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작은 그리스도인의 모임에서 성경을 강해하고 있었다. 열심히 로마서를 강해하는데 모인 무리 중 한 사람이 자꾸만 의문의 꼬리가 이어진다면서 질문 소나기를 퍼부어재키질 않나. 나는 친절히 이것저것을 대충 대답해 주고 본 강해로 들어가려치면 “또”하고 질문을 해오는 것이었다. 가령 근친상간은 성경에 금하고 있는데 가인은 누구와 결혼했겠나요? 틀림없이 누이와 결혼하지 않았겠소? 하나님은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을 줄 아셨을까 모르셨을까요? 하나님이 아시고도 그냥 두셨다면 자비의 하나님이 아니라 무정한 하나님이 아니겠소? 이런 질문에 나는 성실히 대답해 주었지만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보였다. 마침내 그는 금융관계에 있어서 노후문제를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고 문의해 왔다. 그의 질문은 복지문제였다. 그때 나는 일언지하에 “나는 모릅니다”라고 답하니 질문자는 어이없다는 듯이 목사가 이런 것쯤 카운셀링해 주지 않느냐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또 말했다. “나는 성경 밖에는 아는 것이 없어요.” 그는 아주 많이 실망하는 듯 보였다. 설교자는 만문만답(萬問萬答)을 지닌 자가 아니다. 세상살이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예수님이 일찍 제자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예수께서 말씀하신 도적은 악마 곧 마귀, 큰 용, 옛 뱀, 천하를 꾀는 사단(계12:7~9)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계16:13)로 더불어 사람으로 범죄케 하기 위해 천하를 꾀는 자로 창세로부터 인류의 원수대적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영원히 이기셨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며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고 베드로 사도는 고넬료 가족에게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나아온 군대귀신을 돼지 2,000마리에게 들어가게 하고 쫓아내셨다(막5:1~20). “아이고! 화산댁 , 아들 낳아 반갑네요!” 두각댁이라는 이웃 할머니는 새끼줄에 고추가 달린 금기(禁忌, Taboo)를 보고도 무례하게 들어와 어머니께 축하인사를 했다. 당시 금기가 달린 집에는 애기에게 부정 타지 않게 그 집에 접근하지 말라는 표적이었다. 당시 부모님은 종교가 달랐는데 조상들이 함경도 함흥에서 수백 년간 사시다가 강원도
어느 교회에서 주일 점심시간에 후식으로 수박을 먹게 됐다. 그런데 봉사자가 권사 두 명이 마주 앉은 식탁에 수박을 담은 접시를 중간에 놓지 않음으로 다툼이 생겼다. 고의적인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박 접시에서 좀 더 멀리 떨어진 권사가 자기를 우습게보고 무시한 처사라고 화를 내었다. 이에 다른 권사가 이런 것 가지고 화를 낸다고 나무라다가 서로 거칠은 말을 내뱉기까지 했다. 다른 성도들을 권면해주고 위로해줘야 할 직분자들의 양보와 배려가 전혀 없는 추태였다. 두 사람은 결국 담임 목사의 심방마저 거절하더니 다른 교회로 옮겨갔다. 그들은 70세가 넘었고, 수십 년간 교회당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러면서 빌립보서 2장 3절에서 4절 말씀을 여러 번 읽거나 설교도 들었을 줄 짐작이 됐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생활화했더라면 수박 접시를 놓는 거리 문제로 부끄러운 언행을 삼가 했을 것이다. 오히려 상대편 가까이 밀어주고, 권하고, 섬겨주는 아름다운 미덕
요한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아들” 칭호가 처음 사용된 것은 침례자 요한의 사역을 다룬 기사에서 침례자 요한 자신의 언급으로 제시된다(요 1:34). 요한복음서는 침례자 요한의 사역이 가장 많이 다뤄진 복음서라는 특징을 갖고 있기도 하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부터 침례자 요한을 다룸으로써(요 1:5~8, 15), 침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긴밀한 관계성을 부각시킨다. 요한은 서두를 마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묘사를 시작하면서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침례자 요한의 증언을 두 단락으로 제시한다. 첫째 단락에서(요 1:19~28)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침례자 요한의 증언은 자기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소리이며(요 1:23) 또한 그의 침례 사역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기 위한 사역이라는 것으로 제시된다(요 1:26). 둘째 단락에서(요 1:29~34)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증언은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며(요 1:29) 또한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요 1:34). 세상 죄를 지고 가신 대속 제물로써의 하나님의 어린양과 성령으로 침례를 베
개교회주의의 잘못된 실천은 교회사역의 관심과 영역을 교회 내로만 국한하거나, 교인들의 활동 범위를 교회 내부에만 제한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실상 교회 내보다 교회 외부에서 더 많이 이뤄져야 한다. 교인들을 교회 내부에만 묶어두어서는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일어나기 어렵다. 교인들의 빛과 소금 역할은 교회 밖에서 성취되어야 한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5)는 주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런 의미다. 구약성경은 공동체 안에서의 상호돌봄에 대해 마땅한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 “너는 반드시 네 경내에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치라”(신 15:11). 또 신약성경도 영적인 공동체로서만이 아니라 물질적 공동체로서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공유하면서 나누는 것에 대한 원리를 제시했다(행 2:44~46; 딤전 5:3~16). 진정한 공동체성은 주님의 은혜 안에서 함께 생명을 나누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봉사는 기독교 정신의 핵심이며 신앙 실천의 중요한 요소이다. 침례교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
소그룹 사역국 교회관리부, 미디어부, 새가족부, 봉사부, 선교나눔부, 시설관리부, 식당봉사부, 예배부, 재정부, 전도부, 주차관리부, 차량부로 구성되며 교회의 부흥과 영성, 선교적 사명을 위한 사역 1) 교회관리부 교회 전반적인 환경관리, 분리수거 등을 섬기는 사역 주일예배 후 교회마당 및 주변 환경정리 쓰레기분리 수거 및 버리기 2) 미디어부 예배 시 방송실 운영, 홈페이지 관리, 컴퓨터의 유지 보수 등을 섬기는 사역 교회 홈페이지 어플 제작, 교회네트워크 개설, 예배 및 행사, 각 부 서의 주일 모습 등을 촬영하여 홈페이지업로드 시설 장비확충, 캠페인 활동(격월) 3) 새가족부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데 헌신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새가족을 위한 친절한 안내와 등록을 도우며, 원활한 예배참여를 위해 돕는 사역 4) 선교나눔부 선교헌금의 관리 및 각 선교지와 교회가 유기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사역 선교지 탐방 및 현지 사역자 세미나 등을 통한 선교지 새로운 동력원 제공 및 나눔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전함 5) 시설관리부 교회각종행사 및 전반적인 시설관리, 설치 및 제작 사역 배수관 정리, 에어컨 관리, 월동 준비 및 온풍
태성장학회 이사회가 끝났을 때는 정오 12시 30분이었다. 이사들은 모두 홀가분한 기분으로 명동의 유명한 갈비집으로 점심을 찾아 나섰다. 솔직히 밝힌다면, 이 갈비집은 본 장학회를 설립한 장로님이 경영하는 식당이었다. 나는 2시에 강의가 약속됐기 때문에 사무장에게 점심을 같이 할 수 없어서 자리를 비워야 하겠다고 일렀다. 사무장은 아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이사님, 포장해 드릴께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잠깐 기다리고 있는 사이 그는 아주 아름답게 포장된 물체를 안겨줬다. 나는 다른 이사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그 포장 물체를 손에 들고 전철을 타고 또 내려서 마을버스를 갈아타면서 강의할 곳에 도착해 강의실 뒤 테이블에 고이 올려놓고 강단에 섰다. 그게 무엇이냐 묻는 말에 아무런 대답도 안 하고 그냥 웃고만 넘겼고 강의를 마친 뒤에는 커피타임도 마다하고 또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전철을 갈아타고 또 집에 오는 마을버스를 타고 귀가했지만 여전히 포장 물체는 내 손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신사 노인이 등에는 배낭을 메고 손에는 포장 물체를 들고 이런 몰골이 좀 그렇긴 하지만 이 포장은 명동의 유명한 갈비가 들어 있다는 그 내용물 때문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1967년 8월 무더위 속에 춘천 기독교 연합성회가 열렸다. 나는 오전에는 죽림동 성결교회에서, 오후에는 동부교회 연합집회에서 통역을 맡았다. 그런데 미국 전도단을 서울에서 안내해 온 목사님이 젊고 발음이 좋은 교인과 목사님을 선정해 오전 예배에 먼저 데리고 가셨고, 72세의 노인과 더 나이 많은 분은 나에게 남겨 두셨다. 그 당시 나는 사복 군인으로서 춘천군인 복지센터 관장으로 봉사하며 춘천교회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었다. 72세의 노인 이름은 찰스 이 내쉬(Charles Nash) 집사였는데 미국 오순절 계통 평신도 전도단의 일행으로서 동남아를 돌아 부산집회를 한 후 춘천으로 온 것이었다. 그는 성령이 충만하여 자기가 뛸 때에는 나도 뛰면서 통역하게 했고, 미친 듯이 큰 목소리로 하면 나도 큰 목소리로 똑같이 하도록 계속 강요하며 놀라운 간증했다. 나이가 많아 늙고 무식한 노인이라 지금도 생각하면 거의 30%는 이해하지 못하고 적당히 통역했으니 평생 그런 엉터리 통역은 처음이었는데 그의 간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평신도 사역은 전신자제사장직분 교리의 기초 위에서 이뤄진다. 전신자제사장직분 교리란 모든 신자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가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사용함으로 특별한 사역을 담당함으로써 책임성 있는 사역자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교회회원에게 사역적 소명이 있음을 깨닫고, 모두가 자신의 사역을 인식하고, 자신의 사역을 수행할 기회를 제공하고 실제로 사역하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이러한 전교인사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제자도의 확립이 필요하다. 책임성 있는 교인이 되지 않으면 전교인 사역이 불가능하다. 책임성 있는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제자도 확립이 요구된다. 제자도란 한 사람의 교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면서 교회를 통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갖춰져 있어야 할 삶의 방식이며, 제자로 훈련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생활을 훈련하며, 교회의 건전한 교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성도로 양육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훈련의 내용은 개인경건생활부터 시작해서 가정생활, 교회생활, 학교생활, 직정생활, 사회생활 등 삶의 전반에 걸쳐
첫째, 매뉴얼을 계속 데이트 베이스화해야 한다. 작년에 시행한 전도 프로그램 매뉴얼을 보관했다가 다음해에 프로그램을 시행할 때에 그것을 기초로 보완할 것은 보완하고 뺄 것은 빼서 사역 시행 매뉴얼을 조금씩 다듬는다. 이미 프로그램을 진행했기에 경험이 있으니 두 번째는 조금 더 쉽게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다. 몇 번의 경험이 쌓이게 되면 본인의 교회의 상황과 여건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정착되고 이렇게 5년 정도 꾸준히 진행하다 보면 어느새 본인 교회 맞춤 프로그램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제 열매를 경험하게 된다. 어떤 프로그램도 처음부터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자료를 보관하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성도들도 이제 경험이 있어 두 번째는 훨씬 더 잘 봉사하게 된다. 둘째, 사역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집중해 작은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한다. 어떤 프로그램도 작은 성공이 중요하다. 그래야 다음에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어떤 행사를 실패하면 그 다음에는 성도들의 동력을 만들기 어렵다. 그래서 전도 프로그램을 계획하면 1명이라도 결실을 맛 볼 수 있도록 사전에 준비를 잘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의 형편에 힘겨운 행
“일요일 교회요, 토요일 교회요?” 진도에서 전도할 때 사람들에게 듣는 말이다. 진도에는 대부분 마을마다 예배당이 있다. 개신교회와 함께 제칠일 안식일 재림교회가 섞여 있다. 언제부터인가 믿지 않는 지역 주민들의 눈에는 다른 두 교회를 설명하기 어려우니 부르기 쉽게 토요일에 모이는 교회와 일요일에 모이는 교회, 토요일 교회와 일요일 교회로 부르게 된 것 같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두 교회가 서로 자기가 옳다고 티격태격 하는 모습이 보기 좋을 리 없다. 그리고 그것이나 저것이나 똑 같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다만 토요일에 가는 것과 일요일에 가는 것 차이라고 생각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진도에 살면서 대부분 식당이나 심지어 숙박시설에 들어가도 민속공연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있다. 지역의 특색을 살려 민속 공연을 하고 즐기는 문화를 홍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포스터마다 “굿 보러 오세요”라는 글이 들어 있다. 지역 문화라고 생각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사용 되고 있는 말은 마을마다 자리잡고 있는 교회의 영적 영향을 묶고 있는 듯 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을 모르니 안타깝다. 토요일에 모이니 토요일 교회고 일요일에 모이니 일요일 교회라는 말도 ‘그것이
여행을 하거나 행사가 있어서 숙박을 다른 사람들과 합숙해야 될 때가 있는데 쉽게 수면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꽤나 부럽다. 어떤 사람들은 머리를 베개에 얹으면 5분도 안되어 잠든다고 하니 그것도 복이라고까지 생각이 되어진다. 나의 경우엔 잠자리를 옮겼을 땐 잠들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다보니 먼저 잠든 사람들의 작은 코골이 소리나, 큰 코골이 소리도 다 들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거의 수면이 어려워져 힘든 밤을 보내기가 일쑤였다. 언젠가부터 아내가 코골이를 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뚱뚱한 편도 아니고 과체중도 아닌데 하는 것을 보면 하루하루의 삶이 피곤한 탓일 것이다. 아내가 코골이를 심하게 함으로 각방을 사용해야 할 필요성도 있지만 고린도전서 7장 5절 말씀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서 그대로 지낸다. 하나님께선 남자가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해서 돕는 배필로 여자를 주셨다(창2:18). 잠언 18장 22절엔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라고 했는데 나도 아내로 인해서 복을 얻은 자가 되었고 은총을 받은 자가 되었다. 또 아내가 가정주부로서, 목사
K씨는 남편의 침묵이 참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과묵하고 진득해 보였던 남자가 살아가면서 지루하고 무관심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어쩌면 변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속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터에서 들어오면 혼자 방에 들어가 컴퓨터 화면을 보며 지친 심신을 달래는 듯했다. 피곤해서 그러려니 배려하려고 애썼다. 혼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도 반응이 시큰둥한 남편 얼굴을 보면 맥이 빠졌다. 자신이 하루 종일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 육아에 얼마나 지쳤는지, 때론 마음이 얼마나 싱숭생숭한지 도대체 관심이 없는 듯 보이는 남편이 점점 미워지기 시작했다. 과묵한 남편은 이제 사랑이 없는 이기적인 인간으로 비쳤다. 자신이 하는 말을 무심하게, 그저 잔소리로 듣고 넘기는 남편의 주의를 끌려면 더 강한 말이 필요했다. K씨의 언어는 점점 거칠어지고 비난의 톤도 높아졌다. 그럴수록 남편은 더 적극적으로 K씨와의 대화를 피했다. 아내가 매사 부정적으로 투덜대는 말들이 듣기 싫고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K씨는 어떤 점을 걸고 넘어지면 말없는 남편조차 발끈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피곤하다고 늘어져 있는 남편에게 차고 청소를 시키던지, 집안에서 얼마나 형편없는 남편이자 아빠인지를 일깨워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9~30) 웬 세상에 오른 눈 빼인 자, 그리고 오른팔을 잘린 자가 어떻게 온전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조국을 위해 전투에서 지체를 잃은 상이용사가 아니고서야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살인적 문자적 해석에 따라 범죄한 눈을 빼고 범죄한 오른팔을 잃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씀을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하지만 우리의 심령으로는 얼마든지 눈 빼어버린 손을 잘라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제 몸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죄가 있기에 죄인이요 또 죄 행위를 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도 예외는 아니다. 범할 때마다 빼버리고 잘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과 다르게 세상 눈이 볼 때 불구자임이 분명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정욕의 일들을 굳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6월 29일자 “훈련의 방향”에는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 사는 구두수선장이가 성령의 감동과 인도로 40일 금식기도 후 주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받아 그의 직업을 그만두고 복음을 전하고 따르는 치유의 은사로 수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했다. 심지어 눈먼 자, 귀머거리, 벙어리 및 위병, 관절염, 폐병, 절름발이도 고침 받아 즐거워 뛰었고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다. 한 사람의 헌신적인 금식기도의 응답으로 개인의 영적 부흥과 치유를 총해 교회의 부흥과 나아가 잃어버린 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이르렀다. “나는 저희가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시35:13) 신학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조금 일찍 울릉도에서 나와서 신학교 기숙사에 투숙하고 있을 때 대흥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였고 신학교 교수의 강의를 통역한 주성범 집사는 나에게 오스본 부흥사의 신유(Healing the Sick)라는 책을 “한 선생은 섹스피어 공부를 대학에서 했으니 읽을 수 있다”라고 주어 완독하고 은혜를 받아 성령 충만으로 문 닫으려는 도안교회를 찾아가 목회가 시작됐다. 아래에 오스본 목사의 간증을 들어본다. “금식과 기도로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생의 대개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