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책임을 안고 현실에 참여하라.” 우리 사회가 무질서하고, 불안하며, 혼란한 이유는 책임지지 않는 간섭주의자들이 만들어내는 스킨인 더 게임(Skin in the game/나심 탈레브/비지 니스 북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택과 책임의 불균형이 가져올 위험한 미래에 대한 경고를 3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지식, 정보, 균형 첫째는 “지식(知識)”으로 가짜 지식인들이 쏟아내는 헛소리다. 지식인이나 전문가를 자처하면서 무책임하게 내뱉는 거짓말로 우리 사회는 검은 백조가 출연하게 된다. 지금은 지식이 없어 서가 아니라 지식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다. 넘쳐 나는 지식 중에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것이 실력이다. 둘째는 “정보(情報)”로 상위 3%가 고급정보를 독점하는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간다. 정보의 독식으로 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사건과 아빠 찬스를 이용해 50억 클럽에 가입한다. 지금은 부도 세습이며, 권력도 대물림이 되어가고 있다. 요즘 성장하는 교회는 모(母) 교회 찬스를 사용 거나 아빠 찬스를 이용한 교회들이다. 셋째는 “균형(均衡)”으로 보상받기를 원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권리는 주장하지만 의무를 피한다.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깊은 밤 지방회 목사님 사모님들과 20여년 만에 찾아가는 고향이라 설레임과 함께 심한 멀미를 걱정하며 울릉도로 가는 크루즈선에 올라탔다. 코로나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울릉도 지역 침례교 미자립교회를 순방해 함께 기도하고 격려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선교의 열정을 회복하기 위해 올해 지방회 특별사역으로 지방 회장님께서 일일 순방일정으로 계획했다. 이튿날 아침 동이 틀 무렵에 비행장 건설 예정지인 사동항에 도착했다. 울릉지방회 총무이신 태하교회 김차곤 목사님, 도동교회 정치호 목사님, 저동교회 최성환 목사님께서 마중을 나오셔서 차량 운전으로 종일 수고하셨고, 가이드는 울릉도에서 3년 동안 목회하셨던 박용주 목사님께서 담당하셨다. 일주도로를 비롯해 지역사회가 얼마나 발전하고 정비가 됐는지 30대 초반까지 살았던 내가 오히려 외인이 된 것처럼 이곳저곳을 물어보며 감탄사만 연발했다. 맨 처음 도착한 곳이 사동 교회였다. 몇 년 전 수해를 입어 힘들었는데 총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들의 후원과 기도에 힘입어 아름답게 건축돼 있는 모습에 감사했다. 다음으로는 중령교회를 찾았다. 나의 고향교회이다. 교회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지난날의 생각들로 눈물이 앞을 가렸다. 특
지난 1970~80년은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와 경쟁해서 자본주의가 승리했다. 공산주의는 70년의 수명을 다하고 무너졌다. 승리의 원인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보다 ”인간욕망“을 더 효과적이며 합리적으로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이긴 것이다. 자본주의 치명적 결함 그런데 자본주의는 두 가지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자본주의는 그냥 풀어놓으면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신(新) 자본주의(야수 자본주의)”가 된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보다도 야수 자본주의가 판치고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죽여야 사는 적자생존, 이긴 자가 싹쓸이하는 승자독식,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쟁투로 정치적으로는 보수와 진보가 치열하게 싸우는 양극화, 세계 1위 자살과 이혼율, 저출산, 초고령화, 계속되는 산업재해, 환경파괴가 그 증거다. 또 하나는 “과잉생산”이다. 인간의 무한 욕망을 무한 긍정하는 성장지상주의인 신(新)자본 주의는 과잉생산을 중단시킬 수가 없다. 인간의 무한 욕망은 무한 생산을 하고, 무한 생산은 자연을 파괴시킬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생산을 멈추는 순간, 넘어지는 자전거와 같다”는 표현처럼 수요가 없어도 계속 생산해 내야 한다.
머물 곳 없이, 안식처도 없이 계속 쫓기는 다윗,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다. 설상가상으로 멘토이자 영적 스승인 사무엘 선지자마저 죽었다 (1절). 민족의 지도자요, 선지자인 사무엘을 잃은 온 이스라엘이 다 슬피 울었지만 아버지 같은 영적 후원자를 잃은 다윗은 장례식에 갈 수조차 없다. 오히려 본토에서 가장 먼 아라비아 반도 최남단 바란 광야로까지 피신간다. 거기서 마온 사람인 한 부부를 만났다. 남편 나발은 어리석은 사람이었지만 부인 아비가일은 총명한 여인, 그들을 만나 일어났던 에피소드를 통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게 뭔지를 생각해 본다. 어리석은 사람, 나발 나발은 다윗이 그의 목장을 보살펴주면서 알게 된 지역의 부자였다. “양이 삼천, 염소가 천마리”(2절), 당시 시골에서 이 정도면 큰 부자, 2절뿐만 아니라 6절에서도 그를 ‘부하게 사는 자’ 라 했다. 문제는 그가 부자답지 못했다는 것, 그는 자신의 부를 합당하게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 다윗이 먹을 것 좀 달라고 부하들을 보냈지만 아예 모른다고 했다. 배은망덕, 어리석은 짓이다. 결국 이 일 때문에 목숨도 잃고, 재산도 잃고, 아내도 잃는다. ‘나발’의 이름 뜻이 ‘바보’ ‘미련한 자’인데 이름처럼
다윗의 힘든 도피생활이 이어진다. 사면초가의 어려움에 빠진 다윗의 긴박감이 잘 드러나는 본문, 가는 데마다 사울이 따라온다. 사울이 미처 오지 못해도 신고자들 때문에 피할 곳이 없다. 물론 비극만 이어진 것은 아니다. 추격자 사울에게 잡힐 뻔한 위기가 스릴있게 전개되는 것은 맞지만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가 빛이 난다. 하나님과 밀월관계였다 23장 1~13절의 내용은 도피생활 중에 있었던 여느 에피소드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일라 지역이 블레셋에 의해 공격당하고, 주민들은 타작마당을 습격당해 애써 수고한 농산물을 빼앗긴 다. 그 사실을 안 다윗은 자기 몸 하나 피신하기도 바쁜 때였지만 그일라 백성을 불쌍히 여겨 블레셋을 공격하려 한다. 당연히 다윗의 사람들은 반대했다. 그들은 기가 막힌다는 반응이었다 (3절). 그러나 다윗은 블레셋과 싸우고, 그 전투에서 이겨서 그일라 주민을 구한다. 다윗의 호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지랖 때문일까? 아니다. 이게 진정한 지도자의 마음이다. 다윗은 마치 이미 왕이 된 것 같다. 왕은 백성을 책임지는 자리, 자기가 희생되더라도 백성을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지도자인데 다윗은 왕의 품성을 잃은 사울과 달랐다.
모든 사람은 어떤 사물에 대한 자기의 이해를 표현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비록 눈이 먼 시각장애인이라도 코끼리를 접한뒤, 기둥 같다느니, 벽 같다느니라고 느낌을 말할 수 있다. 그들이 코끼리를 만진 경험이 일치점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코끼리임에는 틀림없다. 모 든 공식에서분모(分母)는 동일하고 단지 분자(分子)가 틀린다고 해도 분모에 변화가 없다. 1/5이나 3/5에 있어서 분모 5가 같으면 분자인 1과 3은 5의 자녀요 형제다. 그런즉 1과 3은 싸울 일이 없다. 성경에 관한 학자들의 설명을 읽어보면 시각장애인 촉상 같은 느낌이 든다. 어떤 학자는 구원의 교리를 강조하고 또 어떤 학자는 성경론을 강조한다. 또 어떤 학자는 종말론을 강조한다. 자기들이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이 제각기 있다. 그런데 똑같은 주제를 놓고 설명이 분분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로마서 강좌에 있어서 로이드 존스는 찰스 핫지, 존스토트, 그리고 칼 바르트와 의견을 달리한다고 솔직히 언술하고 있다. 학자간의 의견 차이는 학문의 성격상 가능하다. 문제는 내 것은 맞고 네 것은 틀렸다고 말할 때 시각장애인들의 코끼리 접촉에서 벌어지는 의견의 차이다. 나는 여전히 로이드 존스를
다윗의 망명, 도피생활이 시작된다.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없었지만 반란을 우려한 사울 왕의 집요한 추적 때문이다. 유대나 베들레헴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었기에 결국 다윗은 살기 위해 놉 땅으로, 블레셋 땅 가드로, 아둘람 굴로, 모압으로, 헤렛으로, 엔디게 동굴로, 바란 광야로 돌며 무려 15년 동안 긴 도피 생활을 한다. 사울 왕이 죽어서야 그 지긋지긋한 도피 생활을 끝낼 수 있었는데 감사한 것은 그 도피생활을 하나님이 줄곧 도우셨다는 것이다. 놉, 아히멜렉의 도움을 받다 다윗이 급히 달아났던 곳은 놉이었다. 당시 사울 왕국의 수도 기브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다윗은 엘리 가문을 잇는 제사장 아히멜렉이 있는 곳으로 간다. 급하게 도망치느라 다윗 일행은 먹을 것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기에 제사장에게 먹을 것을 요구한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올렸다가 내온 진설병밖에 없다고 한다. 성소의 상 위에 차려 놓는 열두 덩이의 떡,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는 것, 하나님께 드리는 음식물이라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다(레24:9). 그런데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과 그 소년들의 곤궁한 처지를 보며 이 원칙을 무시하고 소년들이 성적인
불교의 교리 중에는 살생을 금하고 있다. 살생은 사람의 생명을 죽여서는 물론 안 되고 또 모든 것의 생명을 무의미하게 심지어 오락형 식으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중들은 차라리 동물을 죽여서 얻게 되는 고기 먹기를 금하고 채식을 주로 한다. 그러나 식물에도 생명은 있지 않은가? 그러니 모순된 교리 아닌가? 물론 무의미하게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만 이런 종교의 교리에 한계가 있다. 성경에는 살생하지 말라는 것은 없고 살인하지 말라는 있으니 이것이 타 종교와의 또 한 가지 차이점일 것이다. 여하튼 불교지도자들인 중들은 고기 먹기를 금한다. 그런데 혹 어떤 중이 생선회를 즐겨 먹는다 해도 남이 보는 데서 바다낚시를 하지는 않는다. 나는 중이 사냥하거나 낚시질하는 것을 평생에 한 번도 본 바가 없다. 생선회는 먹어도 낚시질을 하지 않는 중의 양심과 태도에서 나는 이런 교훈을 취한다. 속담에 눈치 빠른 사람은 절간에서도 새우젓을 얻어먹는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모든 살생을 금지하는 절간에도 새우젓 숨겨두고 먹는 모양이다. 그들 나름대로 덕을 세우기 위한 조치인듯하다. 그것을 성경은 덕을 세우라고 했다. 소위 건덕(建德)이니 “모든 것이 내게 가하
사람은 누구나 관계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그물망은 날로 더 촘촘해지는데 든든하면 건강하게 살지만 끊어지면 치명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본문에는 든든한 관계의 그물망으로 ‘어왕다’(어차피 왕이될 다윗)의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엉킨 그물망 다윗은 단 한 번도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출마한 적도 없다. 졸지에 기름 부음을 받기는 했지만 뜻밖의 일이라 긴가민가했을 것이다. 그리고 골리앗을 물리쳤던 것도 영웅 되려고 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 심부름 갔다가 열받아 나섰는데 얼떨결에 영웅이 된 것, 그런데 이 일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다. 국민들은 영웅 대접하는데 사울 왕은 자기를 대적자로 여긴다. 사울 왕과의 그물망이 걷잡을 수 없이 엉킨다. 여인들이 부른 노래 때문에 큰일했다고, 잘했다고 칭찬하던 사울 왕이 돌변한다. 이성을 잃은 것 같다. 불같은 질투심으로 그날부터 아예 죽이려 한다. 벽에 박아 버리겠다고 창을 던진다(18:11). 18장 10절에 보니 ‘그 이튿날’이라 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싸워 이기고 돌아온 바로 다음 날, 어제 그렇게 좋아하던 왕이 두 번씩이나 창을 던져 죽이려 했다는
나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다음 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작정하고 역사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부분을 나누기 전에 우리는 이 시대의 영적 상태를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 하다고 생각해서 호세아 4:6을 중심으로 우리의 현 영적 상태를 진단해 보고 있다. 1)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다. 2)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3)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들의 삶은 반드시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다. 4)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데 가장 먼저 찾아오는 심판은 하나님의 생명 역사가 백성의 삶에서 걷히는 것이다. 5)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6)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들이 넘친다. 그동안 진행돼 오던 한국교회의 침체가 코로나로 인해서 더욱 가속화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산다는 말이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대세를 이루고 있다. 문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 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이다. 적지 않은 성도들과 목회자들은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을 예배 참석, 기도 등 보다 철저한 종교
산부인과 의사나 피부비뇨기과 의사는 성을 의학적으로 다룬다. 주로 예방과 치료를 담당한다. 솔직히 그들의 의료행위는 의료일 뿐이다. 성의 윤리적이며 영적인 영역에는 그들은 전문의는 아니다. 가령 의사들은 동성애는 질병을 일으킨다는 의학적 입장에서 금해야 하겠으나 성경은 하나님이 금하신 조항이기 때문에 금해야 하는 것과 같다. “남자가 짐승과 교합하면 반드시 죽이고 너희는 그 짐승도 죽일 것이며” (레 20:15) 또 한 부류의 사람은 의료행위보 다는 성교육차원에서 전문인 활동을 한다. 40대 초반인듯한 여강사가 성교 육에 관한 강의 내용은 들은 바 있는데 주로 동성애의 문제점과 기타 성에 관해 이런저런 학설과 스크린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한 시간 듣자 하니 성교육은 젊은이보다는 늙은이가 하는 게 적절하다고 느꼈다. 또 전문의보다는 생활경험자인 시니어가 더 실감나는 현장 성교육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더 나아가서 시니어 중에서도 크리스천 시니어가 최상의 강사라고 믿는다. 성(性)은 요람에서 무덤에 갈 때까지 사람에게 붙어있는 귀중한 생활선물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크리스천 시니어의 성교육의 출발은 이런 전제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리 아이아코카(Lee Iacocca)는 한때 미국 자동차 산업의 전설적인 인물이 었다. 도산 위기라는 재앙의 문턱에 있던 크리아슬러를 극적으로 회생시킨 20세기 경제의 신기원을 이루어냈던 최고경영자, 재임기간 중반 즈음에는 크라이슬러의 시장을 2.9배까지 넓혔다. 그러나 그때부터 아이아코카는 자신을 미국 비즈니스 역사상 가장 유명한 CEO로 만드는 일에만 심취해 80여 개의 광고에서 자신을 스타로 부각시키며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속에 산다. 지나칠 정도의 자기 선전으로 아이아코카의 개인적인 주가는 올랐지만, 크라이슬러의 주가는 급격히 추락해 결국 경영진들의 압력으로 CEO 자리에서 물러나고, 회사는 독일의 다임러 벤츠에 팔리고 말았다. 자기를 영웅화시키려다가 거인의 인생을 사는 데 실패한 것이다. 반면에 본문에는 자신의 업적이나 공로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겸손하게 살아 진짜 거인이 된 왕이 될 남자 다윗의 승승장구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랑받고 승승장구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은 화려한 영웅으로 등장하며 큰 사랑을 받지만 사울은 계속 추락하며 외로운 외골수 인생이 된다. 본문에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왕이 될 남자와 정상에서 밀려나고 있
전염병은 예수님께서 이미 누가복음 21장 11절에 종말 때 일어날 징조 중의 하나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도 그렇겠지만 저의 생애에도 이런 전염병은 난생 처음 경험하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니 전세계의 인구가 긴장해야 하며, 심지어는 태어나는 아이들까지 모두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하는 삶을 보면 보통 안쓰럽지 않습니다. 코로나19가 발병했을 때 정부 시책으로 처음에는 교회를 향하여 예배 금지 명령이 내려졌고, 그 후엔 비대면 예배를 지시하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실태입니다. 이로 인해 교계에서는 크게 두 갈래 양상으로 나뉘는 것을 보게 됐는데, 하나는 정부 시책에 순응해 비대면 예배로 드리는 노선과 또 다른 하나는 평상시처럼 대면 예배를 고수하는 노선입니다. 목회자들은 물론 성도들조차도 혼선을 빚으며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작년에 대통령이 교계 지도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서 예배 방식을 일괄적으로 비대면 방식으로 전환해 달라고 부탁한 자리에서 한교총 대표 목사님은 대통령 면전에서 “종교 단체를 영업장이나 사업장으로 취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발언을 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 후 정부에서는 대면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
회자되는 유머가 있다. 하루는 할머니 한 분이 골목길을 걷고 있었는데, 뒤에서 따라오던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같이 가 처녀, 같이 가 처녀!” 할머니는 속으로 “아니 내가 아직도 처녀처럼 보이나, 내 뒷모습이 그렇게 예쁜가.” 하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누군지 보고 싶었지만 남자가 실망할까 봐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집으로 왔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께서 싱글벙글하자 손자가 물었다. “할머니.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었 어요?” “아까 집에 오는데 어떤 남자가 나한테 처녀라고 그러더라.” 손자는 믿기지 않는듯 “잘못 들은 건 아니고요?” 그러자 할머니는 정색을 하며 “아니야. 내가 분명히 들었어. ‘같이 가 처녀’라고 했어.” “그게 누군데요?” “그건 모르지, 하여튼 남자들은 예쁜 건 알아 가지고?” “그럼 내일 보청기 끼고 다시 잘 들어보세요.” 이튿날 할머니는 보청기를 끼고 집을 나섰다. 하루 종일 돌아 다녀 봐도 그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일 다시 나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에 오는데 뒤에서 어제 들었던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갈치가 천원, 갈치가 천원!” 잠시 착각하고 사는 것도 행복할 것 같다. 마을에서 공부하시는 문해학교 학생
미국에서 1년 동안 가족과 함께 지내다 귀국한 딸에게 물어본 게 있다. “한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땠어? 힘든 부분이 많았 겠지?” 그런데 딸은 “아니예요, 거기서 제일 기쁘고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했어요. 부담이 없었고, 눌렸던 압박감에서 해방되어 지내니 아주 좋았어요”라고 매우 충격적인 대답을 해줬다. 이 일로 그동안 딸이 목회자 자녀로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교회를 시작하면서부터 우리 가족은 힘든 시기를 보냈다. 상가 건물 한 층을 임대해 예배 실과 사택으로 사용하다보니 자녀들은 어린 시절을 좁은 공간에 갇혀서 답답하고 힘들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나와 아내가 전도 활동을 하기 위해서 외출한 후엔 가끔 정신 이상자나 걸인이 찾아오면 문을 잠그고 불안감에 떨며 지내기도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목회자 자녀들이 받기 쉬운 스트레스나 고충도 겪었으리라. 지미 도드와 래리 맥누선 공저인 “목회자도 사람이다”란 책에는 이런 고충들을 진솔하게 써놓았다. 곧, 목회자는 교인들을 상사와 같이 섬기는데, 그상사들은 목회자 자녀들까지 감시와 단속을 한다는 것이다. 자녀가 어려도 예의 바르며 친절하기를 원한다. 믿음 좋은 모범적인 자녀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