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약의 성 이해 신약에 나타난 성 윤리의 가장 뚜렷한 점은 결혼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하며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성 문제에 관해서 직접 언급한 일은 없지만 이혼 문제와 관련해서 이 점을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가나 잔치에서 포도주 기적을 베푸셨다는 이야기는 그가 결혼을 축하할만한 경사로 보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가 보여 주신 성 윤리는 순결이다. 그는 간음한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고(요8:1~11), 성이 선하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마19:12). 그러나 여성에게 음욕을 품으면 이미 마음에 간음한 것(마5:28)이라고 한 해석은 어디까지나 성적 순결성을 지켜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을 육체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전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전6:9~10). 또한 성을 창조 본래의 선한 것으로 파악하면서도 외설행위 등에 대해 죄악시하고 경고했다.(롬1:24, 고후12:21, 갈5:19, 골3:5). 한편 결혼하는 것은 죄가 아니며 가능한 한 결혼하지 않고 천국 사업을 완성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고전7:24~6). 그러나 바울은 절제할 수 없는 자를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5~6) 신앙생활에 있어서 믿음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 듯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히11:6), 세상을 이기는 이김도(요일5:4) 그리고 예수를 믿어 죄 사함 받은 후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법 또한 믿음으로 살아야 함(히10:38)을 하나님은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믿음을 예수님께선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해 말씀하셨기에 겨자씨에 대한 연구는 결코 가볍게 넘겨서는 안되겠습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막4:31)이지만 예수님께서 겨자씨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했던 주된 내용은 “생명” 때문입니다. 즉, 믿음 안에는 생명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일전에 저는 옥수수, 완두콩, 애호박, 오이, 상추, 고추, 깨, 당근 등 여러 종류의 씨를 화분과 밭에 심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대추 토마토(토마토 모양이 대추처럼 생겼음) 씨앗을 처음 봤을 땐 너무나도 작고, 빈약한 나머지 제 마음에 이런
마음과 생각, 말과 행동은 인격의 사대요소이므로 우리는 십자가로 심사언행(心思言行)을 삼가야 한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여기서 사람은 무엇보다 첫째로 마음을 지켜야 한다. 사람은 마음의 바탕에서 생각이 떠오르며 생각에서 말이 나오고 말한 대로 행동하게 되므로 “심사언행”이라 본다. 하와가 마귀의 유혹으로 금단의 열매 선악과를 쳐다보니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마음에 먹고 싶은 생각대로 따먹고 아담도 함께 범죄케 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22:37~38)라고 첫 번째 계명을 말씀하셨고, 바울사도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히3:8)라고 권면했다. 다윗 왕은 궁궐에서 건너편에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마음에 음심이 생겨 우리아 대장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아를 최전방에 보내어 죽게 했으니 모세의 십계명의 5, 6계명 곧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인륜의 첫 두 계명
요사이 유행가 중 “저 강은 알고 있다.”라는 노래가 있다. 어쩌면 그 가사가 80대 시니어들의 10대 이야기를 말 해 주는 것 같았다. “비오는 낙동강에 저녁노을 짙어지면 흘려보낸 내 청춘이 눈물 속에 떠오른다. 한 많은 한평생에 눈보라를 안고서 모질게 살아가는 이내 심정을 저 강은 알고 있다. 밤안개 깊어가고 인적 노을 사라지면 흘러가는 한세상이 꿈길처럼 애달프다. 오늘도 달래보는 상처뿐인 이 가슴 피 맺힌 그 사연을 설움 사연을 저 강은 알고 있다.” 나의 10대 시절은 내가 알고 있다. 일제 강점기 1937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것은 조국을 마다 해서가 아니라 아버님이 노무자로 그 곳에 가셨기 때문에 출생지가 일본이 됐다. 나는 해방 직전 어머니랑 누님 그리고 동생이랑 귀국했고 아버님은 그 곳에 계시다가 해방 후 귀국하셨다. 강점기 초등학교 1학년 때 8월 15일 조국은 해방됐고, 6학년에 한국전쟁이 터졌으며, 중학교 3학년은 전쟁 중 선배 형님들의 피 값으로 살아남았고, 휴전직후 군 입대 해보니 무슨 군대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지 않아서 동상이 걸리고 굶주린 배를 안고 군 생활을 보냈다. 낙동강 전투에서 낙동강은 핏물 강이 됐다. 대구 직전
내 인생에 폭풍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가끔 십자가를 지게 해주셨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를 사랑해준 사람에게 감사하고 나를 공격해준 사람에게 고맙습니다. 그래서 나를 더 너그러운 사람으로 만들어갔습니다. 때로 가시를 주셔서 잠든 영혼을 깨워 주셨고 한숨과 눈물도 주셨지만 그것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수와 실패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겸손을 배웠습니다. 날마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감사를 발견하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무엇이 생겨서가 아니라 무엇이 나에게 발생하지 않은 것이 감사가 아닌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과 편리한 세상에 태어난 것과 세어봐도 세어봐도 감사 할 일이 너무 많지 않은가? 남과 비교하며 살지 말고 질투의 용광로 속에 들어가지 말게하시고, 돈을 목적 삼지 않게 하시고 으뜸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게 하시고…. 사랑의 속삭임을 입술에 주고, 감사의 노래를 내 심장에 주소서!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신 종려주일에 하나님께 예배자로 나아가 영광 돌리며, 고난주간에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하여 기도드리는 승리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앞에서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러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 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터키의 시인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과거에 퓰리처상을 받았더라도, 그의 가치는 그가 가장 마지막에 쓴 기사가 말합니다. 물레방아는 과거의 물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물로 돌아갑니다. 시인 황동규는 2007년 7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를 아는 사람들이 ‘꽃의 고요’가 최고라고 하더군요. 저는 아니라고 했어요. 다음에 나올 시집이 최고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쓴 시는 관심이 없어요, 앞으로 쓸 시가 문제지”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피터 드러커도 자신의 최고의 저서는 지금 쓰고 있는 책이요, 앞으로 쓸 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시대 좋은 시인 이성복 교수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인을 포함한 여러 ‘무당’류의 예술가들에게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는 식의 종신 호칭은 허락되지 않는다. 시인은 그가 시
초등학교 4학년 때 외사촌이 넘겨준 예수의 만화책에서 “예수는 병자치유, 귀신축사, 죽은 자를 살렸고, 물로 포도주, 떡 몇 개로 4000명, 5000명을 먹였고, 바다 위로 걸었고, 말씀 한마디로 바다의 풍랑을 잔잔하게 했고, 심지어 바다 속의 물고기 입속에 동전이 들어 있는 것까지 아셨는데, 십자가에 달려 고통 중에 죽는 모습이 너무 애처러워 만화책 마지막 부활의 사실은 아예 믿지도 않고 던져버린 기억이 떠오른다.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 핑계로 교회에 안 나간 나는 한국전란 중 1951년 8월 3일에 교회에 나간 것은 아버지가 나의 입학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 결과 17개 초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의 시험에 울릉중학교에 2등으로 입학해 B반 학급의 급장이 된 것이 네가 잘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기도 응답이라고 호되게 꾸짖는 바람에 마지못해 저동교회에 나간 이후 대구 영남고등학교 졸업 이후까지도 부활을 안 믿었는데, 한남대학교에 입학하자 설교대회에서 우재돈 선배가 1등하고 이사야 53장으로 예수의 십자가 주제로 눈물고인 설교로 나는 2등을 하면서 부활 신앙이 그때서야 생겼다. 우리 인생은 고독을 먹고, 실패를 마시며, 슬픔과 두려움 속에 살기에 우리의 삶이 서럽
그 사람의 마지막 떠나는 장례식에 조문객이 모였다. 땅에서는 “이래 살다 갈 것”하고 하늘에서는 “그래 살다 올 것”하는 소리가 내 귀에는 선명하게 들린다. 땅이나 하늘에서 들려오는 이런 소리에는 그 사람의 일생이 유감스러웠다는 것을 한탄조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째서 그런가? “이래 살다 갈 것”하는 유감스러운 마지막 작별인사는 어이된 셈인가? 어째서 이래 살다간 것이 어떻다는 것인가? 첫째로 한 평생을 찢어지게 가난에 시달리다가 떠나가는 고인의 뒷모습이 한없이 처량하다는 것이다. 바가지 고생만 하다가 가누나. 둘째로 이래 살다 갈 것 쯧쯧하는 이유는 만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생전에 남에게 좀 베풀고 갈 것이지 어쩌면 그렇게도 인색했더냐는 것이다. 호주머니 풀지 않고 있다가 어디 가서 풀려나. 셋째로 자기에게도 좀 여유 있게 베풀고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너무도 자기에게 인색했던 그의 삶이 가련하다는 것이다. 외국 여행 한번 못하고 입맛 따라 밥 한 그릇 사먹기를 벌벌 떨었으니 말이다. 마지막 유감천만스러운 것은 하나님을 등지고 떠난 그의 무신론적 생활이다. 그토록 영원 구원 전도를 했건만 고개 짓더니만 그냥 가는구나. 차차 믿는다고 미루더니만 영원
한번 의인은 영원한 의인으로 살 수 없고 한번 죄인이 영원한 죄인으로 살다가 죽는 것도 아닙니다. 의인도 돌아서서 가증스런 일을 범할 수 있고 죄인도 돌이켜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죄인도 좌절해서는 안되고 어떤 의인도 선줄로 알고 교만하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어제의 신앙을 자랑하지 말고 오늘 주님과 깊은 교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돌아서기를 기다리십니다. 악을 향한 분노는 지독한 사랑에 대한 배신에서 나온 것이지 차갑고 냉정한 법 집행이 아닙니다. 이 마음을 우리도 품는다면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인도 주님을 떠나면 죽음에 이르렀고, 죄인도 돌이키면 생명에 이르렀습니다. 행한대로 갚은 것을 불공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탓하기 전에 나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된 자기 백성들에게 조상을 탓하여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한사람도 죄 때문에 죽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죄악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고 하십니다. 심판도 경고도 모두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호소였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낙타의 등뼈를 부러뜨리는 것은 마지막 지푸라기 하나의 힘입니다. 물이 마침내 끓어오르게 만드는 것은 마지막 1°C 의 뜨거움입니다. ‘천 일의 기도’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마지막 하루의 간절함입니다.” 정균승 저(著) ‘내가 나로 살아갈 이유’(티핑포인트, 121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물은 99도까지도 꿈적하지 않다가 100도가 돼서야 끓기 시작합니다. 엔진은 증기 게이지가 212도를 가리키기 전에는 1인치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물질의 상태를 바꾸는 온도. 물 100도, 증기 212도. 이를 ‘임계점(Critical Point)’이라 합니다. 임계점에 다다르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푸라기 하나로 코끼리를 쓰러 뜨리는 법”이란 유머가 있습니다. 코끼리를 쓰러뜨리겠다면서 지푸라기 하나를 코끼리 등에 올린다면, 코끼리는 기가 막혀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쌓아 가다 보면 코끼리가 더이상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옵니다. 바로 그 순간, 지푸라기 하나를 더 얹어서 임계점에 다다르면 코끼리는 쓰러지게 됩니다. 점들이 모여 임계점을 지나면 선을 이루고, 선들이 임계점을 지나면 면을 이룹니다. 그 면이 어느 날 임계점을 통과하면 입체 예술품이 됩니다. 꾸준히
동내에서도 소문난 가정이 있다. 몇 십 년을 싸우며 칼부림도 나고 작은 마을 사람들이 다 듣도록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드디어 몇 달 전부터는 변호사에게도 여러 번 갔고 끝내는 법원 민원실까지 가서 서류를 들고 나왔다. 그런데 연세가 칠십을 넘기신 분들이시다. 진도에 내려와 전도 대상자로 지목하고 기도하던 사람들이었다. 선교지와 같은 마을에서 전도의 문을 열기 위해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는 분들을 지목하고 기도했던 것이다. 지난달부터 더 심해서 이제 끝장이라는 상황에 우리 부부가 알게 되고 늦은 밤까지 찾아가기도 하고 찾아오기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땐 서로 숨기고 각자 찾아와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힘들면 끝내라고 말한다며 내일은 결정하겠다고까지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를 이곳에 보내신 하나님을 전해주고 싶다며 한번 도전해 보자고 울기도 하고 애걸도 했다. 성경의 하나님을 소개하며 시간이 흘러 두 분 모두 나중 더 힘이 빠졌을 때를 생각하고 이겨 보자고 당부를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고비를 넘기고 나서 지금은 만날 때마다 “어떠시냐?”고 넌지시 물으면 미소를 지으시며 “좋아요.” 대답을 듣는
청년 때 섬기는 교회의 부흥회에 열심히 참여한 적이 있었다. 집회 마지막 순서로 강사 목사님이 성도들 모두에게 축복 기도를 해줬다. 그 때 나에겐 십자가가 여러 성도들과는 다르다면서 주님께 더욱 충성하라는 권면을 해줬다. 예수님께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셨는데 그 일로 내가 져야 십자가에 대한 관심이나 궁금함을 더 많이 갖게 됐다. 어떤 목사님이 미국 유학 시절에 YMCA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여름캠프의 촌극을 참관하고는 자기 설교문에 기록해놓은 것을 읽어 봤다. 연극 내용은 무대 위에 수십 개의 십자가가 놓여있고 청소년들이 채색옷을 입고 나와서 원하는 것을 하나씩 고르는 일이었다. 대부분 작거나 가벼운 것, 화려하거나 예쁜 것, 곧 십자가 목걸이, 십자가가 새겨진 반지, 십자가로 장식된 모자 같은 것을 선호하여 골랐다. 그런 반면에 거기에 있는 크고 무겁고 흉물스런 나무 십자가는 아무도 택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으로 분장한 한 청년이 나와서 그걸 어깨에 메더라는 것이었다. 그 촌극에 대한 글을 읽고 생각해본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편안하고 안일한 신앙생활만 추구하다보니 저마
상담을 하다 보면 상처를 받은 자들의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듣게 된다. 어떤 때는 그 아픔을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깊고 쓰린 상처들이다. 어릴 때, 잘 모를 때, 대항할 힘이 없을 때 일어난 일들이 태반이다. 그 당시는 몰랐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새록새록 더 아프고 힘들어지는 일들도 있다. 그래서 자신이 받은 상처의 이야기를 처음 하기 시작하면 한동안은 정신적 문제들이 오히려 심해지기도 한다. 불안, 우울, 분노들이 새삼스럽게 치밀어 올라오고, 다 잊은 줄 알았던 기억들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경험을 한다. 치료를 시작하고 나서 자살을 한다거나 상담을 바로 그만두는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아직 그 상처를 들여다 볼만큼 마음이 단단히 준비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상담소를 찾는 이들 중 대부분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표면적으로 다른 이에게 상처와 해를 가한 사람들이 오는 경우도 많다. 법원에서 보내는 것이다. 가족을 때렸다든지, 아이를 강간했다든지, 훔치거나 살인을 저지른 경우도 있다. 다중 인격의 증상을 앓고 있던 사람이 자의식이 전혀 없던 상태에서 세 명의 자식들을 죽인 사례를 다루기 위해서 서너 명의 팀이 함께 상담에 매달린 적도
지난 2월말, 고민이 하나 생겼다. ‘어떻게 하면 올해는 성도들과 내가 좀 더 의미있는 사순절을 보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래서 먼저 지난 15년간 이미 했던 사순절 특별 프로그램들을 떠올렸다. “사순절 기간만이라도 일주일에 한 번은 새벽기도를 드리자”며 기도출석표도 나눠 드려봤던 일, “사순절 기간만이라도 사복음서를 읽자”며 성경읽기표도 나눠 드려봤던 일, 심지어 “사순절 기간만이라도 패스트푸드를 먹지 말자, 미디어를 금식하자, 가정예배 드리자, 게임하지 말자, 욕하지 말자, 대형마트 대신 동네시장 이용하자, 매일 누군가에게 한 통이라도 사랑의 문자 보내자” 등 정말 별의별 프로그램을 다 해 봤음이 생각났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늘 하는 성도들만 할 뿐, 대부분의 성도들은 관심 없었다. 하기야 나와 교역자들부터도 본이 되지 못했으니 할 말은 없다. 하여 겨우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하나 성도들이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 중에 정말이지 우연히 ‘1분기도’가 스치듯 떠올랐다. 아마 이에는 최근 발생한 큰 지진(地震)들에 대한 기억도 작용한 것 같다. 아시는 대로 몇 년 전 아프가니스탄 힌두쿠시에서 발생한 7.5 규모의 지진은 불
대법원이 실상 결혼을 재정의 한 것도 아니며 따라서 재정의 할 자격도 없다. 결혼이란 것은 오래전 남녀를 지으신 분 곧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창제(創製)됐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다. 결혼에 대한 바른 정의는 창세기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에 나타나 있다. 앨 몰러(Albert Mohler) 남침례신학대학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총장은 ‘결혼은 하나님이 인간의 번성을 위해 주신 선물로서 우리가 논증해야 하고, 오직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혼인상의 연합으로 제한된다’고 잘라 말했다. 이러한 동성혼에 대한 합법화는 거대한 물결로 현대사회에서 매스미디어를 통한 영향력이 지대하다. 미국 디즈니 채널에 사상 처음으로 동성 커플의 키스 장면이 방영돼 눈길을 끌었다. 2017년 2월 22일 유튜브 채널 디즈니TV 애니메이션 뉴스(Disney Television Animation News)는 ‘Star vs The Force of Evil-Just Friends Song’이란 제목의 영상을 공개했다. 해당 영상은 디즈니 채널 만화‘프린세스 스타의 모험일기(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