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라고 한다면 No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 그 필요를 다 내가 채워줘야 할 것 같은 선한 마음에서이다. 또 부탁하는 것을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난감하다. 내가 힘에 부쳐도 상대방이 원한다면 어떻게 하든 들어줘야만 할 것 같다. 내가 교회에서 지도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보살펴야 하고 베풀어야 한다. 우리는 착하게 살아야 하고, 기독교인이라 더욱이 착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처음에는 기꺼운 마음으로 요구에 응답하다가 점점 더 상대방이 부담스럽고 심지어 미워진다는 데 있다. 내 할 일을 못하고 손해를 보면서까지 애를 썼는데 상대는 끝도 없이 요구하는 것만 같다. 어느새 내가 해주는 일들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만 같다. 힘이 들어 어쩌다 No라고 할라치면 상대방은 섭섭해하는 것 같다. 그게 마음이 영 불편하고 내가 이기적인 것 같아 죄책감까지 든다. 그래서 계속 요구를 들어주다 보면 어느 새인가 상대방에게 분노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본다. 내가 도와줘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그 사람이 화나고 짜증 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도
그리스도인은 예수로부터 세상으로 파송 받은 그리스도의 대사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28:19~20)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의 모든 삶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한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비슷하게 살 때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예수를 볼 수 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5~16) 그리스도인이 착한 행실을 통해 빛을 비출 때 주변의 사람들이 감동받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유창한 말로 성경이야기를 하
어떤 일을 시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결혼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것은 결혼은 유지하는 것이다. 어릴 때는 신데렐라가 한번 춤추고 사랑에 빠진 왕자와 결혼하는 데에서 끝나는 이야기가 그저 재미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그 신데렐라가 결혼해서 왕자와의 배경 차이, 문화 차이, 성격차이, 왕비로서의 새로운 역할에 대한 부담 등등을 어떻게 극복하고 살 것인지, 과연 행복할 것인지 뒷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결혼을 골인하면서 다 끝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아는 것이다. 로맨틱한 사랑의 황홀한 경험에 이어서 화장실을 청소해야 하고, 아기 기저귀를 갈아야 하고, 매달 날아오는 청구서에 돈을 지불해야 하는 삶의 뒷모습에 맞닥뜨린다. 구원의 기쁨과 은혜에 충만해 사역에 헌신하고 시작할 때는 신난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가서 커피를 내리는 일도, 교회 쓰레기통을 치우는 일도 그저 감사하고 은혜롭다. 하지만 그 사역을 계속한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열정으로 시작한 일이 마치 김빠진 콜라 맛처럼 느껴지면서 아무 감정 없이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그 거룩하고 멋진 순간 뒤에는 훨씬 많
오늘도 사람들은 삶의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각자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인정 받기위해서 어떤 사람은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성공하기 위해서 제각각 목적을 가지고 일한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우리의 사람을 다시 한 번 생각 해 보게 하는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고린도전서 10장 31절 말씀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말씀은 첫째는 생존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 돼야 한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일 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 돼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무엇을 하든지” 라는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의미다. 그대가 공부를 하든지 직장에서 일을 하든지 예술을 하든지 운동을 하든지 사업을 하든지 정치를 하든지 복음사역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이다. 내가 하는 일을 성공 하느냐? 못하느냐? 이일로 내가 인정받느냐? 못 받느냐? 돈을 많이 버느냐? 못 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안되느냐? 가 더 중요한 것이다.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