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은 인류가 갖는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이다. 성경에는 소망이라는 말이 많이 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 ‘소망’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위한 선물 언어이다. 소망이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종교의 우열(優劣)은 그것이 제공하는 소망의 많고 적음과 낮음으로 정해진다. 성경에 소망이라는 문자가 많은 것은 확실히 그것이 가장 으뜸 되는 종교라는 증거의 하나이다. 목회자는 늘 이 소망을 품고 강단에 서고 소망을 선포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소망은 다음의 세 가지 일을 행한다. 첫째로, 소망은 우리에게 장차 큰 기쁨과 행복이 주어지리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준다. 둘째로, 소망은 우리에게 그 기쁨과 행복의 실상을 드러내 준다. 셋째로,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그것들을 기다리게 하며 그것들을 위하여 모든 고난을 견뎌 내게 해 준다. 유명한 강철왕인 ‘앤드류 카네기’는 세일즈맨으로 가정을 방문하면서 물건을 팔러 다녔다. 어느 날 한 노인 댁을 방문해 그 집에 들어섰을 때 카네기를 완전히 압도해버린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 집의 거실 벽에 걸린 그림이었다. 그림은 황량하고 쓸쓸한 해변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 옛날이야기에 우산 장사를 하는 아들과 짚신장사를 하는 두 아들을 둔 어머니는 항상 걱정이 많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짚신이 안 팔릴까봐 걱정 날씨가 좋은 날이면 우산이 안 팔릴까봐 걱정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비가 와도 허허 날씨가 좋아도 허허하는 것이었다. 아내가 “이렇게 비가 오면 작은아들 짚신이 안 팔릴까봐 걱정이구만 당신은 뭐가 그리 좋아서 실없는 사람처럼 허허하는 거요?” 하자 영감님이 이렇게 말했다. “비오는 날은 큰아들 우산이 잘 팔려서 좋고 날 좋은 날은 작은 아들 짚신이 잘 팔려서 좋으니 다 좋지 않소.” 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같은 상황에서도 부정적인 생각을 하느냐 긍정적인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는 것을 교훈한다. 성경에는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 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6~7)고 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과 원수되는 생각이기 때문에 말씀에 불순종하고 육신의 생각대로 살면 사망이지만 영의
학교의 담임 선생님은 학생이 말을 듣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면 벌을 주기도하고 반성문을 쓰게 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요구할 수도 있고 합법적으로 정학이나 제적을 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의 담임목사는 성도가 불순종하고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목사를 모함하고 비난해도 보호자를 모시고 오라고 할 수도 없고 반성문을 쓰고 회개하라고 꾸짖기도 어렵다. 그랬다가는 잘못했다고 회개하는 사람보다 반항하고 목사를 비난하고 풍파를 일으키고 교회를 어렵게 할 사람이 많을 것 같기 때문에 대부분의 목사들은 그렇게 안한다. 교회 이름으로 치리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면 목사도 성도도 교회도 다 상처를 입게 되므로 쉽지 않은 일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성도들의 공동체로 교회는 주님의 교회요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며 우리는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엡5:23)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구원 받은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구원 받지 못한 이웃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워진 주님과 복음을 위한 공동체다. 교회는 성령님의 인도받아 하나님을 섬기며 복음 증거
불신자가 전도를 받고 교회를 출석해 예수님을 영접하고 말씀을 깨닫고 믿음이 자라고 신앙생활을 잘 하도록 지도 해주는 사람이 목회자이다. 모든 삶에 신앙생활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할 만큼 신앙생활이 중요한데 이 중요한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목사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성경에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6:6)고 했다. 성도는 목회자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으며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신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를 사랑으로 잘 섬기면 하나님을 사랑으로 잘 섬기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면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하나님)를 영접하는 것이며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마10:40~41). 목회자는 권위를 내려놓고 성도들과 가까이 지내려고 다가가는 것은 목회자의 자세이며 감사한 일이지만 성도는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세우셔서 교회를 돌보라고 세워주신 하나님의 사자라는 생각으로 존경하고 잘 섬겨야한다. 필자는 목회자들에게
현대사회는 핵가족화에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경제사정도 여의치 않으면서 자신의 부모님도 짐으로 여기고 돌보지 않고 방임하거나 교묘한 방법으로 낯선 곳에 버리고 사라지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니 마음이 아프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신자 불신자를 떠나 자녀의 근본적인 도리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사회를 향한 봉사의 사명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섬기는 봉사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기부모님부터 잘 섬겨야 한다. 부모님 시부모님을 섬기지 않으면서 타인을 위해 참된 봉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녀에게 축복을 약속하고 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명기5:16) 하나님께서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식에게 땅에서 장수하며 복을 누리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복을 약속하지 않을 지라도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분이기 때문에 부모님을 공경하고 섬기는 것은 자식의 마땅한 도리이지만 오늘 날 세상은 도리도 저버리는 세상이 되어간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바라 볼 때는 품안의 자식이라는 말이
창세기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했다. 천지 만물의 창조주가 하나님이라 선포하고 모든 만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말씀하고 있다. 시편24:1에서 다윗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고 했다. 인정하지 않을 지라도 우주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요 모든 만물의 주인도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다가 떠나가는 나그네요 청지기일 뿐이다. 십일조는 하나님을 우주만물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믿음의 증거요 모든 물질의 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이다. 하나님은 신명기14:22에서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씀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드리라고 한 것은 레위 인들이 백성들을 위해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을 전담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민수기18:2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가까이했다가 자기 죄 값으로 죽는 것을 막고 백성들의 죄를 위해 대신 제사를 담당하도록 레위지파를 제사장 지파로 구별하고 그들에게는 땅을 기업을 주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섬기는 삶이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셨다(마20:28).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잘 섬길 뿐만 아니라 사람도 잘 섬기며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 둘째계명이며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마22:37-40)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다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을 높이지 말고 항상 낮은 자세로 섬기는 자로 살아야한다. 우리 사회 어느 분야에도 그리스도인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요소요소에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하다. 그 이유는 섬기는 삶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직위가 높을수록 자신이 일하는 곳에서 겸손하게 섬기는 자로 산다면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사람들은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민들레를 천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민들레가 짓밟히고 또 짓밟히며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민들레는 그렇게 짓밟히는 가운데서도 자라고 또 자라 결국은 황금빛 꽃을 피우고야 맙니다.이 민들레 꽃을 보고 인생을 큰 승리로 이끈 세계적인 한국 사람이 있으니 그가 우장춘(禹長春) 박사입니다. 그는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일본 도쿄의 한 고아원에서 불우하게 자란 한국의 가련한 소년이었습니다. 일본인으로부터 ‘조센징’이라고 멸시와 천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민들레처럼 짓밟히며 자랐지만 어린 소년 우장춘은 책상 앞에 다음과 같이 써 붙이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짓밟히면서도 피어나는 길가의 민들레’ 드디어 그는 일본의 최고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한 번 심어 두 번 거두는 획기적인 농사법을 연구함으로써 세계적인 육종학의 권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낙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답답한 일을 당할지라도 낙심하지 맙시다.오늘날 사람들은 크고 작은 곤경에 허덕이는 힘겨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질병, 실패, 이혼, 신체장애, 고독, 죽음 등이 사람들의 삶 속에 파고듭니다. ‘장애 때문에….’라고
진진이진진이는 15년 전 쯤 우리 집에 한 가족이 되었던 강아지 이름이다. 왜 이름이 진진이라고 불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진진이가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과 불행히도 그 진진이를 사랑으로 잘 키워야 했었는데 그러지 못한 아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미안한 마음이 들 뿐이다.당시만 해도 우리 집은 역기능이 심한 편이었다. 성격이 정 반대인 아내와 나는 갈등이 있을 때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내면에 쌓였던 어린 시절의 상처 입은 감정들을 서로에게 투사했었다. 간단히 말해 부부싸움을 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와 같은 역기능의 분위기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어느 날 아이들은 친구 집에 있는 강아지를 보고 조르기 한판을 시작했다. 아내는 집 먼지나 털 알러지가 있음에도 항복하고 말았다. 대신 털이 짧은 강아지를 선택했고 먹이를 주는 일과 배설물을 치우고 목욕을 시키는 일 등을 아이들이 하는 것으로 타협을 하고 데려왔다. 사실 진진이란 이름은 촌스러운 이름이라고 느꼈다 아마도 어린 아이들이 눈에 비친 강아지를 부르려다 나오는 발음대로 불리게 된 이름이 진진이가 아닌가 싶다. 진진이는 대천에 사는 아내의 친척집에서 데려와 우리 집
소돔성의 그림자며칠 전 서울 중심인 시청 앞에서 동성애자들의 모임인 퀴어 문화 축제가 열렸다. 그곳에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비이성적인 말들이 고스란히 유투브를 통해 생중계됐다. 특히 서울시 인권위원장은 온갖 선정적 말로 근거없이 기독교를 비판했다.지금 한국사회를 보면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참 많다. 1년 전 지방에 있는 검찰 지검장이 길거리에서 음란행위를 하는 추태를 벌이다가 결국 언론에 못 이겨 검사 옷을 벗고 말았는가하면 전직 국회의장, 군부대 장성, 대학교의 교수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말할 수 없는 추태가 언론에 그대로 비추어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불행한 것은 이렇게 성적으로 도를 넘는 노골적인 모습들이 사회 저변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지금도 일탈(逸脫)을 꿈꾸는 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세상이 우리 주변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끊임없이 유혹에 노출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유혹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언제든지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고전 6:18절에서는 “음행을 피하라”고 했다. 모든 마귀는 다 대적하되 이 음행만큼은 대적해서 실패할 수 있는 확률이 많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