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크신 사랑(새15/통55) 작사: 찰스 웨슬리 (Charles Wesley, 1707-1788) 작곡: 존 준델 (John Zundel, 1815-1882) 수잔나 웨슬리(Susanna Wesley)는 19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 중 아홉 명은 아주 어려서 잃었다. 그녀는 살아남은 열 자녀(3남 7녀)를 바르게 교육하려고 힘썼다. 수잔나는 아이들이 아침에 일어나는 것부터 잠자리에 드는 것까지 철저한 계획에 따라 규칙적으로 생활하게 했다. 자녀들에게 말을 처음 가르칠 때는 주기도문을 따라하게 함으로써 가르쳤고 아이가 정확히 다섯 살이 되는 생일부터 알파벳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처음으로 읽게 하는 문장은 창세기 1장 1절이었다. 어머니 수잔나는 자녀들에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속 깊이 새겨 놓았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를 먼저 알게 하는 하나님 중심의 가정교육이었다. 그렇게 자라난 존과 찰스 웨슬리에 의해 영국에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찰스 웨슬리는 수많은 찬송을 만들어 영국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고, 존 웨슬리는 전례 없는 설교사역으로 영국을 새롭게 했다. 감리교를 만들어 영적부흥을 일으킨 것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그들의 영향은 곧
매년 봄의 시작은 그 어느달보다 숙연해지는 3월과 함께 시작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3월이 왔나 했더니 어느새 3월은 가버렸다. 나라사랑이야 1년 내내 같은 마음이겠지만 그러나 유난히 봄에 더 나라에 대한 생각을 깊어지는 계절이 봄이라는 느낌은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 때문일까? 그런 점도 있겠지만 아마도 봄의 시작을 삼일절과 함께 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어떤 이유에서든 일 년 중 그 어느 때보다 조국에 대해, 민족에 대해, 그리고 자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계절이 봄인 것은 분명한 듯하다. 세대가 바뀌고 10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면서 삼일절을 비롯한 우리민족만이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념일들이 갖는 의미가 희미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래도 예전에는 초등학교에서부터 우리 민족이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 날을 위한 특별한 노래를 가르치고 부르게 해서 일 년 중 나라 사랑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있었는데 요즘의 어린 학생들은 지나치게 과열된 학습 경쟁 속에서 공부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도, 시간도 없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다. 뼈아픈 과거를 교훈삼고 조국의 시련 앞에서 결연하게 일어섰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라도 특정한 날의
큰 죄에 빠진 날 위해(새282/통339) 작사: 샬롯 엘리엇(Charlotte Elliot, 1789~1871) 작곡: 윌리엄 브래드버리(William Batchelder Bradbury, 1816~1868) 프랑스의 시인이자 목회자인 헨리 말란(Henri Malan)은 영국 브라이튼에 있는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절친한 사이인 성공회 신부 헨리 엘리엇의 몸이 불편한 여동생을 위로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었다. 친구의 동생 샬롯 엘리엇(Charlotte Elliot)이 어렸을 때는 밝은 성격과 믿음을 가진 예쁜 소녀였다. 그러나 30세 쯤 됐을 때 병에 걸려 전신을 움직일 수 없는 불구자가 됐다. 그녀는 날이 갈수록 불평이 늘고 세상을 비관하기 시작했다. 성격은 날카로워졌고 신앙을 내동댕이치기에 이르렀다. 집 밖에는 나오지도 않고 방안에서 혼자 지냈으며, 식구들과 대화조차 끊어진지도 오래였다. 그야말로 엘리엇은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엘리엇에게 멀리서 온 말란 목사의 말이 한마디도 들릴 리 없었다. 모든 말들이 허공에 메아리칠 뿐이었다. 그렇지만 말란 목사가 시를 쓰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녀의 닫힌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2017년을 정신없이, 어수선하게 맞아 아쉬웠던 참에 설 연휴를 지내면서 1월을 떠나보내게 된 것은 어쩌면 다행한 일일수도 있다. 설을 맞아 한해를 새롭게 맞이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졌기 때문이다. 올 해는 대체공휴일까지 있어서 그래도 조금은 여유로운 명절을 보내는 행운까지 겹쳤으니 나를 돌아보고 내일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기에 넉넉한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텔레비전 방송들은 명절이 되면 지나간 시절의 영화를 많이 보곤 하는데 오래전 어느 명절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연휴에 봤던 영화가 문득 생각이 났다. 바로 ‘황태자의 첫사랑’이라는 제목의 뮤지컬 영화였다. 1954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1923년, 독일 하이델베르그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인데 독일의 극작가, 빌헬름 마이어포르스터(Wilhelm Meyer-Forster, 1862~1934)의 중편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영화의 내용은 하이델베르그로 잠시 유학을 온 황태자와 하숙집에서 일하는 여성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리고 있는 진부한 것이었지만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 영화였다. 특히 남자 주인공인 황태자가 부르는 노래들의 목소리는 당대 최
어서 돌아오오(새527/통317) 작사: 전영택(1894~1968) 작곡: 박재훈(1922~) 아들 하나를 뒷바라지하며 시골에서 어렵게 사는 홀어머니가 있었다. 어느 날 이 망나니 같은 자식은 어려운 살림이 지겹다며 나이 많으신 홀어머니를 두고 집을 뛰쳐나갔다. 얼마 후 방황하며 다니던 자식이 잘못을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인적이 드문 새벽인데 대문은 열려있었고 방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벽에 기댄 어머니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가만히 계셨다. 깜짝 놀란 아들은 급히 들어가 어머니를 흔들었다. 어머니는 앉아서 졸고 계셨던 것이다. 아들은 무릎을 꿇고 어머니께 용서를 빌었다. “엄마, 밤에는 무서운 산짐승도 내려오는데 왜 문을 열어 놓으셨어요?” 어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문을 열어 놓고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고 하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크게 뉘우치는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아들이 집을 떠난 이유는 상관이 없다. 집을 떠나있을 때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도 문제가 안 된다. 돌아온 것만으로 기쁜 것이다. 다시 말해 아들은 돌아온 사실 하나만으로 실수와 잘못과 모든 과거를 용서 받은 것이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한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벅찬 감사함과 설렘이 있었다. 지난해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또 한 해의 기회를 얻었음에 감사하고 앞으로 할 일들을 계획하고 상상하며 설레어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17년, 정유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예년과는 조금 다른 듯 하다. 지난 한 해동안 겪어야 했던 많은 일들 때문에 마음이 산란하고 가슴이 답답해서일까? 아니면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이 줄어서일까? 아무튼 2017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온전히 환한 꽃밭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해는 우리 앞에 펼쳐졌고 하나님은 시간이라는 귀한 선물을 통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이것이 은혜이고 사랑인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새해이기에 그래서 올 한해는 더더욱 감사함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 같다. 흔히 신년에는 밝고 힘찬 음악들을 많이 연주하는 것이 보편적이고 필자 또한 위풍당당한 음악을 통해 에너지를 전하려고 했는데 올해에는 조금 다른 음악을 소개하고 싶다. 19세기의 교회음악을 선도했던 멘델스존(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1847)의 오라토리오, 엘리야를 들으며
성탄절이 있는 12월은 언제나 설렘과 기쁨의 계절이었다. 어릴적 성탄절의 기억은 아주 따뜻하고 행복한 것이었다. 트리에서 빛나는 불빛과 예쁜 장식들, 가까운 사람들과 나누어 갖던 성탄카드와 선물, 그리고 조용히 새벽을 깨웠던 새벽 캐롤 등 춥지만 마음은 훈훈해 지는 계절이었다. 어릴 때는 성탄의 의미를 잘 모른채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선물을 받는 날이라고 좋아했다. 철이 들고 예수님을 만난후, 성탄절은 감격과 감사의 계절이 되었고 그 감사를 담아 성탄 카드를 쓰고 선물을 나누었었다. 적어도 예전의 성탄절은 그랬다. 거리마다 곳곳에 성탄 추리와 성탄 캐롤이 울려 퍼지며 평화와 기쁨의 인사를 나누는 정겨운 순간들이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성탄의 의미는 희미해져가고 그저 놀고 즐기는 하루 쯤으로 변해가는 현실을 보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올해 대한민국의 성탄절은 유난히 힘들고 허전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다. 촛불의 물결 속에 성탄 트리의 불빛이 바래고 성탄의 기쁨조차 잊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안타깝기도 하다. 그러나 빛이고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의 소식이 상처난 우리들에게 위로의 선물이 될 것이라는
구주 예수 의지함이(새542/통340) 작사: 루이자 스테드 (Louisa M. R. Stead, 1850-1917) 작곡: 윌리엄 커크패트릭 (William James Kirkpatrick, 1838-1921) 영국 도버에서 태어난 루이자 스테드(Louisa Stead)는 어릴 적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서원했던 선교사의 꿈을 포기했지만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예쁜 딸 릴리(Lily)를 키우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1879년 어느 휴일에 스테드 부부는 네 살 난 릴리를 데리고 뉴욕 롱아일랜드의 바닷가로 휴양을 떠났다.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보며 세 식구가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살려달라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한 소년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남편 스테드는 생각할 틈도 없이 소년을 구하기 위해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파도는 거칠었다. 물에 빠졌을 때 흔히 그렇듯이, 허우적거리던 소년은 스테드를 세게 끌어당겨 둘 다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루이자와 어린 릴리는 발을 동동 구르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 바라보던 가족과 주위사람들의 바램을 멀리하고 그들은 그만 물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두 사람이 거친
성큼 다가온 추운날씨에 놀라서 몸은 움츠러들고 나라 안팎의 어지러운 소식에 가슴이 놀라서인지 올해 11월은 더 춥게 느껴지는 듯하다.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기온만큼이나 우리들의 마음도 급속하게 얼어붙어버린 것이 못내 안타깝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 더욱 마음을 무겁게 한다. 어떤 사건이든 진실을 가려내고 그것을 기초로 죄의 경중을 따져 합당한 상벌이 부여되는 사회여야 건강하고 투명한 사회이고 이것이 평등과 평화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 무시되고 개인이나 집단의 독단과 이기심으로 사회가 병들어가는 것인데 이런 현실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답답하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듯 답답한데 우리나라의 현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실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생각의 끝에서 하나님께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일까하는 질문을 다시 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대한민국은 나라를 위해 자신을 버린 독립투사들의 희생과 복음을 위해 삶을 드린 선교사님들의 노력,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와 복음을 위해 기꺼이 생명을 드린 많은 분들의 피로 세워진 나라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주는 강한 성이요(새585/통384) 작사 · 작곡: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편곡: 요한 세바스찬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1.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2.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3.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1517년 10월 31일 가톨릭교회 사제이자 대학교수인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Wittenberg)성당 정문에 가톨릭교회의 부패에 관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였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 당시 교회는 성직을 사고 팔 정도로 부패해 있었다. 심지어 성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사면 연옥의 고통을 면할 수 있다고 시민들을 유혹했
가을이 오면 모든 사람이 시인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내면이 차분해지고 감상적이 된다는 뜻일 것이다.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은 현대인에게는 더욱 가을이 주는 치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먼 나라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지진 때문에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과 만나기도 하고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기근의 소식들로 불안감이 더해진다. 그래서 올해 가을은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가을의 차분한 감성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 같다. 이런 가을의 감성 충전을 위해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의 피아노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 가곡의 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가곡, 노래의 대가인 슈베르트는 기악 작품에서도 편안한 노래가 이어지는 소품들이 많다. 그러나 가끔 예상치 않은 대규모의 작품을 만들기도 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방랑자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이 25세에 작곡된 곡으로 젊은 기운으로 충만한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슈베르트 하면 내성적이고 우울한 성격의 음악가라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슈베르트와 대면하게 되고 그것은 뜻밖의 에너지를 경험하는 기회가 된다. 판타지는 원래
나의 갈 길 다 가도록(새384/통434) 작사: 패니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 1820-1915) 작곡: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 1.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2.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주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3.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그의 사랑 어찌 큰지 말고 할 수 없도다 성령 감화 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여자 아기에게 태어나자마자 불행이 닥쳤다.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가 생후 6주쯤 되었을 때 감기에 걸렸다. 아기를 진찰한 의사는 감기 때문에 눈이 부어오른 줄도 모르고 눈병으로 착각하여 매운 겨자로 만든 연고를 처방해주었다. 그 일로 아기는 시력을 완전히 잃어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크로스비가 어렸을 때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그녀의 일생을 바꾸어 놓았다. 비록 눈앞은
유난히 뜨거운 올해 8월은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지구촌의 축제덕에 마음도 뜨거워지는 한달이 될 것 같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이번 대회는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남미에서 열리는 올림픽이라고 한다. 정열적인 삼바의 나라답게 이번 올림픽 슬로건도 “Live your passion(정열을 다해 살아라!)”라고 한다. 상파울루에 이어 브라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리우데자네이루는 아름다운 항구도시로 이탈리아의 나폴리, 호주의 시드니와 함께 세계 3대 미항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도시는 연중 내내 30도를 웃도는 열대성 기후를 가지고 있고 오염된 수질 등 문제점도 많은데 아무쪼록 우리 선수들이 현지에 잘 적응하고 무탈할 뿐 아니라 최상의 컨디션으로 금메달의 감격을 나눌 수 있는 순간을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우리나라 대표팀을 마음으로 응원하기에 적합한 음악이 있다. 바로 엘가(Edward Elgar, 1857~1934)의 위풍당당 행진곡(Pomp and circumstance march)이다. 영국의 작곡가 엘가는 자신의 조국, 영국을 위한 많은 곡을 작곡한 음악가로 서어(sir) 작위를 받을 만큼 영국이 사랑하는 작곡가이
요즘 들어 예전에는 없었거나 거론되지 않았던 많은 단어들이 자주 세간의 관심으로 대두된다. 미세먼지, 힐링, 아날로그 감성 등 불과 20년 전에는 흔히 들어볼 수 없었던 단어들이 회자되면서 새삼 세상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 단어들이 예전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거나 이런 단어들이 표현하는 현상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처럼 문제가 될 만큼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다. 미세먼지만 해도 현시대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제여서 우리나라에서는 애꿎은 고등어만 구박을 받고 있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지난 수년간 치유, 즉 힐링이라는 영어 단어는 마치 마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묘약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모든 문제들이 하늘을 보고 별을 헤며 시를 노래하던 아날로그 세대에서는 흔치 않았던 현상들인지라 우리는 새삼 아날로그적 감성의 추억을 그리워하곤 한다. 장맛비로 미세먼지가 사라지고 대기가 맑아지긴 하지만 날씨 탓에 자칫 가라앉을 수 있는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며 우리 가슴 깊이 가라앉아 있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깨워주는 음악이 있다. 바로 폴란드의 작곡가 프레데릭 쇼팽(Freder
나 주를 멀리 떠났다(새273/통331) 작사 · 작곡: 윌리엄 커크패트릭 (William James Kirkpatrick, 1838ㅡ1921) 감리교인 윌리엄 커크패트릭(William Kirkpatrick)은 많은 복음전도 집회가 열리던 19세기 말 미국에서 찬양인도자로 활동했다. 그 당시 펜실베이니아 로우린스빌(Rawlinsville)에서 열린 캠프집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음악책임자인 커크패트릭은 재능 있는 한 바리톤 가수인 청년을 독창자로 세웠다. 청년의 목소리는 정말 대단했다. 매일 저녁 그가 부른 노래를 들은 수많은 청중들은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며 감동했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어떤 이들은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곤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청년은 노래만 부르고 설교를 듣지 않은 채 나가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왜 저러는 걸까? 커크패트릭은 처음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말 못할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몇 차례 계속되는 그의 행동을 보며 나중에야 이 청년이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청년은 그저 실력 있는 가수였을 뿐 크리스천이 아니었던 것이다. 커크패트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