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포자기”라는 유머가 있습니다. “자기가 할일은 포기하고 자기가 하지 말아야 할 일에는 기분 내는 것” 그것이 자포자기입니다. 인도의 민담입니다. 고매한 스승 밑에서 수행을 하던 제자가 스승에게 달려왔습니다. “스승님, 드디어 제가 물 위를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습니다. “애 많이 썼구나. 그런데 이 강을 건너는 배 삯이 얼마더냐?” “20루피입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너는 20년 동안 그 고생을 하고 20루피를 번 것이니라.”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거의 경지에 오른 제자 하나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어떻게 하면 하늘을 날 수 있습니까?”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하늘을 나는 일은 새들에게나 맡겨 두세나….”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걸어서 강을 건너고, 새들처럼 하늘을 날아다닌다면 그는 초능력자일까요? 아니면 질서 파괴자일까요? 아니 그보다 인생을 허비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옳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영광 받으실 때는, 강을 걸어서 건너고, 하늘을 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하라고 하신 그 일을 이루며 살았을 때입니다. 아무리 신발이 예뻐도 발에 맞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동방의 나라 조선에서 평생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던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장기려 박사입니다. 장기려 자신은 부인했지만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모델이라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이름을 날렸던 의사였습니다. 일제치하 1928년 17세에 경성의전(서울의대) 입학시험을 보면서 “하나님 이 학교에 입학시켜 주시면 평생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몸 바치겠습니다”라고 서원했고, 1932년도에 수석으로 졸업한 뒤 그 당시 가장 뛰어난 수술 실적을 소유한 백인제 박사 밑에서 조교로 있으면서 수련을 받았습니다. 장기려는 스승으로부터 경성의전 교수 또는 도립병원장으로 가라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코스를 제안받지만 정중히 거절하고 평양의 후미진 병원으로 향합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었습니다. “치료비가 없어 평생의사 얼굴 한 번 못보고 죽는 사람을 위해 일하고 싶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키셨고 병든 자들을 기도로 고치셨는데 그는 의술로써 그리고 더 크게 인술(仁術)로써 사람들의 가슴에 사랑을 심었습니다, 해방 이후 김일성의 외삼촌 강양욱이 조선기독교 연맹을 조직하고 그에 반대하는 목사들이 탄압 받던 시절, 김일성 대학에 재직하던 그 역시 북한 보위
“사전오기의 신화, 홍수환 선수가 한 이야기다. ‘지금까지 링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일련의 어려움들을 겪으면서 저는 인생이 링보다 무서운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링에서는 두들겨 맞아 그로기 상태가 되면 말려 주는 사람도 있지만, 인생에서는 맞고 떨어지면 아예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아요.’” 최윤규 저(著) ‘물속의 물고기도 목이 마르다’(책이 있는 마을, 13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싸움의 3대 요소’라는 유머가 있습니다. 펀치력, 맷집, 그리고 말리는 사람입니다. 머리카락도 가른다는 취모검(吹毛劍), 마이클 타이슨 같은 펀치력이 있어야 싸움에서 이깁니다. 그런데 맷집이 없으면 허사입니다. 실력이 좋아 열 대를 때린다 해도 한 대는 맞게 됩니다. 한 대 맞고 넘어지면 열 대 때린 것도 소용없습니다. 바다에 파도가 항상 있듯이, 인생에는 바람이 항상 붑니다. 따라서 바람에 흔들거리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잡초가 강한 것은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을 흔들되 뿌리를 깊게 하기 때문입니다. 맷집입니다. 거인이나 대가들의 특징 중 하나는 좋은 의미의 둔감력(鈍感力)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눈, 그 독한 입들을 견뎌내는 둔감력이 있어
어느 한 교인이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개새끼”라로 했다며 이집 저집에 다니며 성토를 했다. 듣는 사람마다 “목사님이 욕을 해서는 안 되지! 하나님 말씀만 전해야지!”라고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사건의 전후 실체는 이랬다.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한 예화의 서두에 “옆집 개가 새끼를 일곱 마리를 낳았는데 개새끼들이 너무나 귀엽고 예쁘다”는 말을 했다. 이해력이 부족해서 온 사소한 말로 시작되었지만 한 목회자를 욕쟁이 목사로 만들었다. 잘못 듣고 잘못 말을 전하는 작은 실수로 인해 교회 안에서도 크고 작은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실수! 그러나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그의 책 ‘정신분석학 입문’에서 “성적 리비도”나 “꿈”에 대한 주제보다도 먼저 맨 첫 장에서 ‘인지왜곡’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 즉 비정상적인 사람은 잘못 듣고, 잘못 말한다는 것이다. 잘못 들은 것을 말하기 때문에 왜곡된 말을 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인지왜곡자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은 가위질해 버리고, 듣고 싶은 말만 잘라 모으는 고도의 편집기술을 통해 ‘거짓을 진리로, 진실을 거짓으로’ 둔갑시켜 듣는 이들의 마음을 현혹시킨다
Ⅴ. 중생 교리의 실제적 적용 남침례교 조직신학자들이 중생 교리를 전개하면서 주로 사용한 성구는 요한복음 3장 3~8절과 디도서 3장 5~8절 말씀이다. 요한복음 3장 3~8절은 중생이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된 말씀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3장 3~8절과 디도서 3장 5~8절 말씀은 침례중생설로 왜곡되거나 중생자 교회회원권을 지지하는 말씀으로 활용됐다. 1. 중생과 하나님의 나라(요 3:3~8) 대그와 보이스 그리고 무디는 요한복음 3장 3~8절에 나타나 있는 중생을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해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멀린스는 중생과 하나님의 나라 관계를 아주 간략하게 묘사했고, 카너는 이를 좀 더 상세하게 설명했다. 멀린스는 요한복음 3장을 중생에 관한 고전적인 말씀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그는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 3장 3~5절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가 서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공관복음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건을 다루지만, 요한복음은 그 사건을 인식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더 강조한다는 것이었다(요 5:24~29; 11:25~26). 멀린스는 이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중생과 관련시켜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에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기 위해 사람을 부르시고 사용하신다. 그러나 한 사람보다는 옆에 누군가를 붙여서 함께 일하신다. 몇 사람을 살펴보면, 모세에게는 아론을, 다니엘에게는 세 친구들을, 베드로에게는 요한과 야고보가, 그리고 바울에게는 실라, 바나바 외에 여러 사람이 함께 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함께 하여 더 아름답고 큰 일을 이뤘음을 볼 수 있다. 목회를 하면서도 좋은 멘토와 친구를 만나고, 좋은 교우들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사역을 하며 함께 하나님을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좋은 동역자를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옆 가까이에서 서로 만날 수 있는 동역자도 어느 땐 한 몸처럼 가깝다가도 조그만한 일로도 원수가 되기도 한다. 또 여러 가지 일로 떨어져야만 하는 일들이 생겨 함께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목회를 하며 부족한 것이 투성이인 모습으로 사역을 혼자는 다 할 수 없음에, “동역자를 붙여 주세요.” 간절히 기도했다. 어느 날 마음속에 소리가 들렸다. “네 옆에 있지 않느냐?” 눈을 들어 몇 몇의 얼굴과 이름들을 떠올렸다. 딱히 확신이 안 생겼다. 지나고 나면 그래도 돕는 자라고 생각했던
부산 보수동 어느 헌책방에는 ‘사람이 만든 책보다 책이 만든 사람이 더 많다’는 글귀가 벽에 붙어있다. 주인에게 어떤 책이 더욱 그렇느냐고 물어봤더니 당연히 성경이라고 대답을 해줬다. 전에 교회에 출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성경의 위대함을 생각해봤다고 말했다. 전광 목사라는 이가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를 두고 ‘성경이 만든 사람’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 존 워너메이커는 일생동안 성경을 사랑했으며, 체신부 장관이 되어 인터뷰할 때에 “장관은 부업이고, 주일학교 교사가 본업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어린이 사역에 헌신하고 봉사했었고, 크리스천 기업가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 YMCA건물을 지어주는 일을 했었는데 그를 가리켜 성경이 만든 사람이라고 전했다. 나를 예수님과 교회로 인도해준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대학 시절에 연설문에 잠시 관심을 가진 때가 있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문을 모은 책을 발견하고 관심 있게 읽게 됐다. 그의 ‘사랑’이란 제목의 연설엔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와 긍휼을 전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신데(요1:3) 그분을 피조물이며 죄인인 인간들이
카너도 멀린스와 같이 “하나님 편과 인간 편”의 전개 구조로 그의 중생관을 전개했다. 그에 의하면, 중생을 체험한 사람은 자신이 중생의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오직 중생은 인간이 하나님께 복종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아울러 카너는 중생을 가져오는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반응에 의한 것임을 강조했다. 하나님이 제공한 구원의 선물을 인간이 믿음을 통해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구원을 주시고, 인간은 그 구원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카너는 중생의 과정에서 인간이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반응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카너는 멀린스와 같은 중생관 전개 구조를 갖고 있지만 인간 편의 능동성을 그보다 더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디는 에베소서 2장 8절에 근거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의 구조를 세운 후, 여기에 요한복음 1장 16절과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연결시켰다. 즉 요한복음 1장 16절의 “은혜 위에 은혜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측면을 보여준 것이고, 로마서 1장 17절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씀은 인간의 측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무디는 요한이 구원을 위에서
지금까지 요한복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에 나타난 기독론적 내용을 살펴봤다. 이제는 “사람의 아들” 곧 ‘인자’ 칭호가 사용된 구절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요한복음에는 인자 칭호가 13회 나온다.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아들로 제시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신성을 부각시키는 반면 사람의 아들은 인성을 부각시킨다. 인자는 영원한 신성의 존재성을 가진 로고스가 신체를 가진 인간의 존재가 되어(1:14) 공생애 삶을 사셨고 하나님의 뜻을 완결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와 활동을 전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이번부터는 인자가 사용된 말씀들을 통해 요한의 인자 기독론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인자의 첫 번째 사용은 예수님의 공생애 준비과정에서 두 번째 제자 집단과의 만남 사건에서 나온다(1:51). 그 사건은 빌립을 만나시고 제자로 초청하신 후에, 빌립이 그의 친구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를 예수께 데려온 것으로 진행한다. 빌립의 전도를 듣고 자기에게 나온 나다나엘을 가리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
꼰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겪었던 거에 비하면 넌 힘든 것도 아니야.”“내가 해봤는데 그거 안되는 거야. 시간 낭비 하지마.” 선배는 이렇게 말한다. “나한텐 힘들었는데 넌 아닐 수 있어.”“나는 실패했지만 넌 성공할 수도 있는 일이지.” 꼰대는 “나도 그랬으니 너도 그럴 것이다”라고 말하는 반면, 선배는 “나는 그랬으나 너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강주원 저(著)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비로소, 83~84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아재’와 ‘꼰대’의 차이가 있습니다. 썰렁 개그라도 해서 소통하려고 노력하면 ‘아재’고, ‘요즘 젊은 것들은…’ 하면서 위에서 가르치려 들면 ‘꼰대’입니다. 스페인어 ‘꼰데(conde)’는 ‘백작’이라는 고귀한 의미이지만, 자기 반성이 없이 어른 노릇만 하려는 사람을 세상은 ‘꼰대’라고 부릅니다. 꼰대는 나이와 무관합니다. 삶의 태도의 차이입니다. 늙어도 꼰대가 아닌 사람이 있고, 젊어도 꼰대인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세상 풍속을 잘 따라가지 못하지만 느린 몸과 마음으로 늘 반성하며 소통하려는 사람을 아재라고 합니다. 아재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꼰대는 다릅니다. 몸과 마음이 느린 것은 물론이고,
“남편은 자기 생일날 밥을 빨리 안 준다고 상을 엎어 밥상이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상을 새로 안 사고 석 달 동안 땅바닥에 밥을 줬더니 그 뒤로는 상을 안 엎었습니다.” 권정자 외 20인 공저(共著)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남해의 봄날, 127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 때문에, 그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글을 배우지 못했던 우리들의 할머니 스무 명이, 글과 그림을 배워 전시를 하고 책을 냈습니다. ‘순천의 소녀시대’라고 불리우는 할머니들은 막내가 50대 후반, 맏언니는 아흔을 바라보는데, 살아온 생을 모두 합하면 1600년이 넘습니다. 일본군에게 잡혀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친구, 전쟁 중 피란길에 죽은 동생을 업고 온종일 걸었던 이야기, 구멍 뚫린 양말 사이로 보이는 하얀 엄지발가락이 멋있어 보여서 결혼했는데 짜장면 하나 사줄 돈이 없던 가난한 남편 이야기… 영어를 배울 때 “안녕하세요. 선생님”을 “헬로, 디져”라고 해 웃음 바다가 되고… 할머니들의 그림일기에는 한국의 근현대사의 애환이 묻어 있고, 세월이 그리고 웃음과 눈물이 묻어 있습니다. 동네 오빠에게 손목을 잡힌 할머니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한동네 사는 친
일전에 부산 어느 식당에서 H목사님을 만나서 점심식사를 하며 신앙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 목사님은 자신이 경험한 지옥과 천국에 대하여 말해줬다. 다른 사람들에겐 좀처럼 부작용이 없다는 스테로이드 주사를 병원에서 맞고는 체질적으로 맞질 않아 갑자기 실신하였다고 했다. 그때 지옥의 고통과 천국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차례로 경험했다고 하였다. 베드로는 산에서 변형된 주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고 그 곳에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였지만 그 목사님은 천국이 너무 좋아서 그 곳에 있기를 원했더니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알려주더란다. 그래서 깨어나보니 시간은 20여분 지났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둘러서서 근심스런 표정으로 지켜보더라는 것이었다. H목사님의 간증을 듣다보니 오래 전에 고인이 된 한 청년이 문득 기억됐다. 그는 총각으로 중국집 주방장이었다. 식사하러 간 우리가족에게 관심을 보이며 친근히 접근해오길래 교회를 개척하러 온 사람들이라고 알려줬다. 그 청년은 교회를 방문하겠다고 하더니 말한대로 자주 찾아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에겐 심각한 심장병이 있었다. 지금은 심장과에서 혈관이 막힌 곳을 쉽게 뚫기도 하지만 그 당시엔 힘든 수술을 해야만 했다. 그
가끔 사람들이 찾아와 언제든 바다에 나가면 여지없이 이름을 아는 것이든 모르는 것이든 낚시에 고기들이 걸려 나온다. 그럴 때면 “TV에서는 큰 물고기도 많던데 왜 이렇게 작은 것 밖에 없느냐?”는 투정(?)의 소리를 듣곤 한다. 아무리 섬이라도 연안의 갯벌에서 큰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것이 너무 큰 욕심일 것이다. 미국에 처음 도착해 그 당시 미국에서 10여 년 넘게 목회하시는 어느 목사님의 따님을 만나 대화한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라 생활하는 고등학교 학생이었다. 왜 미국이 좋은가 물은 질문에 첫 번째 대답이 “나라가 커서 좋아요”라는 말이었다. 삼천리 반도라고 하는 대한민국은 미국의 52개 주 가운데 하나와 비슷한 영토를 가지고 있다. 누구나 대한민국에서 자라 이곳에서 생활하던 것을 뒤로 하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느끼는 것은 “큰 나라구나” 하는 것이다.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도로를 달리며 “이 땅을 나의 손에 주시옵소서”라고 감사와 찬양으로 기도했다. 그런데 넓은 미국 땅에 살지만 마음마저 넓게 하기는 쉽지 않다.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으로 자기에게 유익하면 “미국에 사니 미국 사람처럼 살아야 된다”고 말하고, 한
포인세티아라는 화초가 있습니다. 이 화초의 꽃은 화려한 붉은색을 띄고 있으며 아름다워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화초입니다. 겨울에 피는 특성 때문에 외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장식용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포인세티아가 좋은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춥고 캄캄한 환경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빛이 완전히 차단된 추운 곳에서 특유의 붉은 꽃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포인세티아의 파란 잎사귀가 어둠과 추위를 견뎌내고 꽃을 피워내는 모습은 불굴의 의지를 보는 것 같아 감동적입니다. 만약 포인세티아가 있는 곳에 빛이 새어 들어가면 붉은 꽃에 얼룩이 생깁니다. 심지어 이 화초는 비상구의 아주 희미한 약한 불빛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데 방해가 됩니다. 포인세티아가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철저한 고립과 어둠과 추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도 포인세티아와 같습니다. 고통과 시련은 사람을 더욱 강하게 만듭니다. 행복은 우리가 고난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고난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게 됩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춥고 고독한 시련의 터널을 지나야 합니다. 이 역경의 터널을 거쳐 인간은 비로소 아름답
얼마 전 카카오톡에 연결된 새로운 친구라는 분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답이 없다 한참 후에 연락이 왔다. “누구세요?” 나중 이야기하기를 “카카오톡에 나오는 ‘새옹지마’라는 말을 보고 목사님 인줄 몰랐다”는 말에 웃음을 지었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은 잘 안 쓰는 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새옹지마” 변방에 사는 노인의 이야기로, 기르던 말이 도망쳐 집을 나가자 안타까운 마음으로 위로의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무슨 복이 될지 어찌 알겠소?”라고 대답했다. 몇 달이 지난 후 집을 나간 말이 좋은 준마를 하나 데리고 다시 들어왔다. 사람들은 축하를 하며 기뻐했지만 노인은 “그것이 무슨 화가 될는지 어찌 알겠소?” 자중했다. 집에 좋은 말이 생기자 말 타기를 좋아하던 노인의 아들이 말을 타고 달리다 다리가 부러졌고 사람들은 안됐다며 이를 위로했다. 그러나 노인은 “이것이 혹시 복이 될는지 누가 알겠소?” 대답했고, 그 말은 얼마 후 나라에 전쟁이 생겨 장정들이 모두 싸움터로 나가 열에 아홉은 죽었지만 노인의 아들은 장애의 이유로 살아남았을 때 이해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내게는 10여 년을 머나먼 곳에서 타향살이를 하던 시간에 현실에 닥친 막막한 어려움이 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