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금요일과 주일은 좀 힘든 날이었다. 금요일 새벽, 새벽기도를 인도하려 나오려는데 갑자기 몸살 기운이 감돌면서 딱 쉬고 싶단 생각이 들었지 뭔가? 하지만 그 새벽, 갑자기 설교를 누군가에게 맡기기도 그래서 힘들지만 나가서 인도는 했는데, 그때부터 하루 종일 몸살기는 더 커져버렸다. 기도하면서 버텨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철야기도회 인도라도 누구한테 부탁할까 했지만, 그 역시 갑작스레 맡기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무래도 이대론 안되겠다 싶어 오후 늦게 급히 내과를 찾았다. 주사 한방을 억지로 부탁을 하고는 약도 좀 세게 조제해 달라 부탁해 먹고는 철야기도회를 인도했다. 그래서인지 정신까지도 몽롱해져 그 기도회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없다. 술 취하면 필름 끊긴다더니 약에 취한 나도 그랬다. 하지만 프로(?)답게 애써 태연한 척은 했다. 물론 예민한 성도들은 눈치 채셨을 수 있다. “목사님이 다른 때보다 좀 힘들어 보이신다.” 그래서 철야기도회가 끝나기 무섭게 사택으로 돌아왔다. 아내와 딸아이는 아직 기도중이라는 문자를 받고는 “먼저 자겠다”며 누웠다. 그렇게 약 기운에 취하니 토요일 아침 늦게까지 잤다. 그러고 나니 신기방기, 몸은 한결 가벼워지
목회매뉴얼의 필요성 “지금은 목회하기가 어려운 시기이다” 개척뿐만 아니라 기존교회도 점점 성장 동력을 잃고 있다. 정말 목숨을 내놓을 만한 열심도 없고 특별한 능력도 없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적용도 없으면 교회성장이 어려운가? 목회자가 주의 종으로 헌신하고 4년 이상의 신학교육을 받고 부교역자 경험을 했고, 또 소명 가운데 개척을 하였거나 목회하고 있으면 그 정도로 충분하지 않는가? 국민일보를 비롯해 기독교신문이나 교단신문에서 여전히 “이 세미나에 오기만 하면 우리의 목회가 달라질 수 있다”는 광고가 넘쳐나지만 어떤 경우는 오히려 목회의 발목이 잡힐 수도 있다. 지금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목회자들이 있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목회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교회는 생명 공동체이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목회는 목회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목회자는 복음의 확신을 갖고 목회철학을 온전히 성경에 두고 그것에 맞춰 잘 시행하기만 하면 된다. 시행에 있어서 좀 어설프고 부족해도 교회는 주님의 소유이기에 주님의 돌보심 가운데 자연스럽게 성장한다. 그래서 교회는 목회자가 특별한 능력, 특별한
기독교의 실천은 세 가지 국면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첫째는 “무엇을 실천하는가?”와 관련하여 진리(복음)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며, 둘째 “누구에게, 어디서 실천하는가?”에 관해서 상황에 대한 해석이 있어야 하고, 셋째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와 관련해 방법론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실천적 신학이란 인간실존이 지니고 있고 해결을 위한 문제에 대해 응답하는 기독교의 구원의 진리와 생활과 세계의 근본적 변혁을 향한 진리의 생동하는 역사가 교회라고 하는 신앙 공동체와 그 다양한 기능들(예배, 설교, 상담, 봉사, 교육 등등)을 통해 역사 속에서 현재적으로 어떻게 실현되고 있으며 어떤 개혁이 전개되고 있는가에 대한 사실을 규명하고 복음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추구하는 신학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결국 교회와 교회의 활동이 기독교 실천의 중요한 통로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신앙이 1차 체험이고, 신학은 2차체험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둘의 순서가 바뀌면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큰 문제가 된다. 실천이 수반되지 않는 신학은 최종적 가치가 없다. 신학은 진리를 알고 구현하기 위해서 단순히 이론적 앎만 가지고는 안 되며, 실천이 있어야 한다.
오늘도 사람들은 삶의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각자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인정 받기위해서 어떤 사람은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성공하기 위해서 제각각 목적을 가지고 일한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우리의 사람을 다시 한 번 생각 해 보게 하는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고린도전서 10장 31절 말씀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말씀은 첫째는 생존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 돼야 한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일 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 돼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무엇을 하든지” 라는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의미다. 그대가 공부를 하든지 직장에서 일을 하든지 예술을 하든지 운동을 하든지 사업을 하든지 정치를 하든지 복음사역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이다. 내가 하는 일을 성공 하느냐? 못하느냐? 이일로 내가 인정받느냐? 못 받느냐? 돈을 많이 버느냐? 못 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안되느냐? 가 더 중요한 것이다. 미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로고스 찬미가를 통해 신성과 인성의 신비한 연합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근원적 존재성을 제시했다. 그는 성육신하신 로고스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고동락한 경험을 토대로 그 분의 존재의 나타남을 선언한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b). 요한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자기의 견해를 말할 때, ‘내가’라는 단수형 주어를 사용하지 않고 ‘우리가’라는 복수형 주어를 즐겨 사용했다. 이것을 통해 저자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견해보다는 공동체가 전체적으로 동의하고 고백하는 견해를 제시하려고 노력했다(요 3:11; 6:69). 요한은 바로 앞에서도 로고스가 화육해 “우리 가운데 거했다”라고 말함으로써 로고스의 성육신을 공동체의 고백의 형태로 제시하기도 했다. ‘영광’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활동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핵심 단어이다. 구약에서 영광은 하나님의 현현(나타나심)을 표현하는 시각적 모습(때때로 불과 구름의 모습)을 가리킨다(출 33:22; 신 5:21; 왕상 8:11). 영광은 곧 피조 세계에 강림
박 형제님과 교회를 위해 평생 무릎과 눈물로 기도했던 정 집사님이 신장에 이상으로 쓰려졌습니다. 그리하여 지난달 2주 입원하며 조금 안정을 취했었는데 지난주 다시 비오기 전 옥수수 수확을 하는데, 너무 많이 나와서 이틀간 비 맞으며 일하다가 또 쓰러졌습니다. 지난 토요일 강제 입원시키고, 어제 심방 갔다가 3일간 입원했는데도 여전히 얼굴이 부었습니다. “집사님, 우째 그려요?” “글쎄요 쉬면 낫겠지요.”하는데 다섯 평 남짓해 보이는 병실에 3명이나 있는 병실에서 벌써 초저녁에 새우잠을 자고 있던 모습이 수상합니다. 워낙 탁월한 직감으로 진맥을 합니다. “집사님, 밤에 못 주무셔요?”라고 이야기 하니 여자들만 있는 닭장 병실에서 워낙 목소리가 컸는지 놀라서, 심방간 어머니와 저를 밖으로 몰아냅니다. 그렇게 함께 밖에 나와 앉자마자, “앞에 있는 여자가 정신병이 약간 있어서 텔레비전을 끄면 무섭다고 해서 저래 3일간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켜놓고 자서 못 잤어요. 2인실은 비싸서 못가고 또 이제 통증은 많이 사라져서 괜찮아요. 10일만 입원하고 가려고요.” “아 집사님, 박 집사는(박형제) 오기만 하면 특실에 눕는데, 뭐하러 그러셔요?” “무언가 삐쳐서 오지도 않
침례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마3:8)를 외쳐 회개의 침례를 주면서 뒤에 오실 메시아 예수의 길을 예비했고, 예수님도 첫 말씀 곧 일성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로 복음사역을 시작하셨다. 기독교는 회개의 복음이다. 천국은 회개의 관문을 통해 들어간다. “때가 차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고 외쳤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인데 그 뜻은 죄의 자각으로 마음의 의지와 감정의 변경, 곧 전인격적 전환을 말한다. 천국의 주인공인 예수께서 첫 번 외친 천국선언문은 곧 회개였다. 죄의 지각의 회개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애통을 거쳐 옛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도 복음에 전적 합당한 새 생활을 회개로 본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 멋대로 살던 인간이 죄악으로부터 돌이켜 탕자같이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요, 마귀와 죄악의 옛 발걸음을 180°로 돌아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세계로 새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 소극적 후회에서 적극적으로 마음과 생각과 행동으로 과거는 십자가 그늘에 묻고 온전한 부활의 영광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삶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에
주일 아침, 꼭 교회에 나오시라고 하면 이런 저런 핑계로 예배를 참석하지 못하는 할머니 한 분을 그날도 다시 방문했다. 거동이 불편하니 차를 운전해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집에 들어가며 “어머니”라고 불렀지만 기척이 없으시다. 차 소리가 나고 예배 갈 시간쯤 되면 화장실에 숨든지 바쁘다며 핑계를 대고 거절을 하신다. 그날도 아무런 소리가 없어 몇 번을 부르니 화장실에서 나오시며 “오늘은 고무줄이 끊어져서 못 가요.” 그러며 속옷을 보이신다. 보니 속옷에 고무줄이 끊어져서 다시 끼우고 계시다가 인기척이 나니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셨던 것이다. 적당한 옷핀이 없어 작고 낡은 옷핀에 고무줄을 끼워 옷 속에 넣으려고 하지만 눈도 어둡고 손도 어쭙잖은 연세에 옷핀에 손도 찔리시면서 애를 쓰고 계신 것이었다. “괜찮으시면 제가 해 드릴께요.” 말씀 드리니 “아니요. 내가 해야지 이까진 것 가지고 부탁드릴 수 있남요.” 하신다. 그러나 그 핑계에 교회 못 가겠다고 하시니 빼앗듯이 옷을 집어 들고 보니 옷핀이라고 작고 오래됐고 거기에 속옷도 바느질을 많이 해서 고무줄 구멍도 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해드려야 핑계없이 교회에 따라 나설 것이고 예배시간도 임박하여 몇 번 핀에 손
‘빙점’의 작가인 미우라 아야꼬에게 누군가 한 가지 질의를 했다. “아내가 결혼해 아이를 낳지 못하면 이혼의 조건이 되지 않나요?” 그녀는 결혼한 후에도 아이가 없었지만 단호하게 “아뇨, 전혀 그것은 이혼할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해줬다. 자신과 남편과의 결혼은 아이를 낳는 것이 첫째 목적이 아니었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살기 위함이요, 둘이서 연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섬기기 위한 것이 가장 중요한 결혼 목적이라고 말했다. 나의 경우엔 미우라 아야꼬 부부처럼 살지 못해서 갈등과 고민이 심했던 기간이 있었다. 1978년 10년 동안 근무했던 직장을 그만두고 하나님께서 목회자로 부르심에 순종해서 신학대학에 들어가려고 하니 극구 반대하는 3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나와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로서 곧 아내와 어머니와 죽마고우였다. 그 중에 아내는 크리스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눈물과 간절한 호소로서 말렸다. 어촌 출신으로 시골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 목회자 가정의 고충을 많이 보고 듣고 간접적으로 경험한 탓이었다. 그런 일로 인해서 나의 신학 공부는 점점 미루어졌고 5년이 지난 후에야 똑같은 상황을 반복하면서 늦게나마 결단해
상담소를 찾아와서 털어놓는 고민 중에 하나로, 너무 많은 일에 압도되어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을 나눌 때가 있다. 집에 손님이 온다거나 학기말 고사가 다가올 때, 직장에서 쫓기는 프로젝트가 있을 때, 마감이 다가올 때, 할 일이 겹겹이 쌓이고 밀릴 때, 이 모든 해야 할 일에 깔려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든다. 걱정해야 할 일이 많고, 할 일이 끊이질 않는 듯한 상황을 보면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도록 압도된다. 예를 들어 손님이 집에 온다면 음식을 할 계획을 세워야 하고, 청소를 해야 하고, 계획대로 장을 봐야 한다. 장도 미국에서는 한 군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국소형마켓, 대형마켓, 한국마켓 등 세 군데를 돌아야 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실제로 몇 가지 요리를 해야 하고 손님이 오기 전 부엌을 말끔히 정리해야 한다. 이렇게 손님 맞을 준비를 하면서도 당장 먹을 끼니를 준비해야 하고 평소에 해오던 일들을 해야 한다. 아이들을 씻기고 숙제를 봐줘야 한다든지, 여기저기 레슨에 데리고 다녀야 한다. 이 모든 일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이미 압도되어 온갖 짜증을 다 부리고 집안 분위기는 살얼음판이 된다. 대학생들이 상담을 하러 올 때, 듣는 과목들이 줄줄이 F를 맞
1992년 5월에 상가 2층(30평)에서 개척했습니다. 교회는 언덕 비탈길 밑에 있었고 저희 사택은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 예배를 갈 때면 언덕 위에서 교회뿐만 아니라 그 밑에서 단잠을 자고 있을 수많은 세대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으로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다 우리 아버지 땅인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때가 되면 교회를 주실 거야.’ 하며 교회에 가곤 했습니다. 마치 집이 없는 사람들이 자기 집을 갖는 것이 꿈이듯이 남의 건물에 세 들어 살던 저로서도 교회 건물을 가진다는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1998년 IMF 때 우리나라는 경제위기를 맞게 됐습니다. 공장들은 문을 닫고, 실업자들은 속출하고, 부동산들은 거의 매매되지 않았으며 많은 매물들이 헐값으로 나왔습니다. 이때, 교회 건물이 하나가 나왔습니다. 대지, 건물 전체가 690평으로 좌석은 500석의 규모였습니다. 그 교회는 확장 이전 관계로 기존에 있던 건물을 팔아 새 성전 건축에 사용할 계획이었습니다. 줄다리기 흥정 끝에 5억에 구입하기로 했습니다. 그 런데 계약금 5000만 원 중 3500만 원밖에 없었고, 결국 하루 만에 성도들이 물심양면으로 돈을 모아 다음날 계약금 5000만 원
“목사님, 요즘 캠퍼스에서 2030세대에게 가장 유행하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 아세요?” 캠퍼스에서 매주 성경공부 미팅을 지난 1년 동안 해 섬겨온 한 형제가 물어왔다. ‘트렌드 코리아’가 발표한 최근 리포트에 따르면, “욜로(YOLO)”(2017)와 “소학행”(2018)이라는 화두가 요즘 2030세대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다. “욜로”는 “You Only Live Once.”의 약자인데, “너의 단 한 번뿐인 인생 어리석게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의 행복을 저당 잡히는 선택을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 시대 범람하는 욜로족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나 국가의 미래에 대한 일체의 이타적 꿈이나 비전을 접고 산다. 오직 개인적 차원의 카르페 디엠(Carpe diem, 다만 오늘을 즐기라)하라는 철학을 반영하고 있는 까닭이다. 또 2018년 유행 화두인 “소확행”(小確幸)은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의 약자인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랑겔 한스 섬의 오후’(1985)에 나온 말이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만 속옷이 잔득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 쓸 때의 기분을 의
“침례교회는 실천신학이 강하다.”는 말을 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론신학이 약하다는 말을 에둘러서 하는 말일까? 신학적 논쟁보다는 실제 상황과 현장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역량이 뛰어나다는 의미일까? 과연 침례교회는 실천적인가? 실천신학적인 관점에서 한국침례교회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큰 틀에서 기독교 신앙은 실천적 특성을 가져야 하며 동시에 신앙과 실천은 상호 보완적 관계를 맺고 있고, 신앙에 근거하지 않은 실천은 타당성과 일관성 그리고 지속성을 부여받지 못하며, 실천 없는 신앙은 관념적이고 무기력하며 그 진정성에 손상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연구자는 지난 33년 동안 침례신학대학교 실천신학 교수로 봉직하면서 실천신학을 연구하며 학생들에게 강의를 통해 그리고 교회사역을 통해 봉사해 왔다.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침례교회를 실천신학적으로 평가해보고 앞으로의 과제에 대하여 전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먼저 실천신학의 의미와 사명에 대해 개괄하고 나서 그에 비추어 본 한국침례교의 실천신학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고, 이어 몇 가지 제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신문 연재이기 때문에 각주가 생략된 점 독자 제위께 이해를 구한다
1950년도를 전후해서 시골 5일장이 서는 날이면 상거래보다 더 신명나는 구경거리는 품바들의 공연(?)이었다. 남루한 옷차림, 며칠 동안 씻지 못한 얼굴들, 일 년 지나도 이발 못 해 부득불 장발된 두발 등 그들의 몰골은 그대로 꾸미지 않은 거지였다. 한 가족 4~5명으로 된 품바그룹도 있고 영 딴판 남남이 짝을 이룬 품바그룹도 있다. 이들이 국밥집이나 과자 파는 상점 앞에 나타나서 각설이 타령을 한다. 이상한 몸짓도 하고 요상한 소리도 한다. 짐짓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 생김새가 꾸밈없듯이 그들의 그런 공연도 꾸밈이 없다. 단지 그들의 소원은 과자 몇 개를 얻는 것이나 잔돈 한 푼 얻는 것뿐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생계가 걸린 거리의 공연이었다. 그 주변에 장꾼들이 모여들고 인심 좋은 상점 주인은 넉넉하게 동냥을 하는데, 이때 품바들은 어김없이 앙코르 공연을 한다. 의리가 있고 명예에 사는 그들인 것 같았다. 나는 이런 모습을 십대 소년시절에 매장마다 보고 살았다. 그런데 엊그저께 TV를 틀고 나니까 신세대 품바그룹이 공연을 하는 것을 시청했다. 말하자면 50년대에 있었던 품바들을 모방(模倣)해서 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거기 출연한 그 청년들을 TV가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불룩한 큰 자루를 들고 내 앞에 와서 내용물을 쏟아 붓고 사라졌다. 여러 가지 종이돈이 쌓였는데 그중에 외국돈으로 보이는 은행에서 바로 나온 뭉칫돈이 있어 하나씩 집어 상의 안쪽 주머니 좌우에 둘씩 넣으니 양복 두 가슴이 불룩하게 튀어나와서 나머지 흩어진 돈들은 그냥 두고 평생 처음으로 현금 뭉치로 주머니를 채운 기분에 좋아 눈을 뜨니 창살이 환히 밝아온 이른 아침이었다. 특히 목회 초년시절에 교인들이 꿈꾸고 와서 해몽을 가끔 요청할 때 꿈 해몽에 대한 얘기를 부친께도 어려서부터 들었고 특히 대학교 시절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해몽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어서 해몽을 설명해 주기도 했었다. 전번 대통령 선거날 아침 꿈을 꾸고 잠을 깨니 새벽 4시였다. 먼저 끝이 좋으려면 돈조심하라고 충고했던 대통령 후보가 파란 옷을 입고 내 앞까지 왔다가 뒤돌아보더니 정면으로 사라져서 아마도 일바지를 입었으니 부지런히 일 할거라 생각했으나 그 후 다시 생각하니 푸른 옷은 죄수복이란? 이거 안됐구나 생각이 나서 가까운 친구들 10여명에겐 이번 당선자도 부모따라 갈 것이라고 말한적이 있었는데 그대로 되었으니! 돈다발 꿈을 생각하니 이것이 실몽인가? 허몽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