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은 행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서 나타나는 것이다. 기적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곧 자연과 과학의 질서를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법칙이다. 국가에도 일반법이 있지만 특별법이 능가하듯이 더 높은 차원의 법칙인 기적, 이적은 물리적 법칙을 뛰어넘을 수 있다. 세상의 왕권도 자의대로 하는데,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특별히 원하신다면 자연법칙을 잠시 묶고 기적을 시행하실 수 없으시겠는가. 우주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특수 목적을 위해 일시적으로 자연법칙을 중단하고 얼마든지 초자연적 법칙인 기적으로 대치하실 수 있다는 것이 기적에 대한 생각이다. 하지만 신학대학원에 들어가면서 만난 조직신학 교수였던 모 박사는 기적의 시대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으로 계시하신 구약 및 예수님과 사도들의 시대를 지나면서 사라졌다고 했고, 기독교 2000년 역사 속에서나 오늘날에는 기적과 표적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강의했다. 이에 나를 포함해 많은 신학생들이 의구심을 갖고 질문을 쏘아 붙였다. 그러나 교수님의 신학적 주장 (dogma)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난 70년간의 삶을 돌아볼 때, 주님의 손길 안에 일어난 기적 들을 부인할 수 없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TV를 켰더니 가령 아래의 뉴스가 울려 나왔다 하자. “온 세계의 식물(植物)이 자리를 떠나 움직이고 온 세계의 동물(動物)이 꼼작 못하고 제자리에 박혀있다.” 이것은 이변이 아니라 재앙(災殃)이다. 모든 식물들이 뿌리를 지닌 채 뜰로 거실로 침입한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왜 이런 현상이 재앙인가? 그것은 아름다운 질서의 파괴이기 때문이다. 식물이란 심어놓은 물건이라서 언제나그 자리에 박혀있어야 아름답고 질서적인 것이다. 동물이란 움직이는 물건 이니 물건은 소용되어지는 대로 사용 되어졌는데 그냥 한곳에 말뚝 박히듯 박혀있으면 이것 또한 꼴사나운 것이다. 밭갈이 갈 소를 보고 “이랴, 밭갈이 가자”고 농사 주인이 아무리 사정해도 그 자리에 박혀있는 소라면 이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어떤 산장 커피숍에 후배 동역자와 함께 가서 커피를 즐기다가 우연히 벽에 쓰인 영문을 보았다. “He has made everytime beautiful in its time.” 우리말로 옮기니 이런 말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제때에 있을때 아름답게 만들어 오셨다.” 이 자리에서 모두가 그게 진리라고 이구동성 했다. 성경에 분수(分數)를 알라고 했었다. 분수란…
예수님께서는 하나, 한사람, 한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가지셨다.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마 5:19), 한 므나 (눅 19:16), 그 중에 하나(눅 17:15), 예복을 입지 않은(마 22:12) 한 사람 , 오직 나만 남았거늘(왕상 19:10),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 한 사람(렘 5:1)을 언급하셨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각각 만나 주신 사람들이 나온다. 수가 성 우물가의 여인(요 4장),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요 8장),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여인(요 12장),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유대인 관원 니고데모(요 3장), 삼십팔 년 된 병자(요 5장),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요 9장) 그리고 다시 살아난 나사로(요 11장),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에 대한 깊은 연민을 보여주셨다. 미네소타(Minesota) 주의 스카치맨 (Scotchman)의 보고서를 보면, 1881년한 알의 밀을 심었더니, 가을에 560알이 됐으며, 1882년 그 560개의 밀알을 심어 1/5부쉘(3되)을 거뒀고, 이듬해 그 1/5부쉘을 심었더니 17부쉘(85되)을 수확했으며, 1884년에는 17부쉘을 17에어커(약 2만
세상에 자식을 앞세워 천국행으로 보내놓고 왜 슬픔이 없겠는가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감사로 숙성시키는 목사가 있다. ‘별세한 부모는 발밑에 묻고 죽어간 자신은 부모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이 떠나간 자식을 가슴에 묻으면서 보화인양 변모시킨다는 것은 범상(凡 常) 초월신앙이 아닐 수 없다. 마땅히 뭇사람의 위로를 받아야할 장본인 같은데 도리어 뭇사람을 위로하고 있으니 삶의 도치법(倒置法)치고는 과연 희귀한 일이로다. 그 장본인은 국내외적으로 성공한 목회자이며 더욱 명설교 목사로 인정 받는 이름 있는 목사였다.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목사의 41세 청춘아들이 암투병하다가 인생을 마치고 부모와 처자식 곁을 떠나게 됐을까! 세상적인 행복의 기준으로 본다면 불행일 것 같기만한데 왜 하나님은 그목사에게 그렇게 하셨을까? 이렇게 인간이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하늘아래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벤트 때문에 악고론이라는 신학이 나왔던 것이다. 아비 목사는 아들의 죽음을 예견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발표했다. 가을이 오는 산책길에서 “코로나의 안개가 아직도 자욱하여 걷는 이 길이 가슴 저리게 슬프다. 하지만 가을 하늘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걷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사도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다른 방언으로 설교함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행2:13)고 비방했다. 바울 사도는 옥중서신 에베소서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고 권면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15개국 이상의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제자들의 성령충만의 모습은 마치 새 술에 취한 자들로 보였다. 세상 술에 취하여 살아온 저들이 주예수님의 유언대로 과연 성령의 새술에 잔뜩 취해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전혀 다른 전도자로 변화됐다. 오순절 이전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으로 세상과 짝하며 살았으나 오순절 후에 변화되어 세상의 모든 것을 저버리고 세상이 보기에 성령충만으로 새 술에 취한 자로 주님의 복음 전도자로 변화됐다. 오순절 이전에는 모두를 자기가 더욱 잘난 사람으로 말에나 일에나 모두가 교만한 자들이었고 반목질시하며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으나, 성령충만받은 저들은 보다 높은 자리나 좋은 자리, 보다 인기있고 유익한 일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언어 생활의 변화에서 인격과 생활이 변화되어 역동적 대담성과 성령의 은사로 원수
제주도에서 막내 딸 내외가 상경한 것은 그의 첫 아들이 미군으로 한국에 파견해서 주말이면 외갓집에 들리고, 또 그의 둘째 아들이 대학원에 재학 중이라서 주말이면 외갓집에 오는 지라딸 내외는 친아비어미보다 자기 지식 들을 보기 위해 오는 것이라고 실토하기도 했다. 나와 할멈 그리고 저들 식구 네 사람 합해서 여섯 식구가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모두 조용하게 식사를 하는데 그들의 외할머니 측 나의 할멈이 이 식탁에서 좌장(座長)이 되어 시사이야기를 비롯해서 약간의 성경이야기 그리고 딸을 키웠을 때의 에피소드까지 겹쳐 할멈은 명강사가 되는 아침식탁이었다. 모든 식탁 식구들이 할멈을 향해 눈을 주목하고 또 할멈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이따금 고개도 끄덕였다. 할멈의 장광설(長廣說)에 무반응자 세를 취하는 자손은 그 누구도 없었다. 나는 할멈의 강의(?)중에 식탁 식구들에 대한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됐다. 학벌문제였다. 밥이나 먹지 무슨 때늦은 학벌생각인가. 정말 본의 아니게 조금은 쑥스럽지만 실토하자니, 사위도 서울의 일류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좋은 직장생활 하다가 은퇴를 했다. 딸도 서울 명문여대 미술학과를 나왔고, 미군으로 복무하는 첫 외손자도 미국의 조지 메이슨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 중에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던 중 에돔 땅을 둘러 행하므로 저들의 마음의 불안으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므로 백성 중에 불뱀을 보내어 물게 하니 죽은 자가 많게 되자 모세는 백성을 위해 회개의 기도를 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고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 (민21:8)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말씀대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인용하여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 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5~16)고 증거하 시고 구원의 요절 말씀을 주셨다. “너희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모든 율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 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임이니라”(출16:26)라고 첫 번째 여호와 라파(치료자)임을 선
석탄광산지대가 석탄산업의 하락으로 폐광산촌이 되어버렸다. 지금 우리 부부가 그곳들을 방문했을 때 그 옛날 시커먼 광부의 퇴근하는 모습이나 쌀가게 선술집 가게에 들리던 광촌민이 생각난다. 그런데 광산업 하락으로 쓸쓸한 공허촌이 되자 정부가 지역경제 살리자는 차원에서 적극 지원책을 펴서 광촌을 살리자고 했었다. 정선읍 사북과고한 폐광촌과 삼척군 도계읍 광촌을 향해 정부가 지원할 테니 남은 지방민의 소원을 말하라고 했겠다. 두 폐광촌민이 흥분했다. 사북고한 사람들은 카지노를 요구했고 도계사람들은 대학촌을 요구했다. 정부는 그들의 요구대로 했었다. 사북 고한에는 도박학교가 세워지고 도계 에는 국립대학분교가 세워졌다. 이런 선택의 결과가 무엇인가. 사북 고관의 강원랜드지역의 참상을 신문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내국인도 출입 가능한 국내 유일의 카지노 강원랜드는 석탄 산업 몰락 후지역 경제를 살린다는 명목 아래 1998 년 설립됐다. 연평균 1조 5000억원의 매출을 올리지만 설리 취지와 달리 각종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 ‘지나가는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부유했던 이 마을은 강원 랜드가 들어선 뒤 ‘죽음의 도시’로 변했다. 자살자는 연 초
흰옷을 입고 인물이 훌륭한 사람이 웃는 얼굴로 나타나서 손을 주머니에 넣더니 무엇인가 집어내어 손바닥에 놓고 나에게 보이는데 동그란 은전으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500원짜리 보다 조금 더 컸다. 그를 쳐다보니 모퉁이가 조금 찌그러진 것이지만 ‘고쳐서 사용하라’는 뜻으로 나의 손바닥에 놓고 사라지는 꿈늘 꾸고 눈을 뜨니 새벽 5시였는데 이상한 꿈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다. 영몽(영적인 꿈)이라서 무슨 뜻인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다. 신약시대 로마제국의 은화로 데나리온과 그리스의 은화가 생각났다(마 22:19). 예수께서 무리에게 가르치신 후에 연보궤를 향해 앉으셨는데 부자는 많이 넣었으나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 것을 보시고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막12:43)라고 칭찬하신 것은 생활비 전부였음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두 렙돈은 그리스 도의 동전이고 한 고드란트는 로마의 은전으로 같은 값어치였다. 예수님은 작은 빚으로 호리라도 다 갚을 것을(눅 12:59) 말씀하셨는데 무게는 1.7g으로 앗사리온의 1/8이요 고드란트의 1/2에 해당된다(막12:42).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의…
흰 옷을 입은 멋진 사람이 웃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무엇인가 집어내어 손바닥에 놓고 보여주었다. 500원짜리 은전 모양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뜯겨나 가고 찢겨진 것으로 못 쓰는 돈이었다. 그를 쳐다보니 고쳐서 사용하라는 뜻으로 보여주고 떠나가는 꿈을 꾼 후 눈을 뜨니 새벽 5시였다. 조금 이상한 꿈을 꾸어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았다. 신약시대 로마제국의 은화로 데나리 온과 그리스의 드라크마 은화가 떠올랐 다(마 22:19). 예수께서 무리를 향해 가르치신 후 연보궤를 향해 앉으셨다. 부자는 많이 넣는데 어떤 가난한 과부는 와서 연보궤에 두 렙톤 곧 고드란트를 넣는 것을 보시고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막 12:43) 라고 칭찬하셨다. 그것은 그녀가 가진 생활비 전부를 드렸음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두 렙톤은 그리스의 동전이고 한 고드란트는 로마의 은전으로 같은 값어치의 호리로 번역되어 있다(눅 12:59). 무게는 1.7g으로 앗사리온의 8분의 1이고 고드란트의 절반에 해당된다(막 12:42).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톤의 헌금은 당시 유대에서 통용되고 있던 청동화로 가장 작은 값어치의 동전인데 오늘 우리의 동전과 같
코로나 사태로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이 병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강한 분노로 거리로 나왔다. 과잉진압으로 인한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의 죽음은 차별과 불평등이라는 뿌리 깊은 사회적 이슈를 건드렸고 쌓여왔던 분노의 뇌관이 됐다.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평화시위로 모이기 시작했고, 또 다른 이들은 폭동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한인사회도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듯 폭동에 희생이 되기도 한다. 성도님의 가게가 부서지고 도난당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면서, 불안한 현실은 뉴스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삶 코 앞까지 훅 침범해 들어왔다. 이 사태는 우리에게 주어진 권위와 파워를 어떻게 쓰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힘은 영향력이다.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모두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받고 영향을 미치며 산다. 우리가 선 자리는 그 위치에 따르는 권위를 가진다. 우리에게는 교회의 리더로서, 직장의 일원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로서 힘을 갖는다. 심지어 아주 어린아이들도 어떻게 해야 부모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지 본능적으로 안다. 자녀들이 가진 파워가 부모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회에서만이 아니라 가
어느 날 밤 뉴스를 보니 코로나19 의 세계적인 확진자 수가 지난달보다 1,000만 명이 증가 되어 4,000만 명을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그날 이탈리아 에선 1만 1000명이 발생했다고 했으며, 각 나라에선 수천 명 내지 수백 명이 늘어나다보니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전염 병이 전세계인을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팬데믹이 됐다. 이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의료진은 마스크 쓰기, 사회적 거리두기, 손 씻기, 환기시키기 같은 생활을 강조하고 있다. 확실한 백신이나 치료약이 좀 더 빨리 개발되길 모두가 안타까움과 조급함으로 기다리고 있다. 이런 것들이 만들어진다면 심각한 현재의 상황이 어느 정도 해결되거나 근절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에 있는 지인이 건강이 좋질 않아서 혹시 코로나19에 전염된 것이 아닌가 염려하며 병원을 찾은 적이 있었 다. 진단 결과 코로나19가 아닌 폐렴 증세이니 다행이라고 의사가 말해주었다. 그 이유는 폐렴이나 결핵 같은 세균성 질병은 항생제가 있어서 얼마든지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사스, 메르스, 에볼라, 에이즈 등과 같은 바이러스 질병으로 확실하게 효능성 있는 백신이나 치료약이 아직 없어서 치료에 어려움이 많다고
어느 날 아침에 아내가 주방 에서 큰 주전자에 물을 넣었다 뺐다를 여러 번을 반복했다. 콩나물을 기른다는 것이었다. 시루나 콩나물 기르는 그릇이 아닌 주전자에 콩을 넣고 아침 저녁으로 똑같은 일을 반복한 결과 주전자 속에는 수북한 콩나물이 담겨있었다. 신기하듯 콩 담음 그릇에 물을 부으면 다 빠져 나간 것 같은데 어느새 콩나물이 자란 것이다. 진도에서 목회를 하며 시작했던 노인 분들을 대상으로 한 한글학교가 이제 초등학력 인정 문해학교가 됐고, 이제 올해만 마치면 정규 교육부 인정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게 된다. 벌써 삼 년이 지난 것이다. 삼 년 전 처음 문해학교를 시작한다고 하니 “우리가 언제 삼 년을 공부한데요? 이제 공부해서 뭐에 쓴데요?”라고 하던 분들이 벌써 졸업장을 받게 된 것이다. 공부를 하면서도 “해도 소용없어요, 문만 나가면 다 잊어 부러요, 선상님만 헛수고 하는 거라요.”고 하셨던 분들이다. 그때마다 “콩나물 기를 때 물주면 다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여도 어느 날 뚜껑 열어보면 콩나물이 자라있는 것 아시잖아요.”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이들 같지 않고 배우는 것보다 잊어버리는 것이 쉽고 빠른 연세에 있는 문해학교 학생들에게 콩나물에 물 주
물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은 무엇이나 잡아들이는 본능이 발동한다. 구제하러 들어갔던 사람을 껴안고 놓아주지 않기에 함께 익사하는 경우도 있기에 구제자는 뒤늦게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 일찍 절망하고 죽음의 물속으로 들어가자고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익사하기엔 아직 빠르다. 익사하려 하지 말라. 살기를 포기하지 말라. 그냥 기다리다 보면 안전한 구원자가 있다. 사람이 사람을 일찍 포기하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자기가 자기에게도 너무 일찍 포기하지 말고 그 측근자도 상대에게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성도 지인을 모처럼 거리에서 만났다. 반가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지인의 딸을 문안했다. 그 지인의 딸은 30이 넘었는데 어린 시절 부터 뇌성마비로 인해 완전히 신체장애 자였다. 딸을 휠체어 태워 부모님이 교회에 들리는 것을 보았다. 다음은 그 딸의 아버님의 말씀이었다. “딸을 데리고 이번 추석에 설악산관광을 갔더니 내 딸이 너무 좋아하지 뭡니까” 나는 이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아주 감동적이었다. 부정(父情)의 발로! 건강한 남의 집 딸이라면 가정을 꾸리고 손자를 뵈어드릴 테지만 이 집 딸은 그것이 아니잖는가? 그러나 이
1960년 3월 대학교에 입학하니 교수는 웃으면서 말했다. 1학년은 신입생 풋내기로 “Freshman”, 2학년은 조금 배웠다고 “Sophomore”, 3학년은 아직 손아래 미숙 “Junior”, 사가독서학년은 손위의 잘난 고참 “Senior”라고 했다. 인상 깊은 말이었는데 2학년에서 3학 년에 걸쳐 시건방진 나는 별도의 사전 없이 읽을 수 없는 미국인 최초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교수 의 걸작 “사랑과 법“(Love and Law)이란 책을 읽고 학보에 논문을 기고했는데 뒤돌아보면 정말 나의 인생과 목회에 가장큰 영향을 준 위대한 스승의 글이 됐다. 지난번에 기고한 글에 이어 “사랑과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먼저 칼 바르트(Karl Bart)는 독일의 위대한 신학자로 그의 교의학(Dogmaitc)에서 뜻깊은 문구를 인용하면 “다만 믿음”(Sola Fide)으로 “다만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 우리의 응답인데 “유한은 무한을 포함하지 못한다”(Finitum non capax infiniti)였다. 신대원에 들어와 그의 글을 읽으며 그의 몇 마디 단순한 신학사상의 표현이 오늘에 이르는 감명이겠다.…
코로나19 국내 최초확진자가 나온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코로나 위기는 진형행이다. 바이러스 사태가 이렇게 길어지는 이유는 급속한 전파와 백신과 치료제 개발의 어려움도 있지만 정부의 방역지침을 무시하고 위반하면서 집단감염 등의 확진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사회적으로도 코로나 방역지침과 사회적 거리두기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자영업자들과 소상공인들은 코로나 경제 침체로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으며 최근 코로나 이후 일자 리를 잃고 취업을 준비하는 이들이 200만명을 돌파한 상황이라고 한다. 교회도 사회적 거리 두기에 본연의 대면 사역은 거의 중단 되고 비대면 사역 중심으로 교회사역과 목회사역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계속 연장되는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으로 개척교회와 미자립교회는 교회 폐쇄까지 고민할 정도로 목회의 위기 속에 빠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교단도 이러한 코로나19 위기를 함께 극복하고 새로운 목회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무조건적인 재정적 지원 보다 보다 실질적으로 비대면 사역을 돕고 실질적이며 장기적인 재정적 지원책도 마련하고 있다. 이에 교단을 대표하는 교회들이 함께 모여 지난해 각 교회별 성탄헌금을 모아 도움이
지난 한 주간 매서운 한파가 몰아쳤다. 설상가상 갑작스런 폭설로 인해 퇴근길 발이 묶여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이러한 혹한은 비단 날씨 뿐만이 아니었다. 새해 벽두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에 대한 소식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와 희망과 기대가 가득하기도 했지만 안 좋은 소식들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얼어붙게 했다. 확진자 수가 좀처럼 감소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와 관련된 확진 소식이 어김없이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 정부가 교회를 말살하려 한다며 방역지침을 무시한 채 항의집회를 열겠다는 어느 교회의 목회자를 비롯해 모 선교단체는 대규모 감염사태를 일으킨 후 앞에서는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시설 폐쇄 명령서를 부착하기 위해 센터를 방문한 방역당국 사람들과 몸싸움까지 하고 저항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특히 이 선교단체는 대표의 입을 통해 코로나19 관련 음모론이 자주 언급됐다는 제보까지 더해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한 입양아가 양부모의 학대 끝에 죽음에 이른 사건도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필이면 현재 용의자로 지목된 양부모 모두 한국교회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어서 가뜩이나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갈수록 악화되던 교회를
예년과 달리 희망과 기쁨이 가득해야 할 2021년의 새해여야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그렇지 못하다. 지난해 우리의 모든 것을 뒤바꿔 놓은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매일 수백명의 확진자를 양산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송년과 신년의 교회 사역은 암담했다. 1년을 마무리하는 주요 행사들은 아예 취소하거나 온라인 비대면으로 진행했고 성탄 행사와 송년, 신년 교회 행사는 방역당국의 지침에 따라 20명 이내의 비대면이나 온라인으로 행사했다. 이조차 할 수 없는 교회는 어쩔 수 없이 대면 예배를 강행했지만 지역사회의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했다. 2021년의 시작도 다를 바 없다. 코로 나19의 확산은 정부의 믿음과 신뢰를 무너뜨리며 집단감염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여전히 소수 모임에서 마스크를 벗거나 오랜 시간 대면 형식을 취하면서 감염되는 사례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가 코로나19에 이제는 둔감해지고 감염에 대한 스스로의 대비를 등한시하고 있는 단면일 것이다. 교회도 철저하게 방역 지침을 준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 하나 쯤이야 괜찮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집단감염이 생기는 것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일이다. 교회의 존재
코로나19 확진자가 이제는 1000여 명이 넘어서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 코로나19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그동안 정부는 강력한 방역지침을 규정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방역체계는 허술하기 이를때 없다. 다중이용시설의 출입을 제한하며 이용시간까지 제재를 가하고 있지만 여전히 확진자 증가세는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단순히 출입을 제한하는 선에서 방역지침이 이뤄진다면 교회 사역은 위축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재 수도권은 2.5단계 제주(1.5단계)를 제외한 전 지역은 2단계로 종교활동은 2단계가 20% 이내 인원이 참석할 수 있으며 2단계는 20명 이내로 참석 인원이 제한된다. 3단계가 되면 종교활동은 1인 영상만 허용되는 상황이다. 일반적인 모임의 인원 제한은 2단계는 100인 이상, 2.5단계는 50인 이상을 금지하고 있어 교회에 대한 제한이 과도하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 예배는 단 한 사람의 인원으로 진행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담임목회자 한 사람의 몫으로 모든 것을 돌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교회의 이런 상황에 대해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을 비롯한 한국 교계도 정부의 방역지
평화의 왕, 구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유대인을 위한 왕이 아닌 온 인류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 왕이라면 당연히 최고의 궁전과 최고의 대접을 받아야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못했다. 가장 낮고 가장 천한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들을 향해 오신 것이다. 우리가 이 기쁨과 소망을 함께 나눠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실은 우리의 뜻과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공포를 경험하며 매일 500여 명이 넘는 확진자들이 발생하고 있다. 정부는 코로나 확산세에 속수무책 무너지는 조짐을 보이면서 결국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은 오는 12월 28일까지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로 격상해 보다 강도 높은 방역 체계를 구축하고 코로나 확산을 저지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는 전염병이 전국적으로 유행이 본격화되는 시기로 모든 시설에 대한 출입 제한을 규정하고 출입인원도 대폭적으로 줄어든다. 무엇보다 교회가 속한 종교시설의 활동에 대해서는 더 종교활동에 대해서는 더 엄격한 잣대로 규정하고 있다. 비대면을 원칙으로 하되 20명 이내의 인원이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이다. 코로나19 상황에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하지만 비대면 원칙과 20