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유일성을 강조하기 위해 ‘유일하다’ 혹은 ‘독생하다’라는 형용사를 사용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되심 특히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되심을 부각시킨다. 요한은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에서 이 특별한 단어를 두 번이나 사용한다(3:16, 18). 요한은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를 통하여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면서 독생자를 통한 하나님의 활동의 두 가지 성격 곧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을 설명한다. 요한복음 3:16~21의 표현이 삼인칭 강화의 형태로 된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에 있어서 인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에 관한 요한의 신학적 입장을 나타낸다. 먼저 요한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독생하다’는 형용사는 로고스 찬미가에서 화육하신 로고스를 표현하기 위하여 이미 사용됐다(1:14, 18). ‘독생자’는 하나님과 유일한 관계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특별한 일을 완수하기 위하여 세상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시인을 포함한 여러 ‘무당’ 류의 예술가들에게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 는 식의 종신 호칭은 허락되지 않는다. 시인은 그가 시인인 순간만 시인이다.” 이성복 저(著)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했는가’(문학동네, 3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시인 황동규는 2007년 7월 ‘월간조선’ 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를 아는 사람들이 ‘꽃의 고요’가 최고라고 하더군요. 저는 아니라고 했어요. 다음에 나올 시집이 최고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쓴 시는 관심이 없어요, 앞으로 쓸 시가 문제지.”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피터 드러커도 자신의 최고의 저서는 지금 쓰고 있는 책이요, 앞으로 쓸 책이라고 했습니다. 과거 그가 퓰리처상을 받았더라도, 그의 가치는 그가 가장 마지막에 쓴 기사가 말합니다. 안주와 나태를 경계하는 말입니다. 끊임없는 변화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터키의 시인 나짐 히크메트는 ‘진정한 여행’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러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
낮은 골짜기에는 이슬이 많이 내리지만 높은 산꼭대기에는 바람이 심해서 이슬이 내리지 못합니다. 은혜도 겸손한 심령에 내려집니다. 그러므로 자리는 높아지기를 힘쓸지라도 자세는 낮아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심령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제일 아름답게 보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아프리카로 의료선교를 갔던 리빙스턴의 일기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토인들은 참을성이 많아서 큰 수술을 할 때 아파하지 않고 태연하게 옆 사람과 애기한다. 그들은 어른은 절대 울면 안 된다고 여긴다. 아픔은 잘 먹고 잘 입는 사람이 더 못 참는 것 같다. 그처럼 참을성이 많고 눈물을 안 흘리는데 나(선교사)는 신기한 일을 목격했다. 내가 예수님의 피의 복음을 전하자 그들은 엉엉 울며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 눈물이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했겠습니까? 겸손한 회개의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최상의 무기입니다. 그래서 복을 받는데도 겸손이 필요하지만 복을 유지 하는데도 겸손이 필요합니다. 복을 받아도 계속 겸손하면 복이 계속되지
“영어를 공용어로 쓰지 않는 비영어권 102개국 4만 명에게 70단어를 제시하고 정감이 가는 단어를 고르게 했더니 1위가 어머니(mother), 2위는 열정(passion), 3위는 미소(smile)였다. 그 밖에 사랑(love), 영원(eternity), 환상(fantasy), 목적(destiny), 자유(freedom, liberty), 고요(tranquility) 등의 단어가 꼽혔다고 한다. 여기에 제시된 단어들 중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단어들은 추상명사다.” 최복현 저(著) ‘여유’(프리스마, 138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가슴 깊이 아름답고 여기는 것들은 추상 명사가 많습니다. 아름다움은 말로 다 담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현대 철학의 새로운 흐름을 제시한 언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언어로 명제화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전제에서 그는 언어를 최대한 명확하게 다듬는 것이야말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적 가능성을 확고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계를 느꼈습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철학자들의 책을 읽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그가 가장 탐독한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12:19~20) 어리석은 부자는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손 안에 속해있음을 몰랐다. “모든 영혼이 다 네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18:4).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27:1).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라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3~14). 하루살이 인생이 좋다. 어제는 지나갔으니 다시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고 내일 일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므로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오늘 뿐이다. 사람은 내일 일을 자랑할 수 없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부르시면 돌아가야 한다. 지난 주
1979년 함라교회를 시작으로 원당교회, 세종선한목자교회(전 연기교회)에서 40여년 동안의 목회사역을 마치니 지나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과 은혜로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지난 40여년간의 목회를 되돌아보니 아름답게 열매를 맺은 사역도 있지만 아쉬운 삶의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름답게 열매 맺은 공동목회 사역 사역을 마무리할 계획으로 10여년 전부터 공동목회를 꿈꾸었다. 후임목사 선정을 두고 담임목사와 성도 간에 분란을 겪고 있는 주변의 여러 교회들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었다. 교회 안에서 보살핌과 섬김보다 통치와 군림이 우선하고 상호 배려와 공경보다 조직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던 기존의 교회 환경을 관계중심인 가정교회체제로 바꾸고자 공동목회를 계획했다. 검증되지 않은 무모한 도전이요, 별 탈 없이 해오던 목회에 괜한 생채기를 낼 뿐이라는 주변의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지만 나 자신의 유익보다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으로 성도들을 설득하며 시작했다. 몇 후임자를 초빙해서 공동목회 취지와 구체적인 방법과 일정을 제시했지만, 공동목회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떠났다. 그러던 중 다행스럽게도 지금의 후임 목사님과
살다 보니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왜 이 일이 나에게만 생기는 거야?” 생각될 때가 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걸음마다 생각지 못한 일들이 생겨날 때마다 가슴에서 올라오는 소리다. 진도는 대한민국의 땅끝마을이라는 곳보다 더 땅 끝에 위치해 있다. 막혀 있던 동내 분들과도 소통을 하기 시작하고 귀농자로서의 생활도 적응해 가려고 할 때 생각지도 않은 일이 생겼다. 이년 반 전 전임자가 주님께 가시면서 아들 이름으로 바꾸어 놓은 예배당을 갑자기 부동산에 매매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30여 년을 동내 교회로 자리하고 있던 예배당이 없어져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전임자가 병환으로 폐허가 된 듯했던 예배당에 이제 몇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하게 되고 동내의 교회로서 살아나려는 찰나에, 근처 바닷가의 개발 계획으로 도로 계획이 생긴다고 하니 터무니없는 금액을 못 주면 부동산에 내 놓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는 몇 교인들이지만 함께 작정하고 기도하며 부르짖게 됐다. 그러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반문이 생겨났다. 그때 그렇게도 보았던 말씀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기도의 열쇠로 주신 예레미야 33장 3
껌값이란 말이 있다. 껌을 사는데 드는 돈이며, 또한 시중에 파는 간식성 먹거리 중에서 값이 가장 싼 것이기에 무언가 하찮고 적게 들어가는 비용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데 씹다가 뱉어버린 껌은 쓸모나 값이 있겠는가? 미국 시애틀 어느 골목벽엔 기상천외한 관광지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껌을 씹다가 뱉어서 벽에 붙여놓음으로 생긴 것이다. 그곳을 방문하면 역겨운 냄새가 고약하지만 뭔가 재밌고 흥미로운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씹다가 뱉은 껌의 값에 대한 놀라운 기사도 있다. 영국 매체 스포츠 바이블은 알렉스 퍼거슨이란 사람이 씹은 껌을 경매에 내놓았는데 5억 8000만원에 낙찰됐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알렉스 퍼거슨은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 축구감독으로 긴장해소를 위해 1500회 축구 경기에서 3000개의 껌을 씹었다고 한다. 특히 2013년 5월 19일 은퇴 마지막 경기에서 껌을 씹다가 뱉은 것을 한 팬이 주워서 장식장에 보관해왔다. 그러다가 ‘알렉스 퍼거슨 경의 마지막 껌’이란 문구를 적어 경매에 내놓았는데 그것이 일반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고가로 낙찰된 것이다. 껌값이라 하지만 껌을 누가 언제 무슨 용도로 이용했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짐을 알려주
“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삼하 5:18~19) 블레셋은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세력이 강력한 존재로 부상하기 전에 제거하고자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쟁에 능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은 하나님께 질문하여 그분의 뜻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일반적인 성도들 같았으면 적군이 쳐들어오는데 무슨 “전쟁에 나갈까요? 말까요?”라는 질문이 필요하겠습니까? 무조건 군사를 소집하고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고 나갔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으로부터 오랜 세월 동안 도망자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늘 의지하며 살았던 삶이 몸에 베여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새벽 기도 시간에 두 번째로 많은 비중을 두는 부분은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데 둡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삶 외에 또한 저와 함께 계신 성령님의 지시를 늘 따르며 살아가는 데 온
“예전에는 심장 박동수를 빠르게 하는 사람이 좋았다. 요즘에는 심장 박동수를 느리게 하는 사람이 좋아졌다.” 노수봉 저(著) “뜨끈뜨끈 광고 회사인의 메모장”(북클라우드, 96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람이 있고, 가슴을 잔잔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 다 좋고 필요하지만, 후자에 대한 평가절하가 많았습니다.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람은 깃발을 꽂게끔 돕지만, 가슴을 잔잔하게 하는 사람은 ‘풍경’을 보게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청미래, 280쪽)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으면서 본다고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기차가 좋은 것은 ‘앞’을 보여주지 않고 ‘옆’ 풍경을 보여주며 생각에 잠기게 한다는데 있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자주 그림에서 떨어져 그 대상을 본다고 합니다. 그래야 사물의 형상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풍경을 본다는 것입니다. 들숨 뿐 아니라 날숨이 있어야 호흡을 하듯이, 일 뿐만이 아니라 창조적인 안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 높이 날아 보기를 원합니다. 더 넓게 보기 위해서 더 높이 떠오르시기를 바랍니다. 더 깊이 보기 위해서 뚫어지게 쳐다보기를 원합니다. 한반도 창공을 높이 떠올라 지구를 통찰해 봅시다. 러시아의 흰 곰이 얼음 구멍에서 먹이를 찾아서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남쪽의 섬에서는 물개가 먹이를 찾아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 저 태평양 넘어 독수리가 언제 보았느냐는 듯이 자기 먹을 것만을 찾고 있습니다. 높이 떠올라 더 높이 떠올라 서쪽을 보세요. 수 만년 묵은 고목나무가 새순이 돋아났습니다. 동남아를 쳐다보세요. 야자수 그늘이 점점 사라지고 고목나무의 새순이 그늘을 이루고 있습니다. 날개를 활짝 펴고 한반도 위 창공에 떠올라 보세요. 휴전선 토막한 땅 속에 두더지가 먹을 것을 찾아 남진하다가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땅 위로 올라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래의 지도자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교육, 종교 등 미래의 지도자는 세계 속에서 국가관을 일깨워주고 한국인의 민족혼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이제는 양떼를 어느 곳으로 인도할 것입니까? 산 좋고 물 좋은 곳,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곳이 어디인가?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
미래를 명확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현실을 정확하게 관찰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또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과거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래 볼 수 없는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다면 또한 할 수도 없습니다. 눈이 먼 소경은 아무도 인도할 수 없습니다. 혹시 인도한다 할지라도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질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지도자란 과거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하고, 현실은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어야 하며, 미래를 정확하게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과거와 현실과 미래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미래의 지도자입니다. 만약에 과거와 현실과 미래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얘기할 수 없다거나 내다 볼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아무도 인도할 수 없는 소경과 같습니다. 소경은 인도자가 될 수도 없고 길가는 나그네에게 이정표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듯이 앞을 내다볼 줄 아는 능력도 없는 사람이 길가는 이들에게 이 말 저 말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데 사흘길이 되는 길을 떠나라고 재촉하는 지도자도 있습니다. 빗자루 들고 마당 쓸러 나가는 사람에게 마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 나타난 영광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독생자’로 번역된 단어(‘모노게네스’)는 본래 “단 하나의” 혹은 ‘유일무이한’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이다. 요한은 예수의 존재의 특별한 성격 곧 하나님과 유일한 관계를 가진 존재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한다(1:18; 3:16, 18). “아버지의 독생자” 혹은 “하나님의 독생자”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세상의 어느 누구도 혹은 세상의 어떤 존재도 가질 수 없는 특별하고 유일무이한 관계의 존재 곧 창세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의 존재이셨으며, 화육하셨고, 죽으셨으며, 부활하심으로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셨고, 아버지와 아들의 신비한 연합이 완결되셨으며, 이제는 보혜사 성령의 존재로 그의 제자들에게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런데 독생자라는 용어에서 중간에 위치한 ‘생’은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의 출생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출생한 것은 동정녀 출생의 신학에서 부각된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요한은 동정녀 출생의 신학과는 다른 화육의 신학을 부각시킨다. 화육의 신학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중생과 칭의의 동시성 개념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신분을 제공하여 의롭게 만드는 칭의와 새 생명 곧 새로운 본성을 부여하는 중생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롬5:18; 요5:24). 이처럼 카너는 ‘의롭게 만드는’ 칭의의 경험적 측면을 통해 중생과의 관계를 설명했다. 반면에 무디는 중생의 당연한 결과로서 칭의가 발생하지만, 이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 관계라고 간략하게 표명했다. 2. 중생과 성화와의 관계 대그는 중생을 성화와 연결하여 설명하기를 선호했다. 이는 그가 중생과 성화의 행위가 지속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중생한 자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성령과 육신의 소욕 사이의 지속적인 적대행위를 증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갈5:17). 그래서 대그는 중생과 성화의 시작을 동시적인 것으로 파악했다(빌2:13). 보이스는 대그와 달리 중생이 성화보다 선행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가 중생을 성화보다 앞선 것으로 보는 이유는 사람이 중생을 통해 새로운 본성을 획득해야만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중생과 성화가 본성적으로 하나의 변화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같은 강조는 중생과 성화 모두가 시작부터
사람을 위해 돈을 만들었는데 돈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됩니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이 있는데 너무 좋은 옷을 입으니 내가 옷을 보호하게 됩니다. 사람이 살려고 집이 있는데 집이 너무 좋고 집안에 비싼 게 너무 많으니 사람이 집을 지키는 개가 됩니다. 이런 것을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어느 순간 거꾸로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니까 의미의 노예가 되고 행복하지 못한 겁니다.전도(顚倒)는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거꾸로 보는 것이고 몽상(夢想)은 헛된 꿈을 꾸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꿈인 줄을 모르고 현실로 착각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① 많은 것을 곁에 두고 다 써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이상한 현대인(現代人) ② 미래의 노후 대책 때문에 오늘을 행복(幸福)하게 살지 못하는 희귀병에 걸린 현대인(現代人) ③ 나누면 행복(幸福)이 온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알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현대인(現代人) ④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현대인(現代人) ⑤ 늘 행복(幸福)을 곁에 두고도 다른 곳을 해매며 찾아다니다가 일찍 지쳐버린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