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종전 6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있었던 7월이었다. 방송 매체를 통해 낯선 나라에 와서 전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살리고 그들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의 젊음과 생명까지도 기꺼이 나누어 준 많은 사람들의 사연들을 전해들을 수도 있었던 기회였다. 또한 그들의 헌신을 기억하고 그 소중한 희생으로 산 오늘을 감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인류 역사는 많은 전쟁들을 기록하고 있다. 예술사를 살펴보면 이런 전쟁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예술 작품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 문학과 음악 분야가 가장 많은 산물을 창조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작곡가들은 다양한 기법으로 전쟁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를 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전쟁은 인간에게 두렵고 충격적인 경험이며 감정의 깊은 곳에 영향을 주는 사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피아노 작품에서 전쟁 소나타라고 분류되는 프로코피에프의 작품들이 있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Sergei Prokofiev, 1891-1953)는 20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이지만 스탈린의 공산체제에서 많은 정치적 압박을 받았던 인물이다. 공교롭게도 그토록 싫어했던 체제의 독재자 스탈린과 같은 날 세상을
해마다 여름이 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장마기간이 아닐까? 장마와 함께 태풍도 오고 또 겨우 장마철을 무사히 지났다 싶으면 불볕더위와 씨름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과해야 곡식이 영글고 과일이 잘 익어 가을의 수확을 풍성하게 한다는 자연의 이치와 보상을 기대하며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이유 없는 어려움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견딜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려움 뒤에는 항상 상급을 주시는 하나님의 법칙에 감사할 수 있다. 그런 감사함으로 장마기간을 잘 통과하고 여름을 거뜬히 이겨야겠지만 그래도 가끔씩 마음이 눅눅해지는 때가 있기도 하니까 그럴 때 젖은 마음을 보송보송하게 말려줄 수 있는 마음의 제습기가 필요한 기간이다. 젖은 마음을 닦아낼 수 있는 음악을 생각해 보다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폭풍(Tempest)이라는 피아노 작품을 떠올렸다. 피아노 음악의 신약성서라고도 불릴 만큼 위대한 작품인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는 32개가 있는데 그 중에서 17번째의 작품이 바로 폭풍 소나타이다. 이 작품을 처음 대한 지인이 베토벤에게 어떤 생각으로 이 작품을 작곡했느냐는 질문을
5월은 일년중 가족을 중심으로 생활하기 가장 적합한 한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성년의 날 등 내 곁에 존재하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감사하고 행복해 하며 또 축하하는 그런 날들이 모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가족하면 단순하게 피를 나눈 혈연관계, 혹은 직계에만 국한하기 쉽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신뢰와 존경, 그리고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관계가 형성될 때가 있다.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그래도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요, 축복 받은 인생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관계는 같은 울타리 안에서, 피를 나누고 성씨를 공유하는 것 보다 더 깊은 가족 같은 관계이지만 그리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또 다른 가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분명 축복이며 은총이다. 제 2의 가족 관계를 가장 쉽게 형성할 수 있는 직업이 있다면 아마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직업군이 아닐까? 필자 역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명을 가지고 살면서 나의 제 2의 가족은 제자들이라는 생각을 한다. 생물학 적인 관계는 없지만 진심을 소통할 수 있는 나의 학생들은 분명 매우 중요한 존재, 즉 significant being인 것이다. 그들을 통해
요한 세바스천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하면 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음악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작곡가이다. 신실한 신앙의 사람이었던 바흐는 교회음악의 대가이며 음악을 통한 신앙과 신학을 표현한 인물로 기독교 예술과 문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삶 전체가 음악과 예배였다고 할 만큼 부지런한 바흐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고 이것은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달란트를 허비하지 않고자 하는 믿음에서 출발한 성실함이었다. 그러나 생전의 바흐는 내면을 채우는 일에는 뛰어났지만 사람들에게 자신을 포장하고 나타내는 일에는 관심도 없었고 재주도 없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그의 업적에 비해 유명세는 그리 타지 않았던 작곡가였고 그 결과로 사후에는 점점 그의 음악이 잊혀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흐 사후 약 80년 동안 그의 교회음악은 그리 많이 연주되지 않았고 전문 음악가들 외에 일반인들에게 바흐와 그의 음악은 생소해 지기 시작했다. 바흐는 b단조 미사를 비롯한 많은 교회칸타타 등 다양한 교회음악을 작곡했는데 그중에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고난을 음악으로 표현한 수난곡은 바흐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만큼 깊은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사
살다보면 사람의 힘으로는 버거운 일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 버거움을 견뎌내는 것이 성도를 향한 주님의 기대라는 생각으로 노력하면서도 가끔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 초자연적인 기적을 바라며 간구하고 싶을 때도 있다. 어느 순간, 초자연적인 표적으로 나의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것이 나의 바람대로 다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허황된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힘든 순간에 기적을 바라는 것은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 삶속에서 그 어느 것인들 기적이 아닌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기적은 우리 가까이에도 많이 있다. 예컨대 성인의 심장은 10만3,689번을 뛰고 피는 2억6,880만㎞를 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2만3천40번의 숨을 쉬며 750개의 근육들은 빠르게 혹은 천천히 필요에 따라 오차 없이 움직인다. 우리의 머리카락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0.01714인치가 자라고 있고 700만 개의 뇌세포가 움직인다고 한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해도 매순간 생명의 연장을 위해 우리의 인체에서 일어나는 경이로운 많은 일들을 기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교
새해 달력의 첫 장을 걸며 설레였던 일이 어제만 같은데 벌서 1월이 다 가고 있다. 빠른 시간의 흐름 앞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시기가 1월의 끝, 또 다른 시작의 마무리를 할 때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지난 1월, 새해를 맞이하면서 가졌던 소망과 다짐,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한 해에 대한 기대로 설레고 떨리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때의 초심을 아직도 간직하고 그때 다짐한대로 아직도 성실하게 살고 있는가를 되묻기도 하는 새해 첫 달의 마지막 시기, 그래서 조금은 부끄럽고 또 그래서 조금은 조급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올해에도, 또 내년에도 매해마다 새해가 되면 소망과 다짐의 시작을 하게 될 것 같다. 중요한 것은 한 달의 끝에서도 여전히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끝을 위한 기초는 처음 가졌던 생각이기 때문이다. 음악 중에서도 특별히 오페라의 서곡들은 아름다운 결론을 위해 꼭 필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은 부분이다. 언뜻 생각하면 서곡은 본론을 예고하고 주위를 집중시킬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작은 부분인 듯 하지만 이 서곡이 제대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오페라에 집중하지
성도의 삶에서 성탄절만큼 설레고 기쁜 절기는 없을 것 같다. 주님의 오심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오직 한길이며 나 자신이 구원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약속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탄절은 늘 감격으로 준비하고 감사로 맞이해야 한다. 유난히 눈이 많고 추운 올해 12월도 마음만은 따뜻한 것은 성탄절을 준비하기 때문일 것이다. 12월은 그래서 성탄 축하 카드를 전할 지인들을 생각하고 만나며 서로에게 선물 같은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한 달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고유 명절인 추석 덕담 중에 더도 말고 덜도 많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인사가 있다. 그러나 성도들의 안부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성탄절만큼만 넉넉하고 행복하고 은혜에 감사하는 매일이 되고자 하는 것이지 않을까? 성탄절은 또 음악이 풍성한 절기이기도 하다. “음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란 마티 루터의 말처럼 음악만큼 인간의 많은 생각과 감정을 담아내며 동시에 아름다움을 통한 감동을 전할 수 있는 매체는 그리 흔하지 않다. 실제로 클래식 음악에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사와 감격을 아름답게 담아낸 음악들이 많이 있다. 헨델(Georg Friedrich Handel , 1
2012년 여름은 참으로 더웠습니다. 때로는 사정없이 쏟아지는 뜨거운 열기가 마치 진원지를 알 수 없는 독가스처럼 살인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더위도 위협적일 수 있을까요? 그럼요. 노인들에게 더 위험한 건 추위보다 더위랍니다. 사랑하는 침례교 형제, 자매 여러분, 내년 여름을 위해 미리 알려 드리죠. 음악 속의 이열치열법입니다. 우선 심각한 음악은 안 되겠고, 서정적인 여성의 목소리 보다 열정과 낭만을 갖춘 남성의 목소리, 역시 더위엔 시원한 테너의 음성이 최고입니다. 그리고 이열치열이라, 태양과 정열을 얘기하는 음악이면 더욱 안성맞춤이겠지요. 그래서 떠올린 곡이 바로 해양으로 둘러싸인 태양의 나라 이탈리아의 네아폴리탄 가곡들(Neapolitan Songs), 소위 나폴리 민요라 불리는 노래들입니다. 뜨거운 태양이 쏟아지는 곳, 시원한 바람이 키 큰 나무들 사이로 너그럽게 불어오고, 덥지만 습하지 않은 곳, 바로 나폴리의 음악입니다. 대부분의 나폴리 가곡들은 선율이 경쾌하고 화려한 것이 특징입니다. 강렬한 태양을 노래하고 금싸라기 같은 해변을 찬미합니다. 활기와 낭만이 넘치는 항구와 열정과 변덕스러움이 술렁이는 도시를 노래합니다. 물론 찬란한 연인들의
지난 두 번의 글을 통해 필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집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 음악을 통해 이야기했다. 개인적으로 그것은 마치 너무나 당연해서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새롭게 확인하는 것과 같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제 끝으로 3번째 어머니에 대한 노래를 소개하며 신앙의 어머니는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해 알아 보려한다. 최근 신문 지상에는 신생아 유기, 미혼모, 아동폭력, 가정폭력 등의 기사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21세기 여성들을 위한 ‘기독교 어머니관’의 필요성에 대한 절감과 그렇지 못한 이들과 사회를 위해 보다 나은 길로 선도해야할 기독교 어머니로서의 의무감을 피하기 어렵다. 너무나 많은 가정이 파괴되고 공교육이 죽어가는 요즘의 세태를 교육의 시작인 가정, 즉 어머니의 회복이란 관점에서 돌이켜 보며 신앙의 어머니로서의 책임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노래를 통해서 바람직한 크리스천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기를 희망하며 어머니와 관련된 21세기 여성 작곡가에 의한 시와 음악을 소개하기로 한다. “어머니의 사랑”(A Mother’s Love)은 현대 기독교 음악으로 “나의 어머니”가 아닌 “내가 어머니”인 노래이다. 즉
1.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2.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3.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작사 및 작곡: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작곡, 바흐 편곡 1517년 10월 31일 가톨릭교회 사제이자 대학교수인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비텐베르크(Wittenberg)성당 정문에 가톨릭교회의 부패에 관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였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됐다. 그 당시 교회는 성직을 사고 팔 정도로 부패해 있었다. 심지어 성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사면 연옥의 고통을 면할 수 있다고 유혹하여 면죄부를 팔기도 했다. 지도자들은 돈이 헌금함에 땡그랑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서 천국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