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소를 찾아와서 털어놓는 고민 중에 하나로, 너무 많은 일에 압도되어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을 나눌 때가 있다. 집에 손님이 온다거나 학기말 고사가 다가올 때, 직장에서 쫓기는 프로젝트가 있을 때, 마감이 다가올 때, 할 일이 겹겹이 쌓이고 밀릴 때, 이 모든 해야 할 일에 깔려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든다. 걱정해야 할 일이 많고, 할 일이 끊이질 않는 듯한 상황을 보면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도록 압도된다. 예를 들어 손님이 집에 온다면 음식을 할 계획을 세워야 하고, 청소를 해야 하고, 계획대로 장을 봐야 한다. 장도 미국에서는 한 군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국소형마켓, 대형마켓, 한국마켓 등 세 군데를 돌아야 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실제로 몇 가지 요리를 해야 하고 손님이 오기 전 부엌을 말끔히 정리해야 한다. 이렇게 손님 맞을 준비를 하면서도 당장 먹을 끼니를 준비해야 하고 평소에 해오던 일들을 해야 한다. 아이들을 씻기고 숙제를 봐줘야 한다든지, 여기저기 레슨에 데리고 다녀야 한다. 이 모든 일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이미 압도되어 온갖 짜증을 다 부리고 집안 분위기는 살얼음판이 된다. 대학생들이 상담을 하러 올 때, 듣는 과목들이 줄줄이 F를 맞
영어에서 “cutting off your nose to spite your face”라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자신의 얼굴에 앙심을 품어서, 혹은 괴롭히려고, 자신의 코를 벤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화가 나서 앙갚음을 하려고 하는데 결국은 스스로만 괴롭히고 만다는 뜻의 숙어이다. 과연 누가 자신의 얼굴이 맘에 안 들어 코를 베어내려 할까 싶지만 사실 우리가 무심코 수없이 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늘 부부싸움을 하는 부모님이 미워서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세상이 못마땅해서 계속 술로 푼다면 이 또한 자신만 상처 내는 행위이다. 교회에서 누군가에게 화가 난다고 아예 예배를 안 드릴 수도 있다. 결국에는 누군가 때문에 ‘시험 들어서’ 혹은 ‘삐쳐서’ 주님께 마땅히 드릴 찬양을 포기하고 말씀으로 스스로를 새롭게 할 둘도 없이 귀한 기회를 포기한다. 상대 때문에 자신이 손해 보는 짓이다. 우리는 때로 정말 참기 어려운 감정에 휘말린다. 너무 화가 나거나 상처를 받아 잠이 오지 않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살다 보니 열받을 일이 많다. 분명히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온 사
한국에서 상담이 비교적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을 보지만, 아직도 상담소의 문턱은 쉽게 넘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이민을 왔던 그 당시의 문화를 고스란히 가지고 사는 해외 거주자들에게 상담이란 왠지 수치감과 의구심을 유발하는 단어이다. 의사를 보러 간다는 말은 시장 간다는 말처럼 쉽게 이야기되고 정보를 나누지만, 상담을 받으러 간다는 이야기는 숨기고 싶다. 미국에서 자란 우리의 자녀들이 상담이라도 받고 싶다고 하면 바로 가슴이 철렁하다. 정신력과 영성으로 이겨야지, 뭘 상담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말린다. 그래서 어쩌다가 상담을 요청하는 ‘희귀한’ 한국 분들의 사정은 의외로 심각하다. 자녀와의 갈등이 극에 달해 가정폭력에 노출되고, 아동보호기관에게 아이를 빼앗길 위기에 있기도 하다. 이미 한쪽에서 이혼을 결심한 경우 법적인 수속을 밟을 때쯤 상담소를 찾기도 한다. 중독으로 인해 가족들이 모두 등을 돌리고 이미 모든 것을 잃을 때에야 문제를 깨닫기도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과 치유의 역사들을 보지만, 이미 상처 입고 신뢰를 잃은 가족과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는 돌이키기 쉽지 않다. 기다리다가, 괜찮다고 자위하다가, 호미로 막을 일에 가래가 필요하
현대인들은 직장이나 사회가 짜놓은 스케줄에 의해 무척 바쁘게 살고 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기계의 톱니바퀴 돌아가듯 돌아가는데 나 혼자 빠질 수도 없고 남들은 열심히 달려가는데 나만 뒤처질 수 없다는 생각에 눈치를 보며 경쟁하며 살다보니 스트레스가 쌓이고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럴 때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늘 하는 일이 아닌 다른 것을 해봄으로 몸도 마음도 충전할 필요가 있다. 그런 역할을 해주는 것이 취미생활이다. 옛날에는 “취미가 뭐예요”라고 질문 하면 흔히 하는 말이 독서나 음악 감상 이라고 했는데 오늘날은 취미도 다양하다. 취미생활은 스트레스를 해소해준다. 직장인이나 개인 사업자나 학생이나 가정주부나 사람들은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스트레스가 누적되면 병이 된다고 하니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취미생활이 좋다. 생계와 직접 관련이 없고 업무가 아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재밌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자신에게 잘 맞는 취미를 찾으면 신세계를 만난 것처럼 의욕이 생기고 재미에 빠져들게 되며 성취감도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이렇게 좋은 걸 왜 몰랐던가 싶을 정도로 그 것을 하는 동안은
한자 사람인(人)자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양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서로 기대며 더불어 살아야지 혼자 살 수 없다. 돈이 많다고 대궐 같은 집을 짓고 그 집에서 혼자 맛난 음식을 먹고 비싼 옷을 입고 산다고 재미가 있겠는가? 돈은 남을 위해 쓸 때가 즐겁고 지식은 들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보람이 있다. 맛난 음식이 있어도 같이 먹을 사람이 없고 명품 옷을 입어도 봐주는 사람이 없고 해박한 지식이 있어도 들어 주는 사람이 없다면 삶은 하나도 즐겁지 않다. 인생을 즐겁게 살려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한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편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하신 것은 다투고 반목하지 말고 서로 연합하여 더불어 즐겁게 살라는 말씀이다.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들어라 더불어 살기 위해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들어야한다. 들며 날며 인사정도 하는 이웃이아니라 이웃사촌이 있어야한다. 멀리 있는 친척 보다 이웃사촌이 났다는 말이 있듯이 좋은 이웃은 친척보다 형제 보다 더 좋을 수 있다.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
교회를 옮기는 일은 절대 쉽거나 간단한 일은 아니다. 자신이 속한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는데 따르는 상실감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직장이나 다른 일로 그 지역 교회를 멀리 떠날 때는 그나마 아쉬움이 깊다. 그러나 한 지역에 계속 살면서 교회를 옮긴다는 이야기는 그 상실감을 상쇄할 만큼의 실망, 상처, 갈등이 얼룩진 선택이기 마련이다. 상처받아서 떠나고, 또 그만큼 상처를 남기고, 상처를 준 후에 떠난다. 긴 싸움 끝에 마치 이혼을 선택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는 일은 가족을 바꾸는 일처럼, 가는 사람, 남는 사람, 모두에게 힘이 든다. 다른 교회에서 오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 교회는 사람들이 차가워요.” “그 목사님은 사랑이 없어요.” “말씀이 은혜가 안돼요.” “심방을 안 해요.” “장로님이 다 맘대로에요.” “신앙에 본이 될만한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새로운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요. 친구가 안돼요.” “찬송가를 안 해요. 찬양이 은혜가 안돼요.” “교인들이 너무 무례해요.” 그런데 바로 똑같은 그 이유 때문에 또 교회를 떠나간다. 믿음의 공동체에 자신은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올 때나 떠날 때나 들을 수
사람들이 삶이 즐겁지 못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남들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내가 입은 옷과 남이 입은 옷을 비교하고, 내 차와 남의 차를 비교하고, 내 집과 남의 집을 비교하고 모든 것을 비교하므로 행복을 잃어버린다. 비교하는 사람은 남보다 낫다고 생각되면 우월감으로 교만하게 되고 남보다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열등감으로 위축되고 불행에 빠진다. 불만 없이 잘 살던 아내가 오랜만에 동창회 갖다 와서는 “순자는 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도 못했는데, 남편 잘 만나서 고급 승용차를 타고 왔더라.” “영희 남편은 이번에 사장으로 승진했다더라.” “혜선이는 45평으로 이사 간다더라.” 등등 학교 다닐 때 별 볼일 없던 것들이 명품 옷에 명품백 들고 고급 승용차 몰고 왔는데 나는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면서 남편에게 불평을 하며 즐거움을 잃어버린다. 자녀들에게도 “누구네 아들은 전교 일등 했다는데, 누구 딸은 명문대 간다는데, 니들은 뭐하냐” 며 자녀들을 남들과 비교하여 기분 나쁘게 만든다. 자기 남편과 친구 남편을 비교하고 자기 아내와 친구 아내를 비교하며 불평하다가 부부 싸움을 하고 며칠씩 말도 안하고 지옥으로 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인 페이스북에 올라온 한 목사의 글에서 목회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가 목회(木灰), 즉 나무가 다 타서 생긴 재라는 뜻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글에 유달리 큰 울림이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 한마디에 말로 다할 수 없는 무언가를 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참된 교회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패기 어린 주장을 펼치는 열정 어린 신학생들에서부터, 한국 사람이라고는 몇 가정이 채 되지 않는 시골교회에서 은퇴의 나이가 지나도록 섬기시는 선배 목사님들까지 목회자와 사모님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이상하게도 목회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논제 앞에 할 말을 잃어간다. 대형교회라는 축복과 짐을 동시에 지고 부러움과 질타의 대상이 되는 유수한 기독교계의 리더들도, 일주일에 10번이 넘는 설교에 교회 청소까지 맡아하면서 따로 아르바이트라도 하지 않으면 생활이 안 되는 작은 지역교회 목회자들도, 뜻하지 않은 일로 교회의 분열이나 급작스런 사임의 아픔을 경험하는 목사님들도 하나같이 목회라는 여정에서 두렵고 깊은 골짜기를 지나는 경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와 기도 응답으로 순간순간 신나고 벅차기도 하지만, 타들어가는 나무처럼 그 심장이 까매져 갈
사모님들의 옷은 그 교회에서 사모님들이 맡은 역할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갓난아기들을 주로 본다면 정장은 보통 거추장스러운 차림이 아니다. 아이들이 우유 먹고 어깨 위로 토하고, 때로는 기는 아이와 함께 바닥에 철퍼덕 앉아야 하기 때문이다. 부엌에 많이 들어가야 하는 사모님도 소매를 걷고 집에 가서 물빨래할 수 있는 옷차림이어야 한다. 안내를 하거나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이 많은 교회이거나 할 때는 아무래도 얌전한 정장 차림이 분위기에 어울린다.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을 돕는 사모는 청바지 차림이 사역에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친근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성도가 그때그때 다른 상황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옷을 입어도 그 옷의 의미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편안한 차림이 어떤 성도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열심히 섬기는 사모의 일부일 뿐이다. 그런데 이 똑같은 편안한 차림이 어떤 사람에게는 시험 거리가 된다. 사모가 예배를 경시하는 처사로 비치기 때문이다. 정장 차림이 어떤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고 점잖게 여겨진다. 그런데 맵시라도 있어서 옷이 조금만 비싼 듯 보이게 되면 사치스럽고 쓸데없이 화려한 철없는 사모가 된다. 무
단순하게 살아라. 인생을 즐겁게 살려면 삶을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나뭇가지에 연 걸리듯이 여기 저기 연결된 곳이 많고 이것저것 벌려놓은 일이 많고 복잡하면 쉴 틈이 없고 여유가 없어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일에 끌려 다니는 처지가 되고 피곤한 인생을 살게 된다. 필자도 복잡한 것을 싫어하지만 살다보면 자꾸만 복잡하게 되는 것을 본다. 사회적으로도 여기 저기 직함이 하나씩 늘어나고 직함 때문에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경우들이 많아진다. 책상 위를 정리 해놓고 나도 며칠만 지나면 책장에서 꺼내놓은 책과 매일 배달되는 우편물들이 책상위에 수북이 쌓여 복잡해진다. 결국은 버리면서도 혹시나 필요 할까 혹시나 보게 될까 해서 두다보니 자꾸 복잡해진다. 그래서 한 번씩 버릴 것은 버리고 정리를 하지만 그래도 미련이 남아 버리지 못하고 두다보면 정리하는 것도 일이다. 오랫동안 이사하지 않고 한집에서 오래 산 집은 집안이 복잡하고 살림살이가 많은데 몇 년마다 이사를 한집은 집안이 정리 돼있고 살림도 단촐하다. 이사할 때 마다 불필요한 물건들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집안에는 쓰지도 않으면서 버리자니 아까워서 쌓아두고 있는 물건들이 많아 복잡하고 집이 비좁아서 더 넓은
교회에서 사역하는 많은 일들을 볼 때 여성들의 헌신이 너무도 중요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왜 이처럼 여성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사용하시는지 생각을 해보았다. 여성(女性)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신 존재이다. 흙으로 빚어서 구운 그릇을 토기(옹기)라고 한다. 제법 큰 독이라도 그 값은 별로 비싸지 않다. 그러나 흙에다 물소 뼈를 섞어서 구운 그릇을 본차이나(bone china, 骨灰)라 하는데 그 크기가 작아도 그 값이 토기와 비교할 수 없이 비싸고 뼈의 배합율이 높을수록 값은 한층 더 고급이며, 비싸진다. 그러므로 흙으로 빚어 만든 남자와 갈비뼈로 만들어진 여자와는 그 값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여자는 100% 본차이나이기 때문이다. 어떤 물건이든 하찮은 것이라 생각되면 함부로 취급하게 되지만 비싼 것인 줄 알면 더 소중히 다루게 된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보다 약하지만 비싸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이기도 하다. 본차이나인 여성들을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 남자들은 뚝배기 그릇인데 값이 한참 떨어진다. 인명재처(人命在妻) 사람의 운명은 아내에게 있다. 처화만사성(妻和萬事成) 아내와 화목하면 만사가 순조롭다. 순처자(
다 같은 시간인데 어릴 때는 한 주도 길고 일 년도 길고 세월이 더디 가는 것 만 같더니 중년이 지나고 나니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 세월이 너무 빨리 가서 어지러울 지경이다. 40대는 40km로 달리고 60대는 60km로 달리고 80대는 80km로 달린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은 빠른 속도로 달리는데 질병과 사고가 많은 세상이라 여차하면 평균 수명도 못 살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먼저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2014년 만물이 소생하는 춘삼월에 승객 239명을 태운 말레이시아 항공기가 베이징으로 가던 도중 실종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호주인 봅 로튼(57)씨는 시각장애인인 부인 캐시(53)의 시력이 더 나빠지기 전에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 말레이시아에서 중국을 거처 홍콩과 베트남까지 여행을 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고 기회는 언제나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며 짧은 인생 후회하지 않도록 날마다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한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
상담소를 찾은 B양은 직장일과 관련되어 고민이 많았다. 자신에게는 직장에 들어가기 위한 인터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사교적이고 언변이 뛰어난 B양은 자신의 의견이나 능력을 보이고 설명하는데 뛰어났다. 처음에 좋은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할 만큼 친절했고 상냥했다. 인터뷰를 주관하는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남성과 인터뷰를 할 경우 좀 더 여성스럽고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애쓰고, 여성과 인터뷰를 할 경우 전문적인 경험과 능력을 더 강조한다고도 했다. 그러한 그녀만의 독특한 기술이 효과를 보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어쨌든 인터뷰를 하는 직장마다 쉽게 자리를 얻어 들어갔다. 그러나 문제는 들어간 직장에서 두세 달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던지 쫓겨난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일도 빨리 배웠고 맡겨진 일들을 척척 해나갔다. 그러나 똑똑하고 눈치 빠른 그녀의 눈에 직장의 문제점들은 너무나 쉽게 빨리 드러났다. 누가 일을 안 하는데도 안 걸리고 넘어가고 있으며, 누구와 누가 친했고, 어떤 상사가 능력이 없는지도 금방 알아차렸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쉽게 눈치 챘다. 그중 누군
“과연 변할까?”라는 질문에서 우리 모두는 자유롭지 않다. 경계선적 성격장애(BPD)나 불안증, 우울증 등의 증상을 가지고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흔히 표현하는 것은 깊은 무기력감과 절망감이다. ‘나의 상황이 과연 나아질까’ ‘나는 과연 변할 수 있을까’ ‘과연 내게 희망이 있을까’라는 질문과 회의감에 시달린다. 희망을 가지고 이리저리 환경도 바꿔보고 직장이나 교회 등 주위 사람들을 바꿔 봐도 묘하게 비슷한 문제가 반복된다. 처음에는 다시 한 번 힘을 내고 이번만은 다르지 않을까 기대한다. 다른 직장, 다른 교회, 다른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문제가 없어지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내 안에 깊이 잠재된 외로움, 소외감, 열등감, 실패감, 분노, 인간관계의 문제들은 장소나 사람들을 바꿔도 또 드러나기 마련이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늘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다 보면 스스로 지치게 마련이다. 거기에 지쳐가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등을 돌리기도 하고 답답한 마음에 정신 차리라는 등 심한 말로 쏘아붙이기도 한다. 주위의 사람들을 하나둘씩 잃다 보면 다 포기하고 싶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될 때도 있다. 잔인한 세상 탓을 하며 모든 사람들을 멀리하기로 작정하기도 한다. 때로는 돕
말로 축복하라성경에는 야곱이 아들들을 축복하고 바로 왕을 축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창47:10) 바로왕은 그 당시 천하를 호령하는 왕이지만 야곱이 바로에게 인사하러 가서 바로를 축복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보내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 할지어다. 하라.”(눅10:5)고 했다.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평안이 그 집에 임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시면서 어느 집이든 가면 평안을 축복하라고 했다. 꿈이 이뤄지도록 말로 축복해야한다. 우리가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꿈을 축복하고 자신의 사업을 축복하고 자녀들의 꿈을 축복하고 주변 사람들의 꿈을 축복해야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6:24)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고 지키시고 은혜 베푸시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