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많이 듣는 단어 가운데 “열 받는다”는 말이다. 어떤 이는 한 술 더 떠서 “뚜껑이 열린다”고 표현을 한다. 그렇다. 힘든 세상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 결코 만만한 세상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어렵고 힘든 세상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또한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열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비밀과 능력을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그 비밀을 마28:19~20절에서 찾고 싶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에서 두 가지 약속을 붙잡을 수 있다. 나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 지혜와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천국처럼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머리는 차갑게 그러나 가슴은 뜨겁게”사는 것이다. 우리 한번 외쳐 보자.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어떻게 그것
필자는 남침례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가 북침례회(Northern Baptist Convention)에 비해 괄목할만한 성장과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세 번째 이유는 성서적 신앙을 지켜나간 데 있다고 본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지키고,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복음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전수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미국 교계에서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간에 신학적 논쟁이 격렬했다. 유럽에서 전해진 합리주의 철학과 다윈의 진화론, 성서비평 등으로 인해 성경의 권위가 위협을 받았다. 천지창조,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부활, 재림 등 기독교의 기본 진리가 부정됐다. 이에 맞서 남침례회는 1925년 멤피스 총회에서 첫 신앙고백인 침례교 신앙과 메시지(The Baptist Faith and Message)를 채택한다. 성서적인 기독교 기본 진리를 담아 성경의 권위를 지켜나가게 된다. 반면 북침례회는 자유주의 신학에 영향을 많이 받게 됐고, 일부 보수주의 교회들은 북침례회 총회에서 탈퇴하기에 이른다. 20세기 후반, 남침례회 내에서 온건주의와 보수주의간에 치열한 신학적 논쟁이 야기된다. 1961년 Ralp
미남침례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가 북침례회(Northern Baptist Convention)에 비해 큰 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가 바로 미남침례회 회원교회들이 개교회의 예산에서 일부를 교단사역을 위해 헌금하는 협동선교 프로그램과 매년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때 드리는 특별선교헌금 제도에 있다고 본다. 2016년도 미남침례회 총회 보고서(Southern Baptist Convention Annual)에 따르면, 2015년도 미남침례회 북미선교부 (North American Mission Board)를 통해 미주 및 캐나다에 파송된 선교사 수가 5,684명, 새로 개척된 교회 수가 926여개에 달한다고 보고됐다. 또한 국제선교부(International Mission Board)를 통해 세계 곳곳에 파송된 해외선교사 수도 3,645명이었다. 개신교 교단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들을 국내 및 해외에 파송하고 있다. 2016년도 북미선교부 (NAMB) 예산이 1억2천160만달러(약1천4백억원)이다. 이 중 4천 3백만달러는 협동선교비(Cooperative Program)에서, 6천만달러는 부활절 애니암스트롱 특별선
십대 소년 네 명이 주일날 어디엔가 놀러 갔다가 월요일까지 계속 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학생 시절에 종종 받았던 유혹 가운데 하나이다. 네 소년은 의견을 모았다. 그들이 여행을 갔다 오는 도중 타이어가 고장이 났고, 고칠 길이 없어서 월요일에 학교를 결석할 수밖에 없었다고 선생님께 거짓말을 하기로 결의했던 것이다. 그래서 월요일에는 학교를 안 가고 화요일 날 학교에 나갔다. “선생님, 우리가 여행을 갔다 오다가 차가 고장이 났는데 고칠 길이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월요일에 결석을 했다.” 지혜로운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네 명의 학생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너희들 말을 알겠구나. 그런데 어제 우리 반 전체가 시험을 보았기 때문에 너희들도 한 가지 시험만은 꼭 치러야 한단다. 문제는 하나이다.” 그리고는 조그마한 종이 한 장을 각각 주면서 고장 난 타이어가 어느 쪽 바퀴였는지를 쓰라고 했다. 아이들이 쓴 네 장의 종이에는 공교롭게도 다 다르게 기록되어 네 쪽의 타이어가 다 펑크 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링컨은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다. “거짓은 잠깐은 통할 수 있지만 영원히 통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기도를 많이 했고, 기도의 비밀을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남북 전쟁이 시작되어 많은 병사가 죽어갈 때마다 동족을 잃는 쓰라린 아픔을 안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다. 그가 이끄는 북군은 병사의 숫자가 많고 또 여러 가지 여건상으로 보아 다 유리했지만 남군의 용장 로버트 리 장군 때문에 늘 지기만 했다. 그래서 그는 하루에 두세 시간씩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고 한다. 어느 날, 북군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대통령을 위로했다. 한 교회 대표가 링컨에서 다가와 말했다. “각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북군의 편이 되셔서 북군이 승리하게 해달라고 날마다 눈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자 링컨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기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우리 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항상 하나님 편에 서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 링컨 대통령의 어머니인 낸시는 아들이 말을 시작할 때부터 매일 성경을 읽어 주었다고 한다. 링컨이 아홉 살 때 세상을 떠나면서 그가 남긴 유언은 “아들아, 매일 성경을 묵상하라. 위기가 닥칠 때는 더욱 열심히 성경을 읽어라”는 것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매일 아침 성경을 읽은 후 하루 일과를 시작했으
고1년 시절, 우리 반에 일진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누구도 그들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 반은 평화가 유지됐다. 그것은 또 다른 세력 때문이었다. 또 다른 세력은 다름 아닌 범생파들이다. 범생파, 공부 좀 하는 애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 두 세력 간에는 암묵적 약속이 있는데, 그것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적어도 우리 반 애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 왜냐하면 ‘우리’니까! 그리고 일진들에게 잔소리하지 말 것 등이다. 그런데 이 평화가 위협을 받는 날이 왔다. 내가 읽던 책이 너무 재미있다며 그 일진이 책을 빌려 달란다. 다 읽고 빌려주겠다는데도 막무가내다. 결국은 점심시간에는 내가 읽는 걸로 약속을 하고 책을 빌려줬다. 그런데 점심시간 종이 울렸는데도 책을 줄 생각을 안 한다. 아마도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였던가 보다. 조금만 더 읽고 줄 테니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다. 일진이 말이다. 그 정도라면 양보해도 될 텐데 도무지 양보하고 싶지 않다. 왜냐면 이것은 양보를 가장한 침탈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내놔라’, ‘읽고 주겠다’, 이렇게 시작된 실랑이는 내 말 한마디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것은 엄연
1845년 미국 침례교 총회(General Missionary Convention)가 남과 북으로 나눠졌을 당시, 북침례회의 교세는 5259교회, 회원 36만 8000명이었고, 남침례회는 4395교회, 회원 36만 5000명이었다. 남침례회와 북침례회의 교세가 대동소이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약 170년이 지난 2016년도 통계에 따르면, 북침례회였던 American Baptist Churches USA의 교회 수는 약 5800교회, 회원 수는 150만 명에 그친 반면, 남침례회의 교회 수는 약 4만6500교회, 회원 수는 1,630만 명으로 집계됐다. 교회 수로는 남침례회가 북침례회에 비해 약 8배, 회원 수로는 약 10배 더 많은 것이다. 비슷한 교세로 시작된 남침례회와 북침례회 간에 이토록 큰 격차가 벌어지게 된 요인은 어디에 있을까? 지난 170년간 북침례회는 숫적인 면에서 크게 늘지 않은 반면, 남침례회는 미주에서 가장 큰 개신교 교단으로 성장하게 됐는데,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 해답을 세 가지 이유에서 찾는다. 첫 번째 이유는 남침례회의 총회체제(Convention System)가 회원 교회들의 힘을 선교를 위해 결집시키는데 있
지금 우리나라는 최순실이라는 무당의 지시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이 나라를 통치한 것이 드러나면서 온 국민은 대통령에게 배신을 당한 것에 대한 분노와 허탈감을 전국적으로 5차례의 촛불시위를 통해 분출하고 있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우리는 대통령뿐만 아니라 우리 개개인에게 종교와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기능을 하는가를 실감하고 있다. 행복심리학자들은 사람의 행복에 필수적인 요소로 사람(관계)과 밥(음식), 종교, 그리고 대화를 꼽고 있다.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오손도손 대화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장면을 떠 올리기가 어렵다. 그런데 그 배후에 어떤 종교를 믿느냐가 우리의 삶의 질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자 폴 틸리히는 종교를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ultimate concern)라고 표현하였다. 종교적 세계관은 왜 중요한가? 한 사람의 정신적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관, 즉 종교는 삶을 지배하는 정신적 지주와 같다. 우리의 믿음과 언행은 세계관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세계관은 마치 우리가 쓰고 있는 선글래스와 색안경과도 같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종교는 우리에게 의미와 목적을 제시한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인생을 바라보는
뜻밖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던 제자들은 신앙생활에 힘쓰는 대신에 디베랴 호수로 간다. 부활의 증인인 제자들은 그곳에서 밤새 그물을 던진다. 그런데, 이랬던 제자들이 예수의 승천 이후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후에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바로 이 제자들이 예수의 증인이 되면서 기독교 역사가 펼쳐진다. 우리는 이미 시작된 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 시대의 한 부분에서 같은 종말론을 소유한 가치 공유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속해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함락과 성전파괴를 예고하시면서 세상의 종말을 선언하신다(마 24장, 막 13장, 눅 21장). 역사적으로 실현된 예루살렘의 재앙과 성전 파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성취 과정을 미리 체험하게 한다. 줄의 한편 끝을 잡아당기면 이어진 다른 끝부분이 당겨져 오듯이, 우리 시대는 이미 실현되고 있는 종말의 궤도에 놓여있다. 상상 그 이상의 격변인 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 이 시대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과 자신의 부활을 믿는 믿음의 힘으로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한다. 1.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로마서에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서로 구분하는 듯한 표현이 있다(4:25, “예수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믿고 기도해야 한다.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 순종하며 기도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 기도를 지금도 응답하고 계신다. 미국 남북전쟁이 한창 일 때 어느 날 링컨이 야전병원을 방문했다. 병원장이 “우리의 의술 덕택으로 죽어 가는 부상병들이 많은 생명을 구했다.”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때 군의관 한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어제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던 병사가 그만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이 보고를 들은 링컨은 병원장을 향하여 “당신들의 의술은 훌륭했다. 그러나 육체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의 마음도 고칠 수 있어야한다”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현대의학으로도 사람의 마음 병, 영혼 병을 고칠 수가 없다. 예수님은 만병을 고치시는 의사이다. 남북 전쟁이 한창이었을 때 맥클란 장군은 가장 뛰어난 장군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그를 격려해 주려고 링컨 대통령이 국방장관을 대동하고 그의 야전 사령부를 방문했다. 때마침 장군은 전투장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링컨은 몇 시간 동안을 사령관 실에 앉아서 그를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장군이 들어왔다. 그는 방안에 앉아 있는 대통령과 국방장관을 본체만체 하면서 그냥 2층 자
“하나님은 사랑이이시다” 나는 성경에서 이것 보다 더 큰 글자가 찾아서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살아오면서 이 말씀보다 더 큰 소리로 내게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이것보다 더 큰 가슴에 메아리친 울림이 없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1서3:1)“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한 장 달랑 남은 2017년 달력이 빠른 세월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한 장 남은 달력은 또 다른 의미를 말해 준다. 성탄에 대한 기다림이다. 기다림이란 행복이다. 소망이라는 또 다른 푸른 등불이다. 삶이 너무 힘들어서 내일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 새벽이 큰 무게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약속은 희망을 준다. 두려움을 몰아낸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 평화로다. 이 땅에 아기 예수님이 오시던 날 천사들을 통하여 일러주신 하늘에 메시지다. 성탄은 기다림에서 시작된다. 기다림에는 설렘이 있다. 기다림과 살렘이 있는 마음은 행복하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영원히 베스트셀러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감동을 받고 믿음을 얻은 사람들의 작품 또한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그들 중에 세익스피어를 빼 놓을 수가 없고, 미국 작가 스토우 부인을 빼 놓을 수가 없다. 스토우 부인이 쓴 <톰 아저씨의 오막살이>라는 작품은 1852년에 발표가 됐는데, 링컨 대통령은 이 작품을 읽고 작품 인물인 흑인 톰 아저씨의 비참한 최후에 감동을 받아 흑인 노예를 해방시키기로 결심을 하고, 1861년부터 1865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제 2혁명이라 할 수 있는 남북노예해방 전쟁을 일으켜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바 있다. 그 링컨 대통령이 하루는 백악관으로 스토우 부인을 초청했다. 봄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가냘픈 몸매를 한 여인이 링컨 대통령 앞에 나타났다. 링컨 대통령은 깜짝 놀랐다. “그렇게 약한 몸으로 어찌 그리 강하고 담대한 글을 쓸 수가 있었습니까?” 스토우 부인은 “그 글은 내가 쓴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계신 성령님이 인도하여 쓰게 한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한다. 에이브라함 링컨의 신앙을 입증하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교회 지도자들의 초대를 받았다
필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침례 교인이고, 침례교 목사이고, 침례교회를 사랑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침례교 신학대학교를 1976년도에 입학하고 공주에서 1983년도에 교회를 개척하고, 1987년도에 목사 안수를 받고 침례회 총회를 34년동안 참석했다. 이제 나이 60이 됐다. 한 세대를 침례교회에서 목회를 한 셈이다. 30년 넘게 총회에 참석하면서 느끼고 깨달은 소견이 있다. 우선 역사는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History is human). 올해로 침례회 총회가 제105차를 지나고 제106차 총회가 시작됐다. 새로운 사람이 일을 시작한다. 하나님은 역사를 사람을 들어 이루어 가신다.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인간이 역사의 주최가 된다. 하와의 말씀 해석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지 않았던가! ‘정녕 죽으리라’와 ‘죽을까 하노라’ 이 말씀 사이에서 그들의 행동이 결정지어 진 것이다. 우리 총회에서는 거짓은 안된다! 거짓은 죽음과 파멸의 지름길이다. 진실로 106차 총회는 거짓이 통하지 않는 진실된 일꾼들이 일하는 총회가 되기를 바란다. 둘째, 역사는 기억이다 (history is memory). 역사를 잊는 것은 곧 하나님을 잊는 것이다. 하나님을 잊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직업을 꼽으라면 교사, 아나운서 등과 함께 목회자가 꼽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말을 많이 하는 만큼 그들의 말의 영향력 또한 클 것이다. 아나운서는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고, 교사는 듣는 사람 수는 아나운서보다 적어도 보다 긴 시간 동안 학생들이 배워할 내용을 말하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는 청중이 신자라는 제한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설교를 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가장 무게 있게 받아들일 것이다. 때문에 목회자의 말의 영향력은 폭은 좁으나 깊이는 가장 깊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의 목회자는 국어인 한국어로 설교를 한다. 그런데 한국어는 순우리말과 한자어 그리고 외래어로 구성된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본래 모든 언어는 사회적 문화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사회가 변하고 문화가 변하면 언어도 변화한다. 산업화 정보화 사회에서 더 이상 농업사회의 언어만으로는 소통할 수 없다. 말은 필요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필요가 사라지면 소멸하기도 한다. 또 말은 사용될 때 생명이 있는 것이므로 어떤 이유에서든지 표준말이 아닌 말도 절대 다수가 사용된다고 여겨지면
몇 년 전에 성도님 한분이 예쁜 포도나무 분재를 하나 사오셨다. 관리를 잘 못해서인지 잎이 점점 시들고 신통치 않아서 마당 한 곁 수도가 옆 화단에다 옮겨 심었다. 화분에서 꺼내 보니 잔뿌리는 없고 큰 뿌리만 남겨두어 겨우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만들어 관상용으로 만든 것을 알게 되었다. 첫 해에는 뿌리를 내리고 되살이를 하느라 고생을 하며 겨우 잎이 살아나고 가지가 움트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새순이 나오고 제법 잎도 무성해 지고 꽃도 피고 대여섯 알 달린 포도송이가 한 두 송이 맺었다. 그러더니 금년에는 새순이 왕성하게 뻗고 무성해져서 포도가 주렁주렁 열려서 지금 한창 익어가고 있다. 분재 화분에서 시들시들 다 말라가던 포도나무가 좋은 땅에 화분이 아닌 좋은 땅에 심겨지니 다시 살아났을 뿐 아니라 이렇게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을 보니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눈으로 본다. 사람이 이 땅에 살아가는 사는 동안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사람은 살기 위해 먹는가, 먹기 위해 사는가? 예수님은 수가성 우물가에 물 길러 나온 한 여인을 만나 말씀을 을 통하여 그 심령 속에 영생하는 생수를 주시고 그 일로 인하여 기뻐서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