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도 몇 일 안 남기고 있다. 한해가 지나가는 마지막 날에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시작할 때 가졌던 아름다운 희망과 꿈과 기대가 성취된 것보다는 미완성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하며 새로운 희망과 꿈과 기대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회개를 통해 대청소를 해야만 한다. 한해를 살아오면서 부정적인 생각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 왔었다. 언제나 삶의 모자라는 것과 어두운 면을 찾아서 강조하며 살아온 그리스도인들이 아닌가? 부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모든 면에서 부정적인 꼬투리를 잡는다. 진실로 마음이 밝고 맑고 환하고 긍정적이 되지 못하고 무언지 모르게 언제나 어두운 점을 찾고 모자라는 점을 찾고 못된 점을 찾는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또한 한 해 동안 너무나 소극적으로 살아왔다. 발전과 향상을 저항하는 삶이 소극적이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사람은 모험적이고, 발전적이며,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소극적인 사람은 언제나 나 홀로 전통적이며 안정적이고 보수적으로 살아간다. 그러기 때문에 발전하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 안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
새벽송의 추억이 그립다. 크리스마스 전날이 되면 밤이 맞도록 집집마다 다니면서 크리스마스 캐롤을 불렀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선율은 또 얼마나 감미로웠는지…. 참 아련하고 따뜻한 추억이다. 그러나 이제는 잊어야만 하는 추억이 되어버렸다. 가슴이 아프다. 크리스마스의 진실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축제(?)를 즐길 수가 없게 됐기 때문이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께서 탄생한 날로 달력에 지정된 날이다. 그러나 이 날이 정말 그분께서 탄생한 날인가? 또 오늘날 교회에서 행하는 크리스마스 관습들(트리 장식, 산타클로스, 캐롤송, 선물교환 등)은 기독교의 기원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고대 이교주의(Cult)의 산물인가?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날짜에 대한 진실은 다음 번에 다루려고 한다. 먼저 ‘크리스마스’라는 단어의 어원을 찾아보면,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ass)가 합쳐진 것이다. 미사란 라틴어 “Massa”에서 나온 말로서 로마카톨릭의 그리스도의 미사(Christ`s Mass)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특별한 미사이다. 미사는 예배가 아니라 제사이다. 크리스마스는 초기
너만도 아니고 나만도 아니다. 까닭 없는 핀잔, 성급한 충돌 그러다가 후회하는 일들, 더러는 드물게, 더러는 너무 자주 겪는 그러한 일들이 많이 있다.살아 있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 또는 감정의 동물이니 당연하지 않느냐는 등 변명해 버리는 것으로 끝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심지어 그것을 하나의 후회로 넘겨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그러나 그것이 어디 그런가? 핀잔이나 충돌은 예리한 감정의 자극적인 표현으로써, 이에 접한 사람은 심한 상처를 입는다. 감정의 불균형은 인격의 위험 신호다. 감정이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지면 판단이 흐려진다. 그런 가운데서는 인간관계의 우정이 오해가 되고 선배의 충고가 지겨워진다. 주위가 살벌해지고 오던 사람도 돌아가고 아는 사람도 멀어진다. 그런 때의 접촉은 충돌이며 충돌은 인격을 깎아 버린다. 체면을 사정없이 할퀴어 버린다. 경제적인 적신호에 앞서 인격적인 적신호가 오고, 인격적인 적신호에 앞서 감정적인 불균형이 온다. 이것은 알고 만 지나갈 문제가 아니다. 해결하고 지나가야 할 일이다. 또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감정의 불균형은 여러 가지 피로와 스트레스에서 올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투정이
2013년 한해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오게 하심을 감사드리며 목회를 하면서 목회자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늘 섬기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있기에 목회를 계획을 세우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와 절기가 되면 긴장을 하게 되고 절기에 맞춰 기도하면서 많은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하게 됩니다. 목회자가 기도하며 영적으로도 준비해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송구영신예배는 교회의 절기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초기 기독교가 들어올 시기부터 지켜오던 전통적인 예배의 신앙 유산 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1887년 12월 31일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사역하던 서울의 정동교회(새문안교회)와 베델교회(정동감리교회)가 연합하여 우리나라에서 드린 최초의 송구영신예배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언약예배”라고 했고 또한 “언약 갱신 예배”라고 하다가 “야성회”라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지나간 1년을 되돌아다 보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새로운 해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세우는 순서가 있었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이 예배가 드려지던 역사를 볼 때 역사상 처음으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던 그 현장은 은혜와 감격이 충만한 예배였을 것입니다. 그 예배는 오늘까지 약 130여년 동안
북한의 로열패밀리이자 2인자였던 장성택을 1심 재판 후 바로 기관총으로 처형한 북한이 우리나라를 ‘최악의 인권불모지’라고 부각시켜 실소를 자아내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14일 ‘남조선 인터넷신문, 남조선은 최악의 인권불모지라고 주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고 한다. 조선중앙통신은 “‘민중의 소리’를 인용, 남조선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억제당하고 탄압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하면서 이것은 심각한 인권침해 행위라고 규탄했다”고 전했다. 또한 “권력이 앞장서서 국민의 의사에 대해 위협하며 폭압소동을 벌이는 것이야말로 세계인권선언에 위반되는 행위라고 단죄했다”고 전했다. 실제 ‘민중의 소리’는 11일자 사설에서 양승조, 장하나 의원의 발언과 관련한 청와대의 반응과 관련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표현 자체를 제재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검열을 하도록 만든다. ‘위축효과’이다. 위축효과 영향으로 부당한 대우나 탄압이 두려워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인권침해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지난 12일 장성택을 국가안보위부 특별군사배판소의 1심 재판에서 국가전복음모죄로 사형 선고한 뒤 사형을 집행해 전 세계 문명국가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 바 있다. 이
일본의 유명한 마쓰시타 전기 주식회사를 창립한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지만 쌍갈래 전구 소켓을 발명해서 성공한 인물이다. 그가 처음으로 쌍갈래 전구소켓을 특허 냈을 때 주문이 쇄도해 종업원들은 밤샘 작업을 하며 일해야 했다. 하루는 생산에 쫓겨 마쓰시타가 거래처에 가야 할 일이 생겨 종업원들에게 간곡히 부탁을 했다. “내일 납품해야 할 물량은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끝내야 합니다. 여러분들 조금만 참고 이해 주십시오.” 그러나 마쓰시타가 총총히 사라지자 생산장의 기계 소리가 하나 둘씩 멈추기 시작했다. “사장님도 안 계신데 천천히 합시다. 일은 내일 해도 늦지 않는다구.” 모두들 사장의 간곡한 부탁은 언제였느냐는 듯 밖으로 나가 야구를 하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기계를 돌리던 한 종업원도 일을 단념하고 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거래처에 나갔던 마쓰시타가 숨을 헐떡이며 공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이내 안색이 변했다. “다들 어디 간 거야? 일은 다 끝났나?” 종업원은 재수 없이 걸렸다는 마음으로 시큰둥하게 사실을 말씀드렸다. “내가 그렇게 부탁했는데 내일 일을 하겠다고? 게다가 너마저 나가서 놀겠다는 거야?” 순간 종업원은
2002년 미국 의회가 전화기의 최초 발견자를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에서 안토니오 뮤치로 수정 발표했지만 일반적으로는 1876년 벨이 최초 전화 발명자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시작된 전화의 역사는 여러 과정을 거쳐 1980년 대 휴대폰 시대를 연다. 집에서 거리로, 고정에서 이동으로 변신을 한 것이다. 처음의 휴대폰은 크기나 편리성에서 여러 가지로 불편했지만 점점 진화해 1993년 IBM의 흑백스마트폰을 거쳐 2008년 애플의 2G를 3G로 업그레이드 된 아이폰과 2010년 안드로이드를 기반으로 한 삼성의 갤럭시S가 출시되면서 인터넷 웹서핑과 각종 검색, SNS 등 휴대폰의 활용 영역이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대됐다.최근에는 지문인식과 안구인식의 기능을 하는 능력까지 발휘하며 세상을 향해 그 거만한 혀를 날름거린다. 이렇게 세계가 스마트폰의 지배를 기꺼이 수용하는 가운데 우리나라는 인터넷과 함께 휴대폰 보급률 및 교체율에 있어 당당히 세계 1위를 고수하며 달리고 있다. 이는 거의 종속 및 지배수준이다. 이제 휴대폰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우리 생활의 절대필수품이 되었다.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마음대로 돌려대듯이 휴대폰은 단순한 통화기능에서부터 대부분의 분야에
“엄마, 보고 싶어요. 그러나 미안해하지 마세요.그때는 몰랐어요. 왜 어머니는 없어지고 나만 거리에 남았는지.그때는 미처 몰랐어요. 왜 인천 고아원에서 혼자 별을 바라봐야 했는지.정말 몰랐어요 그때는. 왜 비행기를 타고 밤낮이 바뀐 세상에 왔는지.하지만 알게 됐죠. 내 눈빛이 양부모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살아가면서 알게 됐죠.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속이 복잡했던 이유를.아이를 차디찬 길거리에 버린 어머니. 버려진 아이를 주체 못해 나라 밖으로 보낸 조국.그런 아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어머니의 나라.허나 알다가도 모를 일, 어찌 된 조화일까요.내 입에서 날린 화살은, 머리에서 쏘아 댄 독한 화살은. 어머니의 나라에 꽂히기도 전에 꽃이 돼 떨어지고 말았습니다.어머니, 자식을 버렸다고 부끄러워 마세요.저도 딸 둘을 둔 어머니가 된 지금 미움은 사라지고 희망의 꽃만 활짝 피어 있습니다.여섯 살 때 고국을 떠났던 순이. 아무것도 모르고 비행기에 올랐던 순이.독화살을 날리면서 그리움에 사무치던 순이가 27년 만에 사회복지사가 되어 돌아왔어요.어머니, 꼭 뵙고 싶습니다”이 편지에서 입양아는 혼자 별을 바라봐야 했는지(외로움)라고 하고, 자신도 부모님을 충분히 원망했
사람들은 일상의 대화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의사소통의 달인이 되기 위해서는 평소 자신의 대화 방식에서 비롯된 긍정적인 결과를 좀 더 진지하게 살펴봐야 한다. 그러면 올바른 사고방식을 형성할 수 있으며, 이는 효과적인 대화 습관으로 이어져 장차 모든 인간관계를 자연스럽게 개선할 수 있다. 가치 있는 목표에 도달하려는 사람에게는 현재의 위치에서 원하는 미래의 위치로 인도해 줄 믿음직한 안내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하다. 무슨 일을 하든지 방향을 잃고 정처 없이 헤매는 것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다. 잘못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어떤 일에서든지 성공하고 싶다면 우선 내 인생의 네비게이션인 생각부터 조정해야 한다.사고방식은 습관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단체나 교회의 진행방향에 가장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고방식은 또 풍부한 경험에서 나온다. 주로 개인적 경험을 통해 형성되지만 역할 모델과 동료 집단, 공식, 비공식 교육 등의 영향도 받을 수 있다. 어느 시대나 위대한 리더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신임이 되는 사람이 그 시대의 리더로 인정을 받아 추대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올바른 사고방식의 변화를 통해
미혼모의 문제는 어제 오늘 시작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사회가 산업화되고 서구화 되면서 점점 더 심각하게 되어가는 문제가 미혼여성들의 혼전 임신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아기들이다. 유교적 질서를 사회 규범으로 중시해온 한국 사회는 미혼모와 그 아기들을 죄인시하고 냉대하였으며 이와 같은 사회적 태도는 아직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한국의 경우 미혼모의 숫자는 1980년대 중반까지 계속 증가했으나 1980년도 후반부터는 점차 감소했다. 보사부 통계에 의하면 1985년에는 4세 미만의 기아가 11,600명이었던 것이 1994년도에는 미혼모의 친권을 포기한 아동이 1,781명, 그리고 기아가 1,386명, 전체 3,100여명으로 감소했다.이와 같은 통계만 살펴보면 그동안 국가에서 벌려왔던 가족계획정책이나 청소년을 위한 성교육이 성공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사업은 미혼모에게서 태어나는 아기의 절대적인 숫자를 줄이는 데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미혼여성의 임신율을 줄이거나 그들의 성에 대한 지식이나 가치관에 영향을 주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는 기아나 미혼모의 아동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에 비하여 미혼여성의 인공유산율이 높아지고 있고 또한
영국에서는 넬슨제독의 기념탑보다 셰익스피어의 고가(古家)를 더 사랑한다. 독일에는 괴테와 뮐러의 동상 그리고 베토벤의 데스마스크가 신격화되었다. 파리의 중심은 루브르 박물관이며, 곳곳에 문화의 유적들이 있다.우리의 정서와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인 애국자나 영웅들이다. 한 줄의 시를 쓰는 것보다 한 뼘의 땅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리는 투쟁을 한다. 한 가락의 노래를 창작하는 것보다 하루를 우환없이 지내야만 하는 것이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이다.시가(詩歌)에서 나타난 “임”은 애인이 아니라, “임금”이며 “나라”다. 연가(戀歌)는 천한 기생이나 읊는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번 고쳐 죽어....”의 그 애국 충정이 더 절박했고 귀중한 것으로 믿어왔다. 삶의 대한 충정보다는 죽음의 대한 찬가를 부르며 살아왔다. 같은 충신이라 할지라도 “생육신”보다는 “사육신” 쪽이 더 훌륭한 것으로 여기며 그렇게 믿어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산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며, 죽은 자 만이 영웅이라는 편견도 있다.이준 열사가 만약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병사하지 않고 살아 돌아 왔더라면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인의 애국은
2013년도 카렌다가 이제 달랑 한 장을 남기고 있다. 사상가 V.영은 “자연은 회전할 때 아름답고 인간은 전진할 때 아름답다”고 했고. 단테는 “자연은 신의 예술”. 임마누엘 칸트는 “우주의 질서는 신의 존재를 입증한다”고 했다. 창조주의 절대 주권적 섭리 앞에 유한한 인간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싶지만 낙엽이 지고 깊어지는 겨울의 문턱에 서니 자꾸 어깨가 움츠러든다. 텔레비전 매체에서는 올 겨울은 무척 추울 것이라고 하는 기상청 예보를 들고 겨울 상품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는 홈쇼핑 방송이 한창이다. 아직 난방기를 가동하지 않는 내 서재에 들어와 컴퓨터를 여는 오늘 아침 따라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큰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기세이다. 수석채집이 취미이신 교우 한분이 멀리 가서 구해온 것이라면서 까맣게 생긴 돌덩이 하나를 받침대와 함께 가져오셨다. 너무 너무 아름다운 것이어서 담임목사인 나에게 선물하고 싶어서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그저 조금 특이한 돌덩이로 보일 뿐인데 그분은 연신 감탄을 하면서 너무 너무 아름답지 않느냐는 것이다. 나는 수석에는 문외한이라서 별 느낌이 오지 않는다고 했더니 그분은 더욱 열심히
교회 부흥과 교회 성장은 다르다. 부흥(revival)은 새롭게 되는 것이다. 영혼이 구원받고 구원받은 성도가 새롭게 회복되는 것이다. 성장(growth)은 주로 신자 수가 늘어나는 것이다. 교회 성장에 초점을 맞춘 많은 프로그램들이 있다. 그 중에서 단연코 알파 코스와 G12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과연 알파 코스는 성경적인가? 성경에서 금(Gold)은 우상을 만들어 섬길 때 쓰며 인간을 타락시키는 물질로 나와 있다. 또성경에서 금은 오직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의 성구들을 만들고 예수께 경배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기 위하여 드려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그런데 요즈음 알파코스나 G12같은 은사주의 집회를 하는 현장에서는 금을 성령님(?)께서 금이빨과 금가루로 주고 있다고 한다.왜성령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이율배반적으로 만들면서까지 이런 기적(?)을 베푸시는 것일까? 이러한 현상들을 따라가고 있는 알파코스와 G12는 무슨 원리에 기초한 프로그램일까?알파코스(Alpha Course)는 1990년, 영국 런던의 성공회 소속 ‘성삼위일체 브럼턴성당’에서 니키 검블(Nicky Gumbel) 신부에 의해 시작됐다. 브럼턴성당은 은사주의적 성공회 교회이다. 알파코스는 전
요즘 종교를 빙자한 단체들이 국책사업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거나 선량한 주민들을 선동해 국가발전에 역행을 자행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다.북한의 대물림을 통한 독재체제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주민들의 인권문제가 심각한데도 한마디 말을 못하고 있는 위장된 친북단체들의 종교지도자로 가장한 위선자들은 정부의 정책과 국가안보 관련 문제까지 사사건건 간섭하는 일부 속칭 ‘이념 신부’들의 모습은 한마디로 신앙심이나 영성에 기초된 사제라기보다는 ‘마녀사냥’식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헐뜯고 국가안보 파괴와 국가정책 파괴의 올인하는 사제복 뒤에 숨은 이상한 성직자들처럼 보여 이를 보는 대한민국의 많은 국민들은 매우 경악스럽고 분노할 수밖에 없다.자기들의 입에 맞는 정권이 들어서자 정의구현사제단 일부가 주동이 되어 적극적으로 종북 반미의 반역적 현실적인 정치에 뛰어 들었고 그들의 본분인 영성 어린 성직수행을 걷어차 버리고 성직자의 옷 뒤에 숨어 국가 중요 위원회 위원이나 학교 이사장 등의 숱한 감투들을 쓰고 권력의 비호아래 권력을 즐기며, 인생을 즐기는 듯한 성직자답지 못한 모습도 보여줘 국민들과 신자들을 절망시켰던 적이 바로 엊그제 같다. 작금에는 ‘평화의 섬 천주교 연대’라는 반정부 단
통랑한 햇볕 때문인지, 점점 끝자락을 보여 가는 달력 때문인지 늦가을의 햇볕은 많은 표정을 담고 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벗이 있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으나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벗이 있다. 이 두 부류의 벗에서 우정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사랑만큼이나 자주 쓰이는 말이 친구이다. 사실은 아는 사람에 불과한데 단지 오랜 세월이 붙어서 친구라는 말을 할 때도 많은데, 별것 아닌 차이로 보이지만 어떤 사건이 계기가 돼서 중대한 진실을 깨닫고 나면 금방 쓸쓸해지곤 한다. 親舊란 말의 사전적 정의는 ‘오래도록 친하게 사귀어 온 사람’으로 사실은 친구인줄 알았는데 그냥 오래 알고 지낸 사람에 불과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깨달을 때가 있다. 조선 정조 시대에 선비 박제가(朴齊家)는 우정이 결코 오랜 세월에 있다고 하지 않았다. 장맛과 친구는 오래 묵을수록 좋다는 속담이 꼭 옳지만은 않다는 거다. 그가 생각했던 진정한 우정이란 어떤 모습이었을까? 벗을 사귐에 마음이 맞지 않으면 무슨 말을 나눠도 말을 꺼내지 않은 것과 똑같은 법이다. 벗을 사귐에 간격이 없다면 비록 서로가 묵묵히 있다하여도 좋은 것이다. 옛말에 머리가 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