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부활주일은 더함교회가 5년째 맞는 부활 주일이었습니다. 여전히 전교인의 50%이상인 70대 이상 어르신들은 1:1로 메시지를 전해도 그 입으로 “예수님이 나의 주인 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란 소리는 쉽게 하는데 이상할 만큼 “예수님”만 말하면 딴 소리하는 현실입니다. 주입식 교육으로 따라하기 10번을 해야 앵무새처럼 영혼없이 1번 간신히 하실까 말까 합니다. 이것을 보면, 정말 예수그리스도 그 이름 만으로도 굉장한 능력이 있음을 봅니다. 그럼에도 이번 부활절 예배시간에 스승님이신 박영철 교수님께서 개척 전 전수해주셨던 알찬 복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저희는 1년에 두 번은 주일 오전예배시간에 복음을 전하는데, 이 때 기존 교인들에게도 함께 전합니다. 교회 안에 교인 중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회심한 사람은 아직 20%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번 부활주일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늘 별로 관심없는 표정으로 들으시는 충청도 우리 어르신들에게 마지막에는 강경모드로 메시지를 전합니다. “제발 이제 오늘 내일 준비하셔야 할 어르신들, 앞집 할머니, 옆집 할아버지 돌아가셔도, 내 이야긴 아닐 것 같은 착각 버리셔요! 영원하지 않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경험했을 이야기다. 운전에 필수가 되어버린 네비게이션에 출발하기 전 도착할 장소를 입력하면 도착예정시간을 알려준다. 운전하다 잠시 휴게소에 들렸다 나오면 시간은 훌쩍 넘어가버려, 조급한 마음에 늘어난 도착 시간을 다시 줄이기 위해 속력을 내도 흘러간 시간을 줄이기란 쉽지 않다. 얼마 전 가까이에서 함께 목회하시던 분이 젊은 나이에 아직 가족에게나 주위 사람들에게 남겨진 일이 많이 있음에도 우리 곁을 떠나셨다. 진도에 내려와 만난 지 1여년의 시간에 건강하셨던 모습이 금방 무너져 버렸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했다. 시간을 조금만이라도 늘릴 수 있다면…. 분명 성도로서 천국을 소망하지만 아직 이 땅에 살면서 해야 할 일이 생각나 죽음 앞에서 시간을 조금만이라도 더 늘리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일평생을 주님께 헌신하며 살아도 돌아보면 부족한 것뿐이고 아쉬운 마음뿐이다. 늦게나마 깨닫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한 몸부림을 쳐도 주어진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끼며 시간을 늘리려고 애를 써본다. 그렇지만 무엇이 그리 바쁜지 시간을 늘리기가 쉽지 않다. 기도의 시간,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 맡
우리 신앙의 모든 기초는 하나님의 목적과 본성에 있으며, 주님 안에서 자신을 계시 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한 줄만 남은 비파의 이야기가 있다. “왈츠”라는 사람의 “소망”에 대한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둥근 지붕 위에 어떤 젊은 여인이 외롭게 앉아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눈은 수건으로 싸 매여져 있다. 그래서 앞을 보지 못한다. 그 가슴에는 비파를 안고 있는데, 비파 줄은 다 끊어지고 오직 한 줄만 남아 있다. 뒤에는 희미한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앞이 안 보여도 비파 줄이 하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켤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소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 또 여러 가지 줄이 끊어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하기도 하고, 믿었던 줄이 끊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소망의 줄만 있다면 능히 모든 것을 이기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두 사람이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히게 됐다. 이 두 사람은 같은 감방에 있으면서 철창을 붙들고 밖을 내다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사람은 언제나 하늘을 쳐다보며 시 창작에 몰두했다.
교회를 옮기는 일은 절대 쉽거나 간단한 일은 아니다. 자신이 속한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는데 따르는 상실감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직장이나 다른 일로 그 지역 교회를 멀리 떠날 때는 그나마 아쉬움이 깊다. 그러나 한 지역에 계속 살면서 교회를 옮긴다는 이야기는 그 상실감을 상쇄할 만큼의 실망, 상처, 갈등이 얼룩진 선택이기 마련이다. 상처받아서 떠나고, 또 그만큼 상처를 남기고, 상처를 준 후에 떠난다. 긴 싸움 끝에 마치 이혼을 선택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는 일은 가족을 바꾸는 일처럼, 가는 사람, 남는 사람, 모두에게 힘이 든다. 다른 교회에서 오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 교회는 사람들이 차가워요.” “그 목사님은 사랑이 없어요.” “말씀이 은혜가 안돼요.” “심방을 안 해요.” “장로님이 다 맘대로에요.” “신앙에 본이 될만한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새로운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요. 친구가 안돼요.” “찬송가를 안 해요. 찬양이 은혜가 안돼요.” “교인들이 너무 무례해요.” 그런데 바로 똑같은 그 이유 때문에 또 교회를 떠나간다. 믿음의 공동체에 자신은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올 때나 떠날 때나 들을 수
얼마 전 서울 명동의 유서 깊은 한 장로교회 청년부 특강을 갔다. 주제는 “기독교 세계관과 이성교제”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창조의 질서 안에서 우리에게 최고의 축복 통로로 결혼을 예비하셨다. 하나님은 처음에 아담만 먼저 창조하셨으나 독처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해서 여자를 만드시고 이끌어 오시니 아담에게 이러한 감정이 일어났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이것이 바로 연애상대를 만났을 때 도파민, 옥시토신, 노르에피네프린 같은 호르몬이 활성화되는 현상이다. 인간에게 이성교제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짝을 만나서 “합하여 둘이 한 몸”(창 2:24)을 이루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정을 세워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창 1:28)는 사명에 순종하게 하신다.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가정과 가문을 세운다. 따라서 성경은 이성교제와 결혼이 구분된 것이 아니라 이어진 한 세트의 사건이며, 선택이 아니라 사명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고 본다. 또한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세워진 가정은 그 자체가 하나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그 나라를
둘째, 독립적인 내용을 주목하는 것이다. 한 복음서의 저자가 다른 책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독특한 이야기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경우이다. 이때, 설교자는 그 저자의 의도와 목적을 그의 저술 관점과 목적에 연관하여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례로, 선교 명령을 담고 있는 마태복음(10:5~6, 15:24)은 그 범위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으로 한정하고 있는데, 이점은 마태의 주 독자들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반면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선한사마리아인 비유’(눅 10:30~37)와 치유 받은 후 유일하게 사례한 ‘사마리아 나병환자’(눅 17:11~19) 이야기는 누가의 저술 의도와 그의 신학이 마태의 경우와 다른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설교자는 복음서를 해석할 때 저자의 관점만이 아니라 예수의 관점을 동시에 고려하는 수직적 사고의 안목이 필요하다. 이는 어떤 특정 구절의 의미를 먼저(원래적 상황으로서) 예수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고 그 후 저자의 관점에서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상훈은 일례로, ‘포도원 일꾼’의 이야기를 제시한다. 수평적으로 볼 때 마태복음은 관련된 다른 기사들과 함께 마가복음을
20여년전 정상적인 양념 통닭을 먹는 것이 소원인 때가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통닭을 먹는 날은 피아노 학원 강사로 다니시던 어머니의 월급날이었는데, 쥐꼬리만한 월급에 매달 나가는 빚과 이자, 빼고 남는 돈은 몇 천원…. 그래서 유일하게 먹을 수 있던 치킨은 2,800원짜리(아직도 가격이 정확이 기억합니다.) 노점상 옛날 통닭이었습니다. 매번 어머니가 힘들게 사온 통닭이었는데, 저는 부끄럽게도 매번 친구들이 먹던 멕시칸 치킨을 찾으며 투정하며 거의 먹지 않았었습니다. 속상해 하던 어머니 얼굴이 생생합니다. 그랬던 저희 가계가 그나마 풀칠 안하고 먹고 살만 하게 된 10여년 전부터는 일 년에 10번 정도는 아무거나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있었습니다. 요즘은 어릴 때 꿈꾸는 그런 치킨을 거의 매주 먹고 있습니다. 옥천에서 함께 교제하는 목사님의 장모님 시누이가 우리교회 옆 동네 현리라는 마을에 계시는데 전도를 위해 계속 기도중입니다. 그 전도대상자 할머니가 구멍가게와 치킨집을 하고 계셔서 벌써 8마리째 치킨을 구매하고 있습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원리를 믿기에 치킨을 사며 도리어 순대 및 간식을 가지고 만나고 있습니다만, 이제 저에 대한 경계 태세는 다 무너졌습니
수난주간 중에 3월 26일 제35회 침례교 교도소 선교회 연차 총회가 교도선교회 회장인 천안 서머나교회 최만준 목사의 초청은 작년 서울 천호교회 이동춘 총무 목사 초청으로 더 많은 회원이 모였고 “죄인의 좋은 친구”모임이 됐다. 실무위원으로 천안교도소에 최만준 목사를 위시해 서울남부 이유진, 원주 곽도희, 제주 한태희, 안양 박수정, 대구 박윤하, 대전 임헌태, 영월 고병기, 공주치료 이승혁, 청주 이용규 목사 및 청송 엄현숙 사모로 11곳이며, 여의도교회 국명호 , 강남중앙교회 피영민, 영통영락 고흥식, 디딤돌 박문수, 광정 정희량, 새소망 박종철, 반석제일 한유기, 화평교회 조천업, 세종누림 이원열 및 예사랑 한명국 목사 등으로 후원교회 10명 회원들로 함께 모였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11:19, 눅7:34)로 오신 나사렛 목수 예수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잡수셨고”(마9:10~11)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소망은 인류가 갖는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이다. 성경에는 소망이라는 말이 많이 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 ‘소망’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위한 선물 언어이다. 소망이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종교의 우열(優劣)은 그것이 제공하는 소망의 많고 적음과 낮음으로 정해진다. 성경에 소망이라는 문자가 많은 것은 확실히 그것이 가장 으뜸 되는 종교라는 증거의 하나이다. 목회자는 늘 이 소망을 품고 강단에 서고 소망을 선포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소망은 다음의 세 가지 일을 행한다. 첫째로, 소망은 우리에게 장차 큰 기쁨과 행복이 주어지리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준다. 둘째로, 소망은 우리에게 그 기쁨과 행복의 실상을 드러내 준다. 셋째로,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그것들을 기다리게 하며 그것들을 위하여 모든 고난을 견뎌 내게 해 준다. 유명한 강철왕인 ‘앤드류 카네기’는 세일즈맨으로 가정을 방문하면서 물건을 팔러 다녔다. 어느 날 한 노인 댁을 방문해 그 집에 들어섰을 때 카네기를 완전히 압도해버린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 집의 거실 벽에 걸린 그림이었다. 그림은 황량하고 쓸쓸한 해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근원적 존재성을 다루는 로고스 찬미가 첫 단락에서 그는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로고스(말씀)로서 하나님과의 특별한 연합의 관계를 가진 신성의 존재라는 것과 그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한 권위와 능력의 존재라는 것을 제시했다. 요한은 특히 그 로고스 안에 있는 생명이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빛이 된다는 것을 통해 그의 복음서 전체를 통해 제시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유일한 실행자라는 것을 부각시켰다. 요한은 ‘생명’이란 단어를 하나님의 존재(요 5:26)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요 5:26; 11:25; 14:26)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목적을 나타내며(요 3:16; 8:12; 10:10; 17:3) 또 그의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사용했다(요 20:31).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생명이 있으며(요 5:26),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이며(요 10:10), 또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요 20:31). 요한은 이런 맥락에서 성육신하신
지금 더함교회는 전교인 가정방문예배 기간입니다. 3주전부터 광고시간마다 방문일정과 함께 주보에 진한 글씨로 ‘헌금 및 식사 준비 금지’라고 적어두니, 할머니들이 고민을 많이 하신 모양입니다. “예배드리러 오시믄, 밥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첫번째 집을 들어갔습니다. 파킨슨병을 8년째 앓고 있는 혼자 살고 계신 할머니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간절히 안수기도를 하고, 서비스로 안마 신공을 하고 나오려는데,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할머니 성도님이 부엌으로 가십니다. 간신히 기어서 도착한 곳은 냉장고 앞. 하나는 성미, 하나는 간식 몇 개를 미리미리 준비 해놓으셨습니다. 안 받고 오자니, 너무 서운해 하실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교회당에 도착해 열었더니, 주섬주섬 이것저것 선물 세트로 들어 있습니다. 과일 사러 버스타고 시내 시장까지(동네엔 제철 과일 파는 곳이 없음) 다녀오신 생각하니 맘이 찡합니다. 그런데, 호두과자 날짜를 보니 석 달은 족히 지났습니다. 받아오는 차 안에서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믿음으로 주신 성의 생각하여 먹었습니다. ‘주여! 제 위장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두 번째 가정을 들어갑니다. 예배를 마친 후 기도를 해 드리고, 이 새신자
우리 성도들이 매일 매사에 행동하기 전에 마음과 생각으로 어떻게 결정하고 결단하는가? 어릴 때 부친은 “하루의 계획은 아침에 하고 (一日之計 在於寅), 일년 계획은 봄에 하고(一年之計在於春), 일생의 계획은 어릴 때 한다(一生之計在於幼)”고 말씀하셨다. 1948년 9월 첫주 방학이 끝나고 개학해 새로 오신 김봉석 담임선생은 소련의 대문호의 일기 쓴 얘기를 하면서 너희들도 오늘부터 일기를 쓰면서 매일의 계획을 잘 세우면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다고 말해서 9월 3일부터 일기를 썼는데 그 다음주에 “너희들 내 말 듣고 일기 쓴 사람 손 들어봐!” 했다. 내가 손들었더니 기뻐하면서 일기 쓰는 방법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전교생 앞에서 산또닝이란 구충제를 먹고 건강하게 되는 연설도 5분간하게 했는데 그때 부친께서 교회에 나가 치유되고 가정에 축복이 임해 1학년에 꼴찌에서 2등, 2학년엔 38등, 3학년엔 27등한 내가 4학년엔 1등을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수첩을 사서 매일 생활 계획을 시간별로 적어서 잘 실천하게 됐고 목회를 시작한 1964년 3월 8일부터는 목회일기를 써왔는데 일평생 큰 도움이 됐고 나이가 들수록 생활계획이 복잡하고 많아질수록 수첩과 일기장은
사람들이 삶이 즐겁지 못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남들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내가 입은 옷과 남이 입은 옷을 비교하고, 내 차와 남의 차를 비교하고, 내 집과 남의 집을 비교하고 모든 것을 비교하므로 행복을 잃어버린다. 비교하는 사람은 남보다 낫다고 생각되면 우월감으로 교만하게 되고 남보다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열등감으로 위축되고 불행에 빠진다. 불만 없이 잘 살던 아내가 오랜만에 동창회 갖다 와서는 “순자는 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도 못했는데, 남편 잘 만나서 고급 승용차를 타고 왔더라.” “영희 남편은 이번에 사장으로 승진했다더라.” “혜선이는 45평으로 이사 간다더라.” 등등 학교 다닐 때 별 볼일 없던 것들이 명품 옷에 명품백 들고 고급 승용차 몰고 왔는데 나는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면서 남편에게 불평을 하며 즐거움을 잃어버린다. 자녀들에게도 “누구네 아들은 전교 일등 했다는데, 누구 딸은 명문대 간다는데, 니들은 뭐하냐” 며 자녀들을 남들과 비교하여 기분 나쁘게 만든다. 자기 남편과 친구 남편을 비교하고 자기 아내와 친구 아내를 비교하며 불평하다가 부부 싸움을 하고 며칠씩 말도 안하고 지옥으로 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인 페이스북에 올라온 한 목사의 글에서 목회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가 목회(木灰), 즉 나무가 다 타서 생긴 재라는 뜻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글에 유달리 큰 울림이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 한마디에 말로 다할 수 없는 무언가를 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참된 교회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패기 어린 주장을 펼치는 열정 어린 신학생들에서부터, 한국 사람이라고는 몇 가정이 채 되지 않는 시골교회에서 은퇴의 나이가 지나도록 섬기시는 선배 목사님들까지 목회자와 사모님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이상하게도 목회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논제 앞에 할 말을 잃어간다. 대형교회라는 축복과 짐을 동시에 지고 부러움과 질타의 대상이 되는 유수한 기독교계의 리더들도, 일주일에 10번이 넘는 설교에 교회 청소까지 맡아하면서 따로 아르바이트라도 하지 않으면 생활이 안 되는 작은 지역교회 목회자들도, 뜻하지 않은 일로 교회의 분열이나 급작스런 사임의 아픔을 경험하는 목사님들도 하나같이 목회라는 여정에서 두렵고 깊은 골짜기를 지나는 경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와 기도 응답으로 순간순간 신나고 벅차기도 하지만, 타들어가는 나무처럼 그 심장이 까매져 갈
벌써 큰 딸이 두 번째 유학길에 오른 지도 4개월. 미국에서의 고교 졸업 후 대학까지 진학했었지만, 학비와 향수병 등의 이유로 결국엔 돌아와 여기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도 다니던 중, 다시 또 한 번의 도전장을 내민 연유다. ‘그냥 있는 곳에서 편하게 다니다 신랑도 만났으면….’하는 아비 마음이야 왜 없겠냐마는 기도하며 결정했다 해서 또 한 번 더 뒷바라지 하게 됐다. 물론 꿈꾸던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건 기쁘다. 아는 분들은 참 좋은 학교란다. 하지만 그래도 또 2년간 얼굴 못보고 살아야 하는 부모는 여전히 허전하다. 그래서 좋기도 하지만 섭섭하기도 한, 나의 두 마음. 얼마 전 한 성도가,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도 다섯 명도 안 되는 개척교회를 섬기겠다고 기어이 떠났다. 그렇게 어려우면 교회 차원에서라도 돕겠다 했지만, 그 뜻한 바는 꺾지 못했다. 참 많은 관심과 기도를 베풀었는데, 그 또한 우리 교회를 좋아했는데, 우리 교회에도 필요한 일꾼인데, 혹 그러다 다른 상처나 입지 않을까 염려도 되지만, 이미 그렇게 결정해버렸다 하니 어찌나 섭섭하던지. 물론 언젠간 돌아오리라 믿고, 교적도 안지우고 기다리겠다며 나름 쿨하게 응했지만 그래도 섭섭한 이 마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