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입니다. 짧은 문장으로 긴 울림을 주는 시입니다. 1991년 이후 서울 광화문의 교보생명 본사 건물에 걸린 ‘광화문 글판’ 가운데 사람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가까이 자세히 그리고 깊고 오래 가야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습니다. ‘만남’이 있고 ‘스침’이 있습니다. 만남이 깊어지지 않고 인격의 변화가 없을 때, 만남은 스침이 됩니다. 음식을 씹지 않으면 소화 불량에 걸리고, 글도 음미하지 않으면 그저 의미 없는 낱말의 나열일 뿐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당신이 대상에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지 않은 것이다.”(If your photographs aren't good enough, you're not close enough) 수 많은 광고 카피로도 쓰이고 있는 이 고백은 전설적인 종군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의 사진 철학입니다. 그는 포토저널리스트로서 그 시대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담아내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며 대상에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는 1954년 41세의 나이로 인도차이나전을 취재
교단 총회로부터 목회 근속 30년 공로패를 받았다. 나로선 그것이 감사했고, 또한 한 교회에서 30년 넘게 목회했다는 게 매우 자랑스러웠다. 전도사로 개척교회를 시작했을 때 선배 목사님이 10년을 인내하면서 목회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라며 열심히 하라고 권면해줬을 때 그렇게 오랫동안은 할 자신감이 없었다. 예전의 교편생활을 뒤돌아보니 전근을 자주 다녔었다. 심한 방랑벽 탓으로 1년, 2년, 심지어는 부임한지 6개월 만에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겠다고 신청서를 제출한 적도 있었다. 그랬더니 교직원 회의석상에서 교장으로부터 호되게 책망을 받았다. 옛날엔 머슴도 남의 집에서 3년은 일해주고 옮기는데 교사가 교육관이 얼마나 잘못 됐기에 6개월만에 전근가겠다고 경거망동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교장이 전근 신청서를 받아주지 않음으로 그 학교에서 4년 6개월을 근무했다. 내가 한 교회에서 30년 넘게 목회할 수 있었음은 부흥 성장이 잘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온갖 어려움과 시련이 계속됐다. 그 중에 이런 일례로 개척한지 3년이 지나니 구역모임이 4개나 생겨났다. 더 열심히 하면 교인 수도 늘어나고 직분자들도 더 많이 세워질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어느 무렵
대부분 노인들만 있는 시골에서, 매일 학교를 마치고 센터에 오는 29명의 아이들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지역아동센터라는 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 아동들이 대부분 가정 형편과 처지가 열악한 아동들이다. 그래도 핵가족 시대에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며 어느 땐 웃기도 하고, 어느 땐 서로 사소한 다툼으로 얼굴을 붉히기도 하지만 공동체 생활을 익혀 나가며 밝게 웃는 모습에 함께 행복하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말을 듣지 않고 다른 친구들을 괴롭히는 아동에게 “그럼 계속 같이 생활할 수 없어”라고 꾸지람을 했다. 그런데 대뜸 “그럼 나 안 올 테니 내 밥 값 줘요”라고 하는 것이다. 그 말에 할 말을 잃고 멍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아이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집에서 부모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을 테고, 그것이 말로 나온 것일 것이다. 자기가 빠지면 밥 값이 남으니 달라는 말이다. 아동이 빠지면 식비도 청구할 수 없다는 생각은 못한 것이다. 오래 전 목회를 하며 교회 건물과 교회 마당을 일주일에 하루만 사용하는 것이 안타까워 시작한 것이 아동복지시설이었다. 매일 아이들이 교회 마당에서 놀고 교회 건물을 사용하게 되고 그러면서 아이들을 만나는 기회가 되어 시작
어떻게 교회를 생명력 있게 할 것인가? 어떠한 교회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까? 탈봇 신학교에서 교회성장학을 가르치는 게리 멕킨토시 박사는 건전하고 생명력 있는 교회 성장을 위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최대한 헌신하고 믿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정적으로 소통하는 교회는 성경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는 건강한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소유하고 풍성한 영적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인도하심을 분명하게 따르기 위해서 주의 몸 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적으로 건실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생명력 있는 메시지로 채워진 설교가 영적 공동체 가운데 선포돼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말씀이다. 따라서 주의 몸 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공급을 받고 가르침을 따를 때 영적 생명력이 나타나게 된다(시1:1~3; 사55:11; 요5:39; 행20:32; 살전2:13; 딤후3:16~17; 벧전1:23; 벧후1:2~4; 히4:
이와 같이 고령화로 인한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종합해보면 늘어나는 노인인구와 시대적 상황에 대비한 노인목회가 절실하게 요구된다는 점이다. 노인사역에 대한 전문지식과 사명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이 나타나지 않은 채 노인들의 필요를 일시적으로 채우는 시도로는 궁극적인 문제해결이 이뤄질 수 없기에 노인사역에 관한 구체적인 인식이 전환이 요구되며 노인사역에 있어서 재정적인 측면을 넘어선 특단의 대책이 요구된다. 사역의 방법, 예산, 복지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포함한 제도 개선 등 가용한 수단을 총동원해 다가올 위기를 효과적으로 대비해야 할 것이다. 노인사역이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성경적 관점을 통해 노인들의 삶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인지하며 그들의 무한한 잠재력과 내재한 능력을 발견하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 살아가도록 돕는 일에서 이뤄져야 한다. 3. 노인사역에 대한 성경적 관점 1) 창조질서의 한 과정으로 노화를 이해 성경적인 의미에서 노화를 살펴보면 창조질서의 한 과정으로 태어나고 성장하며 발달의 과정을 겪다가 필연적으로 다시 쇠약해지는 단계를 거치게 된다. 단계별로 의미와 가치를 지니며 과정별로 이루어지는 변화에 적응하려면 긍정적으로 하나님의
‘목회’라는 것은 이 넓은 의미의 사역에 포함되는 것일 뿐이며 그것은 목회자로의 소명감을 가지고 헌신한 사람들의 사역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목회 사역’을 하는 것이고, 평신도는 ‘평신도 사역’을 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목회자는 ‘교역자’ 또는 ‘목회자’라고 구별해 부르고, ‘사역자’라는 말이 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다. 가르쳐야 할 또 한 가지는 사역이 교회 안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교회 밖의 세상이 평신도 사역의 주된 자리라는 점이다. 목회자에게는 교회에서의 평신도 구비사역이 그들 본연의 ‘봉사의 일’이다. 하지만 평신도의 ‘봉사의 일’은 교회공동체 안으로만 국한돼 있는 것이 아니며, 주로 세상 삶의 자리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이 대외적 평신도사역을 통해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실제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성도가 ‘봉사’를 곧 ‘교회 봉사’와 동일시하고 있다. 이런 잘못된 인식은 평신도들 뿐 아니라 목회자들에게도 많기 때문에 평신도에게 올바로 가르치려면 먼저 목회자의 인식이 정립돼야 할 것이다. 송인규도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본디 이 노랫말은 ‘얼씨구 절씨구 지하자졸씨구’입니다. 한문으로는 이렇습니다.‘얼씨구 만씨구 지하자졸씨구(蘖氏求 卍氏求 至下者卒氏求)’ 여기서 ‘얼씨(蘖氏)’란 세상에서 멸시 당하는 서자(庶子)의 씨를, ‘절씨(卍氏)’란 스님의 씨를 말합니다. ‘지하자졸씨(至下者卒氏)’는 세상의 가장 밑바닥 인생에서 살다가 전쟁터에 나가 가장 궂은일을 해야 했던 졸때기의 씨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구나!”는 ‘서자의 씨라도 중의 씨라도 졸때기의 씨라도 받아야겠네’ 하는 노래였습니다. 사실 슬픈 노래이고, 절박한 상황의 노래이고, 그 슬픔을 극복한, 아니 극복하려고 하는 달관의 노래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인생을 망치는 가장 큰 슬픔이 바로 자신이 얼씨라는 것, 절씨라는 것, 그리고 지하자졸씨 출신이라는 사실에 좌절하며 무기력할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큰 아픔을 안고 태어났거나, 큰 아픔 속에서 자라났다 하더라도 복의 통로가 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다섯 명의 여인들이 나옵니다. 다말, 룻, 라합, 우리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룻기1:16~17) 2012년도 3월의 일입니다. 저희 아들이 어느 날 심각한 표정으로 저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 저 결혼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너무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한 나머지 배우자가 될 여자아이에 대하여 궁금한 몇 가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첫 질문은 “신앙생활은 하겠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안 합니다” 였습니다. 이 아이는 저희집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며, 신학교까지 나온 녀석인데 불신자 며느리를 데리고 들어오겠다는 황당한 결정에 저희 부부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 생각이 앞서기보다는 하나님 뜻을 구하는 눈과 귀를 열어놓고 깊은 생각을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의 입장이 아니라 이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얼마나 좋으면 그런 아이랑 결혼하고 싶어 할까?” 싶어 “그럼 한번 데리고 와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음 날 아침, 그것도 9시에 데리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젊은 세대는 이러한 현실을 고려해 은퇴 후 노후생활을 대비하고 있을까? 우리나라 30~50대의 중산층 10명 가운데 6명은 노후준비가 미흡해 은퇴 후 노인빈곤층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조사 결과를 나왔다. 은퇴 전문가들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은퇴를 맞이할 경우 노인 70~80%가 빈곤층으로 전락할 것으로 예측했다. 미래의 한국사회는 고령화와 함께 노년빈곤이라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이와같이 재정능력이 감소하는 상황은 기독교인에게도 동일하게 발생할 것이다. 여기서 한국교회가 주목해야 할 점은 재정능력이 열악한 노인인구가 교회 내에 급증하는 현실이다. 교회연령의 고령화와 노인층의 재정능력 감소현상은 결과적으로 교회의 재정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헌금할 여력이 없는 성도들의 증가하는 상황에서 미래를 위한 사역의 경비를 줄어야 하는 재정적 압박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이로 인해 교회 내의 재정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다가올 재정위기가 인지하며 대비하고 있을까? 교회가 상환해야 할 부채총액을 살펴보면 가까운 미래의 닥칠 재정위기의 심각성을 교회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3년 기준
목회자의 평신도 구비사역에서 추구해야 할 ‘성숙’이라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수준을 향하여 “범사에” 있어서 전인적으로 성숙해 나가는 것이다(엡 4:13~15). 그런데 교회의 평신도교육은 성숙함보다도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역자를 만들어내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제자훈련’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대다수의 평신도 훈련이 영적 ‘재생산’을 목적으로 해 전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교회나 선교단체의 양적 성장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송인규는 교회가 성도들에게 봉사의 당위성을 설득력 있게 가르쳐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어떤 것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즉 “그런 내용의 교육과 훈련이 교회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거나 목회자의 목회 전략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꼭 필요하다거나 하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평신도 구비사역은 ‘일꾼’을 양성하는 것보다는 성도 개인의 성숙을 돕는 데 우선적인 목적을 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성숙함이 자연스럽게 ‘봉사의 일’로 표출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1. 내 인생의 시간에 주일이 있어 좋은 이유 1) 각박한 세상살이 잠시라도 접고 하늘나라 기쁨으로 충만하게 채울 수 있어서. 2) 날 위해서만 살았던 한 주간, 하루라도 주를 위한 날로 온전히 섬길 수 있어서. 3) 날 이용하고 해칠 사람들이 아닌 날 사랑하고 기도해줄 이들을 만날 수 있어서. 4) 내 생각과 주장만 펼치며 살다가 조용한 하나님 음성에도 귀 기울일 수 있어서. 5) 국수 한 그릇이지만 이 세상 그 어느 산해진미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맛으로성도들과 함께 먹을 수 있어서. 2. 내 인생의 모임에 교우들이 있어 좋은 이유 1) 지위고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와도 차별 없이 지낼 수 있기에. 2) 누구에게도 말 못할 속 얘기도 터놓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나의 일처럼 기도해주기에. 3)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몸 아플 때든, 축하받고 위로받을 일 있을 때 달려와 주는 이들이기에. 4) 어떨 땐 먼 친척들보다도 더 친근하고, 더 자주 만나는 관계이기에. 5)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들을 보면서 나 자신도 다듬어갈 수 있기에. 3. 내 인생의 고백에 찬양이 있어 좋은 이유 1) 찬양으로 하나님을 향한 내 마음 담아 드릴 수 있어서. 2)
2) 노인들의 역할 상실과 새로운 리더십 형성의 어려움 한 방송사는 “미리 가본 2050년, 저출산 고령사회”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2050년이 되면 전체인구의 40%를 넘는 노인인구의 지지를 바탕으로 의석의 절반을 노인세대가 차지하게 될 것이며, 이로 인해 젊은 세대와의 갈등이 정점에 이를 것이란 예측을 보도했다. 이러한 갈등의 양상은 노인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교회에서 두드러질 것이다. 최윤식은 2028년경이 되면 전체 교인의 60~70%가 55세 이상 은퇴자일 것으로 예측했으며 장년층에서 60~70대가 가장 많은 연령대를 형성할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로 교회 내 노인인구는 증가하고 있으며 연령구성비를 볼 때 시간이 흐를수록 노인세대가 주력세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기존의 노인들의 역할과 교회의 리더십을 두고 노인세대와 젊은 세대의 갈등이 불거질 것이다. 수적 우위와 영향력 면에서 젊은 세대를 능가하는 노인세대가 기득권을 고수하며 리더십의 역할 기간을 연장한다면 한국교회는 새로운 리더십을 형성하는 데에 난항을 겪게 될 것이다. 지속적인 리더십의 노령화는 젊은 세대를 끌어들여 미래의 역동적인 사역을 감당하는데 장애물이 될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절망을 이야기한다. 예배당 건물과 시설은 수십 전 전에 비하여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교인들의 성경 지식과 교양은 이 땅에 복음이 첫발을 내딛은 백 수십 년 만에 가장 충만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세상 속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더 위축되고 고립되어 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더 걱정한단다. 캠퍼스의 선교기관들은 과거에 비해 조직이 크게 방대해지고 전문화됐다. 그러나 최근 조사는 지난 십년 간 캠퍼스 기독교 동아리의 소속 학생 인원이 정확하게 반 토막이 된 것을 확인시켜 준다. 현장의 장기 사역자들일수록 동일한 수고를 해도 열매가 예전 같지 않음에 당황하면서도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능란하다. 현장 주변에는 냉혹한 현실을 설득력 있고 조리 있게 분석해주는 전문가들이 넘쳐난다. 다수의 종교사회학자들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 대해 암울한 전망과 예리한 분석으로 시한부 사망 선고를 내린 지는 이미 오래다. 그렇다면 이 시대 한국 교회의 절망은 필연인가? 이 시대 우리 현장 사역의 초점이 숫자 놀음에서 머무는 한 이러한 절망은 마땅하다. 그러나 이 절망의 시대 한복판에서도
교회 내 노인인구 증가와는 달리 주일학교 학생 수의 감소추세는 이전과는 다른 목회환경의 변화를 예고한다. 장기적으로 교회의 평균연령이 늘어날 것이며 노인인구 증가에 따라 그들이 교회 내의 주력세대가 되어 영향력과 요구가 증대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대비해 노인들의 역할과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노령화에 따르는 문제점을 파악하고 성경적인 대안을 마련해 목회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나가야 한다. 2. 고령화로 인한 한국교회의 문제 1) 노인들의 욕구와 필요에 대한 문제 노인들은 사회적 역할변화와 신체적 퇴화현상을 경험하며 욕구의 감소 내지는 결핍으로 인해 삶의 질이 저하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신체적, 사회적, 심리적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육체적으로는 신체감각과 기능저하로 인해 적응능력이 감소하고 사회적으로는 퇴직에 따른 경제적 수입감소와 기존에 사회에서 감당하던 역할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본적 필요나 욕구의 결핍으로 인해 삶의 질이 감소하며 심리적인 불안이나 절망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 문제를 방치하게 되면 정서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일으켜 노인 개인뿐만
목회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영적 목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목회의 본질이 교육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먹이고, 보호하며, 치료하는 것이 목양이며,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먹이는 것이요, 말씀을 가르쳐서 성도들을 잘못된 사상과 행습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며, 말씀을 가르쳐서 영혼의 약한 것과 병든 것을 치료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했듯이, 목회자는 가르치기를 잘해야(딤전 3:2)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도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과 마찬가지로 목회를 위한 중요한 근거이다. 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받은 성도가 되게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써 “제자를 삼으라”는 것으로, 역시 교육적인 명령이다. 그래서 ‘교육적 지상명령’(The Great Teaching Commission)이라고도 일컫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 자신도 가르치는 일을 통해서 ‘목양’하셨고 성경은 전형적인 그분의 모습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목회자가 목회라는 것을 교육적인 사역으로 보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 평신도신학 발전에 크게 공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