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예수는 세 번째 현현 사건에서 제자들이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베드로와의 대화에 집중하신다. 이 장면에서는 부활의 주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가 중심을 이루며 그 대화의 내용은 주로 베드로의 목자로서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이 장면은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를 부인한 것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실패로부터 그의 회복을 다룬다.예수는 베드로에게 그가 예수를 사랑하는가를 세 번 질문하고 베드로는 예수에 대한 그의 사랑을 세 번 확인시키며 예수는 베드로가 그의 양을 먹이도록 세 번 위임한다. 예수의 삼중 질문과 그 후의 삼중 명령은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한 것과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13:38; 18:17, 25~27; cf. 막 14:66~72parr.). 그 연결이 직접적으로 언급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보기는 더 어렵다.원문에는 세 번에 걸친 질문과 대답에서 단어들(특히 ‘사랑하다’는 동사)이 변경되었다. 그래서 이 변경이 주는 의미의 차이에 관한 많은 논란이 제기되었다. 예수의 연속된 질문이 베드로와의 관계 회복에 역점을 둔 반면, 예수의 명령은 베드로의 목회자로서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과 관련하여 여기서 베드로에
알려진 바와 같이 신곡(La Divina Commedia)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시성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의 종교적 대 서사시이다.단테의 시대는 절대 권력을 가진 교회가 성경 번역과 보급을 금하고 연옥교리를 만들어서 죽은 자를 위한 제사와 헌납(獻納)을 권장하고 면죄부를 팔던 암흑 시대였으며, 한 편에서는 르네상스가 태동을 꿈꾸고 종교개혁 운동이 기지개를 켜던 때였다.단테가 어두운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옛 로마의 시인 버질(Publius Vergilius Maro, 70~19BC)이 나타나서 단테를 지옥과 연옥으로 안내한다. 단테는 지옥에서 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와 성물과 성직을 매매한 죄로 지옥에 떨어진 교황 니콜라우스 3세 등 수많은 영웅호걸과 명사들을 보았다. 연옥을 지나 천국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버질은 자기는 아직 천국에 들어갈 만큼 참회하지 못해 더 이상 갈 수 없다면서 단테가 사랑했던 소녀 베아트리체를 데려다주고 사라진다.이 작품에는 사후 세계의 정황과 시인이 만난 사람들이 현실처럼 묘사되어 있어서 밀턴(John Milton, 1608~1674)의 실낙원(Paradise Lost, 失樂園)과 함께 문학적
광복과 해방, 그리고 자유를 돌이켜 생각나게 했던 8월도 지나갔지만 그 몇 주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 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그 어떤 가치로도 바꿀 수 없는 것, 바로 자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70년 전 일제 36년의 식민통치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어 그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우리들의 눈으로 세계를 돌아보면 아직도 수많은 국가의 국민들이 그들의 국가와 정치권력들에 의해서 폭정과 폭압, 폭력에 시달리며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다.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죽음과도 바꿀 수 없는 자유가 승리하지 못하고 자유가 구속 당하고 있다. 소위 자유국가라고 말은 하지만 경제가치가 인간이 누려야 할 자유의 가치를 억압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타협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자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영적 자유’이며 이것이 ‘참 자유’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자유는 이 세상 그 어떤 자유의 가치와도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 자유’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영적 자유’ 인 ‘참 자유’를 누리게 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3. 완화돌봄의 실제적 방안 제안1) 개인적 접근방안완화돌봄은 당사자와 그 가족 모두에게 질적으로 매우 좋은 나눔과 작별의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완화돌봄에서 목회자는 ‘회고방법’‘추억상자’(memory box)와 ‘화풀이벽’(anger wall), ‘미래편지쓰기’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환자와 그 가족들의 슬픔과 분노 및 마음의 부담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회고 방법은 공식, 비공식적인 방법을 통한 인생의 회고(Life Review)로서 환자와 함께 환자 자신의 삶을 회고해보는 것은 그 환자로 하여금 삶의 의미와 그 속에 담겨있는 영적인 축복과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된다. 첫번째 공식적 방법은 환자로 하여금 사진이나 일기, 개인 기록 등을 통해 기억할 수 있는 대로 1~5년 단위로 주요 사건들과 그 사건들에 대한 본인의 느낌 평가 등을 기록하게 하고 그것들을 환자자신의 관점으로 크게 정리하게 한다. (예: 황금기, 새싹기, 등등.) 두 번째 공식적 방법은 사진들이나 기타 구술하고 그것을 녹음하여 목회자가 활자로 정리하여 환자자신으로 하여금 재구성하게 한 후 의미의 재부여한다. 비공식적 방법으로는 오래된 사진이나 개인소장품, 혹은 방안에
묘지로 뒤덮이는 국토우리나라 어디에서나 고개를 들어 산을 보면 능선 여기저기에 자리 잡고 있는 무덤들이 보인다. 야산(野山)에 묘 하나를 쓰려면 작은 불도저가 숲을 파헤쳐 길을 내고 묘주변의 숲을 모두 제거한 뒤에도 시야를 트기위해 앞쪽에 있는 크고 작은 나무들을 모두 잘라내야 한다. 이렇게해서 무덤 하나를 만들려면 수십 그루의 나무들이 희생되며 숲과 자연 경관 또한 이만저만 훼손되는 것이 아니다.현재 한국은 국토의 1%를 묘지가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가동되는 공장 면적의 3배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현행 장묘제도에 의하면 개인 묘지는 1기당 9평 이하로 제한되어 있어서 일견 합리적인것 같이 보이지만 이것은 우리 국민 한 사람이 살고 있는 주택 면적의 3배에 해당한다. 최근의 한 통계에 의하면 매년 여의도 면적의 1.2배(900ha) 너비의 땅이 묘지로 잠식된다고 한다.우리나라보다 국토가 월등히 큰 중국도 이미 문화혁명 때 화장(火葬)을 입법화해서 산과 들에는 무덤을 만들지 못하도록 조치했고, 일본과 미국과 온 세계를 통틀어 죽은 이를 땅에 묻고 봉분을 만드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잘못된 부활신앙한국인이 화장을 꺼려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조상
‘개망초’, ‘미역취’, ‘민들레’, ‘토끼풀꽃’, ‘곰보배추’, ‘가락지나물’, ‘개똥쑥’, ‘벼룩나물’…. 내게는 그 이름마저 생소한 잡초들, 주변에서 흔히 볼 수는 있다지만 웬만해선 그 존재조차 모를 뿐 아니라 잘 거들떠보지도 않는 잡초들이다. 그런데 어느 누구는 그 잡초들을 맛난 음식으로 탄생시켜 가족은 물론 손님들 대접하는 상에까지 내놓는 이들도 있단다. 얼마 전 우연히 보게 된 ‘흔하게 귀하게 잡초처럼’이란 제목의 KBS-TV ‘인간극장’ 주인공 이야기다. 너무 감동이 되어 예배 시간에도 보여드렸더니 우리 성도들도 꽤 감동되어 하셨다. “우리 삶에도 이런 잡초 같은 은혜들이 많은데, 그냥 무심코 밟아버리기만 했다”는 설교자의 도전엔 꽤 뜨끔들도 하셨다.그러고 보니 누구 뭐랄 것도 없이 사실 나부터도 그랬다. 무슨 화려하고 거창한 꽃과 열매가 아닌 바에야 흔하고 반복되는 일상 같은 잡초 같은 것에는 별 관심도, 별 감사도 하지 못했던 삶이 내게도 있었다. 성도들에게 감사를 가르쳐온 목회자로서 솔직히 부끄러운 일이다. 숨겨진 잡초 같은 보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서 다시 찾아보기로 했다. 잊었던 감사, 익숙해져버린 축복, 흔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6장의 말씀으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옥(이하 ‘음부’와 뜻을 같이함)은 실재하는 곳이라고 그 베일을 벗겨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교회들은 예수님께서 증거하신 지옥에 관한 메시지를 증거 하지 않는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현대 산업사회에서 매일매일 지친 교인들이 주일날까지 유쾌하지 못한 지옥에 관한 메시지를 들어야 하는가? 라는 반론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음부(지옥, Hades)에 대해서 분명히 증거 하셨다. 우리 주님께서 음부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시면서 특정한 두 사람을 말씀하셨다. 그 첫 번째 사람은 부자(rich man)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럭셔리 하게 살았다.” 또 한사람,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있었다. 누가는 부자는 ‘한 부자’라고 기록하고 있고 거지에게는 ‘나사로’라는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 부자가 있어 … 나사로라 이름한” 주님의 말씀에서 호화롭게 사는 부자와 헌데를 앓는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가상의 예화가 아니다. 우리 주님은 바로 그 곳에서 오셨고 그 곳의 말씀을 증거 해 주셨음을 명심해야 한다. 나사로는 땅에서 매일 병들고 헐벗고 굶주리며 살
따라서 목회자는 완화돌봄의 효율성을 위하여 시한부환자를 돌볼 때 사회경제적 지위, 성별, 가족 구성원의 지원 정도 등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고려하여 환자를 이해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임박한 죽음의 현실에 처한 환자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독특한 행동양식을 하게 만든다. 따라서 완화돌봄에서는 이러한 환자 개인 특유의 요소들을 충분히 고려할 때 목회자는 돌봄을 효율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이 밖에도 신체적 상태에 따라 분노와 두려움과 불안이 다양하게 표출되며,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과거 삶에서의 어려웠던 시절의 기억들, 특히 사랑했던 이들과의 사별에 따른 슬픔의 기억이나 자신의 삶에서 의미 있는 성취나 감사하는 일들의 기억을 회상하고 싶어 한다. 특별히 분노는 불치병의 진단 및 확진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하며 불안과 두려움 역시 이 시기에 함께 표출되는 감정이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임박한 죽음과 좀 더 오래 생존하고 싶은 욕구 사이에서 갈등하며, 죽음이 가능한 가깝지 않다고 믿고 싶어 한다. 나이가 젊을수록 또는 이루고 싶은 중요한 일이 있을 경우 죽음을 부인하거나 회피하려는 경향이 높다. 2) ‘확실한 그러나 불명확한’기독교 신앙전통 안에서
인간의 구성요인은 성경의 주요 교리와 직결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과학은 인간을 육체와 정신으로 구성된 하나의 생명체라고 말하고; 성경은 좀 더 구체적으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든 육체에 생기(하임)를 불어 넣어 창조하신 생령(하야), 즉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네페쉬)라고 말한다(창2:7). 그런데 인간의 정신적 실체인 영혼을 영과 혼으로 구분해서 삼분설(三分說)을 주장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삼분설은, 성경에는 영(루아, 프뉴마, spirit)과 혼(네페쉬, 프쉬케, soul)이라는 별개의 어휘가 있고, 또 그것은 각각 독립된 실체로서, 영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선한 일을 도모하며 혼은 육체에 기인한 지정의(知情意)에 속해 있어서 육의 소욕대로 살려고 하는 의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혼’이라고 번역된 ‘네페쉬’(히)와 ‘프쉬케’(헬)는 때로는 영으로, 때로는 영혼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삼분설의 주장과는 달리 ‘네페쉬’가 ‘혼’이 아니라 사람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다. 몇 곳을 제시하면:(1)“야곱의 집 사람(네페쉬)으로 애굽에 이른 자”(창46:27), (2)“사람(네페쉬)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창14:21), (3)“피를 먹는 그 사람
구약성경에 보면, “눈의 아들 여호수아”(수1:1)와 같은 식으로 어떤 사람을 소개할 때 그 부모를 함께 소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좀 심하면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우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삼상1:1)라는 말씀처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집안 내력을 다 소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믿기는 성경은 어느 한 부분도 의미 없이 기록된 것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사람을 소개하는 것에도 다 특별한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에는 하도 같은 이름들이 많다보니까 그 부모와 할아버지까지 내력을 소개함으로 구분했을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아버지 할아버지까지 같은 이름이 많았기 때문에 상당히 혼란스러웠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런데 구약을 보다보면 저도 모르게 어떤 사람에 대한 인상과 기대가 그 부모가 누구인가에 어느 정도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훌륭한 사람이면 그 자녀도 어느 정도는 훌륭한 삶을 살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되고, 그 부모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 하면 그 자녀의 삶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경계해야할 신앙의 형태 가운데 하나가 민족주의적 신앙이다. 심지어 국수주의(Ultranationalism)적 메시지도 아무렇지 않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8월 15일 우리는 광복 70년이라는 뜻 깊은 날을 보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보다 이 날을 축하하고 애국, 애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애국과 애족심이 잘못 되었다면 잘못된 의식을 수정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와 메시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동방의 한 나라 우리나라와 민족을 선택하셨다”고 한다. 이 사상과 신앙은 매우 위험하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선택하셨다. 신약에 와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를 향하여 아모스 선지자는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사회와 국가에 잘못된 안전에 무심할 뿐만 아니라 편승하기까지 한다. 다윗과 솔로몬 치세 이후 가장 번영하고 있는 북이스라엘을 향해 40여년 후에 닥쳐올 국가의 멸망의 위험을 선포 했듯이 잘못된 안전에 취해 있는 대한민국
완화돌봄 대상인 시한부환자의 심리적 변화과정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밝힌 퀴블러-로스(Elisabeth Kubler-Ross)는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환자들이 다음과 같은 심리내적 단계를 겪는다고 설명한다. 첫째, 부정/부인 단계: 자신의 진단에 대한 부정. 때때로 이 단계는 “충격”으로 묘사되어 멍한 상태가 되기도 한다. 둘째, 분노 단계: 초기의 충격과 부정이 지나간 뒤, “왜 하필이면 나인가?” 이러한 분노는 하나님을 포함한 모든 대상에 여러 가지 방법과 표현으로 투사된다. 셋째, 흥정 단계: 환자가 현재 상황 해결을 위하여 의료진이나 하나님께 흥정을 해보는 단계이다. 넷째, 퇴행(의기소침) 단계: 여러 가지 부정적인 신체적 증상을 경험하면서 환자는 자신이 회복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고, 스트레스, 긴장, 죄책감이나 무가치함과 더불어 임박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어 우울하게 된다. 이 때, 환자는 점점 외부와의 반응을 회피하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에 의해 압도당하게 된다. 다섯째, 수용 단계: 이 상태의 느낌은 임박한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함으로 고통과 투쟁이 멈추고 그냥 아무생각이나 느낌이 없는 휴식과 같은 시간이다. 이
필자는 요한복음에서 주 예수의 세 번째 현현 사건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계속 살펴보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와서 조반을 먹으라”라고 제자들을 초청하시는 주님의 말씀과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직접 주시는 주님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저자는 이것을 통해 부활의 예수께서 오병이어 사건 때 무리에게 떡과 생선을 주시던 때의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그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을 표현한다. 이것은 누가의 엠마오 사건에서 부활의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신” 사건에 상응한다(눅 24:30). 요한은, 누가와 마찬가지로, 부활의 예수께서 오병이어 사건 때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최후의 만찬 때의 모습으로 현현하신 것이 제자들로 하여금 부활의 사실을 확고하게 받아들이게 만든 결정적 사건이라는 것을 나타낸다.예수는 베드로가 큰 물고기들로 가득 찬 그물을 끌어온 상황에서 그가 준비한 아침 식사에 제자들을 초대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21:12). 예수께서 준비한 조반과 관련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다. 거기에 이미
아랍의 기원‘아랍인’은 아라비아반도를 중심으로 민족을 형성하고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뜻하며 현재 약 삼억 명의 인구가 대부분 팔레스틴 주변에 거주한다. 성경이 말하는 그들의 기원: 1)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의 후손사래에게 쫓겨난 하갈이 어린 이스마엘을 안고 광야 술 샘물가에서 통곡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이스마엘의 후손이 번성해서 열 두 두령을 낳고 큰 나라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창16:10,17:20). 야곱의 아들들에게서 요셉을 사서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아넘긴 대상(大商)들이 바로 그들의 이복 할아버지 이스마엘의 후손들이었다(창37:25~28). 2)롯의 두 딸이 낳은 암몬과 모압의 후손롯이 소돔의 멸망을 피해 산 속 동굴에 숨어 지낼 때, 그의 두 딸이 땅 위에는 자기들 세 사람만 생존한 것으로 판단하고 후손을 남기기 위해 아버지에게 포도주를 먹여 잠들게 하고 동침해서 큰 딸은 모압을 낳고 작은 딸은 벤암미, 즉 암몬을 낳았으니 그들이 각각 모압과 암몬 자손의 조상이 되었다(창19:30~38). 3) 아브라함은 만년에 그두라를 첩으로 맞아 시므란과 미디안을 포함해서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창25:1~4
며칠 전 TV를 보다가 정말 봐서는 안 되는 장면을 보았다. 전라도 전주에서 새벽 5시쯤 산책을 가던 70세 노인을 20세 청년이 무차별 폭행하는 장면이다. 서로 길을 가다가 어깨가 조금 부딪쳤는데, 청년이 기분 나쁘다고 술김에 3분 이상이나 방어능력이 없는 어르신을 폭행한 것이다. 그 청년은 정말 비겁하다. 자신보다 확실하게 약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한 것이 아니겠는가? 약자 앞에서 갑질하고, 조금 강한 사람 앞에서는 비굴해지는 사회는 저주 받은 사회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병든 영혼에서 비롯된다. 육신은 마음의 지배를 받고 마음은 영의 지배를 받는다. 성령을 거부하고 악령에 사로잡혀 살고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는 패륜으로 치닫는다. 창궐하는 동성애의 패륜도, 별 거리낌도 없이 벌어지는 불륜도, 싸이코패쓰적인 묻지마 살인도, 부자관계를 망각한 경영권다툼도, 악랄하게 조교를 괴롭히는 어느 교수의 행패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빚어지고 있다. 기독교를 비방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든 악한 행동들 역시 그 근원이 악한 마귀의 영에 있다.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성령으로 다시 회복되어야, 이 사회가 다시 정상으로 회복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