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창씨 개명 “니시하라 히대하루” 사촌 누나들이 왜놈 말 “이찌, 니, 산, 시, 고, 로구, 시찌, 하치, 규, 주”를 입학할 때 잘 외워야 하고 “니시하라 이대하루 상”(西原泳春)하면 똑바로 서서 차려 자세로 “하이”라고 대답해야 입학한다고 해서 시킨대로 잘 연습하여 1944년 9월 초 도동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년 간 뭘 배웠는지 모르나 연필 깎는 소리냈다고 옷을 전부 벗겨 팬티만 입히고 눈덮인 운동장을 5바퀴 안 돌았다고 갖은 수욕을 받은 기억이 있다. 일본국가 “기미가요”는 잊어버렸으나 지금껏 기억하는 노래는 “하루가 끼다, 하낭아 사꾸” 일 뿐이다. 왜놈이 가르쳐준 노래대로 1년 후에 삼천리 강산에 해방의 봄이 왔고 꽃이 피었다. ② 양코배기 글 “투레븐 실레븐!”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또 양코배기 글을 세상에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초등학교 때 그놈의 싫고도 못 되먹은 외놈 말과 글 배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또 중학교에선 서양 놈의 글을 가르치지 않는가? 더러워서 못살겠다! “너희들, 지난 시간에 배운 거 누가 해볼 사람 손들어!” 라고 영어 선생이 물었다. 모두 조용하자 “B반에 급장은 어느 놈이고 먼저 일어서라”해서 일어섰더니 1-20까
지금처럼 대형마트가 생기기 전 그러니깐 지금으로 짧게는 40여년 전 만해도 동네가게가 동네 사람들에게 인기였다. 아주 편리하고 고마운 가게였다. 거기 가면 아침저녁 반찬이 있고 간식거리가 있고 각종 음료가 있고 손쉬운 가정상비약도 팔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가게에 진열된 물품이 적어지기 시작했다. 필요품을 사러 가면 거의 없어서 구입할 수가 없었다. 동네 사람들이 하도 이상해서 물었다. “이 가게 안 하려고 그럽니까? 왜 물건이 없는거요?”라고 했더니 그 주인의 일갈(一喝)이 매정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이제 장사 안해유.” 그 특유의 충청도의 길게 빼는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는 손님에게 그는 또 일갈을 토했다. “이제 우리 OO동으로 이사가유.” 잠깐 생각해 봐도 지금까지의 동네 사람들이 고객이 되어 장사해 먹었지만 이젠 저 먼 동네로 이사 가서 장사를 할 판이니 여기 이 동네사람들과는 아무런 거래 관계를 있을 턱없으니 막가는 사람 막 보면 어떠냐는 식이었다. 몹쓸 사람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이 가게 주인은 여기서 톡톡히 장사 재미를 보아 치부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떠나는 마당에 동네사람들에게 그 동안 고마웠다고 다정
한번은 TV에서 “앞으로 태양은 2억년 후에는 수명을 다할 것인데 그러면 지구도 자동적으로 종말이 올 것이다”고 천문학자가 얘기하는 것을 보았다. 시종여일, 시종일관이란 말에도 시종(始終)은 처음과 끝으로 일에 있어서나 시간, 장소, 우리 한사람의 출생과 임종(生如寄也死如歸也)으로 “사는 것은 붙어 있은 것이요 죽는 것은 돌아가는 것”일뿐 아니라 사회나 국가, 민족과 역사속에서 시종이 있어왔다. 말세의 징조에서 해가 어두워지며 달도 빛을 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수 십년 생각하다가 작년 6-7월에 사는 집에서 매일 하늘을 유심히 점검한 결과 4일만 쾌청한 푸른 하늘을 보았다. 홀름스(Hannah Holmes) 박사는 “10~30억톤의 사막과 미세 먼지가 매년 하늘을 나는데 100억톤의 양은 기차속의 1400만 화물칸을 가득 채워 지구의 적도를 6번이나 감싸 도는 엄청난 분량이다”고 말했다. 배기 온실가스와 중국에서 날아온 미세먼지, 안개구름, 지구 온난화로 빙하감소, 해수면 상승, 기상이변으로 홍수, 한재, 허리케인, 환경과 생태계 파괴, 기근, 질병, 우박, 해일, 쓰나미, 자기장, 태양폭풍 등 재해뿐만 아니라 원자재가 상승, 정치, 경제, 문화, 사회,
평상시 잘 알고 있는 어떤 성도님이 굳이 자기가 모이는 모임에 한 번 참여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내가 찾아간 곳이 서울 모처 모교회당이었다. 저녁 7시에 갖는 모임인지라 성도와 함께 부근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그 교회 1층 어린이 예배실로 갔다. 이 교회는 이 모임을 한 달에 한 번씩 어린이 예배실에 갖도록 허락해 줬기에 이들의 모임을 월 1회 여기서 꼭 정한 이날에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 모임의 이름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위한 OO모임”이었다. 누구는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 안하나? 어느 교회든 조국과 대통령을 위해 기도안하나? 왜 굳이 이들만이 유별스럽게 그런 기도를 하느냐고 이 모임에 들어가면서 느꼈던 감정이었다. 나는 이 모임의 이름이나 성격도 모른채 단지 평상시 잘 아는 지인 성도의 간곡한 부탁을 그냥 한 번 들어주자는 예의상에 취한 걸음걸이었다. 대중을 대충 헤아려 보니 10여 명에 불과한 작은 무리였다. 들어서자마자 순서지에 나의 이름 석 자가 “축도”라는 순서에 적혀 있었다. 그 지인이 주최 측에 미리 말했던 모양이다. 축도면 축도일 뿐 하면 되는 거지 뭐. 그런데 20가지 기도제목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10계명을 국가, 민족발전의
크리스천 실존주의 철학자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의 글을 비롯해 칼 바르트(Bart), 에밀 브룬너(Brunner), 불트만(Bultmann), 내게 감명을 준 술라이엘마허(Schleiermacher), 리츨(Ritchl), 틸리히(Tillich), 람세이(Ramsay), 외에 칸트(Kant)와 헤겔(Hegel) 등 철학자도 있지만, 평생 가장 존경하고 기억되는 훌륭한 목회자요 위대한 신학자의 역작으로 별도의 사전 없이 해독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과 운명”(The Nature and Destiny of Man)은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 교수의 소위 옥스포드 강의로 불렸던 현대신학의 장서를 대학교 3학년 때 세미나 교재로 읽고 졸업 논문을 쓰게 된 동기가 있었다. 사람의 본성과 운명은 무엇이며 어떻게 설명하는가? 인간의 본성 곧 천성은 근본적으로 동물과 다른가?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인간성과 동물성을 함께 갖고 있는가? 인어처럼 몸은 물고기인데 얼굴만 사람인가? 몸은 야수인데 얼굴만 사람인가? 동양의 성선설과 성악설 중에 어느 것이 성경의 진리에 가까운가?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가 아니라면 원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시골 농촌답게 연세 드신 분들이 많다. 더욱이 이곳 교회 주변 마을은 진도에서도 연령층이 가장 높은 수준에 해당한다. 그러니 한글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개중에는 자존심으로 드러내 놓고 배움의 기회를 찾지 못하는 분들이 많지만 진도 인구 3만여 명 중에 2, 300 명이 넘는 분들이 한글을 배워 일 년에 한 번씩 백일장을 군에서 실시를 한다. 대부분 여성분들이다. 그래서 가끔은 남자 분들이 계시더라도 엄니들의 한글학교라고 부르게 됐다. 이곳에 내려와 전임목회자 사모님이 하시던 한글학교를 맡게 되어 첫인사를 하려고 하자 한 분의 엄니께서 “아구 우리는 여자한테 배워서 남자하고는 공부 못혀.” 그러자 덩달아 “그려 우리 못혀. 다음부터 안 나올 거구만.” 인사하러 왔다가 아예 끝날 판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남자가 아니고 목사이고 선생이니까. 그리고 한 번 해보고 재미없으면 안 나오셔도 되고요.” 배짱을 부르듯 엄포를 놓자 마지못해 “그럼 한번 해보고 결정합시다.” 대답하셨다. 그렇게 시작되어 두세 달 정도 지났을 때 공부하시던 엄니들이 “아구 이렇게 재미있는 것을 괜히 걱정했네요.” “우린 선생님 만나 넘 기쁘고 즐거워요.” 행복해 하신다. 그리
주일 아침 일찍 동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설교차 청주로 향하는 나의 가방 속에는 아내가 정성들여 싸준 아침식용품이 들어있다. 이른 새벽 떠나는 길이기에 집에서 조반을 들 수가 없어 아내가 늘 그렇게 아침을 챙겨준다. 고맙기 그지없다. 가방을 열고 아침식용품을 열어보니 떡조각, 과일조각 등이 있었고 플라스틱 물병엔 커피가 있었다. 떡조각을 꺼내 먹고 커피 한 모금을 넘기는 순간 이건 커피가 아니라고 확인했다. 원래 나는 집에서 모닝커피랑 손님대접 커피랑 내가 손수 커피콩을 갈아서 적당한 온수에 내려 먹는 커피 매니아요 또 약간은 전문가이다. 따라서 아내가 커피를 끊이는 일은 거의 없다 싶어 내가 끓여주는 커피의 소량을 아내가 즐기긴 한다. 그런데 오늘 아침 커피는 아내의 솜씨였다. 아내는 어제 밤에 인스턴트커피를 끊여서 식혀 두었다가 플라스틱 병에 넣어뒀는데 그것은 아침에 서둘지 말라고 잔뜩 편의를 본다는 심산으로 선심커피를 탄 것인데 그 인스턴트커피는 이미 오래 전에 어느 구석에 박혀 둔 것이었다. 나는 이미 그 사실을 어제 밤에 알고 있었다. 그건 커피가 아닌데! 밤새워 뒀다가 먹는 커피맛? 그건 커피가 아닌데, 그럼 왜 아내가 싸주는 커피를 마다하지 않고
“우리 아내는 이미 여기 없어요. 이미 하늘 아버지에게 갔고 몸만 이 땅에 남아있어요!” 최희준(Jones)선교사는 최희신 선교사 임종시(2014년 3월 18일) 자녀들에게 위로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지난 주일(4월 9일 오후) 그도 88세로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천국에 입성했다는 소식에 추모의 글을 싣는다. 일찍이 최희준 선교사는 미국 텍사스 주 남단 멕시코 연안의 겔베스톤(Gelvestone)이란 작은 섬에서 출생하고 자라나 6·25 전란 직전에 군인으로 대한민국에 와서 병역의무를 마치면서 한국의 연혼에 대한 깊은 관심과 소명으로 신학공부를 한 후 1957년 최희신 사모와 함께 한국 선교사로 나오셨다. 음대생 출신인 사모님은 오르간 반주로 진흥원 음악부와 서울교회 반주로 오랫동안 봉사했고, 최희준 선교사는 신학교 교수와 교회진흥원에 이어 교회개척과 성장 및 선교회장을 역임하면서 38년 동안 이 땅에서 봉사하시다가 1995년 은퇴하시고 본국으로 귀국하셨다. 1998년 한국침례교 선교 100주년 기념대회가 BWA 90대회 후 두 번째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7만여 침례교성도가 운집한 가운데 최희준, 최희신 선교사 부부는 “내 인생 여정 끝내어” 찬양으로 청중들의 심
나는 어릴 적에 왜 흑인들은 백인 앞에서 꼼짝도 못하는 노예 신세로 마치 가축 취급을 받아야 했는지 그리스인으로서 의아해했다. 한참 뒤에야 왜 그런지 이유를 알았을때는 너무 늦은 감마저 들었다. 여기서 신학적 설명은 잠시 보류하기로 한다. 그 이유는 지금도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흑인은 무기가 없었고 백인은 총검 무기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현실적 이유다. 총검으로 무장한 백인은 전혀 무기가 없는 흑인의 저항엔 그냥 총질을 했던 것이었다. 백인은 살생무기를 지녔고 흑인은 그게 없었다. 흑인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노예로 살 수 밖에 없었다. 사람보다 몇 배 더 힘이 센 맹수는 또 포수에게 왜 꼼짝도 못한 채 사냥당하고 있는가? 그 대답도 간단하다. 맹수는 무기가 없고 포수는 사냥총을 지녔기 때문이다. 맹수는 겨우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을 가졌으나 총알 앞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최근 슬픈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때 왜 차지철은 김재규란 사람에 의해 대통령도 서거당하고 자기도 죽게 됐던가? 그 이유도 간단하다. 그 때 김재규는 권총을 차고 있었고 차지철은 아무런 무기도 지니지 않고 식탁에 앉았던 것이다. 대통령을 보호해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8) 예배당 지붕에 왜 더하기 막대기를 붙여놓았나? 아버지의 달램과 명령에 못 이겨 처음 교회당 또는 그 당시 말로 예배당, 예수당에 갔는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고, 예배당 안에 들어가니 또 강대상 뒤에도 더하기 막대기를 다듬어 붙여놓았었다. 몇 년 전 절간에 갔을 때는 번쩍거리는 부처상과 차림이 엄숙했는데, 교회당은 초가집이 옆에 붙은 함석집에 자그만 했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1951년 8월 3일이었다. 나중에 물었더니 더하기 막대기는 예수가 달려죽은 십자가를 말한다고 했다. 그제야 3년 전 만화책에서 본 예수가 가시를 머리에 쓰고 머리를 앞으로 넘어뜨리고 나무장대에 두 손에 발도 대못에 박혀 처참하게 죽는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5학년 배석문 선생님은 야소교는 서양종교이니 교회당에 나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세상에 예수쟁이들은 나무장대에 매달려 죽은 예수가 그 무슨 큰 자랑이라도 되는지 십자가를 붙여놓았는가 생각했었고 어린 소견으로 불쌍하게 죽은 예수를 뭣 때문에 믿는단 말인가? 그 후 작은 모시게 동리에 갔더니 장로교회는 종각대 꼭대기에다 십자가를 붙여
아내가 나의 두 달 약을 처방받아 오노라면 꽤나 호주머니 돈이 많이 나간다. 언제나 지정된 병원에서 처방받고 지정된 약국에서 약을 사온다. 오늘도 아내의 심부름 비슷하게 약을 타 오는 것이 나의 오늘 일부이다. 늘 가던 약국이라 약사들과 직원들이 익히 나를 알아본다. 약을 조제하는 동안 나는 많은 사람들 틈에 끼여 앉아서 약 받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약국에서 언니뻘 되는 직원이 나와 눈을 마주치고 계산대 앞으로 오라기에 갔더니, 그녀가 따끈한 광동탕 한 병을 넘겨줬다. 나는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굳이 나에게 시선을 던지고 유독 특별히 이 광동탕 한 병을 주는가 말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뚜껑을 열고 조심스럽게 광동탕 한 병을 비웠다. 광동탕을 비운 나는 스스로 생각했다. 그녀가 특별히 이 광동탕을 내게만 주는 이유가 뭔가? 그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이 약국의 단골손님 중의 단골이요 또 고액의 약을 사는 손님이요, 외모(?)도 노인치고는 괜찮은 편이요, 주고받은 간단한 대화에도 엘리트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 한 번 잘나고 볼 판이다. 나는 잔뜩 잘난 체하고 있었다. 좋게 보면 자부심이요 나쁘게 보면 교만이 아닐까
“여보시요, 2000년 동안 죽고 썩어 냄새나는 송장이 다시 살아난 일이 세상에 한번이라도 있었어요? 그런데 어찌 부활을 믿어요?” 당황하며 잠깐 머뭇거리다가 “선생님, 저도 어릴 때인데도 처음 교회에 나갔을 때는 믿기지가 않았지요. 그런데 예수님만이 살아나 부활하셨으니 오히려 저 같은 사람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요!” 그는 내가 금년에 새로 만들어 돌리는 “인생의 결단과 도전”이라는 제목의 전도지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주자마자 어떤 사연인지 예수의 부활에 대한 반감으로 소리쳤다. 대화 중 그가 서울대 법대를 나온 엘리트의 합리적 사고에서 나온 저항인가 생각하고, “만일 죽은 사람을 살아있다고 사기치고 기만하는 사이비 종교라면 저 같은 사람도 그런 거짓 종교를 60년이 넘도록 어떻게 믿어왔겠어요! 성경에서 예수의 부활을 못 믿는 것보다 선생님의 말씀대로라면 부활하지 않고 죽은 예수를 부활했다고 믿는 오늘 세상에 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우매한 교인들이 얼마나 더 가련한 인생들이겠어요!” 지난달에는 대구 라온제나 호텔에서 500여명 모인 동창회원들에게 나눠준 전도지에 반응이 좋았고, 지난 50년 넘게 수많은 사람에게 전도를 했지만 그렇게 격분에 모멸스런 말은
어머님이 살아 계실 때 서울 살고 있는 나는 시골 어머님을 서울로 모시고 오곤 했다. 농촌에서 농사일 만으로 살아가시는 어머님이 서울 나들이 차 아들집을 오시자면 일단 서울역까지 기차로 오시고 거기서 내가 마중을 나가서 모시고 집까지 온다. 영업용 택시를 타고 남산 순환도로를 드라이브한다. 어머님은 빽빽하게 들어찬 집과 건물, 그리고 수많은 차의 운행, 또 거리의 사람들을 보시고는 걱정이 태산 같다. “아들, 서울 사람들은 무엇해서 먹고 사나?” 어머님이 보시기에는 논도, 밭도, 산도, 들도 없는 이 황량한 시멘트 벽돌 건물 속에 개미떼처럼 우글거리고 사는 서울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쌀이랑 콩이랑 생산해서 먹고 사느냐는 것이 걱정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모양이었다. 그때 우리를 태우고 가던 택시 운전기사가 태연스럽게 말했다. “서울 사람들은 사람이 사람을 뜯어먹고 살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동물계의 먹이 사슬세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약한 놈은 강한 놈의 밥이 된다는 논리이다. 육식동물인 사자나 호랑이, 치타는 다른 약한 동물을 먹잇감으로 알고 사냥을 한다. 육식동물의 번식은 약하고 그 동
오래전 읽은 신앙 간증을 사순절이 되면 가끔 떠오른다. 미국 일리노이즈주에 60세가 넘는 할머니가 이상한 병이 걸려 통증이 멈추지 않았고 사지도 맘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에 대한 감사가 넘쳤다. 두 손을 전혀 쓸 수 없게 되었고 오른손 엄지손가락 하나만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 한손가락으로 감사하고 기뻐했다. 막대기에 두 갈래의 포크를 묶어두고 그것으로 안경을 쓰면서도, 빨대로 차를 마시며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성경을 읽는 형편이었지만, “나는 사람들에게도 감사를 자랑할 이유가 너무 많아요”했다.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매우 단순하게 대답했다. “내 모든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를 받았지요. 이것이 놀라운 은혜가 아닌가요? 나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평안히 누워있을 수가 있죠. 또 언젠가 나를 부르실 때에 기쁘게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으며,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께 영광 돌립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학교 공부엔 취미를 못 붙이고 만화책에 관심이 많을 때에 하루는 외사촌인 전근술이 또 만화책을 가져다 줬다. 이미 공자와 석가모니 만화책은 읽은 터인데 이번엔 제목이 “예수그리스도”였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서당
결론적으로 말하면 단체는 행사하고 교회는 예배한다. 그러니까 기독교단체는 행사를 하기 위해 모이고 개교회는 예배하기 위해 모인다. 초교파대집회에 참여한 자리에서 황당한 광경을 목도했다. 그 대회에는 참여한 순서담당자들이 무려 20여명이나 됐다. 이런저런 직함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그리고 이런저런 체면예우 때문에 그러다 보니 순서담당자가 늘어난 것이었다. 자기교회 담임목사의 순서 아마 기도로 생각난다 - 가 끝나자 그 많은 청중 ·성도라기보다는 청중 혹은 단순히 대중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가운데서 한 무리의 청중이 우르르 그 장소를 빠져 나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어린 시절 두 발이 빠져나간 아이의 머리털 빠진 곳과 같았다. 네 목사의 순사가 남았으면 네 들은 남아 있으라, 우리 목사의 순서는 끝났으니 이 자리를 떠난다 묘한지고! 몇 사람의 설교자도 설교원고를 써와서 읽고 기도하는 사람도 기도문을 써가지고 와서 한자 한자 실수없이 또박또박 읽는다. 혹시라도 실어(失語)하면 안되니까, 실수하면 입장 곤란하니까 누구 앞에서 그렇다는 건가? 청중 앞에서 말이다. 청중 앞에서 인기없는 설교, 청중 앞에서 횡설수설하는 기도, 그것은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