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3)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지나 사막이라는 환경 속으로 집어넣으셨습니다. 사막은 말 그대로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땅이요 또한 육신적으로 즐거운 것이란 하나도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거기에다가 낮에는 불볕더위가 있는 곳이며, 불뱀과 전갈이 있는 위험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광야가 그들에게는 축복의 땅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의도적으로 끌어들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보호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가면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함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되고, 하나님과 연합되어 하나님과 늘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목적인 것입니다. 즉, 세상 것을 다 내려놓을 때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기
첫째, 교회는 동성혼이 성경적 가치관과는 다른 것임을 분명히 표명하고 창조신앙에 입각해 결혼과 가정의 존재 이유와 동성혼이 아닌 이성혼이 결혼과 가정의 기원임을 지속적으로 설교하고 교육해야 한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등한 지위를 갖고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게 하려는 하나님의 설계임을 선포해야 한다(창 2:21~2). 장년뿐만 아니라 청소년, 청년들에게 기독교적 세계관 안에서의 이성혼에 대한 확신이 미래를 밝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잊게 해서는 안 된다. 둘째, 삶을 통해 건강한 결혼과 가정의 삶을 보여주며 증거해야 한다. 서두에서 한국 사회가 근대화 이후 핵가족화, 호주제 폐지, 이혼율 증가, 최저 출산율 등으로 가족제도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혼인을 귀히 여기며’(히 13:4)라는 말씀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그 의미와 우리 삶에 미치는 역할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 결혼이 잘 지속하고 발전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제도이고 예수님이 축복하신 것이므로 가정과 함께 거룩하게 보존되어야 한다. ‘귀히 여긴다’는 말은 ‘명예로운 것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땅의 모든 성도는 결혼과 가정을
“고래는 지구상 최대의 동물이다(중략). 그런 고래를 춤추게 하고자 하는 세상이 있다. 춤이란 원래 스스로의 신명이 몸짓으로 발현되는 것인데, 그 춤은 그게 아니다(중략). 사람이나 고래나 그 존재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할 때 춤을 추는 것이 고래에게 행복한 일은 아니다(중략). 고래여, 칭찬에 현혹되지 말라.” 이인환 저(著) ‘고래여 춤추지 말라’(도어즈, 20~23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춤을 출 몸 구조가 아닌 고래도 극진한 칭찬을 하면 춤을 춘다는 것입니다. 고래가 춤추게끔 하는 정성을 사람에게 1/10만 쏟으면 모든 사람이 춤을 추게 될 것이라는 좋은 뜻입니다. 그러나 고래는 춤을 추려고 창조된 존재가 아닙니다. 고래는 바다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고래의 존재 이유입니다. 바다에 있는 고래가 자유로운 고래입니다. 독수리는 하늘에서 바위는 산에서 자유롭습니다. 무한한 창공을 나는 것 같은 비행기도 길이 있고, 바람에게도 길이 있습니다. 만물이 모두 길이 있는데,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도 없이 사막에 ‘던져진 존재’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한 비전이 있어서 이 땅에 ‘보내진 존재
“메디치 효과”란 15세기 이탈리아의 피렌체 메디치 가문이 다방면의 음악, 미술, 철학, 문학, 과학 등 학자를 모아 공동작업을 후원하자 문화의 창조 역할이 커져서 르네상스 세대를 맞게 되었다는 데서 유래된 경영 이론입니다. 이처럼 “메디치 효과”는 서로 관련이 없는 것들의 결합을 통해서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 내거나 아이디어를 창출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 떡 굽는 관원장을 만납니다. 감옥 아니면 이런 고위 인사들을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거기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등 관계를 그들에게 듣고 배웁니다. 하나님의 메디치 효과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숱한 만남이 이뤄집니다. 나이, 출신, 직업이 다양하고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메디치 효과”입니다. 안주하고 있으면 맨날 보는 사람만 보고 만나는 사람만 만납니다. 낯선 곳으로 인도함을 받아 보세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난이라고 하는 것도 만나는데 이 또한 또 다른 만남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더 강해지며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집니다. 낯선 곳에서의 아침을 즐기세요. 하나님은 우리들을 낯선 곳으로도 이끄십니다. 힘이 드는 곳 일 수도
내 말만 하는 사람을 우리는 ‘꼰대’라고 한다(중략). ‘아재’와 ‘꼰대’의 차이는 무엇인가? 썰렁 개그라도 해서 소통하려고 노력하면 ‘아재’고, ‘요즘 젊은 것들은…. 하면서 위에서 가르치려 들면 ‘꼰대’다. ‘아재’는 그래도 젊은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고,‘꼰대’는 젊은 사람들 위에 위치해서 아래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진낙식 저(著) ‘인생 처방 약 Mind 100정’(와일드북, 192-193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스페인어 ‘꼰데(conde)’는 ‘백작’이라는 고귀한 의미이지만, 자기 반성이 없이 어른 노릇만 하려는 사람을 세상은 ‘꼰대’라고 부릅니다. 꼰대는 나이와 무관합니다. 꼰대는 나이가 아니라 삶의 태도의 차이입니다. 늙어도 꼰대가 아닌 사람이 있고, 젊어도 꼰대인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세상 풍속을 잘 따라가지 못하지만 느린 몸과 마음으로 늘 반성하며 소통하려는 사람을 아재라고 합니다. 아재의 어설프고 애달픈 몸 짓과 마음 짓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꼰대는 다릅니다. 몸과 마음이 느린 것은 물론이고, 반성하려 하지도 않고 소통하려고도 않는 사람이 꼰대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이 늘 옳다고 하며 사람을 깔아 보고 가르치
19세기에는 유물론과 이성적 합리주의가 서구세계를 지배하게 됐다. 유물론은 물질과 그의 운동 및 변화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 오직 볼 수 있는 물질과 실험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만이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합리주의자들은 모든 경험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구하며 인간의 이성적 사고를 모든 문제들의 주된 지침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이성을 최고의 권위에 올려놓고 말았다. 그러므로 후기 계몽주의자들은 여기서 나아가 현대과학의 관찰과 이성에 기반을 두며 결론을 유출하는 귀납적 방법을 통해 탐구를 시도했다. 여기서 과학의 업적에 의한 실제 세계는 목적에 의해 통치되는 실제 세계가 아니라 원인과 결과라는 자연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 곧 자연이야말로 존재하는 것들의 총체요, 진정한 실제라고 봤다. 따라서 과학자가 자연의 모든 비밀을 풀 수 있는 마술사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합리주의 신학자들, 곧 신신학자로 불리는 자유주의 신학자들마저 기독교 신앙에 뺄 수 없는 꼭 필요한 기적 사건을 과학과 상충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속단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 불트만(
그리스도인의 대정부관계는 선거 전에는 “좋은 대통령을 주세요”(Oh, Lord, give us a good president)였다면 선거 후에는 “좋은 대통령을 만들어 주세요”(Oh, Lord, make a good president for us)라고 하는 것이 백만 번 온당한 태도일 것이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전을 치르면서 태극기 부대와 촛불 부대는 전쟁을 방불케 했으나 종전된 지금에 와서는 평안 질서 안전 그리고 발전의 국가가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성경적인 자세일 것이다. 어쨌거나 현실세계의 태극기라는 기(旗)와 촛불을 성경에서는 어떻게 설명되고 있나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선 민수기를 펴 보았다. 민수기(民數記)는 번호(Number)이니 이는 싸움터에 나갈 장병의 수효를 센다는 책이다. 주로 민수기 2장에서 동서남북 4진영으로 나눈 군대 앞에는 군기(軍旗, Standard banners)가 펄럭이었고 그 군기 따라서 장병들이 행군하고 있었다(민2:2,3,10,18,2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여 각기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르며 자기들의 기를 따라 진 치기도 하며 행진하기도 하였더라”(민2:34) 이
한 곤충학자가 개미집에 불을 질러서 개미들이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시험해 보았습니다. 불을 피해서 도망 갈 줄 알았는데 처음 불을 발견한 개미가 자신의 몸을 불 속으로 던지자 다른 개미들도 하나 둘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개미의 몸을 이루고 있는 키틴질이 불에 타면서 불꽃이 점점 약해지더니 결국은 불이 꺼져 버렸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자기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줄 알면서도 몸을 날려 타인의 생명을 구하는 소식을 종종 듣습니다. 에스더는 어릴 적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자신을 양육해준 삼촌 모르드개의 도움으로 포로 출신인 유다 여자지만 바사왕의 왕비가 되어 유다 민족을 구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모르드개는 하만이 자기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다 민족 전체를 말살하려는 계략을 알게 되었고, 왕비인 에스더가 바사 왕에게 그 계략을 고하여 하만의 계략을 중단시켜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 당시 궁중법이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왕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목숨을 내 놓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왕 앞에 나아가 진실을 알리고 유다 민족을 구하게 됩니다. 이것은 에스더의 용기와 금식하며 기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 “나를 사랑하는 노래”입니다. 음식은 그릇 안에 담겨 있을 때 싱그럽습니다. 그릇 안에 있으면 뒤엉키고 섞인 비빔밥이라 할지라도 먹음직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릇 밖으로 튀어나온 밥알은 아무리 좋은 이천 쌀로 지었다 할지라도 추접합니다. 침은 입 안에 있을 때 유익합니다. 침이 입 밖으로 나와 거리에 뱉어지면 추하기가 그지없습니다. 피 또한 몸 안에 있을 때 생명의 흐름이 됩니다. 몸 밖으로 나오면 혐오물이 됩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라는 그릇, 가정이라는 그릇 안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고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곧 치유가 되고 회복됩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이라이트로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그리하여 만물이 조화로운 위치에 있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 가정 안에 있는 사람을 보시고 이렇게 기뻐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앞으로 읽으나 뒤로 읽으나 똑같은 우리 말이 있습니다. 기러기, 다들 잠들다, 아 좋다 좋아, 다시 합창 합시다, 그 중에 제일은 이것입니다. “내 아내” 앞으로 보아도 내 아내 뒤로 보아도 내 아내, 기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이 구약성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맏형이 장가가서 자식을 남기지 않고 죽었을 경우 그 밑의 동생들이 형수에게로 가니 그 가문의 대(代)를 이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내용이다. 신명기에 이런 말씀이 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신25:5) 사두개인들이 예수에게 궁지에 몰릴 것이라고 생각해서 던진 질문은 7형제가 다 죽고 나면 남은 여자 한 사람은 부활 때 어느 형제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신명기 하나님의 말씀의 요지는 형제의 집을 세우는 것(building up brother’s family line)이 이 세상사는 동안에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부활 때는 아무 상관없는 이 세상 이야기였던 것이다. 사두개인들의 이런 태도에 대해 예수 대응은 결정타를 던졌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22:29) 성경의 문자와 그 문자가 말하는 의미를 모르면 성경 무지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5~58) 강원도 산불이 나서 산과 동리를 태우는 모습을 보고 나는 눈물을 닦으며 기도했다. 산과 집은 불타도 나무는 심으면 되고 집은 새로 잘 지으면 되지만 불 속에 사람을 태우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그런데 죽은 사람은 하나였고 10여명이 다쳤다는 TV뉴스에 나는 또 감사의 기도가 나왔다. 가끔 듣는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리며 머리끝이 쭈뼛 상기될 때가 서울교회 유치원 화재사건 이후엔 가끔 있었기 때문이다. 1979년 10월 16일 정오를 기하여 서울교회 교육관 1층 유치원에서 화재가 나서 삽시간에 2층, 3층을 불길로 덮었다. 소방서의 화재진압 후에 현장과 병원에서 죽은 아이는 6명이었으나 화상 당한 아이는 7명으로 그 후 만 4년간 당한 금식과 기도의 눈물에 수습까지의 수난과 고통
“기독교 미술의 부흥을 위해서는 믿음을 가진 천재들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재능 없는 신자보다는 신앙 없는 천재가 더 이 일에 적합할 것이다.” 이상범 저(著) ‘신앙없는 천재 재능없는 신자’(대한기독교서회, 28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1804), 빅토르 위고의 작품 ‘노트르담의 꼽추’의 배경으로도 유명한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Notre-Dame de Paris)이 지난 4월 15일 발생한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제 이 성당의 복원이 어떻게 이루어질까 하는 것이 큰 관심사입니다. 이런 사건이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프랑스 동남부에 위치한 아시시 성당은 2차 세계 대전으로 파손돼 새롭게 건축하기로 했습니다. 책임을 맡은 쿠투리에 신부는 거장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성당 지도자 일부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초청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유대인에서부터 심지어는 무신론자도 끼어 있으니 어떻게 성당 건축을 맡길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쿠투리에 신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을 가진 천재들이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재능없는
할아버지와 소년이 말 한 마리를 키우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할아버지가 시내에 볼 일이 있어서 가신 날 밤, 말이 병이 들어서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소년은 말의 열을 내려 주려고 밤을 세워가며 물을 먹이면서 애를 썼지만 말은 싸늘하게 죽어 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얘야, 말은 열이 날 때 절대 물을 먹여서는 안된다. 넌 네 방식대로 말을 사랑한거야 말을 사랑하려면 네 방식이 아닌 말의 방식이어야 하는 거란다” 소년은 밤을 세워가며 최선을 다하여 말을 돌봤지만은 오히려 말에게 해가 되는 돌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내 방식대로, 내 잣대로 판단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여 오히려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는가? 하나님과 소통을 원하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나 자신의 고집과 교만을 내려 놓으세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뜻에 부흥하는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격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막12:24)
사람들은 빨리만 가면 1등인 줄 알고 열심히 달려가지만 가서 보면 그게 아닌 경우가 있다. 시골 학교에서 가을 운동회를 할 때 동네 아주머니들 달리기 경주를 시키면 꼭 질러가는 사람이 있다. 못 따라 갈 것 같으니까 운동장 가운데를 가로 질러 먼저 결승점에 도착하는 사람이 있는데 먼저 왔다고 1등 상을 주지 않는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빨리 가는 것만 능사가 아니라 바르게 가야 한다. 어떻게 하든지 일등만 하면 되고, 돈만 많이 모으면 되며, 성공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떻게 가든지 서울만 가면된다는 생각, 꿩 잡는 것이 매라는 말처럼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바르지 않은 과정은 언젠가는 탈이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리 일등을 하고, 돈을 많이 모으고, 성공해도 방법이 바르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존경받지 못하고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는다. 신생기업이 권력과 결탁하여 여러 가지 특혜를 받아 사업을 확장하며 급성장하였다가 비리가 드러나 검찰 조사를 받고 오너가 구속되거나 세무조사를 받고 기업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 않는가? 어떤 사람이 정치에 입문하여 승승장구하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다가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칭호를 그의 복음서 저술 목적에 관한 진술에서 마지막으로 사용한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관한 요약적 진술을 두 번 제시한다. 첫 번째 요약적 진술은 예수가 행한 “많은 표적들”을 지적하면서 시작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사야서의 구절들을 사용했다(요12;37~43). 두 번째 요약적 진술은 예수가 행한 “다른 표적들”을 언급하고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믿는 것과 관계시킨다. 두 진술들은 이미 언급된 것들을 요약하고 다음에 언급될 것들을 소개한다. 이 구절들은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헌신의 결과들 곧 박해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나아가는 신앙공동체의 미래를 내다 본다. 요한은 먼저 예수가 행한 표적들에 관하여 언급한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20:30). 요한은 예수의 공생애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표적’으로 지칭한다. 요한이 표적 자료를 의지했다고 믿는 학자들은 이 구절들이 그 자료의 결론으로 제시된 것이라고 간주한다. “다른 표적들”이라는 어구를 통하여 요한이 공관복음서 전승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