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모여 숲이 되듯이 ‘일상’이 모여 ‘일생’이 됩니다. 인생은 큰 사건 몇 가지와 수 없이 많은 일상으로 이루어집니다. 큰 사건도 중요하지만, 일상은 더욱 중요합니다. 점(點)이 연결돼 선이 되고,선이 연결돼 면이 되고 마침내 입체 작품이 되듯이, 오늘 하루의 점을 경건한 꽃자리로 만들 때 승리하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 인생이 아름다운 이유는 매일매일 일어나는 작은 일들 때문입니다. 이 작은 일들에 하나님의 초월성이 스며있습니다. 산소랑, 햇빛이랑, 물이랑, 땅이랑,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귀하고 귀한 것들은 모두 일상 속에 스며있습니다. 어김없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돌고 있는 것, 하늘의 달, 밤하늘의 별빛, 수면 위를 불어오는 바람,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 꽃들의 고운 자태와 향기, 평생동안 수백만 리터의 피를 펌프질하는 우리의 심장… 이런 작고 평범한 것들이 가장 큰 하나님의 신비요 기적입니다. 이 작은 것들을 보고 감사하면서부터 우리는 회복되고 살아나게 됩니다. 우리는 특별한 일에 대해서는 감사를 합니다. 그러나 당연한 일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불평하는 날이 많은 것입니다. “범사에 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저희 어머니께선 저를 서울에 사시는 외가댁에 보내시고 외국으로 가셨습니다. 그 후 저는 외가댁에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12년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학교를 다니면서 육성회비를 내야 할 때면 외할머니께 달라고 해서 받아서 내곤 했습니다. 그리고 책을 사야할 때나, 학원을 가고 싶을 때나, 때론 이가 아파서 치과를 가야 할 때나, 이발을 해야 할 때나…. 언제든지 제가 돈이 필요할 때면 외할머니께 요구해서 못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어머니께서 외국으로 가시면서 제가 공부하면서 드는 생활비를 외할머니께 다 맡겨 놓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든지 자연스럽게 외할머니께 돈을 받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외할머니께 “외할머니! 저 신발 사야 하는데 돈 좀 주세요.”라고 했는데 외할머니께서 보시기에 신발이 멀쩡하다면 “신발이 괜찮은데 왜 사달라고 하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도산 안창호의 말이다. 안창호는 서슬 퍼런 일제 강점기에 청년을 이 땅 마지막 보루로 생각한 대표적 독립운동가요, 기독교인 민족 지도자였다. 기독 청년은 세상이 아무리 암울하고 절망적일 때조차 낙망이 아닌 희망, 죽음이 아닌 생명으로 살아남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문제는 그 명제의 당위성이 어떻게 실현 가능하냐 하는 것이다. 새 학기 캠퍼스에서 한 그룹의 대학원 학생들과 성경통독을 시작했다. 매우 바쁘고 벅찬 일과 와 중에 예외 없이 각자 매주 시간을 쪼개서 꾸준히 성경을 읽어 오고, 모여 함께 나누는 형제, 자매들을 볼 때마다 은혜가 된다. 지난 3주 동안은 특별히 모세 오경을 함께 나누며 은혜를 받았다. 물론 이 시대 많은 기독 청년들 역시 광야의 한복판에서, 또 아낙 자손 같은 세상의 암울한 전망과 권세 앞에 낙망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현실을 지옥에 빗대며 자조하고, 스스로 계급을 나누며, 삶의 의미를 포기하고 있다. 일자리, 주거, 노동, 학자금 등 수많은 문제들이 청년들을 옥죄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든 현실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거나, 꿈을 꾸거나, 미래를 기대하는 청년의
대한민국은 근대화 이후 핵가족화, 호주제 폐지, 이혼율 증가, 최저 출산율 등으로 가족제도의 위기를 맞고 있다. 최근 들어 동성애 관계(same-sex relationship)에 관한 문제는 동성애라는 성적지향에 대한 인권적 차원을 넘어, 동성 간의 결혼을 허용해야 할 것인지 여부로 그 초점이 이동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양성 간의 결혼이 아닌 동성 간 결혼문제가 새로운 사회적, 문화적 현상으로 등장하여 이에 대한 법적 허용을 둘러싸고 사회적 여론이 비등한 가운데 사회적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게 되었다. 2015년 6월 미합중국 연방대법원은 혼인을 남녀의 결합으로 한정한 혼인보호법 제3조가 헌법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들이나 캐나다 등의 국가들이 성별에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가족을 이룰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고 있다. 대한민국도 최근 들어 많은 동성애 커플들은 이성애자와 마찬가지로 결혼할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김조광수 영화감독과 영화제작사 레인보우 팩토리 김승환 대표의 동성 결혼식이다. 이들의 결혼식은 2013년 9월 7일 청계천에서
사순절을 맞으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쳐다보고 깊이 묵상하며, 자신의 죄를 통회하고 십자가 뒤에 올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고, 오순절의 성령 충만을 체험해 초대교회처럼 복음 전도에 죽도록 충성하는 새로운 결단의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기를 기원한다. 만화책에서 본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림은 70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다. 초등학교 3학년, 10세쯤 됐을 때까지 공부에 취미를 못 붙이고 있었다. 여름에는 수영과 다이빙, 우럭잡이, 봄과 가을에는 산에 올라 과일, 산열매(뽈두, 딸기, 머루, 다래, 마구막 등)따기로, 겨울에는 스키를 타느라 공부를 멀리해서 1학년 통지표는 2등이었는데, 그것은 꼴찌에서 2등을 한 것이었다. 그래도 공부는 안하고 만화책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공자와 석가모니의 만화책을 주어서 재미있게 읽었는데 하루는 사촌이 만화책을 갖다 줬다. 제목이 “예수 그리스도”였다. 나는 엄마 따라 절에 나가는 ‘불자’인에 만화책이니깐 상관없이 재미있게 봤다. 그런데 이 예수님께서 그렇게 좋은 말씀도 하고, 병자도 고쳐주시고, 귀신도 쫓아내시고, 음식도 먹여주시고,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도 살려내신 죄 없고 선한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가? 십자가
비숍 고르(Bishop Gore)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상(非常)한 것을 하도록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日常的)인 것을 비상하게 잘하기를 원하신다.” 사람들은 저 멀리에 있는 큰 것을 취하기 위해 눈앞 발밑에 있는 것을 소홀히 한다. 사람들은 큰 것을 취해 놓으면 작은 것을 저절로 취해지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눈앞 곧 발밑에 있는 것부터 시작하여 점점 더 저 멀리 큰 것을 갖도록 질서를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을 하늘 양식 구하는 것 못지않게 귀한 것으로 생각하셔서 우선 일용할 빵을 구하라고 주기도문에서 가르치셨다. 건강은 늙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 시절에 특별히 유의해야만 얻는 것이라고 했다. 너무 멀리 그리고 큰 것을 취하려다가 눈앞의 작은 것에 대한 사랑을 잊는다. 하나님은 작은 것부터 시작하여 큰 것으로 우리에게 주셨다. 율법을 주시고 나중에 실재를 주셨다. 구약을 주시고 신약을 주셨다. 강한 사자라도 연약한 토끼 한 마리 사냥에는 전력투구한다고 하지 않나. 영문학자의 꿈을 가진 희망자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기 전에 ABC 알파벳부터 배워야 함이 순서가 아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운 지점은 신이 자신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내가 이제까지 읽은 모든 책과 문장을 통틀어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와 니체와 프로이드와 마르크스 등의 저작을 통틀어, 가장 무서우면서도 창의적인 선언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였다. 그건 마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처럼 거대하고 담대한 문장이었다. 흑암을 가르고 나타난 빛, 태초를 명령한 스스로 있는 자, 나는 그 문장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김지수 저(著)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페이지원, 85쪽)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첫 문장은 그 이후 모든 이야기를 끌고 가는 기관차입니다. 가슴을 쩌렁쩌렁 울리는 천둥 같은 첫 문장이 있습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 날개)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그만 돛단배로 혼자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이었다. 여든날 하고도 나흘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했다.”(어니스트 헤밍웨이, 바다와 노인)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거북한 꿈에서 깨어나면서, 자신이 침대에서 괴물 같은 벌레로 바뀐 것을 발견했다.”(프란츠 카프카, 변신) 그러나 그 어떤 첫
사람들은 열심히 일 하는데 만 관심이 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만 잘한다고 칭찬하고 쉬는 것을 노는 것으로 보고 부정적이다 보니 쉬는 것을 무시한다. 기업들도 사원들을 열심히 일시키는 방법은 연구하고 경쟁을 시키고 보상을 제공하지만 잘 쉬는 법은 연구하지도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주5일제 근무를 법적으로 정하고 시행하는 것도 건전한 소비를 유발해 관광산업을 발전시키고 경제를 살리기 위한 것과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쉼을 통해 국민들의 건강도 관리하고 삶의 질을 높이며 일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쉬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잘 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져야한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보살피고 상대하느라 식사할 겨를도 없이 일한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고 하셨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막6:31) 예수님은 제자들을 쉬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쉬도록 하시고 예수님도 쉬는 시간을 가지셨다.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 가사
필자는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 칭호가 나오는 구절들을 중심으로 요한의 기독론 중에서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을 살펴보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도 하나님의 아들 칭호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표현하는 가장 중심적 칭호인 동시에, 요한의 구원론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통로와도 직결된 것으로 제시된다(요20:31). 하나님의 아들 칭호는 나사로 부활 사건에서 두 번 나오는데, 먼저 이 사건의 목적을 알려주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으로(요11:4) 또한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관한 여성 제자 마르다의 고백에 나온다(요11:27).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듦에 관한 소식을 들으시고는 이틀을 더 머무르신 후에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난 후에 나사로의 장례 현장에 가셨다. 요한은 나사로 이야기에서도 다른 사건들의 묘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등장인물 사이의 대화를 통해 중요한 교훈을 전달한다. 이 사건의 중심적 국면의 묘사에서도 먼저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의 핵심적 국면이 제시된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부활을 기대하는 마르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은 마지막 날 부활에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생활하는 요즘 젊은이들은 사색하지 않고 검색을 합니다. 숙제도 검색으로 하고, 친구와 밥 먹을 곳도 검색으로 찾고, 검색하지 않으면 쇼핑도 사랑도 못합니다. 그러나 저녁노을을 보는 감동, 새가 날아가는 경이로움, 마른 가지에서 꽃이 피는 기적을 검색해 보세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뛰는 심장을 심전도로 측정할 수 없듯이 죽음의 슬픔 삶의 기쁨을 검색해 보세요. 지난 여름,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손을 잡고 해변을 달리던 때의 그 바다를 검색해 보세요. 구글의 동그라미가 무한으로 이어져도, 검색으로는 찾을 수 없는 세상이 있습니다.” 이어령 저(著) 이어령의 “80초 생각나누기 ‘길을 묻다’”(시공미디어, 129~13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최고의 인터넷 검색 사이트 구글의 로고는 무한을 상징하는 ‘∞’의 연속입니다. 무한대로 펼쳐있는 정보의 바다에서 헤엄치라는 의미입니다. 머리와 가슴보다는 엄지와 검지! 스마트폰과 컴퓨터가 생활 그 자체인 요즘 세대는 머리와 가슴으로 ‘사색’하지 않고, 엄지와 검지로 ‘검색’을 합니다. 친구와 밥 먹을 곳도 검색하고, 쇼핑과 숙제도 검색합니다. 심지어는 목회자들도 주님을 깊이 묵상하기보다는 검색으
요즘 들어 왜 그리도 내 앞에서 눈물 보이는 성도가 많은지 모르겠다. 최근 몇 주간, 전화 또는 대면으로, 남녀를 불문하고, 그 소중한 눈물을 여과 없이 흘려 보이셨다. 이에 그 눈물들의 결을 따라 내 눈물도 함께 흘렸다. 그렇다면 대체 그 의미는 뭘까? 문득 내 지난 과거의 두 장면이 떠오른다. 한 번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날짜는 6월 6일 현충일. 그날은 고등부 야외예배가 있던 날, 난 총무로서 그 행사의 기획과 진행을 다 도맡았다. 게다가 다음날 7일은 시험까지 있어 5일 밤은 공부하느라 완전히 꼬박 새웠다. 그래서인지 행사를 끝내고 부산역에서 버스를 타고 청학동 집으로 오는 길은 완전히 녹초 그 자체. 그러더니 갑자기 주르륵 코피가 흘렀다. 처음엔 대수롭잖게 여겼지만, 곧 쌍코피로까지 심각해지자, 손수건으로 겨우 틀어막으며 어서 집에 도착하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난 정류장에 내렸고, 쏜살같이 집을 향해 달렸다. 대문 앞에 도착해서는 초인종을 있는대로 누르며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자 놀라 뛰어나온 어머니. 그렇게 난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고, 참았던 눈물이 터지면서 곧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나중에 깨어보니 부산 침례병원 응급실. 그제야 정신이 차려져
V. 본문 설명을 위한 기술 알렌 박사는 본문 설명 방법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설교자들은 본문 주해만으로는 청중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며 자신들의 본문 설명이 약한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본문 주해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루한 주해(본문 설명)가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본문 연구 후에 습득된 연구 자료를 설득력 있고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효과적으로 본문을 설명할 것인가? 필자는 효과적인 본문 설명을 위해서 다음의 열 가지 기술(수사적 질문, 정의, 비교·대조, 분석, 시청각 설명, 논증, 재진술, 인용, 스토리텔링, 실물 설명)을 제안한다. 본문의 내용과 청중의 상황 등을 고려해 아래의 기술들을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다. 1. 수사적 질문 수사적 기술은 청중들의 관심을 끌고 설득하는 기술이다. 수사적 질문은 청중에게 질문함으로써 설교자가 말하려는 부분에 대해 청중이 직접 생각하게 하므로 그들로 하여금 담화에 초대하도록 한다. 따라서 수사적 질문은 설교자가 본문에서 설명하는 주제에 대하여 청중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할 수 있다. 2. 정의 정의는 단어 의미의 “한계”를 정
“사흘 굶어 도적질 안할 사람 없다.” “뭐니 뭐니 해도 우선 먹어야 산다.”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해 먹는다.” 등 어려서부터 들어온 말이 많다. 무얼 먹느냐? 왜 먹나? 언제 먹는가? 얼마나 먹고 어떻게 먹는가? 입으로 먹는 음식에서 인생살이에 먹는다는 뜻은 함축적인 뉘앙스를 의미한다. 탐식 호식 걸식이 있는가 하면 금식 절식 단식 등이 있다. 많이 먹어 배불러 죽는가 하면 못 먹어 배고파 굶어 죽는다. 먹는 음식은 죽고 사는 것과 우선적 관계를 갖는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신 후 원수 마귀의 세 가지 시험 중에 첫 번째가 먹는 시험으로 원초적인 시험이다. 인류 역사를 통해 지금도 인생이 겪는 근본적인 유혹의 시험으로 살아온 지난 세월에서나 수십 년 신앙생활과 특히 지금까지 55년 목회현장에서 겪은 식욕의 시험은 헤아릴 수 없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고 유혹한 첫 번째 시험은 빵에서 돈과 재물, 물질과 재정의 소유욕 시험으로 연결된다. 사단은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금단의 열매 선악과로 유혹하여 범죄케 한 경험으로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에게도 똑같은 먹는 것
“자기에게 쓸모 있는 책을 정독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첩경이다. 그런데 좋은 책인지, 쓸모 있는 책인지는 대체 어떻게 판단한단 말인가. 결국 많은 책을 읽어 보는 수밖에 없다. 쓸모 있는 책, 좋은 책을 고르는 탁월한 안목은 ‘많이, 그리고 골고루’ 읽지 않고는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독(多讀)의 비효율성은 다독이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단언할 만큼 많은 책을 읽어본 사람만 주장할 수 있다.” 임사라 저(著) ‘내 아이를 책의 바다로 이끄는 법’(비룡소, 2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에머슨은 ‘지혜로운 사람은 많은 것을 아는 자가 아니라 쓸모 있는 것을 아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 진리는 책에도 적용됩니다. 자기에게 쓸모 있는 책을 정독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첩경입니다. 그런데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쓸모 있는 책인지는 결국 많은 책을 읽어봐야 압니다. 5세기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에 유협이 쓴 ‘문심조룡(文心雕龍)’은 동양을 대표하는 최고 최대의 문학이론서입니다. 소설가 이문열도 초년 시절 ‘문심조룡’을 자신의 문학 수원지(水源池)라고 소개한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문심조룡에는 독서에 대한 좋은 권면이 있습니다. “천 개의 곡조를 다룬 후에야 음악을
어느 신앙 월간지에서 헨리 그루버의 ‘세상을 걷는 중보 기도자’라고 하는 글에서 “현 미국을 이끌어 가는 70대, 그들은 성장시기에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돌리고 추수가 끝난 들판에 남겨진 곡식을 거두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판매한 돈으로 용돈을 벌었던 이들이 국가를 이끌어 가고 있다”며, “그때에는 곳곳마다 부흥회가 열렸고 성령이 부어졌고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안타까운 하소연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10여 년을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점점 줄어들고 있는 젊은 세대의 신앙인들로 인해 마음 아파했던 생각이 났다. 그런 와중에도 근근하게 신앙을 지켜 나가려고 애를 쓰는 노년층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킨다면 기근의 때의 어려움은 축복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킨다면 재앙이 축복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그루버는 역전의 하나님을 소개한다. 영적으로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가난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모습과 한국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헬조선이라는 말까지 남발하면서 나라를 비판하고, 개독교라는 소리로 교회를 손가락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